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멧아젬(하데아노) / 問
아젬 없는 에멧아젬
- 에멧아젬(하데아노). 그러나 아젬은 나오지 않는.
- 아젬에 대해 질문해버린 빛전과 줄줄 뭔가 불어버린 에메트셀크.
- 배경은 칠흑일 겁니다. 자가 빛전과 자가 아젬의 외형 묘사 언급이 있습니다.
“그럼, ‘■■’은 어떤 사람이었어?”
영웅의 질문에 에메트셀크는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확실히 한동안은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각이었다.
“■■이 궁금해진 건가? 왜. 그 이름은 누구에게 들었지?”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닐걸? 대답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에메트셀크.”
단 한 가지 질문에 거짓 없이 답해주겠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두 글자에 에메트셀크의 나른한 침음이 이어졌다. 원초 세계의 영웅인 '조각'은 어느덧 선연해진 영혼의 빛깔을 지닌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색채로.
그러니 에메트셀크의 시선은 자연히 허공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이한 녀석이었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누구보다도.”
“그 정도는 나도 파악했어. 내가 듣고 싶은 건 조금 더 개인적이고 세세한 내용이라고. 친구였다며?”
그는 적당히 넘어가려 했으나 영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공에서부터 살짝 시선을 내려보면 물끄러미 시선을 떼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보였다. 추억 속 인물과 참으로 닮아있다. 공통점은 영혼의 빛깔뿐이 아니었나? 표정도 영혼과 공명하던가? 이상한 것만 닮아서는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 영웅의 낯을 지켜보는 에메크셀크의 감상이었다.
사실은. 이런 귀찮은 꼬리잡기 질문에는 적당한 핑계를 대며 대답하면 그만이다. 아니, 애초에 이 귀찮은 생명체를 두고 자리를 뜨면 될 일이다. 뭐, 약조한 대로 대답은 해주었지 않은가? 늘 그랬듯이, 아씨엔 에메트셀크로서.
“당신 같은 사람도 친구가 있었다고 하니 꽤 궁금해졌거든. 그러니까 어서, 에메트셀크?”
“흐음.”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보면 자신은 이 영혼의 빛깔에서 도망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운명인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어 눈썹 한쪽이 까딱 움직였다. 영웅은 이를 자신에의 반응으로 여겼는지 덩달아 눈을 가늘게 뜬다. 이건 또 뭐야. ‘약하고 하찮고 작은 것’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봤자지. 가볍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참 귀찮고 참 손이 많이 간다. 그런 점도 여전하다. …… 여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에메트셀크는 고개를 저었고, 영웅의 얼굴에는 은은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 알겠다고. 그러니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이제 그만두지 그래?”
“내 표정이 뭐? 잘 모르겠지만……. 좋아, 들을 준비 됐어.”
결국 이대로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적당히 대답해주고 자리를 뜨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허공에 시선을 두고 기억을 곱씹듯 말을 이었다.
“네가 바라는 건 이야기 속에서나 읊어줄 ‘서술’이겠지.”
그래, 원하는 대로 말해주마. 우리 시대에 ■■이라 불렸던 그는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빛을 받으면 새하얗게 빛났지.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리칼이 흩날릴 때면 꼭 새하얀 금실이 하늘을 수놓는 것처럼 보였다. …… 네 녀석의 그 칙칙하게 빛이 빠진 잿빛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눈동자는, 그래. 바다와 숲을 닮은 빛이었다. 그저 푸르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이었지. 그 녀석의 눈에 비친 세상은 유독 더 아름답게 보였을 정도로 말이다. … 네 녀석이 가진 그 반쪽짜리 영혼의 창과는 달랐단 거다. 알겠나?
그뿐일까. 그 녀석은 꽤 대책 없고 긴장감 없는 녀석이긴 했지만 그만큼 강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건 사고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자였지. 열네 번째 자리, ■■. 그게 그리 쉬운 좌로 보이나? 겨우 ‘에오르제아’를 구했다 읊어지는 영웅과는 급이 달라. 그 녀석은 시대를 관통하는 인재였다. 누구라도 그 녀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고. 그 고지식한 라하브레아 노인네조차 ■■ 녀석은 내버려 두었다. 왜였겠나? 그러니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치며 강함을 뽐낸대도 ■■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또……
“당신. ■■을 정말 좋아했구나?”
