[머뎌롸/메테라하] 악몽 上
* 효월의 종언 6.0 엔딩 시점이니 스포일러에 주의하여 주세요.
* 다소 잔혹한 부상묘사…가 있긴 합니다 근데 제가 이런 걸 영 못보는 사람이라 엥? 이게 잔혹하다고? 싶을 수 있습니다. 6.0 엔딩시점인데 부상이라고 쓰면 다들 어딘지 눈치채실거같긴한데 혹시나 싶어 적어둡니다. 공식 서사에 날조와 망상을 두 스푼 떠 넣었습니다.
* 제 연성의 빛의 전사는 트레일러의 중원 휴런 남성, 통칭 메테오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름 및 외형묘사에서 메테오가 뚜렷히 느껴지니 개인 해석 차이에 주의해주세요.
* 시작하자마자 스포라 아직 효월 미클리어라면 스크롤 내리지 말아주세요
온몸의 피가 식는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라하 티아는 초조한 마음에 가만히 서 있질 못하고 널따란 마도선 안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그건 그라하 티아뿐만이 아니라, 위리앙제도 야슈톨라도 산크레드도, 하다못해 매사 침착한 알피노까지도 어쩔 줄 모르고 저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거나, 손끝을 못살게 굴거나, 허공을 올려다보며 바깥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를 썼다.
1분 1초가 피가 마르는 것 같고, 10분이 1년 같은 아득한 체감시간 속에서 간절한 기도가 목구멍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가 말이 씨가 될까 두려운 마음에 다들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무거운 침묵이 폐를 쥐어짜는 듯했고, 쿵 쿵 쿵 뛰는 심장이 귓가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모두의 것이리라.
어느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질 못했고, 동그란 눈을 뜨고 있는 레포릿들 조차도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눈조차 쉬이 깜빡이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알리제를 제외하고는.
“돌아온다고 했잖아! 기다리면, 돌아올 거라고…! 메테이온이!”
비명처럼, 혹은 분노처럼 새된 목소리가 잔뜩 갈라진 목을 타고 흘러나와 방울방울 떨어졌다.
피 맺힌 한탄처럼, 혹은 내질러지는 절규처럼 그 사람 혼자 지금 뭘 하고 있는데! 하며 발을 쾅쾅 구르고, 당장에라도 우주선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몸짓을 에스티니앙이 가로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마도선 라그라노크의 유일한 출구에 창을 세워 가로막은 거로 모자라 그가 직접 문 앞에 굳건히 서서 수문장처럼 그러고 있으니, 그 아무리 알리제라고 한들 그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에 목덜미에 핏대를 세워가며 바락바락 소리치고 있는 거였다.
억울함과 분노, 짜증과 걱정, 한탄과 격정…… 아직 앳된 두 눈동자에 형형히 서린 불꽃 같은 투기를 에스티니앙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본래 성격대로라면 목구멍 끝까지 기어오른 말을 참지 않고 내뱉는 성정이었으나 에스티니앙은 그저 침묵하기로 했다.
마음속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던 동료를 손도 못 쓴 채 잃는다는 건… 몇십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거니와, 타인이 아무리 뭐라 한들 지금의 알리제에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
다른 동료도 아니고 ‘그 영웅’ 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제가 파트너라고 부르는 유일한 존재.
제게도 이렇게 유일할진대,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 감고도 알겠어서 에스티니앙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울렁거리다 못해 토할 것 같은 제 가슴을 달래는 것조차 모래를 씹는 것처럼 버걱버걱한 일이었으니, 제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말이 저 어린 엘레젠을 자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건 끓는 기름에 뜨거운 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이 없을 테니까 그답지 않게 참고 있는 거였다.
그저 조용히, 달래는 듯 현실을 직시하는 듯 무던한 말로 가로막고 있을 수밖에.
“비켜! 나는 나가야겠어. 찾으러 가야겠다고!”
“여길 나가면, 돌아올 수는 있고?”
“있어! 있으니까, 비키라는 거잖아!”
옥신각신하는 알리제와 굳건한 수문장이 되어 문을 지키고 있는 에스티니앙을 보며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산크레드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알리제를 바라보며 무겁게 말했다.
