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FF14/에스티니앙+프란셀] 상처

잃은 사람끼리의 이야기

티스토리에 17년 3월 16일()에 올렸던, 아주아주아주아주 오래된 글을 아주많이() 다듬어서 이쪽으로 재업합니다

* 시점은 모험가가 용머리 전진기지에 처음 찾아가기 전이지 않을까요. 아주 좋게 쳐줘도 2.4 빙결의 환상 전…?

* (논CP글) 에스티니앙 +프란셀. 가까운 이들을 용족 관련으로 잃은 사람끼리의 이야기.

* 헤드캐논 주의 + 효월이 나온 지금이라면 뭔가 많이 설정에서 벗어난 게 있을 수 있겠죠. 그치만 이것이 창천시절에 쓰였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바이며(구구절절)


커르다스 중앙고지에는 때때로 용의 권속이 출현하곤 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하얀테 전초기지였지만, 용머리 전진기지 주변에서도 종종 출몰했다. 아마도 길을 잃었을 그놈들은 전진기지 주변에 마물화된 짐승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기에 평소처럼 마물과 짐승을 경계하러 나섰던 기병들은 용의 권속을 발견하면 조금 허둥대면서도 자기네 헤더에게 발견한 것을 고했다. 물자도 인적 자원도 후달리기 마련이므로, 상사에게 알려봐야 이슈가르드 본국에서 마뜩한 인원이 파견되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본 기지에 있는 동료들의 지원은 받을 수 있으니까.

이번 발견자는 아유나르트 가의 기병이었다. 고로 제일 먼저 보고를 들은 이는 프란셀 아유나르트라는 뜻이었다. 입가에 흰 김을 피어올리며 헐떡이는 목소리를 들은 아유나르트 가 막내 아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잡무를 처리하던 깃펜이 멈추자, 순찰 로테이션을 적어나가던 종이에 검은 잉크가 둥글게 퍼졌다.

“용이?”

“네, 하얀테 전초기지 쪽에서 넘어온 와이번 같습니다. 총 다섯 마리인데….”

말을 흐리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전달됐다. 프란셀은 투구 속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병사에게 손을 들어 굳이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어차피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늘 그랬듯이, 저희 기병의 머릿수가 모자라 힘에 부치는더러 가뜩 높지 않은 사기마저 다 꺾였다는 거겠지. 그러나 그게 꽁지를 내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승부가 되지 않을지라도 조직의 장이 나서는 것은 대체로 사기를 고양시키며, 기가 꺾여서야 될 것도 안 된다는 건 잘 안다. 프란셀은 속으로만 장탄식을 뱉고서 사대 명가의 귀족 자제다운 침착함으로 입을 연다.

“좋아. 나도 가도록 하겠네. 전원, 출진 준비를.”

지금 제 흉곽을 가득히 채운 것은 무엇일까. 전투는 제 성정에는 썩 맞지 않는다는 불편함? 오늘을 넘기지 못할 아는 얼굴이 생길 거라는 슬픔? 아니면 스스로 용의 권속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러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니,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영원히 떨궈내지 못할 앙금이라는 걸 오래 전부터 인정했다. 이 시대에 저는 어울리지 않음을, 이 자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니까 프란셀 아유나르트가 용을 떠올릴 때 그 심상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억울함이었다. 분노를 닮은 원통함. 그건 말을 떼기 전부터 들어온 정교의 가르침이나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을 적부터 이어내려온 용시전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희 형님을 기어이 사지에 묻어버린 그 족속.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줄 힘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형님 대신으로 아유나르트 가 전진기지를 이어받았다지만 어디까지나 구색 맞추기라는 것을 안다. 기사로서의 소양이 워낙 부족한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얼마 안 되는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융통하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것만으론 가파른 추락을 완만하게 하는 게 전부였다.

