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너, 비단의 너
자인과 사마르 첫 이야기. 정적과 비단은 각각 자인과 사마르
너와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데미르의 유열향.
예드리만에서 북서쪽, 라자한에서는 남쪽으로 그다지 잘 닦이지는 않았지만 끝없는 해안선을 따라 뚜렷하게 나 있는 흙길을 주욱 걸으며 덮쳐오는 밀림의 맹수를 피하다 보면 어느새 다다르게 되는 장소다. 야트막한 협곡 안에 숨겨진 빛나는 누각들과 작은 만 한가득 밀려들어온 바닷물 위를 지나가는 대나무 다리, 굴을 파서 만든 연구실 안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끓는 연금 가마. 독약부터 양약까지 온갖 종류의 약물이 보관된 색색의 병이 수납장 안에서 수정처럼 반짝이고,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바닥에 빽빽하게 메워 쓴 양피지가 굴러다니는 곳. 색색의 사리로 몸을 휘감은 연금술사들이 분주히 걸음을 옮기며 복잡한 연금 수식을 주문처럼 읊는 곳.
일사바드,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연금술의 고장.
그 입구, 커다랗게 입을 벌린 협곡의 진입로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초코보가 한 마리 있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붉은 갑주를 걸치고, 위에는 사람을 하나 태운 채.
"아무튼 해가 떠 있을 때 도착하긴 했군"
물방울이 뚝, 뚝.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침 일찍 라자한을 나설 때만 해도 도착은 저녁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둥글게 패인 협곡 안쪽에도 비는 희뿌연 햇살과 함께 군데군데 들이치고 있었다. 양피지를 펴들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막으며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아우라족 연금술사,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이 커다란 나무상자를 들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아르카소다라족 짐꾼.
잘 닦인 은빛 갑주가 백랍처럼 반짝였다. 밖에 나와있던 몇 안 되는 유열향의 주민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간소하게 어깨와 흉부만을 가린 처음 보는 갑주를 두른 이방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초코보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례합니다, 이 주변에 축사가 있습니까?" "있지. 저쪽에 쭉 가보쇼"
젖은 긴 머리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인은 손에 쥔 고삐를 사람 없는 축사의 막대에 묶어놓았다. 그리고 보코의 몸통에 매달린 가죽가방을 뒤적이며 혼잣말을 하듯 말을 건넸다.
"얌전히 하고 있어라"
보코는 반쯤 감긴 눈으로 말없이 주인을 쳐다보았다.
정성들여 포장된 물건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빗방울은 변함없이 죽죽 떨어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해가 질 때까지 그치지 않겠군.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며 자인은 생각했다.
"실례합니다. 산사미트리씨 댁이 어딘지 아십니까?" "알지. 저어쪽..." "감사합니다" 흙벽을 따라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누각이 아닌 커다란 토굴이었다. 슬쩍 안을 들여다 보자 빼곡이 들어찬 진열장과 향로, 연금 가마가 보였다.
아무리 잘 갖춰놓았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살림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자인이 잠시 옆으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그만 하라니까!"
마치 폭탄이 터지듯 튀어나온 고함소리에 흠칫 놀란 자인이 고개를 돌렸다. 토굴 안쪽에서 튀어나온 손에 건장한 아우라족 남성이 가슴께를 후려맞고 비틀거리며 쫓겨나오고 있었다.
"너는 형수도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냐,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형님, 잠깐만... 잠깐만. 화 좀 가라앉혀..."
뒤이어 터번을 두른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걸어나오고, 그 허리춤을 붙들고 진땀을 흘리며 말리는 굽은 뿔의 아우라 렌 남성과 새하얗게 질린 렌족 여성이 따라나왔다.
비틀거리던 아우라족 남성은 입가를 한 번 쓰윽 훔치고 서서 터번을 두른 남자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상쾌하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아아, 형수? 그래, 이제는 형수 핑계를 대시겠다... 딸꾹. 그래, 형수는, 잘 해 줘야지. 근데에, 지랄은 왜 형이 하고 난리야아...!"
