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상
아젬+빛전 논컾│5.3 이후 스포일러
- 칠흑의 반역자/못다한 이야기 중 <종막을 바치다> 스포일러 有
- 별도의 설정된 빛전과 아젬 기반. 논커플링/기타 커플링성 소재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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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gwgjfMbzS8?si=GL8mLMIi2wXeT8mT
별의 바다에서 눈을 떴을 때, 모험가는 이것이 꿈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별들이 반짝이는 검푸른 공간에서는 어떠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목적없이 날아올 공간도 아닐 뿐더러 마음먹는다고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늘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먼저 말을 건네던 목소리는 들려오지도 않고 고요할 뿐이었다.
- 아, 너구나.
한참을 목적의식없이 부유하고만 있던 때,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린다. 제가 아는 별의 의지는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그럴 필요가 없음을 금방 깨달았다. 바로 옆, 그러나 아득한 '높이'의 사람이 서 있었다.
- 내가 이제야 보여? 하긴, 지금 인간의 키는 너무 작으니까 무리도 아니야.
너무 높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섞인 웃음기가 감정을 드러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존재를 모험가는 알고 있다. 다만 더는 만날 이유가 없으리라 여겼을 뿐. 더불어 이 개개인을 구별할 수 없는 몰개성(적어도 모험가는 그렇게 평가했다.)한 차림새는 그 중에서도 누구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워 자신을 아는 티를 낸다고 해도 상대하기 곤란했다. 만나보고 대화를 나눈 고대인이라고는 휘틀로다이우스가 고작이기도 했고.
- …날 뭐라고 부를지 고민되나 봐. 그렇지?
가볍고도 거침없는 말투는 휘틀로다이우스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도 조금은…어쩌면 다를지도. 모험가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 실망시키지 말고 좀 더 생각해보지 그래. 기껏 찾아온 손님에게 예의가 아니잖아.
“…….”
초대한 적 없는 손님임을 굳이 알려줘야 할까. 조금만 더 꼬아서 불청객이라 잘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거만한 발언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잠깐이었다. 상대를 올려다보던 모험가는 곧 이 대화에서 얻어낸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고, 빠르게 결론을 냈다. 여태껏 만난 적 없는 고대인이자 자신에게 이토록 쉽게 간섭할 만한 자격을 갖춘 존재라면…설마 싶었다. 나온 결론은 어쩌면 있을 수 없는 가정과도 같았으므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정의와 의문을 동시에 내린 함축적인 혼잣말에 예의 고대인은 제법 만족한 듯 목을 울려 웃었다.
- 나도 모르겠는데. 네 영혼이 짙어진 만큼 네 안의 '나'와 만날 만한 우연이 발생했는지도. 봐.
고대인은 두 팔을 벌려 다소 과장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 제법 근사한 만남 아닌가? 나는 '나'로서 대화할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 네가 그와 손을 잡았다면 자연스레 '내'가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이게 더 멋진 것 같군.
경쾌한 말투로 제법 끔찍한 미래를 가정하고 있어 모험가는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대는 대하기 까다로우리라는, 제법 정확한 예측이 머릿속에 경고처럼 스친다. 혼자 떠들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그를 만족시킬 만한 유일한 방법이리라 확신했다.
모험가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다시 웃었다.
- 너 정말 내 조각 맞아?
…처음으로 그와 마음이 통했다.
모험가는 묵묵히 아젬의 대화에 응했다. 사실상 떠드는 건 거의 아젬 쪽이었고 모험가는 근근이 대꾸해주는 게 대화의 대부분이었지만, 막상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공감가거나 이해되는 구석이 제법 많았다. 꽤 긴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절로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각 이상으로 그의 입담에 오랜 시간 어울려주고 있었다.
- 난 골몰하는 행위에 시간을 쏟고싶지는 않아. 물론 동포들의 의견을 존중할 가치는 충분하지만, 의견과는 별개로…급할 때 절차나 원리원칙은 거추장스럽잖아. 도움을 요청할 시간에 내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는 몇 번인가 의제로 올라간 일들을 논의되기 전 처리했던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개중에는 화산 섬과 이프리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모험가는 이 때 처음으로 질문했다.
“왜 굳이 먼저 갔는데?”
- 그 섬에서 나는 포도가 맛있어서.
“…….”
입을 열자마자 도로 침묵이 되돌아오고 만다. 고대인은 마치 모험가의 표정을 보기라도 한 듯 유쾌하게 웃었다.
- 당연히 농담이지. 그런데 딱히 거짓말도 아니긴 해.
모험가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이 고대인의 이런 화법이 짜증났다.
“어느 쪽이야?”
- 난 오히려 묻고 싶은데. 영웅. 너도 분화를 앞둔 화산섬과 그곳에 사는 동포들을 놓고 도망과 수긍밖에 생각할 수 없나?
자신을 향한 질문에 모험가는 순간 입을 살짝 벌렸다. 가면 아래 입꼬리가 씩 올라간 듯 했다.
