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아노휘 / 이름 모를 광석

하데아노휘 고대인트리오의 평화로운 하루 망상과 무언가의 날조

- 하데아노휘 고대인트리오의 평화로운 하루 망상과 무언가의 날조

- 아젬(아노히토)은 금발의 여성으로 외형 묘사가 있습니다.


높은 탑 위로 펼쳐진 하늘에서 햇빛과 바람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열네 번째 자리에 앉은 자ㅡ실제로는 자리가 빈 날이 더 많지만ㅡ 아젬은 어떤 희극의 배경보다도 더욱 웅장하고 찬란한 이 도시! 아모로트에 도착하자 비로소 숨을 삼켰다. 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왔으니 숨이 차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었으니까. 아젬은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유독 그랬다. 이 도시를 상징하는 드높은 건물이 시선 끝에 닿는 순간이면,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을 때보다도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니 느린 걸음에서 서두르는 걸음으로, 빠른 걸음에서 달리는 걸음으로 변하고 마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후후, 아젬. 그러다 넘어지겠는걸. 또 여기까지 직접 뛰어온 거야?”

“휘틀로다이우스!”

그렇게 서두르는 아젬의 걸음 끝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창조물 관리국의 국장이자 아젬의 절친한 친우, 휘틀로다이우스였다. 관리국의 일로 바쁠 텐데도 시간을 내어 마중 나온 친우의 목소리를 듣자 아젬의 얼굴은 환히 밝아졌다. 해맑게 웃는 낯을 한 채 그의 코앞까지 다가간 아젬은 덥석 휘틀로다이우스의 팔을 당겨 안았다. 여행자의 귀환을 알리는 인사였다. ‘어서 와’, 그리고 ‘다녀왔어’라는 인사말이 오가면 두 친우는 마주 보며 소리 내 웃곤 했다.

“그런데, 나의 신실한 친우 에메트셀크 님은 왜 안 와 계시는 걸까~? 나 분명 미리 연락했는데!”

“아아, 에메트셀크는… 어제 미트론 학술원에서 사고가 생겨서 그 수습 건 때문에. 아마 온종일 집무실에서 나오지 못할 거야. 네가 왔다는 걸 아는데도 틀어박힐 수밖에 없다는 건 꽤 가엽네. 후후.”

“저런! 그랬구나. 그건 어쩔 수 없지. …… 그런데 휘틀로다이우스. 지금 그 표정 엄청 얄미운 거 알아? 아하하. 기분 좋아 보여!”

휘틀로다이우스는 ‘얄밉다’라는 말을 들어버린 제 표정을 살피듯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런가? 이 표정이 그렇게 얄밉단 말이지…… 장난스러운 생각의 끝에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옅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젬은 생각했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그리고 오늘의 에메트셀크는 조금 놀림당할지도 모르겠다고!

“아무튼! 에메트셀크가 나오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네.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에메트셀크가 널 그리워할까 봐 직접 찾아가 주기까지 하고. 정말 상냥하구나?”

“그럼! 혼자 울고 있으면 어떡해? 줄 것도 있단 말이야.”

휘틀로다이우스는 농담을 건넸고, 아젬은 뻔뻔한 낯으로 마주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 어깨 너머로 맨 가방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번 여행의 끝에서 무언가 챙겨온 모양이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가방 안에 든 것이 무엇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운을 떼기도 전, ‘아! 맞다!’ 하고 외치는 아젬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 앞서 막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즐겁고 ‘아젬답다’ 싶어 또다시 웃음이 났다.

“휘틀로다이우스! 네가 저번에 말한 특이한 이데아 말이야. 실제로 보니까 감격스럽더라. 정말 멋졌어!”

“아아, 큰 눈에 날개가 달린 ‘그거’ 말이구나. 후후. 역시 네가 좋아할 것 같았어. 물론 사람들 사이에선 여러 의견이 나왔었지만…….”

“정말로! 완전 마음에 들었어! 그걸 타고 다닌다면 즐거울 것 같아!”

