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빛전 / 그 연금공방의 비밀

잠든 모험가와 그를 깨우는 그라하 티아

‘모험가가 잠들었다.’

이는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깨어나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거나, 누군가의 계략에 휘말렸단 말도 아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말 그대로…… ‘잠들었다’라는 뜻이다.

처음 그를 발견한 것은 함께 새벽의 혈맹에 속해있는 동료, 그라하 티아였다. 그는 유독 묘한 기분이었다고, 오늘 자신이 느낀 감정을 회상한다. 늘 한가한 틈을 타서 말을 걸어오던 모험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 의문을 가진 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그것만 두고 본다면 이상할 건 없었다. 모험가에게도 자신만의 일상과 일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당장 자신만 해도 매일 발데시온 위원회로 쏟아지는 의뢰 덕에 여유 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다. 찾는 이도 많고 그만큼 해야 할 일도 많은 모험가라면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맞아. 오히려 매일 연락하는 쪽이 더 부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새벽의 동료들과는 그렇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있잖아?

그라하 티아는 묘하게 허공에 뜨는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곱씹었다. 알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떠오르는 약간의 아쉬움. 하지만 신경을 쓰기엔 미묘한 것. 입 밖으로 채 내뱉을 수 없으며 유별나게 생각하는 것조차 이상한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일렁이는 기분이라거나 마음에 걸리는 유난스러움은 그라하를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끝없는 고뇌 끝, 그라하 티아는 결국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두고 모험가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이러다가는 될 일도 안 되겠다 싶던 모양이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라며 자신을 위안하듯 되뇌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을 지은 채 특별할 것 없이 언제나처럼 링크펄을 울렸다.

“흠, 크흠.”

신호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라하 티아는 선연히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쿠루루랑 지난 조사 결과에 대해 살펴봤는데, 궁금한 점이 있어서.’ 따위의 이유-핑계를 속으로 만들어뒀다. 오늘 바쁘지 않다면 발데시온 위원회 분관을 방문해달라고 한 후 저녁을 함께할 궁리도 했다. 분명 그랬지만……. 그의 계획 아닌 계획은 이어지지 않는 링크펄에 의해 점차 멀어져갔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 모험가. 몇 번이고 울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반응이 없는 모험가. 묘하게 겹쳐 떠오르는 언젠가의 기억 속 모험가. 그라하 티아가 애써 만들어낸 밝은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생각하지 마, 그라하 티아. 괜찮아. 그때와는 달라. 그라하는 한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그래, 잠든 걸지도 모른다. 지난밤에 늦게 잠들어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겠지. 링크펄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든 게 아닐까. 자유로운 모험가인 그에겐 종종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아니, 기우다. 분명 해가 저물어갈 즈음 이제야 깨버렸다고, 하루가 전부 허탈하게 지나가 버렸다고 조금은 우는 소리를 내며 연락해올 것이다. 그래, 그러니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

인내를 시험하며 기다리기를 몇 시간. 결국 몇 번 인가의 연락을 더 취하고도 그는 대답을 돌려받지 못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끝내 급한 일조차 손에 잡히지 않게 된 모습을 보다 못한 쿠루루가 조용히 그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빵이 담긴 바구니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쿠루루?”

“이거, 오지카가 가져다준 빵이야. 그 사람이 좋아할 것 같으니 전해주고 와줄래?”

“어, 어? 이걸? 하지만 맡은 일이 아직…….”

“그 건은 내가 맡을게. 일은 어렵지 않지만, 자리를 비우기는 힘들 것 같아서. 그러니까 부탁해도 될까, 라하?”

쿠루루는 그라하 티아를 분관에서 내쫓다시피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걸 보면 누가 봐도 명백한 핑계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게 한 건가. 그렇게 티가 났나. 난 역시 아직 멀었구나. 빵이 담긴 바구니의 온기는 반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할 말 없이 내쫓긴 그라하의 머뭇거림은 잠시였다. 그는 두 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뗐다.


