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름 (2)
대위가 사라졌다
휴직계를 내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면 라벤더 안식처에 있는 대위의 집은 어떻게 되는걸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공간이 얼마나 순식간에 폐허처럼 망가지는지 루인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하려 해도 아늑하거나 포근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넓고 쾌적한, 꽤 괜찮은 공간이었던 기억이 난다.
스호베이 대위가 자신의 개인 소유 주택에 얼마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집이 폐가처럼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왠지 루인은 자기 집이 아닌데도 조금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물건도 별로 없고 아직까지 풀지 않은 짐이 군데군데 상자째로 놓여있는 집이었지만 그곳의 식탁에서 먹었던 전골은 너무나 따뜻했고 침대에서 잤던 잠은 참으로 달콤했다.
라벤더 안식처의 구석에 위치한 집의 외벽은 여전히 차갑게 짙은 회색이었고, 곧 비가 내릴 것처럼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우중충해 보였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한 번 둘러보러 찾아간 곳인데, 정원에서 누군가 커다란 나무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비질을 하고 있어 속으로 깜짝 놀랐다. 혹시 대위님인가? 휴직했다 하더니 마지막으로 집을 청소하고 있나? 하고 발걸음을 재촉해 울타리 쪽으로 다가가니 빗자루를 들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르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
“엇, 뉘신지요?”
팔을 번쩍 들어 옷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슥슥 훔치던 사내가 루인을 보더니 사람 좋게 웃는다. 루인이 자신의 소속을 밝히며 이 집의 주인인 스호베이 대위와 함께 일하는 사람임을 확인시켜주고, 지금 무얼 하고 계신지 물어보자 중년 남자는 빗자루를 외벽에 세워두고는 잠깐 숨을 골랐다.
“아, 그 키가 크고 머리칼이 검은 분이 대위님이었군요.”
“예, 예.”
“저는 여기저기 출장 다니면서 비어있는 집을 일주일이나 이주일 간격으로 청소하고 정리해주는 일을 하는 업자입니다. 아무래도 에오르제아에서 모험가 거주구에 집을 얻는 분들은 워낙 바쁘다 보니 제 때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잦지요.”
라벤더 안식처, 하늘잔 마루, 안갯빛 마을 같은 모험가 거주구에 주택을 얻은 후 일정 기간 이상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시 토지를 반납해야 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루인도 들은 바가 있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일주일, 열흘, 이주일 정도의 기간을 간격으로 누군가를 고용해서 주택에 사람이 들어가도록 해 집이 철거되거나 토지를 반납하게 되는 일을 방지하고 또 덤으로 쌓여 있는 먼지를 닦아낸다든가, 빗자루질, 간단한 정원관리, 초코보 축사 청소, 수도와 하수 점검 등을 한다는 것이었다. 루인은 그런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충분히 납득되는 일이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신은 스호베이 대위님을 직접 보신 겁니까?”
“오, 네. 그렇지요. 저는 집주인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는 절대 계약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민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주택관리 겸 청소업자가 대위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어제 저녁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대위는 남자에게 거액의 임금을 선불로 지급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으로 와 집 안팎을 청소하고 정원에 쌓이는 나뭇잎이 썩지 않도록 쓸어서 버려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남자는 정원의 작은 나무 의자에 올려 두었던 낡은 작업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자신이 받아 둔 여분의 집 열쇠와 대위의 친필 서명이 되어있는 계약서를 루인에게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던 전문가다운 태도였다.
계약서에 올라간 서명은 루인이 그동안 온갖 행정업무를 처리하며 보아왔던 스호베이 대위의 것과 정확히 같았기에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계약 기간은 오늘부터 석 달. 그래도 주인이 없는 동안 누군가가 이 집을 관리해줘서 폐가가 되거나 철거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니 왠지 안심이 된다. 대위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어쩌면 루인의 예상보다도 더 꼼꼼한 사람일지 모르겠다.