“그걸 탄다고? 정말 특이한 취향이라니까. 흐음, 상관은 없겠지만 그 모습을 에메트셀크가 본다면-”

“…… 한마디 하지 않곤 못 배기겠지. 역시 포기해야 하나? 윽, 잔소리 듣는 건 싫은데~”

두 친우는 이 자리에 없는 또 하나의 친우가 조잘댈 목소리를 떠올리며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아모로트 거리로 다시금 발을 뗐다. 그리운 이와 서로의 곁을 지키며 걷다 보면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느긋한 걸음 속에는 늘 이야기가 있었다. 어찌나 그렇게 나눌 이야기가 많던지. 잠깐 보지 못한 것뿐임에도 일생의 반을 떨어져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멈출 줄 몰랐다.

“…… 그래서 그때 말했지. 이번 대의 에메트셀크가 도와준 거랍니다! 하고.”

“후후후, 정말? 하지만 에메트셀크는 아모로트에 있었잖아?”

“뭐, 에메트셀크가 알려준 술식이 도움이 된 건 맞잖아. 에메트셀크도 분명 이렇게 쓰라고 전해준 거라 생각해.”

“맞아. 그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휘틀로다이우스. 그럴 땐 내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알지?”

서로가 없던 시간을 채워가듯 흐름은 끝없이 이어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사이를 가를 때까지 그랬다.

“유의미한 토론을 하라고 했지, 무의미한 수다를 떨라고 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그것도 내가 일하는 곳 앞에서.”

“앗, 에메트셀크~!”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팔짱을 낀 채 모퉁이에 기대서있는 모습을 보고 아젬이 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끝없이 등장하던 그, 에메트셀크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의 목적지인 에메트셀크의 집무실 근처에 다다른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 번 눈썹을 까딱이던 붉은 가면의 그는 선수를 치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젬. 소리 높이지 마. 뛰지도 마. 내게 달려오지 마. 네 그 거대한 짐에서 이상한 물건을 꺼내지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달려간 아젬은 땅을 딛고 양팔을 벌리며 몸을 날렸다. 자신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 때면 펼쳐지곤 하는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고 싶었다.

모두의 예상과 한치 다름없이 뛰어드는 아젬. 그리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 받아내는 에메트셀크. 익숙한 풍경이었다. 에메트셀크의 표정은 팍 일그러졌지만, 그 끝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그의 품에 얼굴이 묻힌 아젬만이 보지 못했다.

“아젬! 너란 녀석은…! 한순간도 얌전히 있질 못해!”

“재회의 인사인걸!”

“그래봤자 겨우 며칠이잖아.”

“며칠이라니! 한 달이나 됐거든! 정말이지, 에메트셀크도!”

검은 로브가 휘날리고, 에메트셀크의 품속에 안착한 아젬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면 아래로 드러났다. 때마침 복도의 열린 창으로 바람이 불어와 로브의 모자까지 벗겨지고 말면 금실과도 같은 긴 머리카락이 옅게 뺨에 닿아왔다. 에메트셀크는 가까이 흩날리는 그 간지러운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면서도 굳이 손을 떼진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지.”

며칠 내내 이어진 과한 업무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이 말괄량이 아젬 녀석에게 쓸 기운도 없어서라고 스스로 변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결국은 아젬의 따스한 향기가 함께 풍겨온 탓이리라. 조금은, 그래. 아주 조금은 그리웠을지 모를 이 존재에게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자신을 납득시키며, 에메트셀크는 가면 쓴 아젬의 낯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젬은 시선을 마주하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하더니 별생각 없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본다. 그러면 그들을 지켜보던 휘틀로다이우스는 생각이 빤히 보이는 에메트셀크의 심오한 표정에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것이다. ‘언제 보아도 유쾌한 친구들이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어 그는 박수를 한 번 치고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일전의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래, 때가 되었다! 라는 장난기 어린 마음도 잘 챙긴 상태였다.

“후후, 너 역시도 그리워했으면서. 솔직하지 못하구나, 에메트셀크.”

“맞아, 에메트셀크!”

“내가 언제. 아니, 그보다 휘틀로다이우스. 넌 표정이 왜 그런……”

“아젬, 네가 떠난 지 일주일째 되던 날부터 에메트셀크가 어땠는 줄 알아? 끊임없이 문을 힐끔거리더라니까? 네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올지 기다리는 눈치였지, 아마!”