"이 자식이 좋게 말을 해도, 어! 언제부터 그렇게 글러먹은 놈이 됐냔 말이야!"
보아하니 서로 비슷하게 생긴 세 남자는 혈족인 모양이었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아마도 취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허리를 굽힌 채 비실비실 웃으며 그런 남자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쪽도 똑같이 붉은 얼굴이었으나 그게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 글러먹었다. 글러먹었어. 완전히 글러먹었어... 그래서 뭐, 어쩌게? 한 대 패기라도 할래? 응?"
"보자보자 하니까...!"
"봐, 못 패지. 엉? 형이 그렇지 뭐. 주둥이만 나불대기나 하고, 언제 한 번이라도 실행에 옮겼느냔 말야... 딸꾹"
팔짱을 낀 남자의 목에 퍼렇게 핏줄이 돋았다. 천천히 팔짱을 풀고 굳게 주먹쥔 손에 잔뜩 힘을 준 것이,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그 모양을 흡뜬 눈으로 쳐다보던 허리춤의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형님 좀 말려줘요! 이러다 진짜 치겠어!"
"여보!"
여성의 새된 비명을 듣고 자인은 마음을 굳혔다. 집안 싸움에 끼어들다니, 틀림없이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주정뱅이와 남자 사이에 섰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자인을 쳐다봤다.
"뭡니까, 댁은"
"일단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레 끼어든 건 죄송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던 남자는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벌린 채 뒤를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자인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어깨를 붙들고 뒤로 돌려세웠다.
"넌 뭐야, 인마!"
곧이어 거친 손길이 자인의 얼마 드러나지도 않은 붉은 셔츠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취했는데 용케도 잡았군. 자인은 어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신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정면을 보았다.
술에 취한 남자가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훅 불면 입김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지독하게 술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역시 상당히 취한 모양이었다.
"뭘 사람 앞을 막아서고 있어!"
잠시, 자인은 고민했다. 척 보기에 이 사람은 싸움꾼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몸매야 잡혀있지만 태도에서, 기백에서 전투에 익숙한 자의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손목을 잡아 비틀어 올리면 간단히 손을 놓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장에 그렇게 할까? 아니. 자인은 힐끔 뒤로 시선을 던졌다. 새하얗게 질린 여성과 갈팡질팡하는 남성, 그리고 아마도 바로 뒤에서 당황한 채 쳐다보고 있을 터번의 남자. 이 자의 가족이 틀림없었다.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망신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까. 가만히 노려보며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가 또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 그만해.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이니..."
꽤 나이가 들어보이는 휴런족 여성이었다. 자인의 멱살을 쥔 손을 찰싹찰싹 때리며 온화한 어조로 주정뱅이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이놈, 이놈. 이 못된 손. 무슨 짓이니, 처음 보는 사람한테..."
"라트마 씨네 셋째 아냐?" "뭔데, 무슨 일이야" 근처의 누각에서 두어 명 정도가 더 고개를 내밀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게다가 할머니를 상대로 난동을 부릴 만큼 취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주정뱅이는 금세 기세가 꺾였다. "아니, 나는..."
"됐습니다, 하리티 씨.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분"
자인이 돌아보자 터번을 두른 남자의 씁쓸해 하는 표정이 보였다.
"진정됐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마르,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뭐가 진정이 돼? 나는 아직...!"
"여행객까지 말리러 왔는데, 아직도 추태를 부릴 작정이냐? 이야기라면 안에서 얼마든지 듣겠다. 일단 들어가자"
그제서야 주정뱅이는 조금 술이 깬 표정으로 휴런족 노인과 자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하리티 씨랑, 그, 여행자 분도 안으로 드시죠. 변변히 대접할만한 건 없지만..."
"어머, 난 됐어, 얘. 한창 실험중이었단다. 어서 돌아가 봐야지..."