언제나 여기저기 번쩍이며 돌아다니는 모험가지만 그가 오래 발을 두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라하 티아는 머릿속으로 그가 있을법한 곳을 꼽는다. 첫 번째로는 림사 로민사의 모험가 거주구인 안갯빛 마을. 그곳에는 그가 속한 자유부대의 아지트가 있었다. 모험가는 주택 앞의 바다가 마음에 든다면서 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라하 또한 그의 손에 이끌려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었기에 기억은 비교적 선명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면 역시 거기려나 싶은 마음에 길을 더듬어가며 안갯빛 마을을 찾았으나, 그곳에 모험가는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흑와단 군령부인가. 아니면 그가 맡은 모험가 소대? …라고 생각하며 찾은 흑와단 막사에서도 그는 자리에 없다는 말만이 전해져왔다. 이어 방문한 이슈가르드와 창천 거리에서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럼 르베유르 저택인가? 아니면 누메논 대서원? ……둘 다 아니었다. 그럼 템페스트의 아모로트… 는 일단 예외로 두자. 그 외에도 몇 군데가 더 있긴 했는데.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하나둘 선택지를 지워가던 그라하는 어느 순간부터 무작정 그의 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어디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점차 자신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라하 티아. 진정해. 이대로는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그렇게 한 번 숨을 고른 그라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분하게 생각을 잇는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곳이 분명히 있었으므로 머릿속에 나열된 장소를 하나씩 지워본다. 림사 로민사, 샬레이안과 이슈가르드는 확인했다. 울다하를 비롯한 다날란 지방도 아니고, 제1세계에 간 것도 아닐 것이다. 동방이나 갈레말드 지역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남은 건…….

아.


“……여기라면.”

끝내 모험가가 있을법한 장소 한 군데를 더 떠올린 그라하 티아는 그리다니아에 위치한 모험가 거주구, 라벤더 안식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백합 언덕 개인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은 옛날부터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온 벽에 책장을 가득 세워두고는 모험 중 얻은 책들을 꽂아 넣는 용도의 방. 하지만 모험가는 정말 자료가 필요한 때가 아니고서야 이곳을 잘 찾지 않았다. 늘 어두운 조명과 먼지 쌓인 책장만이 맞아주는 공간으로 남아있던 곳…….

하지만 바로 얼마 전, 그가 이곳을 자신의 연금 공방으로 개조할 거란 이야기를 흘리듯 남겼던 것이 떠올랐다. 직접 개조할 거라며 꽤 자신만만하게 말했었지. 방에 두라며 꽃다발도 선물했었으니, 이제 떠올린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있어?”

그라하 티아는 방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하지만 안에서는 목소리는커녕, 기척도 없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전에 그에게 받아버렸던-사실은, 그가 억지로 쥐여주었던- 예비용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허락은 분명 받았으니……. 그리고 긴급 사태니까……. 자신에의 변명이 이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방안은 적막하다. 그저 방 어디엔가 있을 오케스트리온으로부터 조용하고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사람이 각자의 방을 이용하고 있는 거주구 건물은 그리 넓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을 메운 책장. 이전에 보관해온 책을 그대로 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어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거대한 연금 기구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는 연금 솥이 두 개 더. 온갖 재료가 들어있는 재료 장과 물약 트레이. 쌓인 책과 문서들. 제자리에 꽂지 않은 책들로 인해 엉망으로 어질러진 바닥. 테이블 위에는 언젠가 자신이 선물했던 꽃다발과 편지. ……이상한 것 없는, 평범한 연금 공방의 모습.

그라하 티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서재 겸 공방의 풍경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는 이 안에 있다고. 그렇다면 분명 그의 장난기 많은 영웅이 이 공간에 장난을 쳐두었다는 것이리라. 이 정도의 예상은 얼마든 가능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어떤 형태로? 그라하는 천천히 방 안을 한 바퀴 돌며 방금 눈에 담았던 풍경을 되새겨 하나씩 다시 곱씹어보기로 했다. 배니시…… 는 아닌가. 그런 마법은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럼 공중에? …아니, 그것도 아냐. 연금 솥이나 책상에 무언가 장치라던가. 이것도 아니고. 그라하는 모험가가 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걸 확신하는 순간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아까와는 달리 충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주변을 신중하게 살피던 그는 끝내 한쪽 벽, 거대하게 펼쳐진 책에 가려 그늘진 책꽂이 앞에 선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책장이 갈라지듯 열리고, 그 안으로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간단한 듯 묘한 장치였다. 누가 설계하고 설치했을지는 명확했다. 눈앞에 보이는 몇 단 안 되는 계단을 오르면 작은 등이 켜진 침대에 인영이 보여왔다. 그라하 티아는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쉰다. 그래, 그렇구나. 여기서 잠들어있던 거구나. 다행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가까이 걸음 했다. 그리곤 곤히 잠든 낯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침대 끝에 걸터앉고는 손을 뻗어 잠든 이의 조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일어나……."

