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과 사마르

너는 정체된 낭만

이번 제목은 자인 이야기. 사실 진짜 원인은 처음으로 안정된 보금자리를 가지면서 너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보니 생긴 권태 증세지만 결국 자인이 깨닫는 일은 없었다

벌컥.

"음~ 이거야, 눅눅한 곰팡이 스멜!"

작고, 좁고, 어두침침한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자마자 사마르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하듯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방 안으로 들어간 자인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전형적인 학자의 방이었다. 벽 한 면을 메운, 틈새 하나 없이 빼곡이 들어찬 책꽂이. 그것도 모자라서 사방의 바닥에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책더미들. 거뭇거뭇한 마룻장을 정신없이 굴러다니는 메모 용지들. 딱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방 한구석에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은 작은 일사바드식 연금 가마 정도인가.

한바탕 둘러보고 난 뒤 자인은 바깥을 향해 난 자그마한 창을 향해 걸어갔다. 습도 높은 그리다니아의 날씨 탓인지 유리에는 푸릇푸릇한 이끼가 얼룩처럼 붙어있었다.

잘 열리지도 않는 창을 덜컹, 위로 밀어올리자 구슬비가 내리는 신시가지의 모습이 보였다. 숲에 푹 파묻힌, 아기자기한 목조 건물들. 저 멀리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에테라이트.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경치 죽이지? 나름 신경써서 고른 방이야. 여기서 바깥 구경한 적은 손에 꼽지만!"

바삐 책무더기를 치우며 사마르가 조잘댔다. 나름 치운다고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실태는 종이 무더기를 죄다 방 한 켠에 모아놓고 있는 꼴이었다.

"공방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엉. 이 맞은편에..."

"왜 연금 가마가 있는거야"

"아~ 모르시는 말씀. 연금은 생활이야! 당연히 공방에 하나, 여기도 하나 놔뒀지! 그래서, 어때? 내 거점"

자인은 다시금 창 밖을 내다봤다. 곱게 물안개가 깔린 광장, 멀리 저물어 가는 해. 신선한 흙과 비의 냄새가 느껴졌다.

"글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며 자인은 말했다.

"나쁘진 않아"


그리고 약 한 달이 흘렀다.

겨우살이와 탄산수, 그리고 맨드레이크 뿌리. 사마르는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재료와 용량을 꼼꼼히 적어넣었다. 그리고 휴대용 화로에 풀무질을 하는 척 하면서 슬쩍 창문께를 훔쳐보았다.

창가에는 크고 푹신한 장소파가 하나 생겨있었다. 자인은 편한 실내복 복장으로 모포를 두른 채 그 위에 누워있었다. 따닥, 따닥. 여느때처럼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멀거니 대륙 지도를 들여다보며.

거점에 왔을 때만 해도 저것보다는 기운이 있었는데. 사마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허름한데다 책먼지가 가득했던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반들반들한 마룻장, 차분하게 정리된 책장. 도착하자마자 자인이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 왁스칠을 하고, 울며불며 엉겨드는 사마르를 한 다리에 매단 채 헌 책과 노트를 버린 덕분이었다. 메모 역시 자인이 어디선가 구해온 코르크판에 꿰어졌다. 깨끗하게 정돈된 바닥에는 역시 자인이 구해온 따뜻한 색감의 카펫이 깔렸다. 무엇을 숨기랴, 사실 저 장소파도 자인이 구해 온 것이었다.

그리다니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렇게 바쁘게 움직였던 자인은, 그러나.

사마르는 자인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 멍한 표정. 최근 들어서 거의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지도를 펼쳐보거나, 여행 일지를 뒤적이거나.

문제는, 자인과 함께 행동을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마르로서는 도통 저렇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닥. 빗방울이 다시금 유리를 두드렸다.

"사마르"

자인의 노곤한 목소리에 사마르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오, 어어?"

"비, 들이친다. 가마 끄고 창문 닫아"

사마르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러나 고분고분 화로에 덮개를 씌웠다. 아무튼 맞는 말인 것은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책이 가득했고, 책은 습기에 약했다. 그리고 연금가마는 창을 닫은 채로 불을 땔 수 없었다.

