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아젬(하데아노)] 사건의 지평선
봐, 하데스. 우리가 사랑했던 아이테리스. 이제는 사라진 별의 잔해야.
✧ 효월까지 스포일러
✧ 본 글의 아젬은 외형/성별 등이 특정되지 않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남자는 눈을 떴다.
의식이 깨어남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정신이 뒤엉켜 짧게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이곳은 어디고……?
이마를 짚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자 기억의 편린이 슬슬 떠올랐다. 절망한 별들의 잔해 위, 시야를 가득 채운 엘피스 꽃과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들. 그래, 모든 일이 마무리됐지. 잊고 있었던 기억도 떠올려냈고, 더 이상 남은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은 이번에야말로 별바다로 돌아가 혼이 정화되고 에테르로 흩어지길 기다렸어야 했을 터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리 봐도 별바다가 아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광막하고 캄캄한 공간. 아스라한 빛이 어렵사리 시야를 밝히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없다. 느껴지는 것은 천장과 바닥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기묘한 부유감과, 한쪽 귓전에 머무는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뿐. 이 공간에,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다.
남자, 하데스는 혀를 차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어쨌든 설 수는 있는 것을 보니 바닥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대체 뭐지? 잠시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가설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종말에 맞서는 에오르제아의 영웅을 지켜보던 장소는 사실 별바다가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가 진짜 별바다일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이건 너무나도 살풍경하지 않은가. 내가 지켜보던 명계는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이대로 가만히 사고 실험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리의 근원이라도 찾아보려 발걸음을 떼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하데스. 이쪽이야.”
일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설 만큼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다른 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오랜 시간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목소리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에. 잠시 굳어있던 하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공간, 옅은 빛을 등진 실루엣. 흐릿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주 짧은 찰나, 그 영웅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었다. 거기에 서 있는 건…… 틀림없는 아젬이었다.
말문이 막힌 하데스를 보고 상대는 큭큭, 웃기 시작했다. 곧이어 적막을 깨는 맑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익숙하고도 그리운 소리를 듣지 못했던가. 황망히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하데스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만 웃어라. 뭐가 그렇게 우습지?”
……생각보다 더 불퉁한 어조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조금 더 웃더니 눈물까지 닦아내며 하,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 미안. 너무 재밌어서……. 하데스, 너 방금 나를 그 애로 착각했지?”
“…….”
하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이상한 지점에서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그러나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몰라도 이제 와서 부인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군. 너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다니.”
아젬은 빙긋 웃고선 사뿐히 걸어와 그의 곁에 섰다.
“볼 수 있는 네가 착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 애랑 나의 혼은 같으니까.”
“달라.”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아젬은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하데스는 아무런 말도 않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무려 만이천 년 만에 듣는 웃음소리다. 듣기 나쁠 리가 없었다. 그 사이 웃음을 그친 아젬이 말했다.
“당연히 똑같지는 않을 거야. 같은 혼을 가지고 있더라도 만나온 사람들, 가슴에 품은 신념, 그려온 삶의 궤적이 다르니까. 너와 휘틀로다이우스, 베네스 님……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듯이.”
그리 말하면서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하데스는 가장 처음에 물었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꺼냈다.
“너…… 정말로 아젬인가?”
“글쎄. 어떤 것 같아?”
장난기 어린 어조로 되물으며 뒷걸음질로 두세 발짝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온다. 맞춰 보라는 듯 빙긋 웃는 얼굴로 쳐다보는 시선. 그 걸음걸이도 말투도 표정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녀석이 둘이나 있을 리는 없으니.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린 그는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을 물었다.
“이 공간은 뭐지? 현실인가? 아니면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아젬은 대답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만 피워 올렸다. 뒷짐을 지고선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가벼운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일단 좀 걸을까? 아, 발밑 조심해. 아직 떨어지면 안 되니까.”
“뭐?”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우웅, 하는 커다란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하데스는 고개를 돌려 제 왼편을 바라보았다. 웅, 웅, 맥동하는 빛살이 바로 곁의 깊은 구덩이 너머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이런 것이 있었지?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뻗어 그 구덩이 안을 바라보려 했지만 강하게 제 팔을 붙잡아오는 힘에 저지당했다.
