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파판14/빛전수정]희망의 주체

영웅에게 사라진 시대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수정공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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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메인스토리 5.0스포 (*5.0당시에 쓴 글이라 설정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리버스로 소비하셔도 무관합니다. 빛전의 성별이나 종족이 특정되지 않습니다


[빛전수정] 희망의 주체

by. 솔방울새

(*5.0 직후의 이야기)

"계속 묻고 싶었던 건데."

술잔을 내려놓은 영웅이 입을 떼자 수정공은 곧장 귀를 쫑긋 세워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불그스름한 색을 띠기 시작한 영웅의 얼굴은 이미 취기를 선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라하 티아였을 적을 포함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노르브란트 전역이 빛을 되찾은 지 벌써 나흘째다. 자원도 사람도 부족한 1세계인지라 원초 세계와 비교하면 소박했지만, 크리스타리움에서도 작은 축제가 열렸으니 그만큼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간 영웅이 느꼈을 중압감을 생각한다면 잘된 일이라고 수정공은 생각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 무엇이든 편히 물어봐도 좋아. 그간 차마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지만, 이젠 그대에게 더 숨길 것이 없으니."

"그럼……."

망설임인지, 말을 고르는 것인지 내려놓은 잔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영웅은 한동안 뜸을 들였다. 뭐든 답하겠단 말을 너무 안일하게 꺼냈나 싶어질 만큼. 손끝에 박인 그의 굳은살이 컵 모서리에 쓸려 닳는 것은 아닐까 싶어질 즈음에야 어둠의 전사는 입을 열었고, 수정공은 경청했다.

"갑작스럽겠지만 계속 궁금했거든. 그때, 정말 그렇게 이름도 정체도 밝히지 않고 수정공으로 죽으면 내가 정말 잠시 슬퍼하다 곧 다시 일어나 나아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반응할 새도 없이 영웅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알고 싶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그라하 티아가 기억하는 모험가가, 200년 뒤의 기록에 남은 영웅이, 그리고 수정공이 1세계에서 다시 만난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던 건지."

"그럴 사람이라 함은?"

"내가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대는 늘 정이 많고 다정했으며, 스쳐 지나가는 타인에게조차 기꺼이 손을 내밀 만큼 따스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잃어버린 동료들에 대해 안고 있을 깊은 슬픔과 부채감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도 자명했다. 1세계에서 재회한 그의 본질적인 심성이 타워를 모험할 때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면서부터는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

그러나 차마 그렇게 답하지 못하고 수정공은 고개를 숙였다. 비슷한 말은 이미 수차례 그에게 고한 뒤였고, 그 외의 대답은 어느 쪽이든 또다시 잔인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평소 같으면 긴 시간 속에 쌓아 온 처세술로 넘기거나 완곡하게 말을 다듬었겠지만, 부끄럽게도 수정공도 오랜만에 입에 댄 술기운에 휩쓸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대가 바라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아가리라고 믿었어. 개인에게 걸어서는 안 될 너무도 큰 책임과 부담을 그대에게 지우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날 그대의 강한 의지를 믿었던 것이 사실이지."

"그래서 언젠간 빛을 모두 가지고 떠난 수정공도 그저 추억이나, 시답잖은 농담거리가 될 거라 믿었다고? 설령 내가 끝까지 정체를 몰랐다고 해도 수정공에 대해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갔을 것 같아?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잖아."

"맞아. 정체를 들키든, 들키지 않든 희생으로 열린 길 앞에서 그대가 멈추진 않으리라고 여겼어. 그런 판단이 그대를 상처입혔다면 온전히 나의 잘못이야."

수정공은 영웅이 그토록 시니컬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두고두고 속에 서운함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급박한 상황 때문에, 모든 일이 끝난 뒤 눈앞에 놓인 기쁨 때문에 내내 참고 있었을 뿐. 이렇게 술기운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긴 시간을 안고만 있었을 테니 지금이라도 엉킨 속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다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힘겨운 길을 걸어 온 이에게 허심탄회한 대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수정공이라 불리는 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의 숨통이 죄이는 듯한 기분쯤이야 충분히 견뎌 넘길 수 있었다.

