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이 하룻밤 사이에 지나가더라도
지인 리퀘스트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암흑기사 Lv.50 잡 퀘스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가 없으며, '그'로 지칭된 인물은 어떤 성별로 읽어도 무관합니다.
빛의 전사는 배가 고팠다. 하지만 어둠과 별빛, 기억뿐인 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인지한 두뇌의 착각일 것이다. 최소한 여기서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 다행이지. 내 머릿속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마침 몸 오른편을 스쳐가는 기억의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 표면에는 광활하게 패인 운석 구덩이 앞에 주저앉은 누군가가 비치고 있었다. 성별도 종족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루엣이었지만 그가 느끼는 상실감과 슬픔, 좌절, 경외감에서 비롯된 공포 등의 감정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이라도 좀 붙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수정의 빛을 받지 못해 그늘진 왼편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모험가는 격렬히 동의했다.
그 뒤로 크고 작은 기억의 수정들이 곁을 유영하다가 멀어졌다. 모험가는 수정이 뿜어내는 빛을 일부러 외면하지는 않았다. 눈을 감거나, 빛을 피해 몸을 돌리면 주위를 맴돌던 다른 수정의 기억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쏟아지던 감정의 결이 순식간에 바뀔 때마다 에테르 멀미보다 더한 감각이 찾아왔다. 온 영혼을 통째로 뒤흔드는 듯 폭력적인 어지러움…. 쌍동선에서 겪은 멀미보다 더한 게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모험가는 내심 투덜거렸다. 텔레포가 이렇게 위험한 건 줄 알았더라면 세 걸음에 한 번씩 써 대지는 않았을 거라고.
수정의 빛을 쬐며 무수히 많은 세계의 기억을 들여다볼수록 빛의 전사는 조금씩 마모되었다. 그 중 좋은 기억이 없지는 않았지만 멀어진 뒤에도 오래 잔상을 남기는 건 불행한 기억들이었다. 마침내 모험가는 자신이 겪었던 일 역시 별처럼 많은 불행 중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불행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왔으나 주제를 뜯어보면 참으로 구태의연했다. 세계가 쪼개진 이후로 아씨엔들은 쭉 이런 걸 봐 왔을 것이다. 그들이 시간을 넘나들진 못해도 공간을 가로지를 수는 있었으니까. 동족을 되돌리겠다는 열망과 불완전한 것들에 대한 환멸이 합쳐졌으니, 현생 인류와 자신들을 분리해 보는 그들로서는 아무래도….
순간 모험가는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흔드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당신이 또 그 검은 새처럼 이상해지는 것 같기에 방해 좀 했습니다. 슬슬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우리가 이곳에 떨어지게 된 경위는 기억합니까? 경위랄 게 있었던가? 평소처럼 1세계의 에테라이트로 텔레포를 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여기였다. 처음 1세계로 소환될 때, 그리고 엘피스에서 돌아올 때 통과한 시공의 틈새.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증거는 없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직감뿐이었다. 아마도 주위에 널린 수정 중에 이런 공간에 대한 정보를 주는 기억이라도 있었던 거겠지.
질문이 이어졌다.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난 것 같으냔 질문에 모험가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저도 잊어버렸습니다. 애초에 며칠이 지났는지 세어볼 수도 없었다. 수정의 기억을 볼 때는 시간이 흐르는 걸 느꼈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누구 것인지 모를 기억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가늠한다는 발상. 처음에는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기억과 감정 속에서 자신을 놓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하군요. 그러니 좀 이르지만 이 질문부터 해 보죠. 당신 이름은 뭡니까?
모험가는 자신의 이름, 나이, 고향, 가족 관계, 모험의 계기, 친구들의 이름(열 명까지), 집이 있는지, 애인은 있는지, 그 외에도 자신에 대한 온갖 시시콜콜한 문답에 응해야 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 다음엔 앞서 얘기한 열 명의 친구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온갖 시시콜콜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종종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있었다. 고민할 필요 없어요. 저도 답을 모르니까. 돌아가면 그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그때까지 잊지 않는다면. 걱정 마세요.