손사래를 치며 웃는 휴런족 여성을 돌아보던 자인은 곧 터번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사양하겠습니다. 산사미트리라는 분의 댁을 찾으러 온 것 뿐이라..."
"산사미트리"
가족처럼 보이는 세 남자의 눈이 일제히 자인을 향했다. 자인은 약간 당황한 채 터번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십니까?"
"알기는"
터번의 남자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지요. 저희 어머님이십니다. 손님이셨군요"
"장남인 하리마토라고 합니다. 이쪽은 반려인 수미라고 합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둘째입니다. 니메르라고 합니다... 저 놈은, 그. 사마르라고 합니다"
수미라고 불린 여성이 자인의 자리에 차이를 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자인은 공손히 받으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식탁의 맞은편에는 터번을 두른, 하리마토라 불린 남자가 담담히 앉아있었다. 장남이라는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게 보였다. 셋 중에서는 제일 점잖게 행동했고, 연장자 나름의 침착함도 엿보였다. 무엇보다 구부정하게 아래로 굽은 뿔이 다른 형제들보다 조금 더 컸다.
둘째라는 니메르는 정돈되지 않은 흰 더벅머리를 한, 조금 산만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하리마토의 오른편에 앉아 불안한 듯이 맞은편과 형을 번갈아서 쳐다보는 니메르는 안쪽으로 말린 뿔과 아래로 축 처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세 형제 모두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미남인 쪽을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니메르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막내. 니메르의 맞은 편에 앉아, 탁자에 고개를 푹 박고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셋째는 사마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옅은 보랏빛이 도는 긴 머리를 올려묶고, 니메르처럼 안쪽으로 굽은 뿔을 한 주정뱅이. 얼굴은 보이지 않아 뭐라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 형제들과 비슷했으니 못생긴 편은 아닐 것이었다.
"소식은 들으셨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는..."
"예, 라자한에서 들었습니다. 종말 소동으로 타계하셨다고"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집안 사정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하리마토는 사마르가 뻗어있는 곳을 힐끔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마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손님도 맞이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도착하시자마자 실례를..."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사죄가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유열향에 머무르고 계신 동안 이 집을 자유롭게 써 주십시오. 손님 방은 늘 비워두겠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오시게 되셨습니까?"
"일이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자인은 품에 넣어두었던 소포를 다시 꺼냈다. 포장용지로 곱게 싸인, 흔들면 내용물은 존재하는 듯 무언가가 쏠리는 감촉은 느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 상자. 그것을 탁자에 올려놓고 하리마토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밀어보냈다.
"이건...?"
"고인께서 생전에 제게 보내셨던 물건입니다. 제 직업상 주소가 바뀌는 일이 잦아, 제때 물건이 도착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도 보내신지 한참 되어서, 제가 라자한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달이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다섯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꾸러미 쪽으로 향했다.
"내용물은 직접 만드신 옷이라고,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
하리마토는 의아한 듯이 자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습관인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그렇군요. 그런데, 그것을 왜...?"
"저는 용병입니다. 직업상 좋은 옷을 입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고인의 가족 되시는 분이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작업물이니, 틀림없이 저보다는 혈육께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꿈틀. 사마르의 몸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탁자에 눌려 납작해진데다 빨갛게 된 못난 얼굴이 드러났다. 다른 형제들도 당황한 듯 서로를 돌아보다가, 자인을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연 것은 니메르였다.
"아니, 그래도... 선물인데, 선생님이 간직하시는 게"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틀림없이 옷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고인께서도 그럴 바에야 혈족 분들께서 사용하는 것을 더 원하실 겁니다"
드르륵. 의자가 저만치로 밀려났다. "사마르!?" 주정뱅이 막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텁 하고 단단히 싸인 포장봉투를 잡아 끌어당겼다. "야, 너!" 니메르의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무언가에 홀린 눈으로 포장지를 풀어헤치는 사마르의 손에 제법 큰 크기의 나무 상자가 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뚜껑을 열어젖히자,
툭, 하고 반들반들한 질감의 사리가 떨어졌다.
