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춤추자, 라디오에 맞춰서

22.09.13 작성

-주의: 8인 레이드 <마의 전당 판데모니움 : 변옥편> 스포일러 / 변옥편 등장 인물의 과거 날조, 변옥편 등장 인물의 정체에 대한 추측, 엔텔레케이아 설정 날조 있음

감옥을 나선 에리크토니오스는 음악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미스가 기묘하게 생긴 축음기를 끼고 앉아 있었다. 나팔 모양의 관은 보통의 축음기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턴테이블 자리에 있는 것이 매끈한 금속 상자였다. 상자의 중앙에는 크리스탈을 물렸고, 그 양쪽으로는 다이얼 두 개가 눈처럼 달려 있었다.

“‘라디오’…라고?”

에리크토니오스는 생소한 이름을 곱씹으며 ‘라디오’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테미스의 말에 따르면, 근처에 있는 사람의 에테르 파장을 수신해서 음악으로 변환하는 장치라고 했다. 왼쪽 다이얼로는 음량을, 오른쪽 다이얼로는 수신 범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중앙의 크리스탈은 저장 장치였다. 사용 방법은 크리스탈에 기록을 새길 때와 똑같았다. 재현되는 것은 노래뿐이었고 저장 기한도 짧았지만…. 새로운 파장이 닿으면 기록이 자동으로 덮어쓰기 된다고 했다.

“‘그 친구’가 혼자는 심심하니 ‘라디오’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하지 뭐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할 일도 없고, 마침 여긴 너무 조용하니까…. 한 번 만들어봤지.”

창조하는 데 아주 애를 먹었다며 테미스는 짐짓 생색을 냈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데아인데다가 말을 꺼낸 이조차 창조물의 정확한 구조를 몰랐기 때문이다. 요구 조건마저 까다로웠다. 창조물을 구성하는 에테르를 최대한 적게 써 달라는 거였다. 그래야 에테르 파장을 더 잘 감지할 수 있다나. 영 틀려먹은 논리였으나 테미스는 친구의 사역마(라고 주장하는 별)의 말을 들어주었다. 어쨌거나 에테르를 아끼는 게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하는 거야?”

“노래를 듣고 춤을 추라더라.”

에리크토니오스는 테미스의 동행이 상당히 특이한 사역마라고 생각했다. 이번 대 아젬은 특히 괴짜라는데 그런 사람의 사역마도 만만치 않구나 싶었다. 하지만 테미스는 동행의 조언을 따라 보려는 것 같았다.

“아는 노래 있어?”

테미스는 자기가 아는 건 옛날 유행가 몇 곡 정도라고 했다. ‘부끄럽지만 이런 데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건 에리크토니오스도 마찬가지였다. 판데모니움에 간수로 취직한 뒤에는 바깥 유행에 통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그래도 한 해에 너덧 곡씩은 새 노래를 들었지만…. 결국 온 집안과 아테나의 집무실을 점령한 노래는 늘 듣던 세 곡뿐이었다. 어머니는 새 노래를 며칠 듣다가도 늘 듣던 게 제일 좋다며 레코드판을 바꾸곤 했다.

에리크토니오스는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옛날 노래라도 괜찮다면 조금씩 불러보겠다고 했다. 테미스가 아는 노래는 세 곡 중 하나뿐이었다. 마지막에 그거 알아, 하고 끼어들어선 같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리크토니오스는 이내 허밍을 멈췄다. 자기는 노래를 잘 못 부르니 ‘라디오’로 듣는 쪽이 더 나을 거라고.

“세 곡 다 듣고 싶은데.”

“음, 그래…. 신경 써볼게.”

괜한 걱정이었다. 기억은 깨끗하고 선명하게 기록되었다. 테미스는 ‘라디오’ 위에 멋들어지게 올라앉은 나팔관 아래쪽을 더듬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에리크토니오스가 담은 노래의 기억이 역순으로 재생되었다. 둘 다 아는 노래부터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걸 제일 먼저 떠올렸는데…. 낭패다, 싶어 테미스를 돌아봤다. 정작 그는 아랑곳 않고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테나가 세상을 떠난 뒤, 에리크토니오스는 도통 노래를 들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에는 여전히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남아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흥얼거리다가 창조 생물들이 자극을 받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선배 간수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었다. ‘라디오’를 사이에 두고 테미스와 나란히 앉은 채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깨달았다. 오랜만에 들었는데도 노래들은 무척 익숙하고 편안했다.

발을 들썩거리던 에리크토니오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어릴 때 아테나가 가르쳐준 대로 춤을 췄다. 손을 어설프게 위로 뻗었다가 박자에 맞춰 발로 바닥을 번갈아 굴렀다. 가끔 다리를 크게 뻗으며 한 바퀴 돌았고 대부분은 제자리에서 몸을 흔들었다.