덜컹. 창틀에 창을 내리고, 사마르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며 팔짱을 끼었다. 자인은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지도를 펴들고 있었다.

"야"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음"

"너, 최근 좀 늘어지지 않냐?"

따다닥. 세찬 빗물이 연달아 창문을 두드렸다. 역시 신경쓰이는 건 바로 물어보는 게 제일이다. 사마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인의 답을 기다렸다.

자인의 눈에 희미하게 빛이 돌아왔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보고있던 지도를 고이 접어 가슴께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보여?"

"어, 많이"

자인은 게슴츠레 뜬 눈을 두어 번 껌벅였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끄으응... 몇 시야? 지금"

"오후 두 시. 너 아침부터 계속 거기 누워있었다"

"그랬나"

마치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이, 자인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사마르를 쳐다보았다. 이 나사빠진 반응 하며. 사마르는 눈썹을 치켜뜨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슬슬 현장 감각 없어지는 거 아냐? 용병 씨. 따로 할 일 없으면 있다가 나랑 모험가 길드나 가는 건 어때?"

"길드"

자인은 앵무새처럼 대답하며 책이 빽빽이 꽃혀있는 책꽂이를 노려보았다. 요는 몸을 쓰는 일을 찾으러 가 보자는 거지.

가 봤자 뭐가 된단 말인가. 보나마나 이끼가 잔뜩 낀 별궁, 아니면 곰팡내가 나는 낡은 지하 묘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자인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런 사고 방식이 된 것인가. 모험은 늘 가슴 뛰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기회를 마다하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어쩌면, 사마르의 말이 맞을지도. 지나치게 늘어져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래... 저녁에? 넌 그동안 뭐 할 거야, 공방?"

"뭐... 그렇지? 여기서 실험은 그른 것 같고"

"그럼, 나는... 그동안 장비나 손질할까..."

느릿느릿 모포를 걷고 소파를 빠져나오는 자인을 보면서, 사마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내 거점에 오게 된 이유, 기억나냐?"

"글쎄... 네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빛나는 백사장을 탐색한 다음 날에"

"그렇지. 이제 더운 건 그만 하고 싶다길래, 그럼 우리 집 안 올래? 하고... 뭐 우리 집은 데미르의 유열향이지만"

"슬슬 에오르제아가 그리워질 때이긴 했어"

"그러냐? 난 딱히, 별 생각 안 나던데"

"너는 그렇겠지. 나는 거기가 고향이야"

칼라인 카페로 가는 길.

낙엽이 뒹구는 푹신한 흙길을 따라 비취 호수의 가장자리를 걷다 보면 나타나는 비공정 승강장. 그리고 그 2층에 자리잡은 모험가 길드.

물안개가 깔린, 조금은 차가운 밤의 날씨에 옷깃을 여미면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마르는 여느때처럼 사리 위에 긴 외투를 걸치고서, 자인은 받쳐입은 붉은 셔츠가 비쳐보이는 간편한 갑옷의 이음매를 절그럭거리며. 무릎께까지 오는 긴 부츠가 습기 가득한 부엽토를 밟으며 나아갔다.

"아무튼 돈 안 드는 거처를 찾는다길래 난, 은혜를 갚을 찬스다! 하고..."

"은혜라니?"

"아? 너 임마, 네가 준 옷 말이야, 옷. 나는 그거 죽어도 갚을 거다. 아무튼 너를 데려왔단 말이지. 방값 싸지, 접근성 좋지. 뭐어, 이 정도면 권할 만 하잖아"

"그래"

자인은 눈을 내려깔며 답했다. 분명 좋은 곳이었다. 처음에야 사마르의 관리 소홀로 마치 몰볼 소굴같은 꼬락서니였지만, 대강 정리하고 나니 아늑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여태까지 머물렀던 어느 보금자리보다도 훨씬.