"내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리라고도 생각했지. 처음 대면하자마자 그 이름을 꺼내주었는데, 부정하는 한마디 말만으로 의혹을 모두 떨쳐낼 수 있을 리 없으니."

"…그랬어. 하지만 정말 눈 깜짝 안 하고 부정하길래 정말 아닌 걸까 싶기도 했고. 몇 번은 정말 무력으로라도 후드를 벗겨보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그래서 내 머리에 새총을 쏘았나?"

수정공이 부러 희미하게 소리 내 웃자 영웅이 허탈한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효과가 있었는지 굳어있던 주변의 공기가 아주 조금은 풀어지는 듯했다. 

"실은 많이 놀랐어. 그대가 기억해 줄 거라 생각지 않았으니까."

"설마 내가 차라리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길 원했어?"

"아니.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한 걸 소원하지는 않는 법이야. 잠들기 전 나와 함께한 모험은 길지 않았고, 그 후로 그대는 훨씬 많은 일을 겪었지. 완전히 잊히진 않더라도 그대의 기억에서 흐려졌을 게 분명하다 여겼어."

"그건 더 너무한데."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포개어져 있던 수정공의 손등 위로 영웅의 손길이 내려앉았다. 수정공은 동경하던 이의 손에 감싸였다. 그가 걸어 온 길만큼이나 거칠고, 위태롭고, 단단한 손바닥이었다. 닿아 온 온기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라하 티아의 앞에서 영웅은 말을 이어갔다.

"갑작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받아들였을 뿐이야. 어떠한 희생도, 탑에 너를 홀로 남겨두어야 했던 것도 절대 잊은 적 없어. 무엇 하나도 가볍지 않았다는 말이야. 나 하나를 구하고 희생하겠단 계획을 긴 시간 얼마나 깊게 새겨 온 거야? 우리가 같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백 년 만에 만난 내게 정말 얼굴 모를 악인으로 기억되며 죽고 싶었어?"

영웅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손 아래 신들이 멸해졌고, 수많은 생과 사가 나뉘었으며, 천년의 전쟁과 시대의 흐름이 끊어지고 이어졌음을 수정공은 알고 있었다. 무너져가는 세계에 희망을 쥐여 주고, 멸망한 시대의 집념에게 끝을 고한 두 손이었다. 무겁다고 느꼈다. 수정공이 그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손수 쌓아 올린 지난 세월 역시 가볍지 않았던 덕이었다. 결정화된 오른손을 뒤집어 맞대자 도리어 영웅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틀어져서는 안 될 계획이었으니까. 나의 경험들은 그대가 겪었던 고난과 아픔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닐 테지. 하지만 내게도 길을 열기 위해 몸을 던졌던 동료들이 있었어. 이곳 1세계에서도, 재해로 멸망해가던 원초 세계에서도."


지맥이 흐름을 멈추고 에테르의 공급이 끊겼다. 황폐해진 땅에서는 당연히 에테라이트를 이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비공정을 이용하기에는 최근 들어 급증한 비행형 돌연변이 마물들이 커르다스 상공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라하 티아와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협력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보를 이용한 건 그 때문이었다. 기적에 가까운 요행으로 조사대는 드라바니아까지 무사히 다다라 시간의 날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데이터를 입수할 수 있었지만, 은신처인 묵약의 탑까지 돌아가는 길에 조사대는 변을 당하고야 말았다. 전열을 갖출 새도 없이 강도단에게 급습당한 것이다. 