먼저 일어나 한바탕 스텝을 밟는 쪽은 으레 어머니였다. 기분이 나쁠 때 몸을 움직이면 울적함이 날아가고, 기분이 좋을 때 춤을 추면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린다고. 에리크토니오스가 사슬 마법이 잘 되지 않아서 울적해할 때, 아테나가 직장에서 무언가 성과를 올렸을 때, 판데모니움 관장으로 승진했을 때…. 음악을 듣다 흥이 오른 아테나는 아들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억지로 몸을 일으키곤 했다. 에리크토니오스는 불평을 조금 하다가도 결국엔 어머니의 춤에 어울려드렸다.

혼자 일어선 게 머쓱해질 즈음 에리크토니오스는 테미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테미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멜로디가 조금 변하며 곡이 한층 경쾌하고 로맨틱해졌지만, 에리크토니오스는 눈치 채지 못했다. 테미스에게 춤을 가르쳐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아테나에게 배웠을 때처럼 테미스와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테미스는 에리크토니오스보다도 어색하게 팔을 뻗고, 스텝을 밟았다. ‘처음엔 그냥 나를 따라해. 손을 잡고 돌기만 해도 괜찮아! 다른 동작을 하고 싶을 때가 올 거야.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하지만 테미스는 자기의 박자를 찾는 대신 깍지 낀 양손에 힘을 주며 친구의 동작을 따라올 뿐이었다.

에리크토니오스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한 손을 놓고, 손잡은 쪽 팔을 위로 뻗어 테미스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그런가 하면 테미스에게 꽉 잡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 뒤, 자신은 크게 빙글 돌면서 허리를 뒤로 젖히기도 했다. 테미스의 허리를 껴안고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함께 스텝을 밟으며 뛰어다녔다. 노래를 듣고 춤을 췄다. 클라이맥스를 따라 부르며 웃고 떠들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곳곳에 뾰족하게 솟은 가시함정 너머에서, 감옥 부지를 뒤덮은 사슬이 교차하는 아래에서.

음악에 취한 이성이 돌아온 뒤에야 세 번째 곡이 끝난 지 오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라디오’는 계속 둘이서 춤을 출 만한 음악을 출력하고 있었다. 아, 에테르 파장을 수신한다고 했지…. 테미스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아마 ‘라디오’가 반응하고 있는 건 자신일 것이다. 에리크토니오스는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였다. 물방울이 톡톡 튀어 오르는 듯한 리듬이 기분 좋게 가슴을 두드렸다.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발을 구르고 싶은 설렘이 느껴졌다.

에리크토니오스는 ‘라디오’를 끄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별안간 경쾌한 트럼펫 삼중주가 울렸다. 그 뒤로 울려 퍼진 멜로디는 아테나가 가장 좋아하던 세 곡을 한데 합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리크토니오스는 중간 중간 섞인 귀에 선 화음들의 정체도 알아차렸다. 아테나가 매년 새로 시도해보던 노래 중에서 그가 좋다고 생각했던 곡들의 주제부였다. 에테르 파장을 변환하는 것만으로 이런 게 나올 수 있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자신의 취향이 집약된 듯한 음악을 계속 듣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고….

“에리크, 한 곡 더?”

그렇다고 테미스가 정중하게 내민 손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둘은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았다. 라디오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일전에 만든 ‘라디오’말인데, 에테르의 파장이 아니라 다른 걸 감지하는 거지?”

테미스와 에리크토니오스가 요즘 ‘라디오’ 듣는 것에 푹 빠져 있다는 얘기에 흐뭇하게 웃던 빛의 전사는, 바로 그래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최대한 요구에 맞춰주긴 했지만, 정말 엔텔레케이아 비슷한 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정말 대단하다. 응.”

“하필 그런 걸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궁금한걸.”

빛의 전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이렇게 말했다. ‘라디오’로 수신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마음과 감정이 떠올랐을 뿐이라고.

“게다가 너희 둘, 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나쁜 일은 안 일어나겠다 싶었지.”

“무모한 시도였다는 건 알지?”

빛의 전사는 아주 잘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미스는 그쯤 해두었다. 우려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에리크토니오스와 춤추는 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제노스 황자가 큰 부상을 입은 채 갈레말 황성으로 복귀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자신의 방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놀랍게도 장식장에 놓인 라디오였다. 아씨엔 엘리디부스는 그 물건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라디오의 버튼이며, 다이얼을 대중없이 만지작거렸다. 이 자그만 금속 상자의 위쪽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어색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라디오는 한동안 전원이 켜져 있었다. 올바른 주파수에 다이얼이 맞춰지지 않은 탓에 스피커에서는 쉴 새 없이 잡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라디오는 제대로 된 음악도, 목소리도 포착하지 못한 채 연료가 모두 닳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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