하지만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그의 영웅은 눈을 뜨지 않았다. 역시 피곤이 쌓여 깨지 않고 잠든 것이리라. 그라하 티아는 얌전히 곁에서 기다리는 쪽이 좋을지, 더 늦기 전에 깨우는 것이 좋을지 고뇌했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도 괜찮은 건지. 깨어나면 배가 고플 테니 먹을 거라도 더 챙겨오는 편이 좋지 않을지. 하지만 그의 고민이 얼마 이어지지 않은 시점, 긴장이 풀린 바람에 놓쳐버린 빵 바구니가 침대 곁의 서랍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그 실수로 인해, 그제야 그라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라하 티아는 먼저 야슈톨라에게 연락해 이곳으로 와줄 수 있을지 물었다. 야슈톨라라면 모험가가 무사한지 확인해줄 수 있으리라. 믿음직스러운 새벽의 ‘마녀’는 바로 움직이겠다고,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그럴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마토야에게도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마토야와 함께 있던 모양이었다. 그라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혹시 모르니 울다하의 연금술사 길드에도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모험가의 이름을 대자 길드 마스터가 직접 찾아오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분명 오래 아는 사이였겠지. 이 에오르제아에 그가 모르는 이가 존재하긴 하는 건가 하고… 지금 상황에 눈치 없이도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라하 티아는 숨 한번 돌릴 틈도 없이 움직였다. 두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 이상한 점은 없는지 샅샅이 살피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책장에 이상한 마도서는 없는지, 독을 주입 당한 흔적은 없는지, 못 보던 수상한 물건은 없는지……. 그는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가능성을 세고, 하나씩 지워갔다.

‘괜찮아, 해결할 수 있어. 그때와는 달라. 제대로 숨도 쉬고 있고……. 침착해, 그라하 티아.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그는 잠들었을 뿐이다. 죽지 않았어.’

원래도 짐이 얼마 없던 모험가. 가진 것이 얼마 없다며 그게 편해서 좋다고 말하던 모험가. 그가 늘 버려두던 이곳에 가구를 들이겠다고 말했을 때 그를 오래 알던 이들은 옅게나마 풀어진 표정을 지었었다. 비록 일하는 곳과 쉬는 곳을 구분하지 않고 구겨 넣었다는 점에서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모험가는 그마저도 웃어넘겼던 것을 기억한다. 모험가의 특성상 한곳에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할텐데도 이렇게나마 ‘거주’할 곳을 둔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으니 모두 더 말을 얹지 않았었지. 그렇게 그라하 티아는 그때의 기억을 곱씹으며 그가 직접 하나씩 꾸렸을 방 안을 손끝으로 짚어갔다. 펼쳐져 있는 책, 종이에 날리듯 적힌 약재들, 주변에 흩어져있는 꽃잎들과 뿌리들. 연금술에 박식한 편은 아니었지만, 책에 적힌 재료들과 대조하여 목록을 만드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래. 모험가가 신경 쓰여 어찌할 바를 몰라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연금술사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세베리안과 야슈톨라가 모험가의 거주실에 들어섰다. 야슈톨라는 모험가를 꼼꼼히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 사람은 무사해 보이는군요. 목숨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잠들어 있는 상태……. 오히려 그렇기에 원인을 단번에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세베리안은 야슈톨라와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리고는 그라하 티아가 먼저 정리해둔 자료들을 뒤적였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군.”

“정말입니까?”

연금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 물음과 함께 세베리안은 조용히 종이를 넘겼다. 모험가의 책상 위에 놓인 알 수 없는 수식들이 가득 적힌 종이 뭉치 중 한 묶음이었다.

“연금술이라는 건 지금 시대에는 약을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야. 온갖 다양한 약이 연금술을 통해 만들어지니까. 몸을 치료하는 약, 능력을 높이는 약, 그리고…… 독약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재료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이 열리는 게 바로 연금술이다. 오묘하고도 심오하지. 불순물이 섞이면 조제 시 의도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오히려 해로운 약효가 나타날 수도 있고.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 세기의 명약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모험가가 스치듯 설명했던 이야기가 가볍게 그의 입을 타고 이어졌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잠든 건 연금술 때문이란 뜻인가요?”

