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라하

[메테수정/빛전수정] 전하지 못한 말

5.0 엔딩 이후 시점, 메테오가 수정공에게 화를 냅니다.

※ 제 연성의 빛의 전사는 트레일러의 중원 휴런 남성, 통칭 메테오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름 및 외형묘사에서 메테오가 뚜렷히 느껴지니 개인 해석 차이에 주의해주세요.

※ 칠흑의 반역자 5.0 엔딩 이후 시점이니 스포일러에 주의해 주세요.












절그럭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몸에 걸친 흑색 갑주에서 나는 소리인지 제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어 메테오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성견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그를 막는 것은 없다. 오히려 반색하며, 수정공이 안에 계시다 말해주는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묵묵히 높다란 계단을 지나 육중한 문을 열어젖히니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저를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에 숨이 콱 막혀서 더 들어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웅……. 왔는가.”

구태여 고집스럽게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건 네 고집일 테지.

너는, 영웅은, 자네는, 그대는 하며 제 이름 세글자를 입술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건 너의 배려심이었을까, 고집이었을까.

이제는 어느 쪽인지 물어본다 한들 의미가 없을 테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씹어뱉듯 말하고야 만다.

“메테오.”

“…….”

“내 이름, 알잖아.”

내가 너를 본 순간, 그라하티아라고 부르며 네 후드를 젖혀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너는 또다시 고집스럽게, 혹은 삼켜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아는데, 머리는 이해하는데.

“…그래, 알고 있지. 미안하네.”

“그거만 미안해?”

가슴은 이해하질 못해서 자꾸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게 된다. 네게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차마 제 입으로 먼저 꺼내질 못해 맴돌고, 또 맴돌아 고요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분노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목소리로 너를 질타하고 마는 지금이 우습다.

이게 짜증일까, 혹은 서러움일까.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 질척질척한 감정의 편린들이 자꾸만 날을 세운다. 저 자신을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를 찌르려는 것 같기도 해서 네게 그러면 안 된다고 열 오른 속을 달래려고 해봐도 자꾸만 날카롭게 돋아나는 분노를 어떻게 하질 못하고 툭, 툭 짜증스럽게 뱉어내고 마는 거다.

내가 감히, 네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릿속은 정말, 절절히 이해하고 있는데.

“…내게는, 내가 수없이 많은 속죄를-”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잇새로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새다, 피 맛이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콱 짓씹어 삼켰다.

예민한 미코테의 후각에 피 냄새가 잡혔는지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진 채로 이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아, 그 턱을 움켜쥐고 저를 보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러 참아낸다. 마주치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듯, 언제나 당당하던 어깨마저 둥그렇게 뭉친 채로 그 어느 때보다 작고 작아진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속죄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 나는.

“수정공.”

그라하, 라고 뱉어내려던 혀를 잘라 뱉을 것처럼 콱 씹고 겨우 네 이름을 불렀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흐릿하게 웃음이 새고, 이내 저 또한 시선을 깔아 바닥을 묵묵히 바라보다 고개를 들고, 언제나처럼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뱉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말재주가 없는 게 원통할 정도로,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됐어.

하고 싶은 말은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그걸 네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매끄럽게 말하지 못할 거 같아.

그러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 부글부글 속이 끓어서 뒷말은 잘라먹은 채로 겨우 그렇게 내뱉었다.

저 미련한 사람이 제게 미안해서 눈치를 보는 것도 싫었고, 죄인처럼 구는 건 치가 떨리게 싫었다. 오히려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할 건 이쪽이었을 텐데, 그 어느 때에도 당당하던 녀석이 저렇게 굴고 있으니… 또다시, 제 눈앞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숨이 콱 막혀 들어 단어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 너의 그런 얼굴 두 번째로 봤어.

그라하티아로도 끔찍했는데, 수정공으로 마주치니 더 끔찍해. 알아? 미련 가득한 눈을 하고 자긴 아무렇지 않다며 웃어 보이는 거 말이야.