청소업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특별히 속이 상하다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스호베이 대위가 언제 다시 총사령부로 복귀할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루인 자신은 흑와단에 군인으로서 뼈를 묻을 생각은 아닌만큼, 만약 그와 헤어진다면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상상을 했었다. 대위는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도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항상 느꼈다. 어쩌면 사적인 감정이랄 게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지…….
스호베이 대위의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임시로 채웠다. 뷔요르토타 중위는 공정하고 사무적인데다 딱딱한 전형적인 군 장교 유형이었고 루인은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 새로 자신의 상관 역할을 하게 된 중위에게 스호베이 대위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묻고 싶기도 했으나 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무례한 일 같았다. 그의 행방을 알아낸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루인은 평소처럼, 흑와단에서 치유사 특히 학자를 필요로 하는 온갖 종류의 임무에 파견되었다. 전장에 출전하기도 했고, 외지 라노시아 어딘가에서 보기 드문 마물이 나타나 난리가 났을 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마물을 처치하느라 부상을 입은 노란셔츠단 단원들을 치유하는 임무도 했다. 청동호수 야영지에서 요양하고 있는 부상병과 장교들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지 살피거나 종종 군 야영지 근처에서 일을 하다가 도도에게 쪼이고 만드라고라에게 물린 농부를 포함한 민간인들이 실려 오면 그들을 치유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루인 같은 흑와단 소속 학자들의 몫이긴 했다.
그래도 특수 필드에서의 임무는 여태껏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인력이 부족하긴 한지 뷔요르토타 중위가 루인에게 먼저 그 일을 제안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피로에 찌들어서 파리한 얼굴빛과 거뭇해진 젊은 학자의 눈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기 위해 키가 큰 중위가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자 루인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반걸음 물러섰다. 경계심이 가득한 방어적인 태도에 중위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편다.
“귀관은 특수 필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우리 총사령부의 소속으로 파견될 수 있는 임무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임무들이 있다. 일을 하는 장소 때문이든,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 때문이든, 그 임무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것들 때문이든 어쨌든 특수한 임무이다.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귀관이 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경험과 보상은 확실히 보장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위험성 역시 그만큼 높다.”
“…….”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고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데, 정예도, 정규군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귀관의 동료가 될지 예상할 수가 없다. 특수한 장소에서 하는 전투는 항상 돌발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해야 하고,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환자와 부상을 다뤄야 할 수도 있다. 관심 있나?”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없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명령을 받으면 그것을 수행해야 하고 하급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관심이 있냐고 묻는 걸까? 솔직히 될대로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곳이든, 보상이 두둑하든 상관없었다. 어떤 일이든 하고 싶었고, 차라리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위험한 일을 좋아한다거나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을 반기는 타입의 인간은 전혀 아니었으나 다양한 환자를 만나고 부상을 치유하는 경험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명령을 수행하겠다고 말을 하니 중위는 침착하게 일주일 중 사흘은 특수 임무, 이틀은 흑와단 군부에서 직접 하달되는 임무, 그리고 이틀은 휴식을 취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꽤 두툼한 서류 뭉치를 루인에게 건네주면서 그가 가야 할 목적지, 즉 다양한 특수 필드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현재 상황을 정리해 둔 자료이니 당장 다음 주에 그곳으로 파견되기 전 숙지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흑와단 군령부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올 땐 눈가가 뻐근해질 정도로 피로했다. 루인은 터덜터덜 아파트로 돌아와 서류 뭉치들을 꺼내 하나씩 살펴보고 어떤 부분에서는 미간을 찡그렸고 어떤 부분에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헛헛하게 웃기도 했다. 특수 필드에서의 시간 개념이라든지, 날씨의 변화, 마물의 출현 빈도 등에 대해서는 잘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는데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진 파악이 어려울 것 같았다.
특수 필드에는 각국의 총사령부에서 지원, 차출되어 온 이들을 위한 숙소가 있고 상당히 시설이 열악한 모양이었다. 어떤 물건을 챙겨가야 일주일 중 사흘을 그곳에서 별 탈 없이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리 크지 않은 여행용 트렁크를 조금씩 채우는 중에도, 루인은 자기 앞에 다가올 기묘한 미래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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