전략을 아무리 잘 짜더라도 그걸 실제로 실행할 인력은 늘 부족했고, 그렇다고 일단 장인 제가 앞장 서봐야 실질적인 화력이 크게 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악점으로 발목을 잡았다. 스스로 사지에 앞장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부하들만 전선으로 몰아간다는 죄책감은 명치께에 늘 무겁게 얹혀 있었다. 아유나르트 가의 막내 아들을 아는 그들은 그런 마음씀씀이만으로도 괜찮다고 웃곤 했으나 그는 항상 그것만으론 모자라다고 속으로 절규했다. 형님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도무지 요원했다.

벽난로가 켜진 오두막에서 벗어나 설원을 걷고 있으면 눈발이 몰아치는 찬 공기가 폐부로 스며든다. 그 따가운 추위를 받아들이고 있노라면 마음은 차라리 편했다. 비록 그 반대편 저울에 올라간 것이 저희 모두의 목숨이어도. 현장에서 전황을 읽어내며 인력을 끊임없이 재배치하며 진형을 가다듬더라도 애시당초 용을 잡는 데에 특화되지도 않은 기사단을 이끌고 와이번 다섯을 상대하는 것은 좋게 쳐줘야 공멸이 끝이었다. 최악은 당연히 그것들에게 마땅한 부상도 입히지 못하고 전멸해서 와이번이 성도 근처까지 날아가게 두는 거였고. 지금 제 등 뒤에서 오열을 맞추어 걷는 십 몇 명의 저희 기병 모두도 그 사실을 알 거였다. 언제나 전시인 이슈가르드에서 기지에 최소 인원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출동한다는 건 그런 뜻이다. 눈밭을 서걱거리며 나아가는 발소리들은 차라리 장례행렬처럼 비장하다.

‘알고 있어,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

저만치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났다. 있어야 할 목소리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음은 조금이나마 기뻤다. 전갈을 받고 도착하기까지 삼십 분은 지났을텐데 그걸 어떻게든 버텨주고 있었나보다. 뒤편에서 치유사 둘이서 급하게 치유 주문과 포션을 준비하는 낌새가 났다. 저마다 병장기를 고쳐쥐는 소리도 났다. 프란셀 역시 검을 뽑아들었다. 바로 진군 명령을 내리는 대신, 그는 전갈을 가져왔던 발 빠른 병사에게 하얀테 전초기지 쪽에 지원을 요청하고 오라고 일렀고 그 후에야 말 대신 행동으로 전투 개시를 알렸다.

전투에서 밀릴 거야 뻔히 아는 일이어서 속이 쓰리진 않았지만, 도중에 헐레벌떡 돌아온 병사가 어디에서도 원군은 기대할 수 없다는 깃발신호를 보내와서 프란셀은 크게 낙담했다. 하얀테 전초기지는 물론이요 용머리 전진기지(이쪽은 즉석에서 봉화를 올려 확인했댔다)에도 권속이 출현해 그쪽도 그쪽을 틀어막는 것으로 힘에 겨워한다는 거였다. 길을 잃은 와이번들인가 했는데, 어쩌면 용의 권속이 괴롭힘에 나선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승산이 없었다. 그나마 제가 현장에 있어 즉각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어 중상자는 있어도 아직까지 사망자는 없었지만, 처음과 비교해서 전선 자체가 크게 밀려 있었다. 전선은 이제 더더욱 빠르게 무너질 거란 예측과 더불어 프란셀은 선택의 무게로 목이 콱 졸렸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했다. 이대로 퇴각을 지시하면 부하들의 목숨은 그럭저럭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용과의 싸움에서 후퇴란 재판받아 처분당할 것도 각오를 해야할 일이었다. 그런 후폭풍을 생각하면 뭐라도 보험을 들어야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지휘관이 목숨을 걸고 이 습격 소식을 알리려고 했다거나. 장고할 틈은 없었다. 와이번 한 마리가 눈밭에 넘어진 기병에게 아가리를 쩍 벌리고 돌진하는 게 보였다. 그래, 목숨이 먼저다. 저들은 가족과 친구의 품으로 돌아가야지 않는가. 남겨진 자의 심정을 절절히 아는 프란셀은 도무지 이들에게 이상과 신념을 위해 산화하라고 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막 전원 퇴각을 외치려는 순간, 무언가 까만 형상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귀청을 잡아 뜯는 와이번의 기다란 단말마가 들리고 흰 설원에 길쭉하니 붉은 핏자국이 난다. 인지는 인식보다 늦었다. 와이번의 몸통에서 뽑혀 나간 것은 창이다. 저희 기병단이 쓰는 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서 샘솟은 붉은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고 선 자를 알아채는 것은 더더욱 늦었다. 창과 특유한 갑주. 그 두 조합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다. 다만 용시전쟁에서 말단이나 다름없는 저희에겐 너무 별천지라 깨닫고도 믿기지가 않았을 뿐. 아주 짧은 침묵 끝에 어느 병사 하나가 멀뚱히 중얼거렸다.

