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토토리모 관문에서

리세와 파파리모

-주의: 3.5 숙명의 끝 스포일러 / 신생 8인 레이드 바하무트 연대기 스포일러 / 약 10년 뒤 미래 날조 if. / 특정 빛전 묘사가 없으며, 여성/남성 캐릭터 모두 대명사 '그'로 지칭합니다.

토토리모 관문, 그리다니아 방면에서 검문을 기다리던 젊은 울다하 상인은 문득 의문을 품었다. ‘이 관문에는 왜 토토리모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토토리모 관문은 그리다니아 영토와 기라바니아 땅의 경계에서 가장 큰 거점이었다. 라라펠이 주류가 아닌 두 나라가 관여한 장소에 뜬금없이 붙은 라라펠식 이름이라니, 아무리 알라미고의 황소 라우반 알딘이 한때 울다하에 몸을 의탁했다고 한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 상인은 관문의 이름을 주제 삼아 말을 꺼냈다. 지루한 검문이 이어질 동안 안면을 튼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얹었다. 관문을 세운 사람들 마음 아니었겠느냐, 림사 로민사도 관문을 주조하는 데 손을 댔다는데 정작 울다하만 지분이 없으니 이름만이라도 챙겨준 모양이다, 같은 에오르제아 동맹인 이슈가르드는 그런 것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내가 그런 걸 알면 샬레이안에 갔지 왜 댁하고 일하는 중이겠냐 뾰족귀 양반아….

불꽃지킴이 루가딘 용병이 피부가 창백한 엘레젠 고용주와 말싸움을 하려던 찰나였다. 나이가 지긋한 라라펠 상인이 자기가 이유를 안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토토리모 관문을 몇 번이나 지나다녔는데도 사연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괜찮으시면 얘기를 좀 해 달라며 누군가 청했다. 라라펠 상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과 고용주는 슬그머니 서로를 외면했다. 흥미로운 얘기 앞에서 소란을 피워 경비병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바일사르 장성이 정말로 무너지고, 관문의 옛 이름이 드디어 의미를 잃어버린 뒤에….”


“숲 사이에 그 못생긴 갈레말식 철벽이 없다니, 좀 어색한 걸.”

빛의 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벨로디나 대교 전망대에서 옛 바일사르 장성 방면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그건 해방자를 마중 나온 리세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휴가를 내고 장성 철거 작업 현장을 보러 왔음에도 그랬다. 점점 트여가는 숲의 전경이 주는 감상은 몇 번을 봐도 새로웠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는지 전망대는 연일 문전성시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랜 지배의 역사를 떠나보냈다. 장성 철거 노동자로 지원하든 변방지대로 여행을 오든….

알라미고 수도에서는 장성 철거 풍경을 시간 순으로 담은 화첩이며 철거 사업 과정을 취재한 특집 기사들이 인기를 끌었다. 바일사르 장성이 서서히 사라지는 광경은 한 시대의 풍경으로 남을 터였다. 그 현장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고 생각하려니 리세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건만 새삼스러웠다. 살아있었다면 빛의 전사와 자신 사이에, 또는 옆에 서서 전경을 바라보았을 사람 때문일지도 몰랐다. 들릴 리 없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리세는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감상에 오래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알라미고 외교부의 황소고집 리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려 ‘해방자’라는 인맥까지 동원한 막중한 임무였다. 마침 빛의 전사는 전망대 창가를 따라 돌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차였다.

“저게 그거야? 새 관문?”

바일사르 장성 철거 과정에서 나온 고철 더미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장성 철거 사업에 직접 관여한 두 나라 모두 상대 국가에 자원의 절반이 그대로 넘어간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했다. 해방 전쟁 도중에는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도 말이다.

알라미고의 입장은 이랬다. 바일사르 장성 철거 사업을 주도한 건 우리인데 왜 잔해를 절반씩이나 나눠야 하는가? 외교부에 몸담은(리세의 주된 업무는 수인족과 휴런 사이의 교류였지만) 덕에 그리다니아 입장도 이해는 갔다. 그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건 정령 탓이었으니까. 숲의 주인들은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마음이 없었다.

알라미고는 장성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손실 없이 흡수했다. 철거 노동 일자리며 장성 잔해에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다니아가 보낸 지원 물품, 지배와 단절의 상징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이 뿌리는 수입과 늘어난 유동인구가 불러들인 또 다른 일자리들…. 장성의 잔해마저 알라미고와 나눠가진다면 그리다니아는 무척 헛고생 한 기분일 터였다. 다행히 해결책은 멀리 있지 않았다. 카스트룸 오리엔스에 새 이름을 붙여야 했으니까.

장성을 허물면서 국경을 따라 여러 관문이 생겨났다. 그러나 종전의 유일한 출입구였던 카스트룸 오리엔스만큼 번성하지는 못했다. 관문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식민지 시절 이름을 갈아치우자는 의견도 부상했다. ‘장성을 무너트리면서 철거된 문도 다시 세우자, 마침 재료도 잔뜩 있지 않나.’ 그리다니아 측의 주장이었다. 문은 자기들이 만들겠다며 림사 로민사도 슬쩍 끼어들었다. 알라미고는 두 나라의 은근한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알라미고와 그리다니아는 관문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리세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회담 사절에 자원했다. 알라미고 국내에서 진행된 새 관문 이름을 위한 민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이때의 리세는 알라미고의 국민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친구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빛의 전사는 부탁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와 줬다. 영웅이라는 이름값이 사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닌데, 옛 친구들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말이다. 리세는 자신이 치사한 수법을 썼다고 자평했다.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다니아 측에서는 무려 환술황이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알라미고가 제안할 이름은 ‘토토리모 관문’입니다.”

