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름 (1)

대위가 사라졌다

FF14 OC by 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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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믿을 수 있다고 여겼던 상관이 갑자기 휴직을 해버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호베이 대위는 루인의 상관은 아닌데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서로 이름도 기억 못하는 남남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조직에서는 가장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살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강하게 그의 팔뚝을 물어 뜯었더랬다. 루인은 그때 자신의 입안에 남아 있던 비릿한 피의 맛이 아직도 가끔 느껴지는 듯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에 덴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놀랍게도 대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도 부끄러운 일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이긴 하나, 자신은 너무 공격적이고 성급했다. 흑와단 총사령부는 낯선 곳이었고 이제 막 모험가 치유사(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루인의 눈엔 모든 것이 너무나 거대하고 딱딱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던 시기였다. 환술사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다가 집을 나온 이후로 그는 줄곧 혼자였다. 그래도 루인은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외로움보다 더 두려운 것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하거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악명을 얻는 것이 나아…….’

 

 

업신여김과 무시를 당하느니 미친 계집애라고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게 나았다. 예전에 불멸대에서 잠깐 일했을 때 어떤 장교가 치졸하고 음흉하게 굴어서 홧김에 물어뜯었더니 더 이상 그 곳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피를 철철 흘리던 장교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심사병으로 분류되어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특별히 루인을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도 소외 받는 기분을 느끼던 차에 흑와단 군령부에서 학자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발견하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지원했다.

 

장교들 사이에 모종의 연결고리와 각종 연락망이 있다는 건 나중에나 알았다. 하긴 왜 아니겠는가. 구조적으로 에오르제아의 모든 사람들은 실력과 자격을 증명할 수 있으면 어느 총사령부에든 입대할 수 있는데다 심지어 불멸대, 쌍사당, 흑와단 세 곳 전부에서 계급과 지위를 획득할 수도 있었다. 이권 다툼이나 세력 확장 문제가 엮인 전장에서야 총사령부의 장교들이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싸우지만 공공의 적이 나타날 시에는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끈끈한 ‘전우애’ 같은 거랄까.

 

우여곡절 끝에 함께 하게 된 흑와단의 분위기는 불멸대와는 조금 달랐다. 루인이 잠깐씩 몸 담았던 그 어떤 조직보다 활기차고 개방적이었으며 동시에 거칠었다. 학자, 즉 군의관과 의무병이 부족한 건 어느 시대에나 그랬다. 림사 로민사에는 산호탑이 있고 그곳에서 도끼술사와 학자를 길러내는 만큼, 흑와단은 항상 실력 있는 치유사를 길러내 그들을 직업군인으로 영입, 장교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고 꼭 직업군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학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신입 치유사들을 상시 모집하는 편이었다.

 

비록 실전에서의 일은 배우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루인의 업무 능력과 성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불멸대에서의 일을 관두고 흑와단에 지원서를 낸 계기에 대해 장교들 사이에 소문이 도는 것까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흑와단에서 함께 일하게 된 임시 상관이 스호베이 대위라고 했을 때, 루인은 당연히 그가 이미 이리저리 와전된 나쁜 뒷말을 들었고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당시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휴게실에 있던 여러 명의 장교 중에 누군가가 함께 일하게 된 신입의 별명을 알고 있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키득키득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지는 포탄의 굉음마냥 크게 들렸다. 결코 작지 않은 공간이 손바닥만하게 우그러드는 느낌이 들면서 숨이 막히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루인은 자신을 가리키며 ‘미친개’라고 비웃던 남자를 향해 달려들다가 예상치 못하게 뒷덜미를 낚여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시야가 바늘구멍만큼 좁아져서, 자신을 비웃는 저놈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앞으로의 안위를 보장받아야만 한다는 극단적이고 필사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악명을 떨치는 게 차라리 나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굉장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뒷덜미를 낚아챈 게 무엇인지 황급히 돌아봤을 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번뜩이는 회색 눈과 마주쳐서 소름이 쭉 끼쳤다.

 

마치 시커먼 암흑에 눈 두 개가 박혀 있는듯한 기괴한 얼굴이었고 당장 이 사람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힘을 주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릴수록 ‘미친개’라고 말했던 장교에게서 루인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굵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뒤에 있는 회색 눈동자가 뭔가 말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그 눈엔 오로지 겨울밤의 눈밭 같은 침묵만이 존재했다.

 

 

 

- ……윽.

 

 

