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빛전 / 쿠가네 귀신 사건? ~ 그 모험가의 무료 ~
제목은 가짜고 부제가 찐제입니다
- 그라하 티아와 빛의 전사. 어느 무료한 날의 이야기.
- 꼭 사건부처럼 적혀있지만 그냥 평범하게 사이 좋은 라빛 이야기입니다
- 6.1 전에 정말 무료할 때 쓴건데 안 올렸더니 그사이에 6.1이 와서 안 무료한 모험가가 되어버렸어요... 더 늦기 전에 그냥 급하게 마무리만 해서 샥...
[사건번호 2022-071824]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난 건 지난 밤이었다.
동방의 도시, 쿠가네. 그곳에 있는 상점가 코가네의 상인들은 삼삼오오 입을 모았다. 자신이 지난밤 겪었던 ‘이상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천장에서 소리가 나더니 가볍게 진동이 일었다고 했다. 또, 창가에 무언가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으며 순식간에 발소리를 내며 사라지기도 했다나. 귀와 입을 타고 이야기가 부풀었다. 그 끝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귀신의 소행이다!’
어쩌면 조금은 황당한 결론일 수도 있겠으나, 상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상점가를 지나던 다른 모험가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입과 입을 타고 퍼지더니, 결국은 배보다도 빨리 바다를 건너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모험가…… 그러니까, ‘에오르제아의 영웅’에게 닿고 말았다.
“그래서, 모험가님이 이 ‘귀신 소동’에 대해 알아보시면 어떨까 하고용.”
“갑자기…?”
오랜만에 모르도나에 위치한 돌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던 모험가는 자신을 향해 종이를 내미는 타타루의 야속한 손끝을 바라봤다. 품에 가득 들고 왔던 식재료 봉투들이 툭, 식탁에 떨어지듯 자리 잡았다. 그저 타타루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어 방문했을 뿐인데. 여기서 이렇게 의뢰부터 건네줄 줄이야!
“아니, 타타루. 나 방금 온 참인데.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이렇게 날 보내고 싶은 거야…?”
“혹시 바쁘신 건가용?”
타타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모험가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진실과 거짓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야, 사실은 조금도 바쁘지 않았으니까!
이 모험가로 말할 것 같으면, 가타부타 말할 필요도 없이 세상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영웅담의 주인공이었다. 그 기나긴 이야기의 끝, ‘종말’에서부터 세상을 구하고 난 후 잠시 흩어진 새벽의 동료들처럼 자신의 길을…….
“이상하네용. 제가 듣기론 매일 안갯빛 마을의 장터 게시판 앞에서 움직이지 않으신다던데용.”
“윽.”
그러니까, 자신의 길을……. 하아, 누가 그런 얘기를 타타루에게 전한 거람. 모험가는 짧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의 길을. 그러니까, 정확히는 ‘무엇도 하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다. 집에서 대충 잠을 청하고, 느지막이 눈을 떠서는 침대에서 한참 뒹굴뒹굴하다가, 또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밖으로 나와선 모험가 거주구를 산책할 뿐인 일상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영웅의 팔자 좋은 일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건 제법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도 그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곤란한 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러 쏘다녔고, 쏟아지는 마물에게서 마을을 구하기도 했으며, 한때 ‘야만족’이라 불리던 여러 종족과 우호 관계를 쌓기도 했다. 자신이 속한 총사령부 흑와단의 휘하 소대원들을 훈련시키기도 했고, 이름을 숨긴 선봉장으로서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그뿐이랴. 곡괭이나 낫을 들고 나가선 자연의 채집물을 가득히 들고 돌아오기도 했고, 낚싯대와 함께 며칠 밤낮을 물가에서 살기도 했다. 재료를 쌓아둔 채 음식이나 영약, 옷가지, 액세서리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으며, 어디선가 주워온 보물 지도의 먼지를 털고선 세상에 숨겨진 온갖 보물들을 파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지금 이 영웅은 그중 무엇도 하지 않고 있다. 거대한 흐름을 건너 역사를 바꿔냈기 때문일까. ‘오늘’이 여즉 평화롭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 때문일까. 너무도 크고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태우고 잿더미만 남아버린 걸까. 바스러져 손 틈의 모래알처럼 세상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푹 쉬길 바랐던 건 맞지만용. 이러다간-”
조금은 단호한 타타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험가는 고개를 까딱이며 시선을 피했다. 이 의리 없는 안갯빛 마을 주민들 같으니.
“알겠어, 알겠다니까. 내가 다른 새벽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잔뜩 들어버릴 거란 거지? 알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슬슬 심심해서 뭐라도 해볼 참이었어. 정말이야.”