“아직 안 된다니까. 날 여기 두고 벌써 갈 셈이야?”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눈가에는 미약한 긴장감이 감돈다. 하데스는 아젬이 진심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챘다. 그럼에도 제게 곧바로 답을 말해줄 생각은 없다는 것도. 그는 오랜만에 제가 아는 아젬이 어떤 이인지를 실감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강물 같다가도, 때로는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듯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하데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아젬의 뒤를 따라 직선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표로 삼을 것이 없는 광활한 공간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걸어온 것인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앞서가는 아젬은 저보고는 발밑을 조심하라고 말해놓고선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걸음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저 구덩이와 지면의 경계선을 밟으며 걷고 있었다. 하데스는 그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을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뒤쫓았다. 물론 아젬이 고작 발을 헛디뎌 저 빛살 너머로 떨어지고 말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은 다르다. 만에 하나라도 주시해둬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고 있는 자신을 자각한 하데스는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만이천 년 전과 다를 게 없군.
하데스는 어렵사리 아젬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물론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저 물결치는 빛의 구덩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집중하며 걷다 보니, 저와 아젬이 직선으로 걷고 있는 게 아니라 구덩이를 중심으로 지름이 아주 큰 거대한 원을 그리며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서 걷던 아젬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에 따라 하데스도 그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허공으로부터 구덩이로 빨려드는 빛을 바라보며, 아젬은 감탄하듯 말했다.
“신기하지?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세상에는 아직도 정말 놀라운 것들이 많구나.”
“……너도 처음 본다고?”
“어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보는 건 처음이지만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곧 모두 설명해 줄 것처럼 굴어놓고선 처음 본다기에 도끼눈을 떴더니 아젬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아래로 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까지.
하데스 또한 그 시선을 따라 구덩이 안쪽을 바라보았다. 구덩이에 가까워질수록 한없이 느려지는 듯한 빛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귓가를 스치는 규칙적인 울림에 맞춰 흔들렸다. 그리고 그 너머는, 끝없는 암흑. 그야말로 빛조차 빨아들이는 구멍이었다. 자신이나 다른 것들이 빨려드는 건 삽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아젬이 평온하게 이 지평선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 구멍 너머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어쩌면 오싹하게 느껴져야 마땅한 풍경일지도 몰랐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광경이니까. 하지만 오히려 하데스는 그와 상반되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듯, 비로소 돌아가야 할 곳을 찾아낸 듯…… 아늑한 느낌. 기묘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저건 블랙홀이야.”
아젬이 불쑥 입을 열었다.
“……블랙홀?”
“그래. 먼 미래의 인류가 붙이게 될 이름이지. 최후를 맞이한 거대한 별의 흔적.”
봐, 하데스. 우리가 사랑했던 아이테리스. 이제는 사라진 별의 잔해야.
그리고 그제서야 하데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야가 핑 돌았다. 지나온 만이천 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시간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갔다. 그는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마치 어제처럼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언제고 다시 돌아가길 꿈꿨다.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바랐던 만이천 년의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그리울 수 밖에.
“……우리가 사랑한 아이테리스는 이제 없어. 앞으로는 하이델린…… 아니, 이제는 그 이름도 아니려나? 어쨌든,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생명들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게 될 별이 남았지.”
아이테리스라는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라진 것은 그 이름.
그리고 그 별의 이름은 여기에 잔해별로 남아 있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담고서.
“저게 무슨 원리로 생기는 건지도 들었는데. 뭐라더라, 핵융합? 뭐 그런 걸 해서 어쩌구저쩌구…… 아무튼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별이 사멸할 때, 이렇게 빛조차 빨아들이게 된다고 하더라고. 더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인가봐. 첫 이론의 근간부터 이해가 안 가서 결국 포기했어.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네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도 다 있군.”
“어쩔 수 없잖아. 널 만나러 와야 했으니까.”
너를, 만나러.
하데스는 그 말의 울림을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이어, 당연하게도 의문이 딸려왔다. 묻는 것이 좋을까? 오랜 세월을 건너 겨우 만난 이에게 너무 많은 질문만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고작 이런 것들이 아닐진대. 그러나,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어야만 아젬은 답을 줄 테니까. 이건 그렇게 짜여진 아젬의 퍼즐이고, 하데스는 그 퍼즐 조각을 맞춰 완성된 그림을 보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
“아젬. 너는…… 어떻게,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거지.”