윽. 그가 낸 소리는 그 한 음절이 전부였다. 몸부림치던 루인이 빠져나가겠답시고 자신을 붙들고 있던 팔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을 때,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사내의 몸 전체가 살짝 동요하며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몸을 지나, 목울대를 거쳐 몸 밖으로 겨우 나온 나직한 신음이, 입으로 남의 피를 뿜어내는 루인의 정수리 위로 조용하게 떨어졌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아드레날린이 바닥난 루인의 몸에 힘이 빠져 늘어지기 시작하자 매우 익숙한 동작으로 붙잡아 주었다. 주변엔 피가 튀어서 루인을 받아 든 사내 역시 피범벅이었지만 살짝 눈살을 한 번 찌푸렸을 뿐 꽤 태연했다. 스호베이 대위, 괜찮나? 웅성거림 속에서, 흐릿한 정신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문제 행동을 하는 군인들이 대부분 스호베이 대위의 손에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나중에나 알게 되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악명 높은 신입이나 소문이 나쁜 장교가 돌고 돌아 가게 되는 곳이 대위의 소대라고 했다. 이유는 잘 몰라도 대위의 지휘하에서는 어떤 개차반도 군인 한 사람 몫은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주인도 못 알아보고 아무나 물어뜯는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성질 더러운 학자가 불멸대에서 이곳으로 온다고 했을 때, 자신의 소대로 데려가겠다고 한 사람 역시 그 뿐이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자 루인은 대위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명령을 내릴 때 말고는 정말 말이 없었고, 그림자처럼 기척 없이 다녔다. 항상 줄을 맞춰 잘 다려놓은 흑와단 장교 정복을 입고 있거나 학자들이 입고 있는 치렁치렁한 치유사용 로브를 입은 채로 낡은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루인을 만난 첫날, 싸움판에 몸을 던지려던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가 팔을 물어 뜯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부하들과 직접적으로 신체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불멸대와 흑와단을 거치면서 루인이 보아왔던 군인들은 훈련의 일환으로, 혹은 재미삼아서 몸싸움을 하거나 전우애를 다지는 의미로 팔씨름을 하고 끌어안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루인이 스호베이 대위를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을 붙잡았던 날을 제외하고는 그가 누군가와 살을 부대끼는 걸 보지 못했다. 심지어 타인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기색마저 보여서 오히려 루인은 좀 안심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사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성격인듯했지만 흑와단 안에서 대위의 평판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딘가 좀 이상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해도 주어진 임무는 큰 문제 없이 수행했고 성가시거나 험한 일도 하급자에게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일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그는 루인의 나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그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베테랑 흑와단 원사에게 하는 것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어조와 태도로 루인을 대했다. 그건 루인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받아본 적 없는 존중과 대우였기에 금방 스호베이 대위에 대한 신용을 갖게 됐다.

 

그의 집에 초대받아 밀린 행정업무를 어색한 분위기에서 함께 처리하고, 그가 만들어 준 담백하고 뜨거운 전골을 얻어 먹고선 뜨끈해진 위장으로 그의 침대에서 자기도 모르게 몇 시간을 자버린 이후 그 신용은 더욱 두터워졌다. 루인으로서는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 이해가 안 가고 무례한 짓이었지만 대위는 별다른 말 없이 잠에서 깬 햇병아리 학자에게 따뜻한 물과 식사를 주었다.

 

……남을 조롱하는 취미는 없는 걸까? 사실 대위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고 어조도 꽤나 단조로워서 사람들은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주는 호의를 베풀었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루인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그를 믿을 수 있게 되고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한 번씩 그가 소매를 걷을 때마다 보이는 깊은 흉터가 루인을 괴롭게 했다. 아직도 선명한 잇자국. 그 잇자국을 보면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 떠올라 수치스러웠고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흉터를 보고 있을 때, 대위가 그걸 눈치챘는지 먼저 입을 연 적이 있었다.

 

 

- 내 몸엔 상처가 정말 많지. 그래서 이런 건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아.

 

- …….

 

 

거짓말. 저렇게 큰데? 심지어 가장 최근에 생긴 거라 너무도 선명했다.

 

 

- 어쩌면 난장판이 된 전장에서 이 흉터로 내 신원을 확인할수도 있겠군.

 

- ……예?

 

- 치열한 전투 후에 엉망진창으로 훼손된 시신은 누군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목이 날아가 있거나 얼굴이 난도질 되어 있기라도 하면 내 팔뚝에 나 있는 자네 치열과 똑같은 모양의 흉터로 나를 알아볼 것 아닌가.

 

 

정말 끔찍한 농담이었다. 심지어 스호베이 대위의 얼굴에 표정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루인은 이게 농담이 맞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무언가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 적어도 대위님의 시신에 팔은 붙어 있어야 하고 제 시신엔 머리가 붙어 있어야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요. 대위님의 시신에 팔이 없고 제 시신에 머리가 없다면 전부 소용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머,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젠장. 너무 당황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서도 다급하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매끄럽게 말이 쏟아져 나왔고 망할 몸뚱아리는 뇌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부하의 이런 발언을 유머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만약 스호베이 대위가 화를 낸다면, 그래서 분위기가 커르다스의 설원처럼 싸늘해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가며 사고실험을 해봤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아……. 흑와단에서의 생활도 이걸로 끝인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본가와 가까운 쌍사당은 정말로 피하고 싶었다. 여기에서도 밉보여 쫓겨나듯 그만두게 되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팔을 물어 뜯어버린 이후에도 크게 어색하지 않고 비교적 잘 지낼 수 있는 상관이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어. 꼭 쥔 두 손바닥 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혀 불쾌하게 축축해지기 시작했을 때,

 

대위가 웃었다.

 

루인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크고 정갈하게 맑은 소리로, 웃었다. 루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웃는 대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즐거운 듯, 눈까지 질끈 감아가며 웃고 있었다. 루인을 놀라게 한 건, 자신의 부적절한 발언을 스호베이 대위가 유머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아니었다. 그는, 대위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놀랐다.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라 너무 신기해서 시선을 빼앗겼다.

 

 

- ……아.

 

- …….

 

- 정말 재미있군.

 

 

스호베이 대위가 웃는 얼굴을 이제와서 다시 떠올려봐도 그게 현실이 맞긴 했는지 루인은 종종 헷갈렸다. 대위가 갑자기 휴직계를 내고 사라져 버린 지금 그때의 일이 왜 이렇게 선명하게 다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흐려져서 나중에는 그 자리를 다쳤는지 아무도 눈치 못 챌 만큼 옅어지기도 하는데 왜 루인의 눈에 들어오는 스호베이 대위 팔목의 잇자국은 볼 때마다 더 짙어지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누군가가 속 시원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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