“걔가 어떤 마음으로 웃으면서 전송장치를 눌렀는지 알잖아. 그럼, 기다려야지. 우리는.”
“……아니까! 알고 있으니까, 구하러 가겠다는 거잖아. 온다고 했는데, 못 오고 있는 걸 테니까…… 그 사람이, 이런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잖아…….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걸 거야. 메테이온도 모르는 일이. 그럼, 우리가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우리가 도와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기다리자.”
무겁게 한숨을 내쉬는 산크레드의 말을 이어,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라하 티아는 알리제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라하까지 기다림을 택한 것을 보며 알리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는, 아랫입술을 꽉 짓씹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지! 너는, 나와 같은 마음이잖아. 아니야? 그 사람이 걱정이 안 돼? 그라하,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분노와 배신감, 혹은 실망과 초조함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라하는 뻣뻣하게 식어버린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길 반복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건 그라하도 마찬가지였다.
바깥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지금, 그 사람이 혹시라도 치명상을 입어 혼수상태에 빠진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고 전송 직전의 자신들처럼 허공을 떠다니며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 혹시 혼자서 절망에 잠겨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라하가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건…….
믿고 싶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역경을 헤치고 꺾였던 무릎을 다시 곧게 편 채 걸어 나간 영웅을.
모두가 불가능하다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음에도 끝내 만인의 희망이 되었던 그 사람을.
넘실대는 빛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견디어낸 사람이니 이번에도 기필코, 절망 따위에게 잠식되지 않고 굳건히 돌아올 거라고.
수없이 많은 변명과 희망과 기도를 담다가도 끝내 혀 위에 오르는 진심은…….
‘나와, 약속해줄래……?’
오미크론 기지 앞에서 했던 약속이어서, 그라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나 그와의 약속은 주문처럼, 기도처럼, 그라하를 미래로 연결하곤 했다.
자신이 그렇게 운을 떼었을 때,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서리던 절망과 분노를 그라하는 기억한다. 그런데도 정말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묵묵히 제 목소리를 들어주던 얼굴도, 어깨를 늘어트리고 제 주먹에 주먹을 맞대어주던 손길도.
그럼에도 그를 두고 돌아서야만 했던 그때의 상황도 바로 직전처럼 또렷이 기억이 나는 탓에 그라하는 두 주먹을 꾹 쥐고 겨우겨우 참아내다 부옇게 차오르는 시야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머릿속으로는 지금의 알리제를 조금 진정시키고, 일부는 안에 남아 그를 기다리고 일부는 바깥을 탐색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그라하 티아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다가도 덜컥 소리를 내며 멈추고, 또 멈추길 반복했으니.
너와의 약속은 나를 언제나 미래와 연결해주었는데, 내가 한 약속이 너를 미래로 연결해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네가 무리하다 잘못된 거면 나는.
“……약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겠어요. 위리앙제, 나 좀 도와줄래요? 그 사람이 오면 바로 쓸 수 있도록.”
침잠해있던 야슈톨라가 생각을 끝냈는지, 적막을 깨고 지시하는 서늘한 목소리에 파득 정신을 차린 그라하의 머릿속에 새빨간 전등이 툭, 켜졌다.
“산크레드, 깨끗한 이불을 찾아줘요. 가능하면, 천 종류도 많이 찾아주세요. 알코올 종류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으면 어쩔 수 없죠…….”
야슈톨라……, 그가 ‘멀쩡히’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전제하고 지시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 몇 번의 전투를 한 거지?
잔해만 남은 별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하고, 종언을 맞이한 세계를 몇 번이고 봤었지. 그래, 그때 나도 옆에 있었어.
그리고……, 그리고 융합해버린 메테이온과…….
혼자서 메테이온과 싸워 이겼으니, 메테이온이 그가 돌아올 거라고 소식을 전해준 거겠지.