휘틀로다이우스의 자신만만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나긋하게 울리면, 이어 에메트셀크가 그 말을 끊으며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의 투닥임이 재미있었는지 아젬의 높은 웃음소리가 복도를 채웠고, 그 소리는 지나는 사람들의 고개를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웃음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면 사람들의 고개는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다. ‘뭐야, 아젬이 돌아왔나.’, ‘그 녀석이라면 이 소란도 이상할 것 없지.’ 지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이상적인 도시 속 유일한 이변. 하지만 그조차도 자연스러운 이례의 존재. 그것이 ‘아젬’이었으니. 그에게 홀린 존재들을 이해하는 건 이제 아모로트의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빨리 들어와. 시끄럽게 하지 말고.”

“네에~”

빠른 걸음으로 앞장선 에메트셀크가 문을 연다. 복도를 건너 에메트셀크의 집무실로 세 사람이 들어서면, 각자 익숙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들에게 여러 의미를 갖는 ‘가면’조차도 벗어 내려둔다. 일련의 과정에는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저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움직임은 세 사람의 일상을 가늠하게 하며 그들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를 보여주었다.

“아, 맞아. 그래서 아젬? 에메트셀크에게 줄 거라는 건 뭐야?”

“……내게 줄 것이 있다고?”

“아, 그거 말이지!”

휘틀로다이우스의 물음에 아젬은 자연스럽게 매고 있던 가방을 제 품 안으로 가져오더니 한참 속을 뒤적였다. 저 작은 가방 속에 뭐 그리 들어갈 게 많은지. 에메트셀크에게 아젬의 ‘번거로운 걸 좋아하는 성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순식간에 피곤함에 찌든 듯 퀭해진 에메트셀크의 시선이 아젬에게 따라붙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버린 휘틀로다이우스의 시선도 아젬의 손끝에 이끌렸다.

“음~ 으음… 여기 분명 뒀는데.”

“됐어. 또 쓸데없는 것을 챙겨온 거겠지.”

“아니거든! 아, 찾았다, 찾았다! 짠~ 이거 봐, 에메트셀크!”

그렇게 아젬이 가방을 탈탈 털며 꺼내든 것은 작은 보석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에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이름 모를 광석’이 에메트셀크의 손바닥에 놓였다. (물론 그가 제 의지로 손을 내민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광석은 투명한 그림자를 그의 손에 자아내며 은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왜, 기억나? 일전에 내가 널 불렀던 적이 있었잖아. 수중 생물의 일로.”

“갑자기 예고도 없이 불러내서 아주, 몹시, 굉장히 귀찮게 했던 그때를 말하는 건가.”

“앗, ……하하. 그렇지만 큰 물난리였는걸! 내 힘으로 안 될 땐 최강의 마도사님께. 그게 정답이잖아? 그렇지, 휘틀로다이우스?”

“후후, 물론이지. 마력도 넘쳐나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에메트셀크?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말이야.”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는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럴 때면 평소보다도 참 죽이 잘 맞는 쌍이다. 사이에 낀 에메트셀크만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낀다. 그럼 그의 표정에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이 제3의 자리에 앉은 자, 에메트셀크의 위대하고 멋진 점을 몇 번이나 읊는다.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그 내용에 거짓은 없었고, 끝내 두 사람이 에메트셀크의 집무실에서 쫓겨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좀 얌전히 있으라며 한 소리 들어버린 아젬은 헛기침하며 웃음기 어린 표정을 갈무리했다. 알겠어. 이번엔 진짜. 그리 말하고는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에메트셀크에게 건넨다. 에메트셀크는 또 무슨 장난일지 의심을 거두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종이를 순순히 받아서 손에 들었다. 종이의 겉에는 ‘친애하는 아젬. 그리고 에메트셀크님께.’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편지였다.

“이게 뭐야?”

“그때 네가 구해준 사람에게 받은 거야. 후후… 어때? 감동적이지? 네게 준 광석도 그 사람이 보내온 선물! 봐, 네가 선한 마음을 다해 그 사람들을 구했기 때문에 네게도 그 마음이 돌아온…!”

“것일 리 없지.”

“차가워! 매정해!”

“시끄러워…. 그보다 이 바보 같은 물건은 또 뭐란 말이야.”