부연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상대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이천여 년 전 그날, 베네스-하이델린-에 의해 인류의 혼은 열네 조각으로 쪼개졌다. 저와 라하브레아, 그리고 엘리디부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러했으니 아젬 또한 그랬을 터다. 실제로 조각난 아젬의 혼이 여럿 중첩된 것도 목격하지 않았는가. 다른 세계들에서 또다른 아젬의 혼의 조각을 가진 채 살아가는 생명들도…….
하지만 제 눈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온전한 아젬이었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아젬은 엷게 웃음지었다. 두 손을 모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초조하고, 서글프고, 안타까울 때 하는 행동.
“유감스럽게도 나는 네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없어, 하데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겠으니까.”
조심스럽게 열린 입술에서는 놀랍게도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젬은 고개를 돌려 다시금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알고 있어. 내 혼은 쪼개졌지. 세계가 나뉘어진 지금, 내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이곳에 존재해. 분명한 나 자신으로. 그리고, 너를 만나기 위해 여기로 왔어…….”
후, 하고 아젬은 얕은 한숨을 뱉었다. 지그시 감았던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며 다시 그를 바라본다. 입가에는 다시 이전과 같이 미소가 머문다.
“사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존재하는지 설명하려면 이 공간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하잖아? 하지만 난 그것도 몰라. 그냥 별바다로 가기 전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어. 너와 마찬가지로. 내가 아는 건 이제부터 네가 나아가야 할 길, 그것 뿐이야. 네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 나는 여기에 왔어. 그렇지만…… 하데스. 솔직하게 말하자면.”
느리게 뻗어온 손이 제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보고 싶었어. 아주 많이.”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함께였던 시절에 곧잘 그러했듯이.
하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보다 조금 작은 손이지만, 꽉 쥐는 악력만은 절대 못하지 않다. 무기를 쥐고, 펜을 들고, 울창히 우거진 숲의 나뭇가지를 헤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살을 가르고, 까슬거리는 모래더미를 파내고……. 그렇게 세상 모든 곳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어온 이의 손이다. 오래도록 경애해 마지않았던 그 손을 마주잡고, 하데스는 늘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줄 것이라 여겨 입 밖으로 자주 꺼내지 않던 말을 꺼내놓았다.
“……나도 그래.”
아젬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꿈처럼 찰나 같기도, 영원 같기도 했던 시간은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아젬은 하데스의 손을 잡은 채 그를 빛의 구덩이 가까이로 이끌었다.
“이 구덩이에 뛰어들면 별바다로 가게 될 거야.”
“……그렇군. 별바다로 가는 통로란 말이지…….”
중얼거리듯 말하며 하데스는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젬이 아프다며 엄살을 부렸지만 모른 척하고선 시선을 돌렸다. 관심을 주지 않자 아젬은 금방 붙잡힌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고선 하데스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언제 가야 하는 거지?”
“언제든. 네가 원하는 때에.”
“내가 가고 나면, 너는?”
“글쎄?”
흔들던 손을 멈추고 아젬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내가 아는 건 네가 저 구덩이 너머의 별바다로 향해야 한다는 것뿐이라고. 이제 너에게 알려줘야 할 건 전부 알려줬어. 언제 갈지는 네가 정하면 돼.”
“내가 가고 나면. 너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데스.”
끊어내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젬은 엷게 웃었다.
“설마 안 가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혹시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그럼 내가 널 밀어서라도 보내고 말 테니까.”
“……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너를 여기 혼자 두고 가라고? 아까는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이 참, 이렇게 또 반론을 하네.”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아젬은 토론을 할 때 으레 갖추던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하데스 또한 저와 토론을 하고자 하는 지성체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바르게 섰다.
아젬이 먼저 서두를 떼었다.
“하데스. 너는 가야 해. 이미 너무 오랫동안 혼이 붙잡혀 있었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가지 않을 거다.”
“어떻게 될지? 글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사라지겠지. 네가 떠남으로서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끝나는 거니까. 혼자 이곳에 남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괜찮다고? 네가 사라지는데도?”
“하데스, 네 출발이 내 소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게 아냐. 따지자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게 맞으니까. 원래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사라질 수도 없어.”
“네 존재를 부정하는 건가? 그럼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너는 뭐지? 망령이라고 할 텐가? 내 지나치게 간절했던 바람이 만들어 낸?”