"이건..."
"어머니 솜씨다"
옷을 본 하리마토와 니메르는 제각각 한 마디씩 말했다. 사마르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은 채 뚫어져라 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옷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어... 엄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마르는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기 시작한 얼굴을 옷에 파묻고 엎드렸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용한 방에, 이따금씩 코먹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인은 멍하니 협곡 사이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라씨를 들이켰다. 꿀꺽.
이른 아침의 유열향 항구는 인적도 없이 조용했다. 있는 것은 오직 대나무 다리 끝에 걸터앉아 맨발을 바닷물에 담근 자인과,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코 뿐.
"숙박비가 굳은 건 좋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인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결국 옷은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도통 놓을 생각을 안 하던 사마르 차지가 되었고, 자인은 그 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얻어먹고, 손님의 방에서 자게 되었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그렇게 고생한 편은 아니지만.
"어떻게 할까..."
거처가 결정된 이상 이 주변에서 일을 찾으며 다음 여행에 들일 돈을 모으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때 신세를 졌던 은인의 집. 오랫동안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다시 라자한으로 돌아가기에는 방값이 감당이 안 되었다. 예드리만 쪽으로 더 내려갈까.
문득, 보코가 고개를 들었다. 자인도 똑같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겼다. 터덜터덜 걸어온 방문객은 털썩, 엉덩이를 대나무 다리에 걸친 후, 머리를 싸맸다.
"앗, 쓰읍... 내 머리..."
사마르였다. 어제보다는 훨씬 멀쩡한 옷차림으로, 예의 반들반들한 다홍색 사리에 일본도까지 한 자루 차고 있었다. 다만 안색은 훨씬 피곤해 보였다. 얼마나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취할 정도였으니 숙취가 오고도 남을 정도일 것은 분명했다. 자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씨를 홀짝이며 골칫덩이 막내를 바라봤다.
한참 후에야 사마르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었다. 말없이 투명한 바닷물을 바라보다, 문득 신고 있던 샌들에 생각이 미쳤다. 아차, 소금기 때문에 망가지면 안 되는데. 느릿느릿 신발끈을 풀어 자인처럼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사마르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 미안했다"
불쑥 던져진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 자인은 잠시 생각했다. 저쪽이 먼저 반말로 접해왔으니 굳이 정중하게 대답해 줄 필요는 없겠지.
"뭐가"
사마르는 조금 놀란 듯이 자인을 쳐다봤다가, 잠시 분한 표정이 되었다.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지만.
"멱살, 잡은 거랑. 개짓거리 한 거랑..."
"됐어. 익숙해"
화가 난 건가. 어제의 예의 바른 태도와는 딴판인, 무뚝뚝한 반응에 사마르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미간에 잡힌 주름과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당연한가, 그런 꼴을 당했는데.
"진짜로, 미안했다..."
쩔쩔매며 고개를 숙이는 사마르를 흘끗 바라보고 나서, 자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다니까. 그렇게 빌 필요 없어"
철썩. 파도가 자인의 발목을 치고 지나갔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지나갔다. 사마르는 손가락을 꼬물대며 아래만 내려다 보았다. 자인은, 라씨가 맛있다고 생각했다.
"종말의 재앙때"
정적 속에서 사마르가 입을 열었다.
"나도 소식 듣고 사베네어로 달려왔지. 그런데, 형님들이 말리는 거야. 부정적인 감정을 품으면 야수로 변한다던가.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 게 뭐가 있냐고 물었지. 일단 말은 들었지만..."
두서 없는 이야기는 앓는 소리와 함께 중단되었다. 사마르는 다시 관자놀이를 붙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인은 여전히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라씨를 홀짝였다.
"섬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종말이 끝난 거야. 그리고 알게 됐지. 사실 어머니는..."