'내 잘못이야. 내가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웅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따라 나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본거지 밖으로 나가 변해버린 세계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 나름대로 괜찮은 전력이 될 자신감도 있었다. 더군다나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선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한데, 이 시대의 인류 중 마법을 운용할 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고귀한 정령들이 침묵하고 에테르가 오염된 지 200년이 흐른 세계에서 그라하 티아는 조금이나마 마법을 사용하고, 에테르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극히 귀한 인력이었다. 그들이 목적한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라하 티아가 필수성을 인정받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꾸려진 조사팀에 포함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그 결과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더 신중했을 텐데.'

숨통을 죄는 듯한 후회마저 사치였다. 후두부를 얻어맞고 기절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려 볼 때 함께 온 동료들은 대부분 죽임당한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라하 티아는 귀하디 귀한 마법사라는 이유로 전리품으로 분류된 것뿐이었다. 단단히 묶여 피가 통하지 않는 손발을 비틀었지만 무력했다. 밖에서는 전리품을 나누며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강도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손쓸 수 없는 재앙이 써낸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인류는 그들이 쌓아 온 문명과 인간성을 잃어왔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대화는 그들이 잡아 온 마법사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이야기로만 전해 들어 온 치유술의 효과를 어떻게 비인간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할지가 대부분이었다. 탈출에 필요한 정보를 얻어보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그라하는 그들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끊고 지혈할 방법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주의를 거두어버렸다. 대강 들어도 머릿수가 적지 않았고, 끌려오기 전의 싸움을 되짚어 보면 제법 전투에 잔뼈가 굵은 자들이 분명했다. 혼자서 무모한 탈출을 감행했다가는 가까스로 건진 목숨마저 잃을지도 몰랐다.

'…어쩌지?'

그라하 티아는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느꼈다. 아주 조금의 에테르만 흘려보내면 은신처의 사람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주는 도구였다.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직원들이 이번 조사를 위해 개발해냈다며 조사대가 출발할 때 나누어 준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라하 티아는 섣불리 그것에 마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조사대의 리더는 조사가 끝난 뒤부터 휴대용 데이터 전송기를 이용해 그들의 성과를 기지에 전달하고, 줄곧 현 위치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르도나 쪽 사람들은 갑자기 연락이 끊긴 시점에서 이변을 깨달았을 터였다. 필요한 데이터는 이미 대부분 전송했으니 이대로 어떤 구조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면 전멸로 결론 나고 끝맺어진다. 오염된 땅에서 자라 이제는 치명적인 독성을 띠게 된 니메이아 백합 대신, 호수 주변의 흰 돌을 쌓아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계속해서 나아가겠지. 그리하면 이만큼의 피해로 끝낼 수 있다.

'나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텐데.'

재앙 앞에서 대부분 개개인의 목숨은 그 무게를 저울질당한다. 크리스탈 타워를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세계에서 그라하 티아가 유일했다. 시간의 날개와 이계로의 이동. 그리고 차원의 틈 잠행까지. 어느 것 하나도 크리스탈 타워를 주축으로 준비하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타워 제어권은 지옥 같은 200년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의 염원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속이 터져나갈 듯한 자책과 고민 끝에 그라하 티아는 결국 구조 신호를 보냈다.

당사자가 파멸을 원치 않는 한, 희망의 주체에게는 자신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 훗날 그라하 티아는 이때 깨달은 사실을 멸망해가는 또 다른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체감해야만 했다.

결국 남은 전투 인원들을 모두 끌어모은 구조팀이 파견되었다. 은빛 눈물 호수에서부터 그라하 티아가 신호를 보낸 구 이슈가르드의 폐허까지 달려온 그들은 또다시 한 차례 피해를 감수했다. 벌어진 전투는 짧지만 격렬했고, 그라하 티아 역시 구속에서 풀려나자마자 주운 활과 되찾은 환술봉을 번갈아들며 최선을 다해 싸움에 뛰어들었다. 구조 작전은 성공이었다. 도굴꾼들에게 장갑을 모두 뜯겨 폐허와 같은 모습을 한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그라하 티아는 주저앉을 것만 같은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이들이 크리스탈 타워의 관리자의 무사 귀환을 확인하고 탄식과도 같은 안도의 신음을 흘렸다. 그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하자 현 회장인 빅스 3세가 가장 먼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직접 다녀온 덕에 가장 핵심이 되는 회로 술식을 파악할 수 있었어. 아니었다면 조사대의 희생은 희생대로 치르고, 너를 포함한 조사대를 2차로 꾸려 보내야 했을 거야. 자책할 것 없어."

