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언약 반지

드림 1주년 기념 연성 / 23.05.31 업로드

-주의: 특정 빛전 묘사 있음

언약식 계획을 세울 동안 에스티니앙은 특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가능하면 맑은 날 아침에 식을 해치우자는 얘기에도, 하객을 불러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겠다는 말에도, 식을 치를 때 입을 예복은 빌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하면 너도 머리 좀 굴려 보라며 아실이 타박할 정도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나?”

에스티니앙이 입을 연 건 예식용 반지를 정하는 자리에서였다. 둘 다 금속 세공과는 인연이 없었으므로 반지 제작은 울다하의 보석공예가 길드에 맡기기로 했다. 아실은 별다른 무늬가 없는, 가느다란 은반지를 원했다. 은 함량을 낮춰서 강도를 단단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상담을 맡은 보석공예가는 당황했다. 패물로서 가치가 없는 장신구를 주문 제작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장인은 간절함을 담아 손님의 일행을 흘끔거렸다. ‘좀 말려보세요!’ 에스티니앙은 눈짓의 의미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결혼반지를 값진 귀금속으로 만든다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예산이 모자란다면 내가 보태지.”

“됐어! 딱히 절약하려던 건 아니고….”

아실은 드물게 머쓱해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평소 끼고 다닐 물건이니 내구성이 좋은 게 나을 것이고, 용병이나 모험가 일을 하려면 몸에 걸치는 장신구는 수수할수록 좋았다. 값진 패물은 반드시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이야기를 들은 에스티니앙은 그도 그렇다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그는 여전히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연인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단순한 게 싫으면 보석을 쓸까?”

아실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에스티니앙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서로의 눈 색과 비슷한 보석을 쓰자, 그래도 내구성은 포기 못 한다, 같은 얘기가 오고 갔다. 보석공예가는 정상 궤도로 돌아온 논의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것저것 의견을 보탰다.

의뢰서 작성을 끝낸 뒤에는 열두 신 비석에 기도를 올리러 다녔다. 비석이 워낙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탓에 동선을 짜느라 애를 먹었다. 대도시에도 비석이 하나씩은 있었으므로 보급은 수월했다. 노련한 모험가 둘에게는 산책이나 다름없는 여정이었다.

짧은 여행길 내내 날씨가 궂었다. 에스티니앙은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성천의 열두 신이 아실과 자신의 언약을 못마땅하게 여겨서인지 알 수 없었다. 새삼스레 두렵거나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어쩔 거야, 얜 이미 내 건데. 다만 언약식 날까지 기상이 이 모양이면 아실이 아쉬워할 터였다. 그는 할로네의 비석 앞에서 좀 더 공들여 기도했다. 평소 성실하게 믿어본 적은 없었으나 열두 신 가운데서 가장 제 편을 들어줄 듯한 이가 할로네뿐이었다.

전쟁의 신이 다른 신들을 잘 설득해 준 것인지 언약식 당일은 무척 화창했다.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에스티니앙과 아실은 따로 떨어져서 옷을 갈아입었다. 빌린 예복은 묘하게 몸에 맞질 않았다. 에스티니앙의 경우 팔다리 길이를 맞추면 가슴과 윗팔뚝, 허벅지가 꽉 끼었고 품을 맞추면 소매와 바짓단이 길게 늘어졌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해 성당 측에서는 재단사를 대기시켜 두었다. 안으로 접어 올린 옷단이 감쪽같이 마무리되는 광경에 에스티니앙은 내심 감탄했다.

옷을 수선한 뒤에는 화장이니, 눈썹 정리니, 머리카락 손질이니 하는 문제로 소란스러웠다. 예복이 흰색이었던 탓에 귀찮다고 넘길 수도 없는 문제였다. 에스티니앙에게 붙은 사람은 둘이었는데 그들은 머리카락을 이대로 둘지, 묶을지로 옥신각신했다. 아실이 머리를 푼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야 묶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에스티니앙은 한 일도 없는데 피곤해졌다.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하려다 화장이 지워진다며 제지당했다.

하객이 없어서 종을 치는 절차는 생략했다. 입장은 동시에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예식장 문 앞에서 아실을 기다려야 했다. 귀찮은 건 자기가 하겠다며 나선 탓인지 아실은 몸치장을 끝내는 데 오래 걸렸다. 닫힌 식장 문과 반대편 복도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에스티니앙은 이상하게 초조했다. 지금이라도 저쪽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서 아실을 보러 갈까, 싶었다. 다행히 그가 마중을 나가기 전에 아실이 나타났다.

아실의 옷차림은 에스티니앙과 비슷했다. 꼬리가 둥글게 내려온 연미복과 정장 바지, 딱딱한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흰색. 다만 화장이 제법 세심했고(아실은 평소에 종종 화장하고 다녔으므로 에스티니앙도 자연스레 알아볼 눈썰미를 갖추게 되었다) 등 중간까지 내려오는 면사포를 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부케였다. 조화롭게 구성된 꽃 사이에서 에스티니앙은 눈에 익은 거베라를 발견했다. 교회의 제단이나 고위 귀족들의 실내 장식으로만 보던 꽃이 연인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늦었지, 미안!”

아실이 걸음을 재촉하자 면사포가 덩달아 등 뒤로 휘날렸다. 에스티니앙은 나풀거리는 레이스에 정신이 팔려 대답이 늦었다. 가까이서 보니 머리카락도 평소보다 단정했다. 빗어도 정리가 안 되는 잔머리를 땋아서 머리 뒤로 두른 덕분이다.