문득, 자인은 여태껏 거점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과 자금을 들여 어떤 장소를 꾸민다는 것 또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녀석이 있었다.

"야, 야. 왜 그래,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생각중이었어.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재미없는 인간이야. 말수도 적고, 머리가 돌아가는 편도 아니야. 굳이 살갑게 굴 필요 없어"

"뭐야, 갑자기 왜 밀쳐내고 그래? 섭섭하게시리. 우리 같은 방 쓰는 사이 아니야?"

"자리를 마련해 준 건 고맙지만, 나는... 얼마나 됐지? 이렇게 된 게"

"한 달쯤? 너랑 내가 태그먹고 다니게 된 거 이야기라면, 사베네어에서 있었던 시간까지 합해서... 두 달 정도"

"두 달이라..."

자인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사마르 없이 여행을 다니던 때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두 달. 누구와도 이렇게 오래 지내본 적은 없었다. 보코를 제외하고는.

"오래 되긴 했네. 그래서? 무슨 생각 한 거야? 조금만 들어보자"

"딱히, 별 거 아냐."

어느새, 두 사람은 칼라인 카페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입구의 아치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비가 내리니 카페로 피신 온 것처럼 보이는 음유시인이 류트의 현을 퉁기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제각각 깔개를 깔고 앉아 연주를 듣는 사람들. 앉을 의자 같은 건 없었다. 모두 꽉 차 있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도 음유시인과 같은 신세인 것이 틀림없었다. 어깨가 푹 젖어있었으니까.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교통 정리를 하는 가운데, 카페 주인인 뮬은 진땀을 흘리며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할 분위기는 아니군"

사마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벅저벅 걸어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의 파도를 버텨내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던 뮬이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그래, 주문 있어?"

"밀크티요! 각설탕 세 개쯤 넣고"

"나는 물이면 돼"

"이 놈은 허브티면 됩니다. 다날란 향초로"

"물이면 된다고"

"좋아, 밀크티, 각설탕 세 개. 허브티, 다날란... 지금 자리가 없는데, 괜찮겠어?"

"됐습니다, 이 언저리에서 적당히 마시다 갈게요"

"좋아. 조금만 기다려 줄래?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말이지..."

2미터가 넘는 아우라 둘이 지나가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불공평한 세상..." 출입문 언저리에 신문지를 깔고 처량하게 앉아있던 한 라라펠이 부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적당히 비어있는 벽가에 기대어 선 후, 사마르가 입을 열었다.

"이야아, 도저히 길드 창구에 물어볼 만한 환경이 아닌걸"

"때가 안 좋았어. 소나기만 쏟아지지 않았어도"

"뭐, 시간 좀 지나면 원래대로 되겠지. 비도 그쳤고..."

잠시,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그렇게 서 있었다. 사마르의 희망적인 예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도통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음유시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훅 불면 꺼질 것 같은 분위기의 새하얀 아우라 렌 여성은 쌍사당의 제복을 입고 그리다니아의 오래된 전설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 주변에도 동족이 많이 늘었어"

혼잣말처럼 사마르가 중얼거리자, 자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음유시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예전에 비하면"

주변에 자인 자신 말고는 이런 존재가 없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너무 신기한 나머지 가게 홍보에도 이용됐던가. 움직이는 입간판. 그 경멸 섞인 별명을 기억해내고 자인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좋은 시대가 되었지..."

룸메이트의 그다지 상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미소를 보고 사마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뭐야, 내가 뭐, 안 좋은 말 했어?"

"아니, 예전에. 별 일 아니야"

자인은 빠르게 표정을 고쳤다.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마르는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이었다. 굳이 자신의 괴로운 기억을 나누고 싶지는 않은. 애초에 나눈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자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사마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 배배 꼬인 녀석은 매번 가까워졌다 싶으면 항상 벽을 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알고 지낸지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마르는 자인의 신상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야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습관이라던가는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되니 슬그머니 오기도 생겼다. 반드시 이 놈의 입에서 자기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겠다는 집념이라던가, 꼭 친해지고야 말겠다는 결심이라던가. 이래봬도 고향에서는 형제 중 제일 사교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몸이었다. 열 번 찍어 쓰러지지 않는 나무는 없었다. 아마도.