하지만 이제 와 굳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탓할 이도 없었다. 온갖 거창한 칭호를 지닌 그는 어딜 가나 시선이 들러붙는 존재였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과 이름이 쉬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막았다고 하지만, 이웃 주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서로 알음알음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는 것이다. ㅡ 실제로 영웅의 팬이었던 또 다른 모험가. 즉, 이웃 주민은 하도 오래 마주쳐서 그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고 답했다. 처음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었는데도 말이다. ㅡ 아무튼. 거기다 요즘은 성도의 개방 때문인지 그보다도 먼 너머와 연결되는 길 때문인지 이전보다도 많은 모험가가 모르도나를 스쳐 지나가곤 했다. 이 모든 사실을 모아보자면 결국 타타루에게 영웅의 사소한 이야기가 닿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깐깐한 목소리와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잇지만, 타타루에게선 이 모험가를 향한 걱정이 가득히 묻어나왔다. 이런 타타루 앞에선 거드름을 피우기도 뻔뻔하게 고개를 돌리기도 어렵다. 결국 패배를 인정한 모험가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용!”
타타루는 모험가의 대답을 듣고서야 조금이나마 가벼운 낯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풀이 죽어 있던 거야?”
“그치만 타타루가…!”
하지만 정작 돌아선 모험가는 전혀 가볍지 않은 낯이었다. 모르도나, 망자의 종소리에 있는 로웨나 기념회관. 그 2층의 테라스 테이블에서 모험가의 볼멘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붉은 머리의 미코테족 남성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걸어왔다. 마시멜로가 두 개씩 떠 있는 따뜻한 코코아는 모험가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자신도 언젠가부터 종종 마시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갈 거야! 이미 림사 로민사의 다음 배편으로 떠나기로 했는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고 싶으니까 갈 거긴 한데…….”
그래. 같은 ‘새벽의 혈맹’의 동료 중 한 명. 그라하 티아는 모험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을 반쯤 뜬 채 테이블에 엎드린 그의 영웅은 자연스럽게 제 곁을 내주고는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갈 거긴 한데?”
“…… 요즘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그라하 티아는 이 영웅을 잘 알았다. 다른 누군가보다 그를 지켜본 세월이 긴 것은 아니겠다만, 그럼에도 그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라하 티아’다. 오로지 한 사람,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순간을 몇 번이고 곱씹어가며, 하나의 생이 흘러갈 만큼의 시간을 바친 그라하 티아. 그에게 있어 모험가란 말과 감정으로 정의하여 다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그 이후로 더욱 함께 시간을 보낸 지금에 이르러서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었다.
세상 모두에게 굳건하게 자리매김한 거대한 영웅. 대답은 늘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를 사람들은 차갑고 말수가 적은 이성적인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 정반대다. 그는 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감정적이다 못해, 감성적이다 못해, 무르디무르다 못해 유약했다. 거기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그의 영웅은 이 순간까지도 늘 이렇게…… 흐르는 생각은 미소를 끝으로 열린 한 마디에 정리되었다.
“네게도 동기부여가 필요한 거 아닐까?”
“동기부여?”
“울티마 툴레의 일로 거대한 여정이 정리되었잖아. 그러니 너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도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말이야.”
“…… 그런 걸까? 끝에 도달해서?”
“끝났다고 할까, 잠시 멈추게 되었다고 할까. 지금까지 넌 끝없이 새로운 일에 휘말려야 했으니까 이런 일상이 낯선 걸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움직여야 할 이유’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미안. 잘 모르겠어.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해. 네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몰아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일리가 있는 내용이겠지. 응, 이해했어.”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타인의 발언을 인정한다는 건 웬만한 신뢰로는 할 수 없는 일이겠다. 하지만 은근하고도 자연스레,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그 어려운 신뢰를 보이는 자신의 영웅. 허공에 선을 그으며 모호한 설명을 이어가는 새하얀 손가락을 바라보던 그라하 티아는 턱을 괴었다. 언제나 장갑을 끼고 있으면서 지금은 끼지 않았구나. 간질간질, 장난스레 목에 걸린 말을 뱉을지 말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점차 모험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빠져나가는 듯한, 혹은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침묵도 잠시, 제 앞에 앉은 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과 시선을 맞추면, 오묘한 빛깔에 빠져들어 버린 것처럼……. 제 목소리가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제멋대로 나긋하게 울렸다.
“그럼, 이런 건 어때?”