- 섬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활화산……너도 ‘그저 그런’ 거라고 받아들여? 아니잖아. 내 손에 그걸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단이 있다면 더.
잠깐, 엄밀히 말하면 그건 네 것도 아니고 라하브레아의……입술이 달싹였지만, 아젬은 그런 사소한 문제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 그래서 그렇게 했어. 후회도 없었고. 농장도 그대로여서 그 해 섬의 포도 농사도 어김없이 풍년이었지. 그 섬의 모든 것들이 살아있었으니까. 나중에 하데스가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며 실컷 잔소리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고.
그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어쩐지…그 시절을 그리워하던 에메트셀크의 쓸쓸한 옆모습과는 다른,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이를 질책하는 똑같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이마저도 되돌리고 싶었던 일부였을까. 헤아리기도 까마득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아젬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평온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너도 그리워?”
- 응?
“과거가 그립냐고. 아씨엔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마디 하면 혼자 열 마디는 하던 고대인은 그때 돌연 입을 딱 다물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도 높이의 차이가 큰 탓에 상반신 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 침묵의 의중을 파악할 시간보다는 짧은 간격을 두고 대답이 돌아왔다.
- 당연한 걸 묻는군. 잃고싶지 않아서 내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발악을 했는데.
전에도 말했을지 모르지만,
조디아크를 소환하기 직전에 14인 위원회를 빠져나간 사람이 있었어.
- 나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찾아보려고 온 세계를 돌아다녔어. 그건 원래도 내가 해 오던 일이었지만…그래, 솔직히 찾아보려 할수록 이게 마지막인 것 같았지.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조디아크를 위하여 동포들을 바친 이들에게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했다. 비록 당장은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그들에게 외면받더라도 언젠가 그들을 종말로부터 되돌려받으며 없던 일마냥 얼싸안고 웃을 미래를 기대했다. 질책과 잔소리는 익숙하니까. 그럼에도 인정받아왔으므로 이번에도 결코 다르지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바스라지는 세상을 마르고 닳도록 헤집으며 깨달은 것이라고는 이 세상을 도저히 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뿐이었다. 아젬이라는 존재의 힘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을 던져 지켜낸 포도 농장도, 변함없는 내일을 보내던 동포들도 걷잡을 수 없는 해일과 연속된 화산분화로 손 쓸 틈도 없이 떠밀려가고 가라앉았다. 재앙이 내린 고향땅에 나타난 마수들은 그가 모험을 다니면서도 마주한 적 없는 기이한 생김새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상대할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의 부름에 부응해줄 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분하기보다는 그저 그 현실이 안타까웠다.
- 그제야 깨달은 거야. '섭리'란 그런 거라고.
극복할 수 있는 미래란 정말 유한한 것일까. 섭리란 하나같이 잔혹할 뿐인가. 끊임없이 되물으며 맞서왔던 아젬에게도 종말의 재해는 저항할 틈도 없이 들이닥쳤다. 최후는 생각보다도 보잘것 없었다. 아무도 없는 메마른 모래사장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처음으로 '그저 그런' 것이었음을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뒤따라온 안식은 무력함의 증거였다.
- 나에게는 분명 함께 해줄 동료들도 있었는데, 이해받지 못한 게 분해서 홀로 찾아보겠다며 뛰쳐나간 게 맹점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동포를 바치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든……. 결국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아젬은 그렇게 말하며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 너는 나이기도 하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지만, 당대에 태어난 동포들의 영혼이 아씨엔이 되면 '우리'의 기억과 함께 행동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너는 '내'가 되었겠지.
그의 말은 곧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정보였다. 모험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지 않겠느냐고 아씨엔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게 한 번은 아니었다. 감언이설로 꼬드긴 자가 있는가 하면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지켜본 이도 있었다. 그리고 아씨엔이 된 자가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도 알고 있다.
에메트셀크의 제안을 받았을 당시에도 모험가는 한 번쯤 생각해본 적 있었다. 그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주장할 만큼 이 세상의 진실이 충격적이라면, 자신은 과연 어둠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가. 원형이 아닌 아씨엔들이 그렇듯이 '아젬'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을 자신은.
- 솔직히, 설령 그렇더라도 유감스럽지만…나라면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을 거야. 동포들을 바치고 고향을 잃은 충격에 미쳤냐고 화를 냈겠지.
생각에 잠겼던 모험가를 끌어낸 건 아젬의 거침없는 발언이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모험가는 잠깐이나마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금방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너라면 그러고도 남네.”
- 하하, 슬슬 날 파악했어? 하지만 이건 ‘내’ 얘기고, 진짜 중요한 건 ‘내’ 기억이 돌아온 ‘너’라는 거야.
솔직히 그가 그렇게 말한들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긴 한다. 그걸 정말 ‘나’라고 부를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애초에 모험가는 그렇게 있지도 않은 경우의 수를 상정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눈앞의 이의 기억을 가진 채로, 자신의 동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고민의 시간이 유독 길었다.
