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비밀 결사의 가입 절차

새벽의 혈맹, 이젤 당굴랭

-주의: 3.0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 인물 성별에 관계 없이 대명사 '그'로 지칭함

1. 제안하기

이젤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빛의 전사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답해주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새벽의 혈맹에 합류하는 게 어떻겠냐, 이젤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이젤은 빛의 전사가 자길 놀리나 싶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얕은 친분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제안이 워낙 뜬금없었던 탓이다.

빛의 전사 일행은 흐레스벨그의 협조를 얻기 위해 구름바다에 올랐다. 그러나 흐레스벨그는 중재를 거부했다. 이젤이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는 동안 빛의 전사는 푸른 용기사와 함께 니드호그를 살해하고 돌아왔다.

이젤은 그들이 기어이 용의 피를 묻혀 왔다는 것이 심란했다. 한편으로는 과격한 방법을 택한 이유를 이해했다. 모든 진실을 알기 전에는 인간의 잘못을 적시하고 사과를 건넨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니드호그가 원하는 것은 이슈가르드 땅에 사는 이들의 멸절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이젤은 물론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길을 권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 이유가 무엇이었나?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니드호그를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푸른 용기사의 선택을 지지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젤이 둘 중 어느 쪽도 비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여행을 끝냈다. 성도를 공격한 동지들을 마주했을 때는 차라리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 상황에서 빛의 전사는 제안했다. 새벽의 혈맹이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지금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니구나.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그대에게 도움 되지 않을 거다.”

이젤은 제안을 거절하고 근거지로 돌아갔다.

 

2. 애원하기

빛의 전사는 성도에 숨어 있던 연락책을 통해 틈틈이 이젤을 떠봤다. 정말 새벽의 혈맹에 들어오지 않을 거냐? 동지들의 처우를 걱정해서 그런 거면 뭐라도 공을 세우면 된다. 토르당 7세를 직접 잡고 싶지 않으냐? 혈맹은 내규가 빡빡하지 않으니 신경 쓰이는 일이 모두 끝난 뒤에 합류해도 괜찮다….

편지로, 혹은 전령의 입으로 도착한 영입 제안은 무척 끈질겼다. 아마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빛의 전사는 이젤의 로브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을지도 몰랐다. 이젤은 결국 이렇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은 해 보마, 빛의 전사여!”

 

3. 심사숙고

빛의 전사 일행이 마대륙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이젤은 처음으로 전쟁이 끝난 뒤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에는 이 정도로 구체적인 미래를 그린 적이 없었다. 성도의 문은 영영 열리지 않을 듯 굳건했고 성벽 안의 사람들은 진실 앞에서 귀를 닫았다. 혹은 삶이 고단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앞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동지들의 의식주를 챙기는 것부터 대립에 지쳐 가는 사람들의 결속을 다지는 것까지.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길 바라는 두 축 중 한 축이 무너졌다. 남은 하나도 곧 사라질 것이다.

공상 끝에 이젤은 깨달았다.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자신의 의무가 끝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마저 모두 해결하고 난 뒤에는, 어쩌면….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나 끌림만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젤은 빛의 전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에게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진실 앞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으냐?’

이젤은 성도의 동향에 촉각을 세운 채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빛의 전사가 오직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연락책은 빛의 전사를 근거지까지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영웅이 무척 집요하게 자신을 추궁했고, 이젤이 자주 그의 소식을 물었기 때문에. 그래도 문책을 피하지는 못했다.

빛의 전사는 마대륙의 결계를 뚫을 에테르 충각을 제작하는 문제로 저지 드라바니아까지 다녀왔다. 그래서 편지를 확인하는 게 늦었다고.

“이젤이 그런 사람이어서 함께하자고 말했던 거야.”

빛의 전사는 말했다. 새벽의 혈맹은 ‘야만신’ 문제 앞에서는 타협 없는 결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신을 죽인다고 신을 불러낸 원인이 사라지던가?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매듭을 보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혈맹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빛의 전사는 장난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자신의 추천으로 들어오면 발언권에서 밀릴 일은 없을 거라고.