예정된 시각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실은 그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주된 화제였다. ‘넌 상관없을지 몰라도 난 궁금해.’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고작 치장 당하는 게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인지, 머리카락을 묶고 푸는 문제로는 또 얼마나 열띤 토의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누가 중간에 찾아왔더라니 그게 네 쪽 사람이었구나?’ 아실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 중에 에스티니앙이 흥미로워할 만한 것을 골라 짧게 얘기했다.

잡담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예식 진행 도우미가 헛기침으로 둘의 주의를 끌었다. 나란히 서서 식장에 들어가다가 에스티니앙은 문득 연인을 처음 본 순간 해야 했던 말이 아직 입안에서 맴도는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실이 부케를 흔들면서 ‘나갈 땐 네가 들어.’ 속삭이는 통에 입을 열 때를 놓쳤다. 그는 어깨만 으쓱했다.

모그리 족 특유의 말투를 빼면 주례사는 평범했다. 둘은 상투적인 언약의 말이 적힌 증서를 따라 읽고, 맹세하고, 서명했다. 반지를 받아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줄 때까지도 에스티니앙은 언약식이 남의 일 같았다. 마지막으로 키스하라는 주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든 아실을 보는 순간 실감이 났다. 반지 낀 왼손을 연인의 어깨에 얹고서 에스티니앙은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지금까지 한 것 중에 가장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퇴장해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서 에스티니앙은 부케를 가져갔다. ‘진짜 들게?’ 아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라고 할 땐 언제고.’ 풍성한 꽃다발은 에스티니앙 수중에서도 그럭저럭 태가 났다. 아실은 막상 넘겨주니 손이 허전하다며 팔짱을 꼈다. 그들은 빈 하객석 사이로 난 통로를 천천히 걸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평범하게 살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해 왔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도, 은퇴를 결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위를 내려놓고서 발길 닿는 대로 떠돌고, 종종 맛있는 것을 먹고 가끔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삶. 동반자는 없을 테지만 혼자일 거란 사실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사는 얘기를 나눌 친구도 있었으니까.

아실과 연인이 된 뒤에도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에스티니앙이 선택한 조금 이상한 삶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랐고, 경위를 파악한 뒤에는 곁에 머무르는 아실에게 너무 익숙해졌다. 에스티니앙은 혼자여서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실이 떠나게 된다면 빈자리를 의식할 때마다 적적한 마음이 들 터였다.

예식장을 나서기 직전, 에스티니앙은 해야 하는 말을 아직도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오늘 예쁜데, 아실.’ 동시에 에스티니앙은 걸음을 멈췄다. 왠지 그래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실은 고맙다고 대답하며 발돋움했다. 뺨에 입맞춤이 닿는 동시에 너도 예뻐, 하고 칭찬이 돌아왔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의 어휘 선택에 관해 약간 불평했다. 아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실인 걸 어떡하니?’ 가볍게 말다툼하다 보니 어느새 문밖이었다. 언약식은 그렇게 끝났다.

은반지는 관리하기 번거로웠다. 그냥 둬도 삭아버리는 게 은인데 매일 끼고 다녔더니 무섭도록 빨리 닳았다. 아실은 10년쯤 지나면 반지가 다 깎여나가고 보석만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새 반지는 금으로 할까? 오래 가는 걸로 따지면 그게 제일 낫대.’ 에스티니앙은 뭐든 상관없었다. 금이라면 굳이 보석을 박아 구색을 갖출 필요 없겠다는 정도가 그의 의견이었다.

아실과 달리 에스티니앙은 반지를 빼놓는 일이 잦았다. 건틀릿을 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손가락을 조이는 감각이 낯설었던 탓도 있었다. 그래도 일하지 않을 때는 목걸이 줄에서 반지를 분리해 꼬박꼬박 끼고 다녔다. 불편하다는 핑계로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영영 익숙해지지 못할 테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마련한 목걸이 줄에 반지를 매달면 심장 위까지 늘어졌다. 그는 가끔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언약의 무게를 생각했다.

에스티니앙이 아실의 손에서 반지 자국을 발견한 것은 언약 기념일이 몇 번쯤 지나간 뒤의 일이었다. 한바탕 침대에서 뒹군 탓인지, 아니면 막 씻고 나온 탓인지 연인은 모처럼 반지를 빼놓은 채였다. 아실의 왼손 약지 뿌리 부근은 눈에 띄게 색이 옅었고 살이 옴폭 들어갔다. 에스티니앙은 예식장에서 읊자마자 잊어버린 맹세의 일부를 떠올렸다. ‘언제나 한결같이.’ 유독 상투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절들만 기억에 남은 것이 우스웠다.

약지에 입을 맞추며 에스티니앙은 몰래 자기 손가락을 문질렀다. 꼭 같은 흔적이 손끝에 읽혔다. 그 사실이 약속을 잘 지켰다는 증거 같았다. 고작해야 살갗이 반지 모양대로 눌린 것뿐인데도. 언약의 또 다른 구절들을 떠올리며 그는 확신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보통에서 동떨어진 삶을 함께할 것이다. 처음 맞춘 반지가 마모되고, 새로이 마련한 반지마저 같은 운명을 겪더라도. 에스티니앙은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