“……방금 그 말 조금 낯부끄럽지 않았어?”
“아니, 전혀.”
논점을 벗어난 아젬의 공격에도 하데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고작 그런 것으로 무너질 만큼 그의 만이천 년은 가볍지 않았다.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 우리가 끝내 막아내지 못한 종말을 새로운 생명들이 그 작은 손을 모아 멈춰세우는 것을 봤다. 이제는 네 크리스탈을 가지게 된 그 영웅 녀석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전했고, 마지막으로 소중한 친우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었어. 이제 정말로 내게 남은 염원은 없다고 생각했다. 만이천 년이 넘는 내 긴 이야기도 여기서 막을 내릴 거라고……. 하지만, 아젬.”
하데스는 아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 또한 피하지 않고 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너와 다시 마주했을 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내가 오래도록 바라던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고.”
너무나도 오래 바랐고, 그렇기에 깊숙이 묻어둔 채 꺼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해서…… 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소망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일몰을 목도했다. 두 번 다시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데스.”
아젬이 천천히 뻗은 손이 조심스럽게 뺨에 닿아왔다. 이윽고 두 손바닥이 눈을 가렸다. 캄캄해진 시야 너머로 희미한 귀울림이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나는 사라지지 않아. 너도 알잖아.”
“…….”
“나는 여길 떠나서도 계속 존재할 거야. 앞으로도 계속 모험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거고. 그게 너와 내가 아는 이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다시금 조각으로 흩어져 지금의 나, 아젬이라는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혼은 같지만 다른 개체이더라도, 때로 별바다로 돌아가 기억이 씻기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더라도…….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모험을 할 거야, 하데스. 너 또한 그렇게 될 거고.”
네가 인정하기만 하면 돼. 그 모든 것들이 나와 같지는 않을지라도, 그게 곧 내가 사라진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실은 이미 답이 내려진 문제였다.
아젬은 손을 내렸다. 다시 제 시야를 채우는 아젬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의 패배였다.
“좋아. 그럼 이제 원론적인 얘기 말고, 물질적인 얘기도 좀 해 볼까?”
“물질적?”
“정확히는 에테르학적……이라고 해야 하나?”
눈썹을 모으며 뒷머리를 헤집은 아젬은 씩 웃었다.
“언젠가 혼의 조각이 별바다로 내려와 기억이 씻기게 될 때, 나에게는 네가 깊이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어떨 것 같아? 너한테도 내가 그렇겠지?”
“……당연한 소릴.”
“그거면 충분해. 그럼 우리는 분명 서로를 알아보고 끌어당기게 될 테니까.”
아젬이 끌어당기고, 그는 저항 없이 끌려간다. 오랜 약속처럼 운명을 모아 불사르는 태양의 곁으로. 그러면 됐다고,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데스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고 빙긋 웃는 아젬의 뒤로 캄캄한 공간이 조각나 무너지기 시작한다.
“흠, 아무래도 네 뒤나미스가 약해져서 그런 것 같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는 증거네?”
“나 참. 어떻게 돼먹은 공간인지…….”
“자, 자.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가자! 그렇게 말하며 아젬은 하데스를 끌어당겨 깊은 구덩이의 경계선에 세웠다. 얕은 바람이 불어든다. 이대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자신은 드디어 별바다로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 번의 눈맞춤이 마지막이겠지.
공간이 무너져 빛이 얼기설기 새어들었다. 하데스는 몸을 돌려 제 뒤에 선 아젬을 바라보았다. 도망치지 않는 곧은 시선이 마주 돌아왔다.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
남자는 태양을 본다. 여명처럼 밝아오는 머리칼, 정오처럼 빛나는 눈동자, 황혼처럼 지는 미소. 일출로 그를 비추고 일몰로 그를 잠식했던 태양.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을 무작정 걸으며 다음 날 아침이 영영 오지 않을 거라 절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름이 몰려와 흐릿하게 보이더라도, 요마의 안개가 껴 제 빛을 잃더라도, 그럼에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이 태양이라는 것을 안다.
남자는 자신의 태양이었던 이를 본다.
경애하는 태양이여.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 발짝 뒤로 걸음을 떼어, 그대로 빛무리와 함께 구덩이-블랙홀-속으로 떨어진다. 끝없이 계속되는 그 소멸-출발-의 현장을 바라보며 아젬은 힘껏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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