정신을 차린 뒤 문답 직전의 사고 흐름을 복기하던 빛의 전사는 혀를 찼다. 앞으로는 기억의 수정 하나 당 질문 세 개를 할당해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시간 여행까지 했지만 아씨엔에 대한 모험가의 평가가 크게 바뀐 일은 없었다. ‘세계 통합이 대체 뭐라고 이상한 것에 집착하는 나쁜 놈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온갖 난리를 벌였다는 점에서 변함없이 나쁜 놈들’ 정도였다. 그 ‘온갖 난리’를 겪은 나의 주인은 여전히 물러 터졌고요. 일부러 악담할 필요가 있어? 어쨌든 그들은 죽었고 자신은 살았다. 그것도 아씨엔이 우리들의 부족한 점으로 꼽았던, 구태의연한 불행 앞에서 타인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의 힘 덕분에…. 네, 네. 그때만 생각하면 제 속도 터지니 거기까지.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던 모험가의 눈에 보인 것은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별바다에서 기억을 되찾기 전에, 1세계에서의 전투 이후. 마침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기한 걸…. 그 정도 감각으로 수정에 손을 뻗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몸이 손끝에 닿은 수정을 따라가듯이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모험가는 놀라서 손을 뗐다. 그러자 몸은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서 기억의 수정들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어쩌면 여길 벗어날 실마리일지도.
빛의 전사는 자신의 내면을 주의 깊게 뒤졌다. 지금까지 봐 왔던 수정들처럼 강렬한 감정들이 담긴 기억들을 떠올렸다. 타이탄을 토벌하고 돌아왔을 때 모래의 집에 감돌던 스산한 공기. 마도성 프라이토리움에서 민필리아를 다시 만났을 때의 환희와, 울다하의 지하수로에서 느꼈던 죄책감과 원망.
등이나 겨우 가리는 방패 하나로 거창을 막은 무모한 오르슈팡, 신화 속의 얼음을 두른 채 혼자서 군함의 폭격을 막은 무모한 이젤. 남은 우리를 끝까지 염려해서 힘을 보태기 위해 잠시 돌아와 주었던 두 이방인들.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지 못한 다섯 명의 영웅과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혼을 태우기로 한 민필리아. 지하수로에서 등불지기를 떠밀었던 단단한 목소리로 남은 우리를 격려하고, 유품 대신 세계를 맡기고 떠난 나의 맹주.
마음속에 불꽃을 품은 사람들. 해방을, 자유를, 사람다운 삶을 얻기 위해 싸운 사람들. 인간의 열망과 집념으로 신에 필적하는 존재들조차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 8성력의 이상주의자 집단. 그들을 대표해 수정으로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백 년을 기다려준 씩씩한 친구. 다시 기회를 얻고서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구해낸 또 다른 빛의 전사.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걸고 길을 개척한 우리의 신…. 익숙한 기억이 담긴 수정들이 회상을 따라 몸 주위를 맴돌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지금까지 내가 누군지 천 번은 더 묻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왜 이걸 몰랐을까? 당신이 제가 있는 그늘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게다가 직전에 수정의 빛에 호되게 당했잖습니까. 원흉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합니다.
길잡이가 될 만한 기억을 떠올리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를 올바른 때로 인도할 기억이 대체 뭘까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허기 탓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모험가는 생각했다. 그놈의 배는 왜 아직도 주린 거죠? 점심을 걸러서 그런 것 같았다. 텔레포 마법이 오작동하지 않았다면 한참 전에 크리스타리움에서 식사를 했을 텐데. 그러게 왜 식사를 미룹니까? 점심 약속을 했던 사람이 무척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지? 이번엔 스무고개군요. 맞아, 우리 둘 다 답을 잊어버렸지만.