“저기 책상 위에 놓인 약초들. 사프란과 벨라돈나라고 하는데, 거기엔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어. 그리고 전갈에는 마비 독이 있지. 수은까지 더해 모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약재들이야. 하지만 옆에 있는 건… 활력을 강화하는 약재. 라자한에 다녀왔다더니 거기서 가져온 모양이지? 이 재료를 비율을 맞춰 조합하면……!”

성분이 어떻고… 공기가… 시간별로 열의 차이를 두면… 끓는 점이… 상호 작용을……. 분명 어떤 면에 있어서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마다치 않는 그라하 티아나 야슈톨라에게도 어찌 보면 관심이 갈 주제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라하는 끝없이 말을 잇는 세베리안의 말을 끊어보려 애썼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기나긴 이야기를 겨우 요약하자면 그 성분에 의해 모험가가 중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참, 나의 제자가 무모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발상이라니. 나의 제자답다고 해야 할지! 흥미로워!”

세베리안은 모험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사고의 전환을 극찬했다. 하지만 그라하 티아에게는, 그가 말하는 내용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말이 복잡하다거나, 빠르고 알아듣기 어렵다거나, 연금술 전문성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모험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저 잠들었을 뿐이라고 재차 확인하는 이 순간에조차 그는 꼭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라하 티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척 숨을 확인하면, 야슈톨라는 그의 손길을 눈치챘음에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이런 조합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말이야. 분명 여기에 체내 흡수율을 높이는 원리를 더해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역으로 수면과 마비 성분을 휘발시킬 수 있는 약을 만든다면… 아니, 오히려 수면제로 사용할 수도 있을 거고……. 아주 기발한 생각이야. 이를 응용한다면 치유제로써 훌륭한……!”

“흠, 흠!”

세베리안은 호쾌한 표정으로 끝없이 말을 이었다. 그를 마주하던 야슈톨라가 헛기침했고, 그라하는 그제야 야슈톨라의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고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먼저 다급히 말문을 떼며 그의 혼잣말을 끊어냈다. (야슈톨라가 폭발하기 전에.)

“그럼, 깨어날 방법은 있는 겁니까? 일단 마토야님으로부터 연금 솥의 불을 끄지 말라고 들어서 유지하긴 했는데……”

“성분 파악이 끝났다면 이 사람을 이곳에서 옮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언제까지고 원인이 된 성분이 자욱한 이곳에 이 사람을 두고 싶진 않거든요.”

“아니. 이곳에 있는 쪽이 안전해. 이미 공기 중의 성분은 휘발되어 사라졌으니 굳이 안정된 육체를 이동시킬 필요는 없지. 그리고 이곳에는 온갖 약재들과 연금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잖아? 유능한 조수가 모아둔 것들이.”

“그 말은……!”

“일단 일차적으로 해독할 수 있는 약을 증류기에 올려두고 가겠다. 한 방울씩 떨어질 테니 이 병에 가득 차면 먹이도록 해. 깨어난 뒤엔 직접 확실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안심한 그라하 티아를 두고 연금술사 길드 마스터는 돌아갔다. 이어 야슈톨라 역시도 마토야에게 돌아갔다. ‘잘 부탁해요.’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부탁? 무엇을?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해독제가 조그마한 약병에 담기고 나서야 그라하 티아는 깨달았다. 이 약을 영웅에게 먹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 되었다는 것을.

그라하 티아는 맑은 액체가 담긴 병을 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될 법한 작은 병이었다. 한 모금이나 될까 싶은 양이다. 그라하는 조심스레 잠든 모험가의 입가에 약을 한 방울 흘려보내 보았지만, 약이 그리 쉽게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럼,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갑자기 모든 회로에 불이 들어온 듯 생각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저 그를 구하기 위해서고. 큰 사건도 아니다. 중독된 사람에게 해독제를 먹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냥 그 정도의 일. 의식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지.

“…….”

그라하 티아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모험가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늘 영롱한 빛으로 자신을 마주하던 눈동자는 감겨있다. 속눈썹이 길구나. 피부가 맑다. 모험가들은 온갖 흉터를 달고 산다지만, 그의 영웅은 비교적 깨끗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치유사로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일까? 자신에게 상처가 남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성정임에도 그랬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 흉터가 남아있다는 걸 그는 전해 들었지만…… 평범한 사람처럼 그것을 속상하게 여길 수도 없다. 그의 상처 하나하나가 모두 그가 걸어온 길과 살아온 시간의 증명이었다. 그는 영웅이니까.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늘, 땅, 바다에 사람은 물론이요, 세계, 우주, 미래까지도 구한 영웅이니까. 거기에…… 어리석은 자신 또한 구한 영웅이니까.