“푸른 용기사…?”

“…전원, 대열을 무너뜨리지 말고 지원하라!”

병사의 그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일순 멀거니 서 있던 프란셀이 물벼락을 맞은 듯이 퍼드득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사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런 호기를 놓치는 멍청한 지휘관일 수는 없다. 아유나르트의 막내는 주변을 훑으며 병사들을 독려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면에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와이번을 몰아댈 몰이꾼으로 역할을 바꾼다면 훨씬 수월하고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야 당연했다. 저희 대의 푸른 용기사는 아주 격을 달리하는 인물이니까. 일반적으로 훈련 받은 용기사 셋이 와이번 하나를 잡는다지만, 이 전란의 시대가 낳은 푸른 용기사는 토벌한 용의 자리수가 아예 달랐다. 오죽하면 분명 단순한 순찰 겸 토벌 임무였을 텐데도 혈혈단신으로 와이번의 둥지를 굳이 부득불 쳐들어가 와이번 로드의 멱을 따오겠냐는 말이다. 그런 자가 가세했으니 와이번 다섯 마리쯤이야 애프터눈 티 한 잔 마시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실은 저희가 와이번을 몰아댈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혹 푸른 용기사 님께서 저희를 귀찮아하면 바로 병사를 물릴 작정이었는데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질질 끌었던 전투는 지나치리만큼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 와이번에서 저 와이번으로 순식간에 옮겨 타며 목뒤 경추를 찔러 후비는 푸른 용기사는 저희 기병 서른 남짓이 중상을 입어가며 한참 동안 붙들었던 것이 고작이었던 와이번 다섯 마리를 무슨 장작 패기라도 하듯 사뿐히 끝내버린 거였다.

마지막 와이번의 몸뚱이가 눈 위로 엎어져 절명한 것을 재차 확인한 푸른 용기사가 창을 갈무리 하고서야 아유나르트 기병단 전원이 활이며 검을 슬금슬금 내렸다. 아직 귓가에 쇳소리가 환청처럼 쩡쩡 울려댔지만 대체로 고요한 설원의 그것으로 잦아들고 있다. 프란셀은 기병단 전원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을 곁눈질로 훑다가 말고 벌써 발길을 돌리려는 푸른 용기사의 앞을 막아서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용기사님.”

“용이 있어서 왔을 뿐이다. 애초에 이만한 놈들한테 쫄아 붙을 거면 말이지….”

그건 제 말에 대답한 것이긴 했지만, 거의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게다가 유독 서늘한 기세는 한파가 몰아닥친 새벽녘 설원처럼 무겁게 차가워서 목이 막히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잔챙이는 입 닥치라는 으름장일지도 모르지만—. 프란셀 아유나르트는 차라리 눈치 없는 자가 될지언정 침묵하기를 거부한다. 제 깜냥은 저 스스로 잘 알았다. 용시전쟁에 조금의 보탬도 안 될 티끌 같은 놈이란 건 잘 안다. 그렇지만 제게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 의지를 짓밟히는 것만큼은 결코 묵과할 수가 없다. 비록 이어지는 말이 떠뜸거려 볼품없더라도.