제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빛의 전사는 이젤에게 함께 마대륙으로 가자고 했다. 부패한 위정자 처단에 이단자들의 우두머리가 빠지면 섭섭하지 않으냔 이유에서다. 이슈가르드 무력의 정점인 푸른 용기사와, 성도와는 아무 인연 없는 외지인도 한자리 차지할 텐데 말이다. ‘참, 혈맹 동료가 한 명 돌아왔거든. 미리 만나 보고 분위기를 가늠해보는 것도 좋겠지?’ 빛의 전사는 자신과 알피노, 둘만으로는 아무래도 파악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4. 결과

이젤 당굴랭은 새벽의 혈맹 합류를 결정했다. 당장은 아니었다. 이젤과 그의 세력은 새로운 이슈가르드를 이루는 한 축이 될 터였다. 삶에 지쳐 국가를 등진 사람들이 다시 그 일원이 되려면 안팎으로 마찰이 잦으리라. 치러야 할 죗값도 남아 있었다. 지난날의 투쟁은 종교가 은폐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참작의 여지가 있었지만, 당사자가 그러기를 원했다. 아이메리크가 꾸린 변호인단이 일을 잘해준 덕분에 재판은 시시하게 끝났다.

시간이 흘렀다. 이젤은 성도에서의 책임을 다했다. 용의 공격에 부서진 구름안개 거리는 복구되었고 많은 빈민이 일자리를 구했다. 용과 인간이 어우러진 거리 풍경은 몇 번을 보더라도 새삼스러웠다. 좀 더 이곳에서 변화를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떠나더라도 성도는 괜찮을 것이다. 빛의 전사가 갈아엎은 땅에 이젤은 더 나은 미래를 파종했다. 씨앗은 때를 기다릴지언정 언젠가는 움트는 법이니까.

빛의 전사가 성도까지 손수 마중 나왔다. 새로운 동료를 위해 조촐한 환영회를 준비했다고 한다. 돌의 집으로 가는 길, 영웅은 혈맹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얘기해주었다. 좀 괴짜 같은 사람도 있고 얼핏 행동거지가 경박한 사람도 있지만, 다들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혈맹에는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여럿 있으니 대화하기 편할 거라고. 맹주 역시 그중 하나이며, 이름은 민필리아라고 하는데…. 빛의 전사는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이젤은 인사말을 고민하며 돌의 집에 발을 들였다.

 

5. 그리고 빛의 전사는 눈을 떴다.

영웅은 돌의 집 로비에 놓인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잠깐 졸았나? 방금까지 머리에 괴고 있던 팔을 살펴보니 소맷자락에 젖은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어쩐지 눈이 찝찝하더라니. 빛의 전사는 마른세수로 얼굴을 닦았다. 타타루가 덮어주었을 게 분명한 담요를 차곡차곡 접어 빈 의자에 올려놨다.

실제로는 이젤에게 아무런 제안도 하지 못했다. 그가 새벽의 혈맹에 합류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용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젤이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지나치게 순진한 믿음이었다. 나나모 여왕 독살 미수 사건도 여러 수 싸움과 운이 얽힌 결과였지 않은가?

머릿속 공상에 불과한 것이 묘하게 생생했다. 빛의 전사는 꿈속에서 이젤이라도 되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초월하는 힘으로도 세상에 없는 사람의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체험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빛의 전사는 믿기로 했다. 혈맹 가입을 권유했더라면 이젤은 받아주었으리라고. 어쩌면 이젤이 새벽의 혈맹으로 불릴 미래가 분명 존재했을 거라고.

빛의 전사는 일어섰다. 감상에 젖기에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지맥에 흘러 들어간 민필리아도 찾아야 하고, 이다와 파파리모의 행방도 수소문해봐야 했다. 위층에서 세숫물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빛의 전사는 돌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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