“…애초에 너희같은 계획을 실행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 너랑 다르지 않겠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아니기에 더 화를 낼지도 모른다.
모험가의 대답에 메아리도 없는 공간에서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다.
- …그래. 우리의 영광이 그리워도 받아들여야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이 세계 곳곳에 조각처럼 흩어졌음을. 살아남은 그들에게는 그게 끔찍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말이야……그런 게 진짜 섭리거든. 죽은 자는 에테르가 되어 별의 바다로 돌아가 새 생명으로 순환하는 것. 이 까마득한 세월동안 우리의 조각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 억지로 이어붙이려 하면 오히려 더 불완전해질 뿐이야.
역설적이게도 섭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해답을 찾아오던 이는 끝에 다다라서야 그를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도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동료들의 뜻을 모을 수만 있었다면……수많은 가정을 그라고 안 해봤을까.
그럼에도 인류는 흩어진 채 생존했고, 모두가 그들의 조각을 품은 채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 비록 그 영광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로는 외모이기도 했고, 때로는 성격이기도, 때로는 아주 사소한 버릇이기도 했으며 때로는…과거의 행동을 답습하기도 하면서.
그 모든 걸 그저 인정하면 된다. 모든 존재는 크든 작든 과거의 발자취를 잊지 않고 순환하고 있음을 알면 그걸로 충분했다.
- 난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언제 내가 아닌 나와 이야기를 해보겠어.
“솔직히 난 네 존재도 믿기지 않는데…….”
- 바로 그런 게 통한다는 점에서 믿어야겠지. 안 그래?
“…끼워맞추지 마.”
그리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알 것 같았다. 서로의 영혼이 같은 색이라는 걸. 멀리 보았을 때는 다르지만 서로를 구성하는 요소가 너무나도 닮은 존재들. 같은 색의 영혼을 가진 이들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자리잡아 어느 새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각들은 각자의 뿌리를 내려 새싹을 틔웠기에 서로를 별개로 인식한다. 각자의 역사를 품고 살아간 이들을 더 이상 같은 존재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비록 그들의 영혼은 같은 색일지라도, 그 뿐이었다.
영혼은 존재의 본질이지만, 같은 색이 곧 같은 영혼이라 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선명한 빛깔의 영혼을 나눠 가진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 새삼 네 운명도 만만치 않은 것 같네. 죽음까지 초월해서 끈질기게 따라붙는 영혼이 있으니.
…누구를 이야기하는지는 알 만 했다. 소름끼치는 파란 눈을 떠올린 모험가의 표정이 구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엄청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군.
“너도 몇 년을 이렇게 살아봐.”
- 잘 모르겠네. 그렇게 끈질긴 상대를 만난 적은 없어서.
모험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못미더움이 다분히 묻어나는 눈치였다.
“내가 보기에는…네가 끈질긴 쪽이었을 것 같아.”
- 내가? 그럴리가. …아닌가? 뭐 그래, 그런 셈 치자.
모험가는 그 순간, 어째서인지 이프리타 이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던 '하데스'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를 이해한다니 터무니없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앞의 고대인을 두고서는 잠시나마 공감대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자……실컷 떠들고 나니 시간이 다 된 모양인데.
그렇게 말하며 아젬이 손을 들어 보인다. 손끝에서부터 색이 빠지듯 투명하게 천천히 물들어가는 것을 모험가도 볼 수 있었다.
-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 뭐…그런 대사를 해주는 게 좋겠지? 너는 별로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굳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넌 나랑 안 맞아. 빨리 가.”
- 아하하! 그 표정은 하데스랑 똑같아. 넌 상상도 못 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어서 잠시 주춤했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는 표정을 한층 더 구겼다. 그 와중에도 고대인의 몸은 점점 별빛에 물들어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무릎을 구부려 몸을 낮춰 모험가를 내려다보았다. 이 고대인과 그만큼 가까이서 마주 본 건 처음이었다.
- 네게 해 줄 충고같은 건 없어. 나는 너의 상위적인 존재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너도 나의 하위격이라 볼 수 없지.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길을 걸어온 동등한 존재니까. 그러니 이제 깔끔하게 이별하면 그만이야. 나는 진짜 끝으로, 너는 여전히 앞으로.
공명하는 목소리에 점점 메아리가 커진다. 목소리는 그에 반비례하여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모험가는 그의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대했던 그의 형상이 마치 신기루처럼 흔들리고, 녹아들어간다. 동시에 꿈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지지 마. 태양이란 그런 거니까!
이제 웅웅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는 고대인의 언어와 공명이 뒤섞여 들렸다.
그럼에도 또렷하게 인식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꿈은 형상과 함께 새까맣게 녹아내렸다.
댓글 1
몰입하는 날다람쥐
선생님, 저 이 글 너무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젬이 그 이름대로 "지지 마. 태양이란 그런 거니까!"라고 한 대사가 쿵, 하고 들이박고 가네요... 지지 말라는 말이 중의적이면서 동시에 양쪽을 다 만족시키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와, 정말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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