문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 이 행위에 부끄러움은 남지 않을 것이다. 치기 어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니까. 젊은 날의,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하는 건……. 너를 생각하는 건 내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라하 티아는 병을 손안에 쥐고는 매끄러운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숨결을 불어 넣어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엔 마음의 힘이 얼마나 작용하는 것일까.

옛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조각가가 자신의 이상을 담은 여인을 조각했다가 그대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그는 결국 신에게 간청하여 조각을 사람으로 만들었다던가. 조각에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던가. 어째서인지 그라하 티아는 지금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와 닮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에.

그는 자신의 이상인가? 입을 맞추어 숨을 불어내면, 깨어나서 자신을 바라보아주는 꿈 같은 존재인가? 애초에 이건 나에게서 이름을 선사 받고, 오로지 나를 바라보며 살길 바라 행하는…… 신실한 사랑의 증명을 위한 입맞춤인가? ㅡ아니, 전혀 아니다. 제 손끝에 닿은 온기는 그리던 이상을 뛰어넘은 존재이며, 삶은 주는 것이 아닌 주고받는 것. 그라하 티아는 이어지는 자문자답에 그저 미소 짓는다. 맹세컨대 그 누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도 더 크고 깊은 마음이 이곳에 존재한다. 이 마음만큼은 누구도, 그 어떤 신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 감정의 이름을 무엇이라 붙이면 좋을까.

“그러니까, 나는 이 순간을……. 네가 모르길 바라.”

그렇게 작게 되뇌며, 그라하 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유리관도 백악의 탑도 아닌 라벤더 안식처에 잠든 공주님은 그렇게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라하?”

“……잘 잤어?”

그리고는 부스스하게 눈을 비비고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본다. 평화로운 낯의 모험가를 마주 보던 그라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모험가는 그라하 티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잠에 취해 있는 것인지, 눈을 감은 채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응, 좋은 아침. 이상하게 몸이 무거운데……. 그보다 무슨 냄새…… 아? 내 약!”

그는 우당탕탕, 자신의 연금 솥을 살피러 뛰쳐나갔다. 그 “약”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지.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비명 어린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 옆에 기대서있던 그라하 티아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도감 이전에 씁쓸하고 달큰한 약의 끝맛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라하 티아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는 제 손안에 낯을 묻었다. 안도의… 혹은 이유 모를 묘한 배덕함의 한숨이 피어올랐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자, 그라하 티아.

“라하! 이거 누가 남긴 메모야?! 세베리안이 다녀갔어?!”

“어? 아, 그게……!”

물론 그의 영웅은 늘 그렇듯 생각할 시간 따위, 주지도 않았다. 다급하게 침실 문을 열고 나서며 그라하 티아는 생각했다. 문제의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고.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뿐인 해프닝으로. 이렇게 끝났다고.


그리고 며칠 후, 올드 샬레이안. 야슈톨라는 앞장서는 알리제와 뒤따라가는 모험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바닷가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르베유르 부인이 저택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갖자고 한 모양인데, 어쩌다 보니 발데시온 분관에 있던 그라하 티아와 누메논 대서원에 있던 야슈톨라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버린 것이 이 외출의 이유였다.

즉, 동행인 중 한 명인 그라하 티아는 제 곁에 서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던가. 제 눈치를 살피듯 슬슬 다가서는 그라하는 분명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야슈톨라는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있을까 싶어 고민하다가도, 이 가여운 새벽의 경력직 신입자에게 먼저 한마디 건네주기로 했다.

"말 안 해요."

앞뒤가 모두 잘린 말이지만 두 사람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야슈톨라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라하 티아는 오히려 그 덕에 귀와 꼬리가 퍼뜩 서는 듯한 기분이 들어 몸을 잠시 움츠렸다. 그래, 물론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게 맞았지만! 눈치가 빠른 새벽의 마녀님은 늘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곤 한다니까! 꼭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할지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속으로 약간 앓는 소리를 삼킨 그라하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고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진다.

"...... 고마워. 저 사람도 모르고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어머나. 저라면 그냥 말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고 보는데요.”

“아니…! 분명 곤란해할 거고, 이미 잘 해결되었잖아? 거기다 특별한 의미가 있던 것도…….”