그라하 티아는 짐짓 머쓱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제길, 바보 같은 그라하 티아. 조금 더 고민하고 망설여도 좋았잖아. 아직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채 상상하지 못했는데. 겉으로는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평온한 낯을 유지했지만, 아예 숨겨지진 않았다. 그라하 티아는 두어 번 입술을 떼었다가 닫으며 작게 침음이라도 흘리는 듯싶더니 제법 마음을 먹은 듯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나는 쿠가네에 가본 적이 없잖아. 네가 동방 대륙에서 겪은 모험 이야기도 간단하게 전해 들은 정도고. 그러니까……”
이 뒤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리라.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라하 티아는 입을 꾹 다문다. 어쩐지 낯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전에도 분명히 했던 말인데, 물론 그때도 용기는 필요했다만, 그거랑은 조금 다른 느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험가는 눈을 깜빡이고, 그라하 티아는 그런 모험가의 눈치를 살핀다. 그의 영웅은 한참 눈을 맞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유 모를 긴장이 몰려왔다.
“……물론 너만 괜찮다면.”
짧은 한마디가 느긋한 척, 다급하게 뒤에 덧붙여졌다. 모험가는 그의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환히 입을 연다. 밝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정말이지? 같이 가주는 거지? 내가 이 의뢰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같이 시오카제 정에서 저녁을 먹고, 간식으로 꼬치도 챙겨 먹고, 밤의 코가네 상점가를 구경하며 거닐어 주는 거지? 함께 말이야?”
“어……?”
이것이 그가 움직일 동기부여가 되는 게 맞는 건지. 그저 늘상 기꺼이 휘말려주는 자신의 영웅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은근하게 넌지시 티 낸 것뿐이 아닌지. 뒷말을 삼킨 것 치고는 뜻을 명확하게 밝혀버린 그라하 티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걸어온 그가 머쓱한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이 밝은 표정을 하고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한 모험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죽 죽 선을 그어가며 무언가를 고민한다. 아마 자신과 함께할 여행의 계획이라도 짜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작은 혼잣말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잘된 일이려니 싶었다.
그래, 당장 늘어져 있던 아까와는 달리 허리를 펴고 앉아 깃펜을 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안심, 안심이라……. 그라하 티아는 방금 자신이 느낀 안도감에 문득 떠올린다. 이 영웅이 느끼는 무료한 시간의 근원에 대해. 그리고 그 단어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사소한 불안에 대해.
영웅은 말하곤 했다. 그것이 “이 세계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처음엔 그 말에 위안을 얻었다. 어떤 말보다도 의지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멋지고 든든한 존재였으니까. 그가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으며 이 세계ㅡ 우리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고 또 하나의 역사서가 덮일 때도 영웅의 한마디는 사라지지 않았다. 매번 덧붙여지는 “존재 이유”만이 달라질 뿐이었다. 모험의 시작에서부터 모래의 집의 일원으로서, 용시 전쟁을 끝낸 자이자 홍련의 해방자로서, 칠흑의 반역자, 그리고 세계의 종말을 끝낸 빛의 전사이자 어둠의 전사로서. 에오르제아의 영웅, 희망의 등불, 인류의 구원자.
그라하 티아는 어느 날부턴가 이 모든 칭호가 낯설게 느껴졌다. 영웅의 이타적인 말들이 종종 이질적으로 들려옴을 깨달았다. 이것은 비단 자신만의 고민이 아니었겠다만 그에게 닿아오는 무게는 남달랐다.
“있잖아.”
“응?”
그 끝에 그라하 티아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영웅, 우리의 영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 하지만 아무리 오래 생각하고 고민한대도 답은 쉬이 나지 않았다. 그 어떤 역사보다도, 어떤 이론과 학문보다도 어려운 주제였다. 몇 날 며칠 밤을 생각에 쏟고 또 쏟은 끝에 그라하 티아는,
“만약에…… 정말 네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가 ‘이유 없이’ 존재하길 바란다고. 결론이 아닌 소망으로 생각의 끝을 맺었다.
“… 라하?”
너는 이미 많은 일을 해왔잖아. 더 무리하지 않아도 돼. 세상은, 살아가는 존재들은 네 덕에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내일과 먼 미래를 꿈꾸게 되었어. 그들은 자신의 발로 걸어 나갈 거야. 너는 이미 많은 이들의 길잡이 별이야. 너로 인해 고개를 든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아무도 널 부정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너는 조금 쉬어도 돼. 네가 주저앉는대도 아무도 너를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을 거야. 설령 네가 수많은 위기와 고난 속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대도, 그래도 나는 분명 네게 말했을 테지. 함께 갈까? 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저 존재해줘. 이 말이 갑작스럽고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수많은 말이 맴돌았지만, 문장들은 소리가 되어 전해지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네가 바란다면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이 말이 네게 어떠한 무게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내가 믿음직스러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떤 거짓 하나 없이 투명한 진심이야. 나는 늘 네게 진실만을 말하고 있어.
끝내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덧붙일 수 없었다. 모험가의 손이 가벼이 제 손등을 덮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제 눈으로 지켜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어쩜… 이렇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하하.”
“나, 네가 있어서 좋아, 라하. 네가 함께해준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어디든 갈 수 있어. 너랑 함께하는 매 순간, 그저 존재하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걸. 그야…….”