그 사람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아빠 친구와 동료의 딸? 새벽의 혈맹에 기혼자가 있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입양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 이런 스무고개 끝에 모험가는 점심 약속을 잡은 상대의 이름이 요정어로 ‘축복’이라는 것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축복…. 축복……. 이럴 줄 알았으면 위리앙제한테 요정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걸. 그때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일정한 음계와 길이로 반복되는 것이 꼭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모험가는 문득 기억해냈다. 린이었어!
기쁨도 잠시, 모험가는 걱정에 새하얗게 질렸을 린과 그런 린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을 가이아를 떠올렸다. 두 사람 다 지극히 걱정이 됐다…. 이번에는 린과 가이아가 번갈아 비치는 기억의 수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수정 결정과는 달리 움직임이 빠르고 조급했다. 수정에 손을 얹자 몸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기억은 모험가를 꼬리처럼 매단 채, 혜성 같은 빠르기로 자신의 기원을 향해 나아갔다.
어둠의 전사가 실종되었던 하룻밤 동안 크리스타리움은 난리가 났다. 린이 모험가가 이상하게 늦는다며 위병단장에게 상담했고, 에테라이트 오작동을 점검 한다 주변을 수색한다 온 레이크랜드가 들썩였다. 소란을 지켜보던 픽시들이 요정왕에게 알리는 바람에 일 메그까지 시끄러웠다고 했다. 정확히 린과 약속한 시각에서 24시간 후, 모험가는 크리스타리움의 에테라이트 광장에 나타났다. 그러곤 정신을 잃었다.
린의 생일이었는데. 그리고 민필리아의 기일이었죠. 그런 날에 애를 걱정시키다니 난 쓰레기야…. 나쁜 버릇이 도졌군요. 그렇지만 나 말고 화낼 데가 없는 걸…. 차라리 제 탓을 하지 그러세요. 뭐가 다르냐고….
모험가는 돌아온 뒤 꼬박 사흘을 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펜던트 거주관에 셔츠바람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실종되었던 하룻밤의 기억은 말끔하게 날아간 채였다. 1세계로 텔레포를 탔는데 도중에 무언가 사고가 있었고, 자신은 무척 지친 채로 1세계로 돌아왔다는 사실 정도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는 어느 정도 기억합니다만 알려드릴 순 없겠군요.
머릿속에 남겨서 좋을 게 없는 것이니 몸이 열까지 내 가며 잊어버린 게 아니겠는가, 그런 주장이었다. 모험가는 수긍했다.
천 년 동안 당신을 독차지한 건 좋았습니다만…. 천 년? 무슨 천 년? 나는 당신이 남들 정도로만 이기적인 걸 바라지, 나처럼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니까.
어둠과 별빛, 기억뿐인 공간에서 ‘그림자’는 무척 의지되는 존재였다. 영웅이 되지 못한 면으로 이루어졌다고 자칭했던 만큼, 그의 염세주의가 오히려 활개를 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혼자였다면 못 돌아왔겠지. ‘혼자’였잖습니까.
기억을 떠올릴 때 용케 타박을 안 하더라.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당신의 너그러움이 좋은 기억에 점수를 주는 게 무슨 배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군요. 당신이 나를 또 방치할 생각이라면 그게 맞겠지만….
그럴 일 없지, 다시는.
그렇죠, 다시는.
침대 근처, 옷장 위에 곱게 개켜둔 겉옷이 혼자 흐트러졌다. 그 틈으로 어두운 푸른색의 에테르가 흘러나오더니 빛의 전사와 똑같은 형상이 침대 맡에 나타났다. ‘그림자’는 육신이 있는 자들의 방식으로 주인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곤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천 년이 다시 하룻밤 사이에 지나가더라도 곁에 있을 테니, 눈이나 좀 더 붙이시죠.
그림자가 말했다. 빛의 전사는 권유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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