후련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러면서도 겁을 잔뜩 먹은 채로 이게 자신이 할 일이라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고 다짐하고서 행동하는 거 말이야.

그라하, 너 예전에 크리스탈 타워에서도 그랬었잖아. 우리가 처음으로 헤어졌을 때, 미련 하나 없이 돌아서던 네 얼굴을 내가 잊었을 거라 생각해? 왜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두고 가.

왜, 지금도 미련 하나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내가 살길 바랬다면, 너도 살아야지.

이번이 두번째인데, 세번째가 없을거라는 보장이 있어? 네번째는? 다섯번째는? 그때도 지금도 이 빌어먹을 크리스탈 타워에서 너는 그러고 있는데. 나는 그럼 매번 너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너를 보내야 해? 언제까지? 나는 매번 아무것도 모르고 네가 힘들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아니, 보여주면 그나마 다행이게.

네가 날 위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네 선택의 결과를 뒤집을 수 없고 바꿀수도 없이 그저 지나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야할때 내가 알게 되면 난 손 끝만 벌벌 떨면서 네 이름을 부르는 거 밖에 못해.

너는 모든 걸 받아들였고, 수긍했고, 이해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왜, 너는. 매번.

목 끝까지 그런 말들이 신물과 함께 기어올라왔지만 목소리로 나오질 못했다.

말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두서없이 뱉어냈다간 상냥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안심시켜놓곤, 또다시 어떠한 선택을 해 버릴 녀석이니까.

똑똑하고 영리한 녀석이 선택하는 바보 같은 짓을 세 번씩이나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차분히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하자고 마음먹었다가도 지금처럼 울컥 짜증이 올라오고, 서러움이 스몄다가도 분노가 치솟아서,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자신도 모르겠어서 결국 성견의 방을 박차고 나왔다.

머리를 식혀야만 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많을 테니까……. 분명히.




한참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떠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망설임 없는 걸음처럼 쾅, 하고 미련 없이 문이 닫혔다. 차마 그 분노한 뒷모습에 손을 뻗지도, 붙잡지도 못한 채 수정공은 비틀거리는 팔로 홀장을 꽉 쥔 채 버티어 섰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견뎌냈다. 견딜 수…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서린 짜증과 분노는 어느 정도 감안 했던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눈을 볼 수 있음에, 자신이 여태 이 장소에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는 그의 호의를 이용했고, 거짓말을 했고, 그리고 그의 목숨을 가지고 웃기지도 않는 연극 따위를 했지. 그뿐일까?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그의 손을 붙잡고 나오기까지 했다.

그가 말했던 ‘다음’이라는 게 제게 있을까? 기만자에게, 다음이라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수정공은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어쩐지 눈가가 시큰해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서 호흡을 천천히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각오했었잖아, 그라하 티아. 그를 1세계에 부르기 전부터, 그를 그리며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었잖아. 이제 네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더 바라는 건 욕심 아니야?

곧 그는, 안온한 세계로 돌아갈 텐데.

수정공은, 천천히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한참을,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늘어트려 보아도, 그가 제게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차마 그의 이름조차 소리 내 부르지 못하는 거였다.

사실은 하루에도 몇십 번, 몇백 번을 혀 위에서 굴리고 굴려 습관처럼 나오는 이름인데도 자신은 그를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 자격이라는 걸, 1세계에 부르는 대가로 써 버렸기에 더는 그를,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부를 수가 없었다.

저는 그렇게나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메테오.

그런데도,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 지금 그의 이름 세글자를 혀 위에 올리니 시큰거리던 눈가에서 기어코 주르륵 눈물이 샜다.

사실, 서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저 다시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 희망이자 빛이고 제 삶의 이정표이자, 모두의 태양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각오하고 또 각오했음에도, 막상 마주하니 너무나도 서러워져서 수정공은 오랜만에 탑의 단말이 아닌 그라하티아의 마음으로 하염없이 울었다.

메테오, 나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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