대지를 누비고 바다를 건너고, 때로는 유구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고.
그렇게 어디든, 어디까지든. 함께하고 싶으니까.
“나도 그래.”
제가 뱉은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춘 영웅을 지켜보며 그라하 티아는 가벼이 소리 내 웃었다. 자신의 모험가, 영웅, ■■■■는 늘 이렇다. 솔직하지만 솔직하지 못하지. 뻔뻔하게 말을 잇는 순간이 끝났으니 이제 낯이 조금은 붉어지려나. 그럼 이대로 조금 정도는 놀려도 괜찮을 것이다. 출발은 지연되겠지만 림사 로민사로 향하는 걸음을 조금만 재촉한다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 놀림에 대한 보복을 당한대도 상관없다. 끝에는 분명 같이 웃게 될 테니. 그 후엔 함께 배를 타고 머나먼 바닷길을 넘어서 그가 유랑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자. 책에 적힌 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기억으로 되새겨 남기자.
그라하 티아는 눈을 감았다. 승객 목록에 나란히 적힐 그의 영웅과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작은 욕심이라고 되뇌면서.
사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 쿠가네에 있던 모험가가 함께 여행하던 꼬마 커얼을 잃어버려 생긴 일이었을 뿐이니!
두 사람의 노고 덕에 꼬마 커얼은 무사히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마 앞으로 많은 세상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자신을 밤낮으로 찾아다닌 소중한 친구와 함께! 정말로 기쁘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정말로. 하지만…….
“귀신인 줄 알았는데……”
꼬마 커얼과 함께 여관으로 돌아가는 낯선 모험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모험가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따라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던 그라하 티아 역시도 마찬가지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행인데. 다행이긴 한데…….”
“상점가의 사람들이 분명 동방의 ‘요괴’라 불리는 것들과 관련된 사건일 거라 했었다고! 산크레드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해두기까지 했는데 조금 허탈하네. 자료는… 다음에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천천히 읽어둬야겠다.”
“응. 그치만 귀신인 쪽이 조금 더…… 어? 라하, 팔에서 피 나.”
제게 시선을 돌린 모험가가 내뱉는 말에 시선을 내리면 꼬마 커얼을 안고 있던 그라하 티아의 팔에 얕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아, 하는 작은 목소리를 낸다. 정신없이 커얼을 추격하느라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치료해야겠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래도 안 돼. 팔 이리 줘.”
“그보다, 귀여웠지, 꼬마 커얼.”
“말 돌리지 말고! 그치만 꼬마 커얼이 귀여운 건 맞아.”
“꼭 누굴 닮은 것도 같고. 여러모로.”
“누구의 이야기야, 그거? 무슨 여러모로?”
“늘 사고를, 음…….”
“사고를?”
“아, 배고프다. 시오카제 정이 여기 앞에 있는 건물이지? 네 모험록에서 읽은 적 있어. 이렇게 생긴 곳이었구나! 바로 가보자. 치료도 거기서 받는 걸로 할게.”
“저기, 라하? 그라하 티아 씨? 누구 이야기냐니까?!”
앞서 그라하 티아가 걸어가면, 모험가가 소리치며 뒤를 따른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그라하 티아의 보폭을 따라잡으며 고개를 기울이면, 멀뚱히 두 사람의 시선이 맞는다. 퉁명스러운 목소리 끝에 가볍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두 사람이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시오카제 정으로 걸어가던 그라하 티아의 시선이 문득. 머나먼 별하늘에 박힌 자신의 동경이 아닌, 낡은 등불 하나에 닿는다. 온도가 닿아올 정도로 가까이에 놓인 평범하게 낡은 등이다. 사실 알고 보면 평범한 것. 하지만 누군가의 낯을 환히 밝히는 것. 밤길을 걷는 이의 걸음을 안전히 밝히는 것. 살아가는 누군가의 세상을 따스히 밝히는 것. 얼어붙은 고통을 녹이며 밝히는 것.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빛을 품고 끝없이 타올라 누군가의 마음까지도 밝히는 것…….
아아, 그래. 그 등불이 이곳에 있었다.
2022. 10. 06.
라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요... 그야 종언 후 빛전은 할 일이 없어졌으므로... (사실 없는 건 아니지만... 저는 6.1 전까지 밀린 신생우호퀘랑 고대무기랑 에우레카랑 봉바라는걸 좀 했다네요...)
사실 쓰면서 사이에 뭔가 비어보이는 부분 채워야지... 라고 해놓고 방치했는데 어느새 6.1이 와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이제 안 무료한 모험가 됐음... (진짜)
이 얘기 했더니 지인이 오타쿠도 타이밍이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 같음... 더 늦기 전에 던져두고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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