그럼, 지금 그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또 다른 전투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이 우주에서 그의 발목을 잡을만한 존재가 있나?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나, 생사를 걸고 싸운 사람에게 또 한 번의 싸움을 견딜만한 체력이 남아 있을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차분히 상황을 되짚어보던 그라하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둥그렇게 떠 졌을 때, 슈우욱- 하고 무언가가 전송되는 소리가 들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눈을 찌르는 것처럼 밝은 빛 사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이, 부피감이, 덜그럭 소리가 나며 떨어지는 피에 절은 방패가 그임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게 했지만, 시각이 마비된 지금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져 전송되어온 그의 육체가 말랑한 인간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라기보단 마치 딱딱한 고목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도 귓가에 잡혔고, 삽시간에 마도선 내부를 꽉 채우는 피비린내가 코앞에서 수혈 팩을 터트린 것처럼 너무나도 짙게 느껴져 눈을 부릅뜬 산크레드가 빛 속을 살피더니 이를 빠드득 갈고선 다급한 걸음으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아직 남아 있는 빛을 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알피노! 알리제 눈 가려!”
“알피노님, 알리제님을…!!!”
“뭐, 왜 나를……!? ……꺄아아아악!!!!!!!!!!”
기민하게 상황 파악을 한 위리앙제까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알피노를 찾았지만, 알리제가 상황을 파악하는 게 더 빨랐다.
“약을, 약을 가져와요!”
생사를 걸고 한 싸움을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서 한 사람이, 사지 멀쩡히 돌아온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겠지.
……그럼 그 사람에게 숨이 붙어있을 확률은, 기적의 기적을 곱절로 곱한 만큼이지 않을까?
그라하 티아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꾹 쥐었다. 동경하는 영웅의, 사랑하는 연인의 끔찍한 모습 앞에서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썼던 케알의 술식이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나 반질반질한 은빛의 두툼한 갑주를 입고 있던 메테오였음에도 갑옷은 어디로 갔는지 조각조차 찾을 수가 없었던데다, 뾰족하니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오고, 기괴하게 뒤틀린 팔과 다리는 그가 어떤 전투를 겪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 잔혹한 전투에 이골이 난 에스티니앙조차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라하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한 채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제 눈앞에서 미동조차 없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있는 메테오는, 제가 100년간 머릿속에서 떨쳐내고자 애를 썼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아니 어쩌면 똑같아서……. 지금 저 사람, 숨을 안 쉬는데…… 가슴이, 멈춰 있는데. 아주 미약하게나마 들썩거려야 하는데 움직이질 않아. 몸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큰 상처가, 마치 거대한 낫으로 베인 것처럼 깊숙하고…… 해부학에서 봤던 것처럼 장기가 저렇게까지 쏟아지면……. 온몸을 적실만한 출혈을 동반하고 있다면…….
아니지? 내가 꿈을 꾸는 거지? 뒤나미스로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더니 그때의 기억도 잠깐 흩어졌었나 봐. 아직, 기억이 완벽히 동화되질 않아서. 응, 그래. 분명 그런 걸 거야. 이건 수정공의 기억이구나. 200년간 자고 일어났던 ‘내’가 보았던, 이제는 갈라져 버린 시간 선의 미래의 그를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 어떻게 살려낸 사람인데, 어떻게 살려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려고 살린 게 아니잖아. 이런 끔찍한 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맞아, 그렇지. 나는 이 미래를 피하고자 그를 1세계로…….
“정신 차려!”
멍하니 굳어있는 그라하 티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쥐고 에스티니앙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충격에 현실 도피를 하고 있던 그라하의 양쪽 귀가 바짝 서고, 억세게 잡힌 어깨를 놓아달라 말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은 분명 피였다. 그것도, 지금 막 쏟아진 것 같은 새빨간 피가 아니라 흘러나온 지 꽤 된 것 같은 어둡고 새까만 피가 에스티니앙의 손바닥에서 자신의 어깨에 묻어나는 이유는, 방금까지 메테오를 살펴보던 그에게서 피가 묻는 이유는…….
헉, 하고 그제야 숨을 들이켠 그라하의 시야에 힘없이 주저앉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알리제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자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에스티니앙이 보였고, 바쁘게 치유술을 퍼붓는 위리앙제와 알피노가 보였고, 지시를 내리는 야슈톨라가, 바쁘게 약을 가져오고 들이붓고 있는 산크레드가 보였다.
여전히 악몽에서나 나올법한 모양새로 고요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심장을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이, 고통스럽지 않아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잔뜩 일그러지고 공포에 서린 얼굴이었다면 하염없이 괴로웠을 텐데, 그나마 평온한 얼굴이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어느 날의 아침처럼, 메테오- 하고 다정히 부르면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저를 보며 웃어줄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어서, 무슨 악몽이라도 꾸었느냐며 저를 다정히 안아주고 다독여줄 것만 같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싶었다.