열심히 손을 내저으며 뭔가를 말하려다, 사마르는 결국 포기했다. 눈가를 누지른 사마르의 입에서 축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날부터 돌아가셨다는 거야"
꼴깍. 마지막 한 모금의 라씨가 입 안으로 사라졌다. 자인은 조용히 라씨가 들어있던 잔을 신발 옆에 놓았다. 사마르는, 또다시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형님들 탓이 아닌 건 알아. 어쩔 수 없는 것도 알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어떻게..."
그래서, 그렇게 술에 쩔어있었던 건가. 자인은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평선을 바라보며. 돌아보기에는 사마르가 훌쩍이는 소리가 너무 컸다.
"아무튼, 나는... 나는, 그냥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 그냥. 어머니 옷을, 그냥 준 거...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남긴 게 없으셨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다. 자인은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추억할 어머니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도움으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다면, 아주 조금은, 그런 결핍이 보답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거듭하다 보면, 타인에게 감사받는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 속에 있는 공허도 메워지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가 자인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별다른 삶의 목표랄 것이 없는.
"별로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진짜로 감사하고 있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여전히 술이나 마시고 있었겠지. 형님들 탓이나 하면서..."
사실, 누구보다 탓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었다. 섬에 진입하지 않겠다고 정한 것도 자신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더 가까이에서 돌봐드리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다. 단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너무 벅차서 형님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언부언 늘어놓던 말을 멈추고, 사마르는 힐끔 자인을 돌아보았다. 여행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남의 신세 한탄같은 건 듣고싶지 않겠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사마르는 발끝을 내려다 보았다. 목까지 푸른 바닷물에 잠겨 흔들리는 발을.
"나, 치유 마법은 잘 쓰거든"
슬슬 유리컵을 돌려주러 가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자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마르를 돌아봤다. 왜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사마르는 재빨리 품 속에서 마도서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당신 따라다니면서 도와주면 안 될까? 물론 공짜로"
자인의 눈썹이 사선을 그리며 미간으로 몰렸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가.
"아니, 나는..."
"있어봐, 그게, 은혜는 갚고 싶은데, 돈은 없거든. 내가 저축을 안 하고 살아서 말이지. 뭔가 주고 싶어도 그럴싸한 게 안 떠오르더란 말이지. 갑옷 광택제? 메가 포션? 그러다가 떠오른 거야. 뭘 줄지 모르겠으면, 그걸 만들 줄 아는 놈을 선물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서..."
"잠깐... 잠깐만. 굳이 뭔가 줄 필요는 없어..."
"그럴 수는 없지! 나도 양심이 있는 남자야. 뭔가 보답을 하지 않으면 미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이래봬도 나, 그리다니아에서는 꽤 잘나가는 파티 멤버 후보라니까? 치유도 할 줄 알지. 연금술도 할 줄 알지..."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게 편해서..."
"귀찮게는 안 할게! 이래봬도 나, 모험가 경력은 꽤 긴 편이거든!"
"약이나 도움 같은 건 당장 필요가..."
"언젠가는 필요해지겠지! 여행하다 보면 그렇게 될 거 아냐. 맞지? 그럴 때 내가 나서면 된다 이거지"
"정말 보답하겠다고 따라오려는 건 아니겠지?"
"진짜라니까 그러네! 그야, 물론, 정신도 차렸고 본업으로 돌아가자니, 이 참에 여행 동료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인은 이마를 짚고 하늘을 쳐다봤다. 일 났다. 이 녀석은 거절하더라도 아득바득 뒤를 따라올 기세였다. 뭔가를 주러 온 거지, 되려 혹이 늘어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난 재미없는 인간이야. 그래도 길동무를 삼고 싶다면, 그러던가..."
"진짜냐! 넌 참 좋은 녀석이야. 그러니까 이름이... 자인이라고? 따로 붙는 건 없지? 뭐... 성이라던가, 작위라던가"
"없어. 자인이면 돼. 그리고 질문 그만 해"
"에이, 이제부터 같이 여행 다닐 사이 아냐. 서로 기초적인 정보는 교환해 둬야지! 나이는? 고향은 어디야?"
"23, 울다하. 이제 제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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