"하지만…."

"모두가 염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널 잃지 않았음에 감사하자고. 고생했는데 이만 푹 쉬어."

빅스 3세는 어깨를 두드리고 직원들의 지휘를 위해 돌아갔다. 심신이 지쳤을 테니 들어가서 그만 쉬라는 다른 이들의 만류가 뒤따랐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그라하 티아는 환술봉을 들고 일어났다. 면목 없게도 자신을 구하느라 부상을 입은 이들을 모두 찾아 치유술을 걸어 준 뒤에야 잠시 마음을 풀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라하 티아는 희생자들의 시신 없는 무덤에 흰 돌을 올렸다. 그중에는 조사대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잡혀간 순간에도 치밀지 않았던 울음이 눈가를 시큰하게 물들였지만 그라하 티아는 끝내 울지는 않았다. 타워에 잠들며 이런 세계를 예상하진 못했으나,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숙명을 받아들인 각오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 무엇도 헛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해내야만 했고, 해내고 싶었다. 싸움에서 눈 감던 동료들도 그러기를 바랐을 테고, 그들이 되찾고자 하는 영웅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그라하 티아는 동경하는 영웅의 기록을 수없이 되짚었다. 이보다 큰 절망과 고통을 느끼고도 끝없이 일어나 나아갔을 찬란한 이를 떠올렸다. 그의 염원대로 자신의 이름을 이정표로 남겨 빛으로 이끌어 준 영웅이 있었다. 

'그러니 그 빛을 따라가 길을 개척하는 건 내게 주어진 몫이야.'

그라하 티아는 최소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는 어떤 퇴로도 만들지 않기로 작심했다.


"나는 결코 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 그들의 의지와 희망을 이어받은 대리자로서 미래를 여는 것이 우선이었을 뿐."

수정공의 목소리는 조금도 어둡지 않았으나 영웅은 그것이 슬프다고 느꼈다. 그 대신 처음에 느꼈던 분함은 녹듯이 풀어졌다. 다른 이는 몰라도 영웅은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하 티아에게는 나아가는 것 외에 길이 없었을 것을 받아들였다. 그 손에 맡겨져 온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희망을 안고 운명에 저항한 1세계와 원초 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게다가 그것은 영웅 자신의 행보와도 다르지 않았다.

영웅의 손을 쥔 채 조심스레 끌어올린 수정공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끝이 하얗게 바랜 붉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려 흘러내렸다. 곧이어 영웅은 얇은 피부가 옅은 온기를 품고 손등에 닿아오는 것을 느꼈다.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오직 무섭도록 순수한 경애만을 담은. 

"내가 그때 아씨엔의 방해 없이 그대의 빛을 모두 가지고 사라졌다면, 분명 깊이 슬퍼했을 테지.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니까."

입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웃었다. 조금 전 숭배하는 자의 모습으로 입 맞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부드러운 미소였고, 마주친 눈에는 채 다 숨기지 못했다는 듯 몽글한 애정이 배여 있었다. 감추려는 것은 있을지 몰라도 진심이 아닌 건 없었다. 영웅은 수정공이 필사적으로 후드를 써 그의 눈을 가려 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영웅, 하지만 그대가 거기서 무너졌을까?"

내밀한 감정을 엿보는 기분으로 영웅은 어느새 정해진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래…. 그대의 이야기는 계속됐을 거야." 

맞아, 그러기야 했겠지. 영웅이 긍정했다.

재해 앞에 억눌린 감정이 피어나길 기다리며, 희망의 주체는 오늘도 포기하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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