“바보 같다니! 말이 너무 심해! 편지를 써준 사람이 직접 고르고 고른 거란 말이야. 네가 금방 그곳을 정리해준 덕에 구할 수 있던 거래. 색이 무척 예쁘지?”

광석을 연구하던 이들이었나. 에메트셀크는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떨며 도움을 청하는 아젬에게 갑자기 불려가서는 사태 수습에 이용당했을 뿐이었던지라 그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런 내용의 문서들이 있던 것도 같고. 그가 여전히 심드렁한 낯으로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 아젬은 창문을 열었다. 맑고 따뜻한 태양 빛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에메트셀크의 집무실을 채웠다. 아젬은 그의 손을 잡고 창문 근처로 이끌더니, 그의 손바닥을 창문의 빛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있던 보석을 들어 빛에 비추었다.

“뭐 하는 거야, 아젬.”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허공에 놓인 그의 손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맑고 투명한 보랏빛이 일렁였다. 에메트셀크는 그가 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면서도 점점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슬슬 아젬의 제멋대로 행동에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미간에 진 주름과 함께 입술이 꿈틀거리는 순간, 아젬이 순순하고 맑은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평범한 광석처럼 보이지만 이건 엄청 특별한 광석이거든. 봐봐, 이렇게 빛 아래서 아름다운 건 물론이고…”

아젬의 손길로 실내의 등이 꺼졌고, 동시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도 닫혔다. 내려앉은 어둠 속, 에메트셀크가 다시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한 번 빛을 머금은 광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지 뭐야.”

아젬의 말대로였다. 볕이 드는 창문을 닫고 방 안의 불을 껐음에도 광석은 빛나고 있었다. 은은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빛을 잃지 않은 채로, 꼭 누군가가 태양 빛을 붙잡아 그 안에 불어넣은 것처럼.

“어때? 멋지지? 대단하지? 자, 에메트셀크. 이것 또한 네 마음이 만들어낸 업적…!”

“웃기지도 않는군. 도대체 누가……”

이딴 걸 좋아할 줄 알고. 딱히 좋은 마음으로 도운 것도 아니고, 선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이건 그저 모두 네가ㅡ 비뚤게 올라간 입꼬리는 끝맺지 않은 뒷말을 대신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낯은 잘 보이지 않았어야 했지만, 아젬의 손에 들린 광석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 덕에 그 표정은 문가에 서 있는 휘틀로다이우스에게까지 보였다. 휘틀로다이우스는 결국 입을 가려 웃었고, 아젬 역시도 장난스러운 낯으로 검지를 들어 그의 입꼬리를 가리켰다. 에메트셀크는 그제야 제 올라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고, 두 사람을 집무실에서 쫓아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맞부딪히는 소리 한 번에 빛은 돌아왔고, 휘틀로다이우스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제를 꺼내며 휴식 시간을 제안하고 나서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광석은…… 글쎄. 그 또한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에메트셀크의 서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일 이후로는 특별한 것 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즐겁고, 평화롭고, 안온하며, 따뜻하게 빛나는 그런 하루를.

그래. 찬란한 아모로트 속에 잠긴 일상. 귓가에 아른거리는 웃음소리. 말갛게 피어오르는 얼굴. 선선한 바람과 그에 실려 오는 향기.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로 가득 찬.

미치도록 사무치고 그리운 그런 하루를,

곱씹으며 천천히 눈을 뜨는 이가 여기 있었다.

생각에 잠긴다는 건 불쾌한 일이다. 이건 이제 추억이 아니라 아집의 결정일 뿐일 테지. 하지만 떠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것이 사라질 리 없었다. 자그마치 만 이천 년의 시간이다. 그 길고 긴 고독과 그리움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채 한 겹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심해를 잠식한 누군가의 비원은 그리도 지독한 것이었다.

에메트셀크는 더 이상 밝게 빛나지 않는 아모로트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 잠겨 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껏 이 거리를 내려보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 얼마나 많은 추억을 되뇌고, 얼마나 많은 허상의 목소리를 흘려보냈던가.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나 눅진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거늘 오늘은 영 찝찝했다. 꼭 뜨지도 않은 태양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태양이란 없거늘. 이제 이 거리에 태양은 뜨지 않거늘. 유일한 태양을 되돌려둘 그날까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란 없는 것이거늘.

