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트셀크 / 명계의 문

그의 이름은 오르페우스가 아니다.

명계의 사랑을 받는 자여. 닫힌 명계의 문을 열어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가면을 벗고 땅에 고개를 조아리십시오. 문이 열리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바라십시오.

그대가 명계의 신이 되어 군림한다 한들 강을 되돌아 건너오는 인간이란 무릇 인간이 아닌 법입니다. 그대가 아무리 바라고 또 바란들 이미 명계와 하나 된 세상에선 무엇하나 온전히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세요. 돌아보지 마세요.


에메트셀크는 계단을 올랐다. 몇 개의 계단을 밟고 또 밟았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림잡아 만 개, 혹은 그보다도 이천 개나 더 되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으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자신도 모르는 새 깊게 내쉬어진 숨은 흩어 사라졌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아, 참으로 괴로운 고행길이었다. 반파된 계단은 이곳저곳 부서져 있었고, 고요한 적막 속에는 제 발걸음 소리만이 남아있었다. 그 누구 하나 부를 이 없었고, 그 누구 하나 부르는 이 없었다.

몇 번인가 이 계단을 오르길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저 멈춰서서 이대로 남은 생을 다하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끝없이 돌아보며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마다 끓어오르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른 탓이렷다. 채 뱉지 못한 고함이, 울분이, 비명이 턱 걸린 채 목을 옥죄기 때문이렷다. 에메트셀크는 습관적으로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감았다. 제 발아래만 보이는 깊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감은들 큰 차이는 없었다.

그렇게 계단의 ‘끝’에 도달했을 때, 그는 문을 보았다. 선연히 존재를 자랑하는 거대한 문. 돌로 만들어진, 제 키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이다. 자신의 보폭으로 단 세 걸음이면 그 문 앞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메트셀크는 기나긴 인내 끝에 맞이한 이 순간을 현실로 인지하여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환상인가, 꿈인가. 아니…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긴다.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 모를 빛이 문을 비추고 있었다. 아니, 문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인가? 빛. 그래, 빛. 이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얼마 만에 닿는 것인가. 아무리 그가 어둠을 지닌 존재라 한들 깊은 시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고행을 반복하다 보면 이 한 줌의 빛조차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빛이여! 문이여! 영원한 고독 속에 고통을 반복하여 도달한 명계의 문이여! 에메트셀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뗀다. 하나에 그리운 이름을, 둘에 잊지 못한 이름을, 셋에 사랑하는 이름을 읊는다. 한 번 숨을 삼키면 거대한 문이 제게 쏟아질 것처럼 웅장하게 자신을 마주했다. 손잡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기괴하리만큼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벽의 가운데에 선이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에메트셀크는 확신했다. 이것은 문이라고.

문에 손을 얹으면 차가운 온도가 장갑 너머로 와 닿았다. 이제 밀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것을 위해 이곳까지 오르고 또 올랐지 않은가? 그러니 밀어라. 힘을 주어 이 문을 밀어라. 밀어라, 문을 밀어라. 그렇게 열어라. 명계에 빛을, 세상에 어둠을 흩뿌려라. 그렇게 뒤섞이도록. 생자와 사자를 구분할 수 없도록. 모두 하나가 되도록.

“이것으로…….”

그러나 에메트셀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우 한 걸음이다. 이제 겨우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지상에 닿을 수 있거늘. 이 세상을 되돌려둘 수 있거늘. 이 차갑고 고독한 명계에 홀로 남아있지 않아도 될 것이거늘. 그리운 이의 손을 붙잡아 제 품 속으로 이끌 수 있거늘. 어찌하여 문을 열지 못하고 어찌하여 기어코 뒤를 돌아본단 말인가. 온갖 말을 질러대는 사자들의 외침이 귓가에 일렁인다. 환청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손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오르지만 채 밀지 못한다. 문은 움직이지 않는다.

에메트셀크는 문에 손을 얹은 채 제 이마를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한 줄기, 황금빛을 머금은 빛이 제 눈가에 내려앉는다. 익숙한 빛이다. 너무도 그립고 또 그리운 빛이다. …… 아아, 따스하다. 그렇기에 온몸이 시리도록 차갑다. 체온을 지닌 이는 들어올 수 없으며, 체온을 지니지 못한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이곳에서 ‘빛의 온도’를 잠시나마 느껴버린 그는 숨을 토한다. 오로지 명계의 이름을 지닌 단 한 사람만이 생명을 손에 쥔 곳에서 또 다시금 현실을 깨닫는다.

“하하…….”

당연한 이야기다. 당연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리를 따르는 이야기다.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에메트셀크 스스로 모를 리 없었다.

그래. 이유는 하나. 구슬픈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안 되는 것도,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도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 너머에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위한 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디뎌 지상에 닿기만 하면 제 품으로 돌아올 연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기어코 자신이 돌아갈 곳은 이 문 아래의 명계이기 때문이다.

보라, 에메트셀크. 자신의 꼴을 보아라. 누구 하나 불러주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이름을 잊었는가? 그리하여 그대는 모든 것을 잊고 사랑에 눈이 멀어 지상을 취할 것인가? 그를 명계로 이끌어 돌아올 것인가? 그리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자신의 이름을 잊지 말라, 하데스여. 명계의 사랑을 받는 이여. 그대가 뒤돌아야 하는 이유를, 문 앞에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라. 그대가 쥐지 못할 봄을 기억하고, 그대가 외면해야 할 태양을 되새겨라. 이 모든 것이 상흔이 되어 남았을 때 그 이름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리라.

“이거야말로 지독한 저주로군…….”

명계의 주인은 문을 열지 않는다. 문을 열지 못한다.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기에 오늘도 명계에 태양은 뜨지 않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는 그저 기다린다. 한 줄기 빛을 등진 채 기다린다.

저승의 강을 건너고 또 건너

이 문을 열어줄 ‘영웅’을.


2022. 09. 28.

사실 원래 쓰고 싶었던 건........

그냥 하데스는 오르페우스가 아니기 때문에 문을 열고 지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돌아갈 곳이 지상이 아니라 명계이기 때문에...... ㄱ결국 뒤돌아보고... 뒤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는데.... 쓰다보니 약간 산으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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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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