“저, 저는, 드래곤 족에게 죽은 형님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를, 모자라지만 대신 채우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치잇, 하여튼 그 빌어먹을 족속들이란.”

“…?”

죽은 형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자마자 푸른 용기사의 기색이 훅 바뀌었다. 하관만 겨우 보일 투구 아래에서도 표정 전체가 콱 일그러진 게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불쾌는 타인을 향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말의 가벼움을 질책하는 그것이었으므로 프란셀은 먼저 어리둥절했다가, 뒤늦게 푸른 용기사가 내비친 주눅듦이 제 의지를 긍정한 결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고명한 푸른 용기사가 마른 낙엽처럼 나약하기 그지없는 제가 주창한 싸울 이유란 것에 동의를 해줬다고? 대체 왜? 그렇지만 떠오른 의문은 소리가 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답이 나왔다. 니드호그가 파괴해 영영 사라진 것들은 수없이 많아서 뭉뚱그려 배우기 마련이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그 상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영 지워진 마을 중 판데일이라는 곳이 있었다. 저희 대 푸른 용기사의 고향이라던. 저 사람은 그곳의 유일한 생존자랬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 괴물 같은 실력에 곧잘 묻혀서 그렇지, 저희 푸른 용기사는 용을 증오하는 것만으로 이슈가르드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사람이기도 했지. 거기까지 생각한 프란셀은 곧 화들짝 놀란다. 저 역시 그에게 몹쓸 화제를 꺼낸 셈 아닌가. 심지어 그의 일화는 알음알음 다 퍼져있는데도. 그는 곧장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용에게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었죠. 말이 성급했어요. 죄송합니다.”

“…됐다. 오래전 일이고. 이제와서.”

무어라 더 달싹이려던 입술이 금방 다물렸다가 좀 전 용의 등에서 등으로 옮겨 타던 것처럼 이야기가 툭 튄다. 아까의 차고 무거운 목소리가 아니고 조금은 어깨힘을 뺀, 손아래 아우에게 건넬 법한 어조로.

“하여튼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빠질 놈은 그냥 빠지라고. 잘 먹고 잘 자란 풋내기까지 사지로 꾸역꾸역 밀려오지 말고. …난 그만 간다. 토벌 내역은 너희 몫으로 보고해.”

“네? 하지만!”

“보고서 쓰기 귀찮다.”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폭탄처럼 내던진 푸른 용기사는 그 말 한마디를 툭 남기고는 용머리 기지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마 푸른 용기사님은 저쪽에 나타난 와이번도 처리하려는 거겠지. 모습을 보아 하얀테 기지를 습격한 것들도 도륙내고 왔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와이번 수십 쯤이야 손쉽게 상대하시는구나. 벌써 설원 위의 까만 점 하나로 멀어진 뒷모습을 어벙벙하게 쳐다보던 프란셀은 곧이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와이번 시체도 처리해야 했고, 부상자도 많아 어서 치료를 시작해야 했고, 용기사님 말대로 보고서도 작성해 올려야 했다. 다른 기지들 상황은 푸른 용기사님이 갔으니 괜찮을 거다. 우리가 그러했듯.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보고서와 일지에 사망자 0명이라고 적는 게 얼마 만의 일일까. 중상자가 여럿 나왔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로 다친 자는 없었으니 치료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무사히 하루를 넘긴 자축 파티라도 조촐하게 열면 좋지 않을까. 아껴온 비품은 이런 때 써야지 또 언제 쓰겠나. 그런 생각을 하며 프란셀 아유나르트는 아주 오랜만에 즐거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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