“그 ‘영웅’을 마주한 이후로 소란스러워졌군.”

에메트셀크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턱을 괸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터털 걸음으로 돌아섰다. 오늘은 이 거리를 지켜볼 기분도 들지 않는다. 영웅 나리의 발자취를 살피러 가는 쪽에 더 마음이 동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지금쯤이면 어디에 도달했을는지. 걸음을 잇는 그는 습관처럼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쥐었다.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표면에 잠시 생각이 짙어졌다.

방랑의 끝,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영웅’이 우리의 손을 잡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까.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는 그이니 이 알량한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이 가능성은 소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야, 영웅은 누가 뭐래도 ‘그 혼의 소유자’이지 않은가.

에메트셀크는 언제고 품에 지니고 있던 결정을 손안에 굴렸다. 행동에 습관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은 오랜 시간 그가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러니 ‘만일’의 때가 온다면 그에게 건넬 동행의 증표는 이것이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수많은 목소리와 향기와 풍경을, 기억과 감정과 마음을 이 속에 담아서 전해주리라. 경애하는 ‘그 사람’이 그랬듯 보여주리라. 여전히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내가… 단단히 미쳤지.”

다른 이도 아닌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스스로 작게 한숨을 짓게 했다. 에메트셀크의 시선 속에 담긴 결정은 이미 상당히 빛이 바랜 채였다. 다시 빛을 담을까도 고민했으나 여즉 남아있는 온기를 덮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두었다. 그야 이건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아니, 이게 아냐. 그와는 관계없다. 이건 그저 대비할 뿐이니까. 같은 빛을 지녔다고 해서 그 사람인 것이 아니니까. 일개 조각일 뿐이니까. 그래, 이것처럼.

“하여튼. 그 빛깔의 영혼이란 변하질 않아. 사람을 어찌나 홀리는지. 생각조차 마음대로 이을 수 없게 하고.”

에메트셀크는 손에 쥔 것을 다시 품속에 넣는다. 어둠 속에서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빛을 발하는 보석의 무게가 느껴진다. 언젠가 이것에 빛을 불어넣은 이가 돌아올 것이고, 그의 손에 다시 쥐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다시금 빛을 되찾을 테니 상관없다. 그때까지 잠시 맡아두는 것뿐이다. 이제 곧, 이제 곧. 그는 주문처럼 곱씹었다. ‘영웅’을 맞이하기 위한 포석을 깔기 위해 심해를 헤치고 나서면서.


그가 준비한 증표가 당신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을 것이다.

빛의 전사이자 어둠의 전사여.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남긴 알 수 없는 결정을 보았는가? 명왕 하데스가 남긴 이름 모를 보석을 발견하였는가? 그의 뜻과는 다르지만 결국 전해져 버린 유산을 쥐어보았는가? 당신의 손에서 유독 빛나는 것을 느꼈는가?

그렇다면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빛과 온기를 기억해보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일렁임이 아닌지.

……이렇게 말해 봤자 기억도 못 하겠지만.


2022. 09. 19

ㅎㅏ데스 코하쿠토 생각하기... 이런 거... 갖고 다녔어? 랄까 기억이 봉인된 <- 이라는 점... 어쨌든 기억의 매개가 될 수 있단 점... 그럼 다른 기억을 봉인할 수도 있었단 거잖아? 랄까... 하데스 제작 무기도 생각하기... 돌돌돌... 그냥 처음엔 평화로운 아모로트의 고대인 트리오 얘기를 쓰고 싶었는데... 높은 탑 위로 펼쳐진 하늘에서 햇빛과 바람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걸 적고 싶었는데... 적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기승전결은 모르겠고 일단 쓰고 보기...

+ 옛날에 어떤 분 연성 중에 에메트셀크가 영웅 떠올리면서... 영웅에게 줄 극데스 용 직접 빚는... 이런 게 있었는데 결정 부분 쓰다가 그거 갑자기 생각 났지 뭡니까요 그 연성도 엄청... 하..... 에메트셀크 바보바보바보(좋다는 뜻) 하면서 봤던 기억... 근데 못 찾겠다 발견하시면 알려주세요 다시 보고 싶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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