느긋한 듯 점차 빠르게 이어지는 에메트셀크의 말을 끊어낸 것은 영웅의 한마디였다. 에메트셀크는 막혀버린 말문을 다시 잇지 못하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 그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랜 시간 곱씹고 또 곱씹어온 순간들의 연속에는 늘 그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 잊을 수 있을 리도 없지. 그러니 애초에 덮어둔 것을 입 밖으로 한 번 꺼내고자 한 것이 문제였던 거다. 에메트셀크는 영웅의 말에 아차, 싶은 기분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말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길었다. 적당히 이 조막만 한 영웅이 바라는 대로 소설 속 문장에 빗대며 맞춰줄 생각이었는데. 평소처럼 극적인 어투로 읊어주고는 멋들어지게 퇴장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왜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빛깔과 아득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그를 홀리고 만 것일까.
“무슨 소리야? 관계없어. 네가 그와 같다고 착각하지 않길 바라서 말한 것뿐이다. 궁금증조차 갖지 말라고. 그에 대해.”
휘날리는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끼면 허공을 간지럽히며 수놓는 금실. 자연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새하얀 손가락. 세상을 전부 담은 보석인 양 빛나던 눈동자. 장난기를 담은 사랑스러운 미소. 제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
그 모든 것을 지닌 이와 눈앞의 존재가 같을 리 없었다. 같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멀리 떠났다 돌아오면 늘 반가움을 이유로 제게 뛰어들던 그 대책 없는 철부지를, 세상 누구도 하지 않을 생각만 해대던 못 말리는 괴짜를, 그러면서도 그 누구보다 세상과 생명을 사랑했던 태양 같은 이를 누구와 빗댈 수 있을까. 이 녀석? 이건 겨우 몇 조각일 뿐이거늘.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존재거늘. 그래.
“너 따위와는 다르지. 너와는…”
한 번 구겨진 인상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순식간에 요동치는 감각을 잠재우며 손을 허공에 과장되게 휘휘 저었다. 애초에 아씨엔에게 있어 ‘그 이름’이란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홀로 곱씹기만 하던 이름을 별것 아닌 척 입 밖에 꺼낸 것이 문제다. 꼭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다.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한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어지러이 색채가 휘날린다. 휘말리고 말 것 같다. 그러니.
“이거면 됐지? 영웅 나으리. 난 이제 가봐야겠군.”
작게 숨을 내쉰 그는 몸을 돌렸다. 눈앞에 놓인 되다 만 존재에 휘둘리는 건 이제 사양이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그저 조각일 뿐이다. 저것은 ■■이 아냐.
보라. 그 찬란한 빛깔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에 낡고 바래서 씻겨 내려간 듯 금빛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존재. 영혼을 비추는 창은 어떤가. 영혼도 반쪽이라 빛도 반만 들었단 말인가? 아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거라면 조금은 기쁠지도 모르겠다만. 그조차도 코웃음만 치게 된다. 이리도 약해 빠지지 않았나. ■■ 녀석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모든 것을 해결했을 것이다. 늘 밝고 상냥하고 다정한, 쓸데없이 따뜻하고 오지랖도 넓은데다 장난기도 넘치는,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래. 그랬다면 나는 어쩌면……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도망치듯 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세운 거짓 안온의 성으로. 심해에 자리 잡은 망령의 궁전으로.
“■■……”
이 거짓된 공간에 감히 태양을 수놓을 수는 없다. 그러니 홀로 다시금 영원의 형벌을 계속한다. 그 이름을 고이 간직하며 곱씹는다.
“■■■■…….”
이는 아마도 줄곧, 영원히, 멈출 수 없는 것이리라.
다시 누군가 묻힌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까지.
‘■■■.’
2022. 09. 16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