평온한 얼굴에도 여기저기 피가 튀고 찢어져 있던 데다, 육신이 찢기고 베어 너덜너덜하다 못해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꼴이었음에도 그런데도 그라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은 것 같지는 않아서.
분명, 언제나처럼 싸움에서 이기고 안심한 채로 눈을 감았으리라. 자신이 꺾이면, 라그라노크에 있는 우리가 위험해질 거라 믿고 끝의 끝까지 무리해서 싸워 이겼을 사람이니까.
자신이 아는 메테오란 사람은 분명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 그라하는 메테오에게 손을 뻗었다가도 방향을 돌려 자신의 뺨을 강하게 내려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가 그런 사람이듯, 저 또한 그가 이대로 숨이 멎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으니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여기에 같이 있는 새벽의 혈맹 사람들은 이 사람이 별바다로 떠내려간다면 양손 가득 퍼 올리다 못해, 같이 잠수해서 가라앉고 있는 그를 끄집어낼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라하는 뼈 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스태프를 꽉 움켜쥐었다.
뒤나미스가 가득한 우주에서 한 줌 존재하는 에테르를 한계까지 끌어다 써 탈진한 알피노가 기절하듯 잠이 들고, 끝까지 버티고 버티던 위리앙제까지 무릎이 풀썩 꺾였을 때, 라자한의 연금술사가 만들어 준 엑스 에테르를 물 마시듯 마시며 그라하는 지친 몸을 어떻게 하질 못하고 부들대며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언젠가의 기억처럼 스태프를 바닥에 짚은 채, 위리앙제에게 엑스 에테르를 건네고 잠시 치유가 멈춘 사이 이를 꽉 깨물고 버케알을 쏟아붓고 있는 알리제에게도 에테르를 권유했다.
우리가 쓰러져서는 안 되잖아. 그렇지? 그라하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위리앙제도 고개를 끄덕이고, 알리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한 치유술 사이에서 쏟아졌던 장기가 다시 자리를 잡고, 갈라졌던 피부가 새 살처럼 붙었으며, 오래전에 상흔으로 남은 묵은 상처들 외엔 마도선에 처음 몸을 실었을 때처럼 깔끔해진 상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메테오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지친 그가 이제는 휴식을 택하기라도 한 걸까 싶어 손을 거둬야 할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새벽의 혈맹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를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이를 악물고 포기하지 않으니 뒤나미스의 가호가 깃들기라도 한 건지, 다시 뛰지 못할 거로 생각한 심장에 피가 돌고 새파랗게 질려있던 피부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며 기적적으로 영웅이 눈을 떴다.
그가 멍하니 눈을 뜨고서 한 첫 말이 다른 말도 아니고 ‘나 살아있어?’ 여서, 새벽의 혈맹 사람들은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 자신조차도 제 죽음을 확정 짓고 있었다는 충격에, 사람들은 헛웃음을 짓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다들 울며 웃고 그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마도선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눈을 떠 줘서 다행이라고 눈물을 훔치고 소리 없이 울음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부상을 입더라도 언제 다쳤느냐는 듯 멀쩡히 돌아다니곤 하던 그였으니,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테오와 함께 최전선에 섰던 적이 너무나도 많았던 사람들인지라, 그의 괴물 같은 회복력 - 이런 표현으로 말하는 걸 알리제는 정말 싫어했지만, 정말 목숨만 붙어있으면 어떤 부상이든 다 회복하고 마는 기적적인 회복력이었으므로 - 을 잘 알고 있는 탓에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잘 먹고 잘 쉬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시 눈을 떴으니, 분명 금세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 믿음이 다시 한번 박살 난 건, 지식신의 항구에서 다섯 걸음도 채 떼지 못했을 때였다.