"밀크티랑 허브티 시키신 분~"

카운터 위에 쟁반과 함께 따뜻한 김이 나는 컵이 놓였다. 달그락. 사마르는 바글바글한 인파를 뛰어넘어 머그컵 두 개를 쥐고 돌아왔다.

"자, 네 거"

물이면 충분한데. 이렇게 말하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자인은 감사의 인사를 입에 담았다.

"고마워"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흘러들어온 따뜻한 기운이 천천히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물이면 된다고 그렇게 말을 했지만. 자인은 입 안에 감도는 그리운 황야의 향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물보다는 이런 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사마르는, 역시 각설탕을 팍팍 넣어야 고향의 맛이 난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마지막 곡이었던 모양이었다. 음유시인은 연주를 마치고 나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앉아있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아우라 렌 여성은 쌍사당의 군모를 푹 눌러 쓴 후, 카페를 나섰다. 사람들 또한 삼삼오오 자리를 접고 카페를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한산해졌구만"

공연의 열기도, 활기도 가라앉은 카페 속에서 사마르는 찻잔을 흔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문득, 자인은 사마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충동적으로.

"방금 그 애, 별로였어?"

사마르는 갑자기 사레가 들었다.

이 놈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언제는 거리를 두듯이 밀쳐내 놓고, 느닷없이 이런 질문이라니. 사마르는 열심히 가슴을 치며 눈물 맺힌 눈으로 자인을 돌아봤다.

"읍, 켁, 켁... 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너라면 좋아라 작업을 걸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안 그러길래"

"내가 무슨, 여자에 미친 놈인 줄 아냐? 그야, 연애가 아주 안 고픈 건 아닌데! 아니, 그리고 난 걔보다 조금 더 작고 생기 넘치는 애가 취향이거든?"

"그래?"

자인의 입이 슬며시 호를 그었다. 졸음에 겨운 고양이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

"그건 의외네"

"너 말이다...!"

사마르는 입가를 훔치면서 자인을 노려보았다. 왜 이 녀석의 무기력증을 고치러 와서, 자신이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맞아, 길드 창구. 시선을 옮기자 한적한 길드 창구가 보였다. 사마르는 자인의 어깨를 붙들고 복수라도 하는 양 쭉쭉 끌어당겼다.

"야, 비었다, 비었다. 이 짬에 물어보러 가자"

"뭐가... 잠깐, 쏟아지겠어...!"

툴툴대는 자인을 끌고 카운터로 다가간 사마르는 몸을 굽히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보통 휴런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비엘라 여성이 발랄하게 인사했다.

"예에, 길드 창구입니다! 일거리를 찾으시나요?"

"예! 뭔가 탐험이랑 관련된 거 없어요? 던전 조사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탐색에 관한 의뢰라면... 이렇게 있는데요, 한 번 보시겠어요?"

비엘라 여성은 쾌활하게 대답하며 카운터 안쪽에서 서류철을 몇 개 끄집어내어 사마르에게 넘겨줬다. 사마르는 그것을 어딘가 시큰둥한 표정의 자인에게 넘겼다.

"왜 나한테"

"애초에 여기 온 이유가 뭐냐, 너 기운 좀 차리라고 일거리 찾으러 온 거거든? 널 위해서니까, 네가 책임지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봐"

부탁한 적은 없는데. 자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서류를 주욱 훑어보았다. 일감들은 예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별궁 순찰, 유적 탐색, 호위... 문득 자인은 자신이 또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럼, 이거"

가볍게 한숨을 쉬고, 괜찮아 보이는 의뢰를 하나 골라 접수원에게 내밀었다.

"오, 뭔데 뭔데"

촐싹대며 서류철을 들여다 보던 사마르의 몸이 삽시간에 굳었다. 서류철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탐타라 묘소 탐색 의뢰'.