“모르는 쪽이 더 곤란하진 않고요? 설마 입맞춤이 처음이었던 건?"

“하지만 그건 입맞춤이라기보단…….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야슈톨라!”

“정말인가 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침묵.

“저, ……저녁!”

“네?”

끝에 이어진 목소리에 야슈톨라는 눈을 깜빡였고, 그라하 티아는 미묘한 낯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 투명한 눈빛에 무엇이 비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붉어져 있을 제 낯을 들키지 않길 바랐다. ……이미 틀린 것 같지만.

“티타임이 끝나면 다시 누메논 대서원으로 갈 예정이지? 그러니까, 라스트 스탠드에서. 그래. 저녁……. 내가 살 테니까.”

“어머… 뭐든 주문해도 괜찮단 뜻이겠죠?”

“그래, 뭐든지! 그러니까…!”

“후후. 그거 오랜만에 좋은 제안이네요. 하지만 당신과 단둘이 식사했다간 금방 재미없는 일에 휘말릴 것 같으니.”

“저기, 그건 무슨 뜻이야…?”

“다 같이 먹는 거로 할게요. 당신의 지갑 사정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고.”

야슈톨라는 그라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앞서 걸어가던 모험가와 알리제를 불렀다. 야슈톨라가 그라하 티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는 동안 벌써 저만치 앞서간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느지막이 몸을 돌렸다.

“여기 있는 발데시온 위원회의 현인께서 모두에게 오늘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군요. 라스트 스탠드에서요. 무엇이든 주문해도 괜찮다는데요?”

“뭐? 라하. 정말 괜찮겠어? 당연히 우리 집에서 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응? 라하,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좋은 일이랄까…….”

그라하 티아는 야슈톨라의 웃음기 어린, 조금은 짓궂은 목소리를 귓가에 흘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모험가를 한눈에 담았다. 태양이 기울어 노을 진 올드 샬레이안의 바닷가, 살리아크 상에서부터 쏟아지는 물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그 끝에, 영롱하게 빛을 머금은 맑은 눈동자. 지금 이 순간 그 속에 올곧게 비친 건 바로…….

눈치 없이도, 이 순간이 어찌나 마음에 가득 차던지.

“……비밀이야.”

그 말만이 그라하 티아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뭐어?! 무슨 일이 있긴 한 거구나? 뭔데. 무슨 일이길래?”

“라하. 발데시온 위원회에 좋은 일이라도 들어온 거야? 쿠루루는 별말 없었는데.”

“아니면 역시 알라그의 유산이 발견되었거나?”

“그런 거라면 나도 가고 싶어! 뭔진 모르겠지만 나도!”

그래. 아직은 비밀이야. 아직은 무엇도 말하지 않을 거야. 무엇도 전하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다음에. 다음에 알려줄게.”

다음에, 언젠가 다음에. 이 모험이 이어지고,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또 언젠가는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무엇도 묻지 말아줘. 무엇도 답하지 않을게. 무엇도 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조금만 더 이대로.

그라하 티아는 치사하다는 둥, 반칙이라는 둥, 제게로 달려와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그들을 뒤로 스쳐 지나가며 앞서 걸음을 옮겼다. 언덕길을 오르며 다리를 건너는 동안, 꿈도 이상도 아니고 허구도 거짓도 아닌…… 현실과 진실로만 이루어진 순간 속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저 달큰하고 씁쓸한 끝맛이 입 안에 다시금 맴돌았다.

……그래도 좋았다.


2022. 11. 15.

예에에에엣날부터 갖고 있던 아파트가 있었어요

n년전에 서재로 꾸며두고 쳐다도 안 보고 있었는데... 가끔 새로운 꽃이 나오면 화분에 꽃 키울때나... 가곤 했는데...

이번에 다른 사람들의 하우징을 보다가 너무 신기해서 좀 만져봤다고 하네요

근데 하우징하면서 내내 든 생각은... 가구 수 부족해... > 가구 수 부족해서 창문을 얼마 못 놔... > 환기... 되나 이거... > 애초에 이거 옆에 침대에서 깜빡 잠들면... 막... 약 연기때문에 죽는 거 아냐... 일까요...

거기에 +로 일과 쉼터 구분하라고 혼났을듯... 이라는 말을 엄청 들었을 것 같달까...

그래서 거기에 한스푼 얹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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