세계를, 아이테리스를 구한 영웅의 귀환이라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손뼉을 치고 있던 그때, 메테오의 옆에서 그를 주시하며 걷던 산크레드가 그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기민하게 눈치를 채고 그에게 달라붙어 부축해 온전히 무너져내리는 건 막았지만, 가물가물 꺼져가는 목소리로 메테오가 그라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또한 그의 무릎이 꺾이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하.’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메테오가 그렇게 불렀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미코테라는 종족 특성상 다른 종족들보다 소리를 더 예민하게 들을 수 있음에도, 메테오의 입술이 벙긋거리며 무언가를 불렀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기세 좋게 걸어가던 영웅이 비틀거리며 부축을 받는 모습에 환호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침묵하고, 모든 시선이 메테오에게 쏠려 그라하는 빠르게 걸어 나가 자신의 몸으로 메테오를 가렸다.
영웅의 귀환이었다. 위풍당당하게, 많은 사람에게 축복과 감탄을 받고, 기쁜 목소리로 한없이 축하하고 미래를 그려야 마땅한 좋은 날에, 그의 이름이 더욱더 드높아져 만인의 영웅으로 남아야 할 기쁜 날에, 잡음이 섞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리고, 그들이 바라는 위풍당당한 귀환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무언가 잘못됐을까 불안이 퍼지는 건 마른 숲에 들불이 번지듯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가는 일이라는 걸 그라하 티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민중의 시선에서 그를 숨겨주고 싶었다.
말 없는 눈동자가 도르륵 구르며 영웅의, 메테오의 흠결을 찾고 혹시라도 계획이 실패한 건 아닌지 벌써 수런거리고 있었으니까.
죄식자를 토벌하고 돌아온 위병단이 크리스타리움의 입구에서 맥없이 쓰러졌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동요하고 불안해했던가.
분명 더 이상의 위험은 존재치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저 사람이 새로운 죄식자가 되는 건 아닌지 힐끔대고 수군거리던 시선들처럼 이 지식신의 항구에 모여있는 사람들도 수군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가장 멋진 도시인 올드 샬레이안과 그런 샬레이안을 참고하여 만든 크리스타리움에서의 경험이 머릿속에서 섞여들고, 그라하는 두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어떻게 돌아왔는데, 영웅이 어떻게 두 다리로 지금 여기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머리로는 침착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불안해 할 수 있다고 그들을 안심시키면 해결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도 가슴은, 메테오의 연인인 그라하 티아로는 콰득 깨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혹은 조금 더 강력한 치유술을 쓸 수 있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 레비테트를 걸고 그가 직접 걷지 않아도 괜찮게 제가 세심하게 움직여주었더라면 저런 시선에 메테오가 노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저 좋은 것만 듣게 하고 싶고 고운 시선만 닿게 하고 싶었다.
죽음에서 겨우 돌아온 사람의 연인으로서, 그 정도의 욕심조차 사치였을까.
제 등 뒤에서 메테오가 어떤 상황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라하는 당당히 어깨를 편 채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우주의 끝까지 날아갔다 왔는데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서 있는 건 그게 더 기적 같은 일이라는 듯, 메테오의 몫까지 당당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하자 웅성거리고 동요하는 목소리들 사이로 의료반을 찾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섞이고, 라자한 특유의 억양으로 유열향 사람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라하는 조심스럽게 레비테트의 술식을 웅얼거렸다.
아주 조금만, 발데시온 분관까지만, 거기라면 그를 편하게 쉬게 할 수 있으니까. 거기서 추가적인 조치를 하는 게 좋을 터였다. 육체의 손상은 치료했다지만 정신적인 외상이나, 피로감, 혹은 출혈이 심해 빈혈이 온 걸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
자신의 앞에 그라하가 서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산크레드의 부축을 받은 채로도 비틀대던 메테오가 그라하만 들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라하, 나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아주 미약한 힘에,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흐린 목소리에 놀라 움찔대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라하의 시야에 보이는 건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메테오였다.
힘없이 넘어가는 몸이 바닥에 쓰러지고, 에스티니앙과 산크레드가 이를 꽉 깨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다급한 목소리로 의료반! 의료반! 환술사, 현자, 점성술사가 있다면 이쪽으로! 하고 소리치는 고함이 귀를 찢듯 들려오고, 우루루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와 수런대는 소리가 섞여 그라하의 귓가에 들려왔지만, 메테오가 눈을 감기 전 했던 목소리만 맴돌아 그라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라하, 나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뭐를?
내가, 뭐를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그라하가 들었던 메테오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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