"아~ 이것 말씀이시죠? 최근 묘소에서 또 이상한 말소리랑 발소리가 들려온다는 모양이더라구요~ 이렇게 자주 문제가 되면 폐쇄를 할 만도 한데, 사람이 부족해서 그건 안된다지 뭐예요? 그리다니아도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는거죠~"

"야... 꼭 이거로 해야겠냐? 다른 거 없어...?"

퍼렇게 질린 사마르가 돌아봤지만, 자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멍한 얼굴로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게 난이도 치고 제일 보수가 많아. 묘소 안쪽 탐험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잖아"

"유령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잡으면 되지. 유령이 검은장막 숲에서 그렇게 신기한 것도 아니잖아. 선금 주시겠습니까?"

"네에~ 그럼 여기 의뢰주 연락처랑 선금이구요~"

"뭐, 따라가긴 할 건데 말이지"

돈이 든 주머니를 건성으로 허리에 매다는 자인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마르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제서야 자인은 사마르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조금 마음이 켕기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받아쳤다.

"내키지 않으면 쉬고 있어도 돼"

"농담 마라. 내가 아까 뭐라고 했냐. 은혜는 꼭 갚겠다고 했지? 그럼 물 속이고 불 속이고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소리다 이 말이야. 그건 그렇고 누님, 링크셀 있어요?"

"남친 있습니다~"


"그렇게 안 마신다고 해 놓고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대의 그리다니아 신시가지는 조용했다.

하늘에는 환하게 달무리가 진 보름달이 걸려있었고,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 끝에는 마법의 불이 잔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께름칙한 느낌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숲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결국 한 잔 다 비운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자인 씨"

그런 그리다니아의 가도에서 사마르가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만면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고 활보하며.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던 자인은 조금 얼굴을 붉히고 대꾸했다.

"따로 마실 게 없어서 마셨을 뿐이야.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목이 좀 마를 수도 있잖아"

"말은 청산유수구만. 맛있다는 듯이 연거푸 들이켜 놓고"

"나는 그냥..."

뭐라고 대꾸하려다, 자인은 오리입을 내밀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실제로,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다날란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에게는 고향이었다. 아무리 의부와 마주치기 싫어 피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불현듯 그리워지곤 하는 것이었다. 사막의 건조한 냄새가,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이.

"감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

불쑥 입을 연 자인을 히죽히죽 웃던 사마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뭐가"

"향수병... 이라고 해야 하나. 계속 숲에 있었으니까. 약간, 물렸던 거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사마르가 눈을 꿈벅였다. 자인은 한숨을 푹 쉰 후,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큰 소리로 덧붙였다.

"늘어진다던 거 말이야. 네가 나보고 하던 말. 그 차를 마시고 나니까 알 것 같아. 다날란에 돌아가고 싶었던 거였나봐"

"향수병...?"

사마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수병으로 사람이 그렇게 늘어질 수도 있나. 애초에 이 녀석은 자기가 향수병에 걸린 줄도 몰랐단 말인가. 자기 일에 엄청나게 둔감하기는 하지만.

"이젠 괜찮아, 나아졌어"

쭈욱 기지개를 켜고, 어깨를 돌리며 자인은 말했다.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사마르 덕분에 여지껏 막연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흐음. 나아졌다면야 다행이고"

뭔가 석연치는 않지만, 아무튼 사마르는 만족하기로 했다. 은인이 다시 기운을 차렸다니 좋은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도움으로. 보아하니 자인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럼 어떡할까. 다음은 울다하로 가 볼까?"

"아니, 됐어. 아직 그렇게까지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야"

"뭐야. 너 왜 그렇게 다날란을 싫어하냐? 고향이라면서"

"딱히 싫어하는 건 아냐"

"흐음... 아무튼 그럼, 보자... 일단 돌아가면 자고, 내일부터 묘소 탐색 시작인가? 간만이네"

"일찍 자 둬. 실험할 생각 하지 말고"

"안 한다, 안 해. 으으, 유령은 질색인데..."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작품
#ff14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