회담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 이름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단 세 명뿐이었다. 빛의 전사와 카느 에 센나, 그리고 자신. 리세는 그리다니아 측 사절을 위해 파파리모 토토리모가 누구인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현인 루이수아의 수제자, 한때 전 에오르제아의 골칫거리였던 ‘야만신’ 분야의 전문가, 빛의 전사의 믿음직한 동료이자….

“바일사르 장성에 출몰한 정체불명의 ‘야만신’을 목숨 바쳐 토벌한 당사자기도 하지요.”

이것만으로는 그리다니아 사절의 의문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리세는 준비한 말을 마저 이었다. 알라미고가 어째서 파파리모 토토리모에게 큰 은혜를 입었는가? 당시 장성에는 훗날 해방 운동의 효시를 쏘아 올릴 영웅이 탈환을 위해 잠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강제 노역에 끌려온 민간인들과 각국 총사령부 군인들까지.

“알라미고는 그 고결한, 희생, 정신이…. 우리의 해방 이념과 맞닿아 있음을 확신합니다. 때문에 파파리모 토토리모가 비록 알라미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도, 현인이 잠든 자리에 세운 관문의 이름으로는 그것이 마땅할 겁니다.”

이후로 얼마간의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리다니아 측은 관문의 지리적 위치와 알라미고가 내놓은 이름 후보 사이의 연관성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리세가 반박하기도 전, 환술황이 ‘토토리모 관문’에 지지를 표하면서 그리다니아 측 사절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자리에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지만, 그리다니아는 현인 파파리모 토토리모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의 그 ‘야만신’ 문제였지요. 바일사르 장성에서 그가 쌍사당 군인들의 목숨을 구한 것 역시 진실입니다.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이름이에요, 헥스트 씨. 이쪽에서 먼저 제안하지 못해 부끄러울 정도군요.”

카느 에 센나는 그렇게 말했다. 빛의 전사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카스트룸 오리엔스의 새 이름은 토토리모 관문으로 결정되었다.

이름을 정한 뒤에는 관문에 달 현판을 제작하는 일만 남았다. 관문의 그리다니아 쪽 면에는 솜씨 좋은 목수가 깎은 나무 현판이, 기라바니아 쪽 면에는 아난타족이 마법금을 씌운 금속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둘 다 장인을 미리 구해 두었기 때문에 남은 건 이름을 새기는 일뿐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관문 개통식이 열릴 것이다.

리세가 남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빛의 전사는 관문을 들락날락하며 부조를 구경했다. 그리다니아 쪽에는 마주 보는 그리핀과, 횃불 혹은 깃발을 든 휴런과 미코테, 아난타 족의 형상이 도드라져 있었다. 반면 기라바니아 쪽에는 그리다니아의 상징인 두 마리 뱀이 문틀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현판이 달리는 자리 위쪽에는 백합 문양이 보였다. 잘못 설치한 것이든 의도한 것이든, 치열한 물밑 다툼 끝에 탄생한 관문이 저런 꼴로 서 있는 게 조금 웃겼다.

빛의 전사가 카스트룸, 아니, 토토리모 관문 거점 관광을 끝냈을 즈음 리세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거점에서 하루 묵은 뒤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말에 리세는 섭섭한 기색이었다. 빛의 전사도 관문 개통식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 번 미룬 의뢰를 두 번 미룰 수는 없었으니까.

“괜찮아, 리세?”

오랜 친구가 물었다. 리세는 대답했다.

“아니, 하나도!”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언사란 무릇 그런 법이다. 고결한 희생 어쩌고, 숭고한 구원행위 저쩌고 하면서 진실을 포장해야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었다. 리세는 이제 그 사실을 안다. 파파리모가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너도 드디어 어른이 됐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담겨 있을지, 안타까움이나 미안함이 담겨 있을지, 가벼운 타박이 담겨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 모두가 포함될 수도 있고.

“고결한 건 차라리 파파리모의 사랑이겠지. 파파리모는 나랑 너, 거기 있었던 우리들을 아꼈으니까. 그래서 투프시마티를 들었던 거야. 어쩌겠어? 희생을 원망할 수는 있어도, 사랑은 차마 원망할 수 없지….”

리세의 말을 듣던 빛의 전사는 문득 루이수아의 최후를 떠올렸다. 루이수아 르베유르가 바하무트에 맞서 불사조라는 신으로 화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에오르제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말이다. 비록 그날의 진실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스승이나 제자나 똑 닮았다니까.”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리세는 ‘그런 식으로는 닮지 않아도 됐을 텐데!’라고 농담조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된 거요.”

라라펠 상인이 이야기를 푸는 동안, 사람들은 어느새 기라바니아 땅에 들어서 있었다. 백 년도 더 전, 옛 장성에 출몰한 ‘야만신’(사람들은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라라펠 상인 역시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은 몰랐다. 인간의 힘으로 처치하기에는 버거운 야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을 물리친 현인을 기리며 붙인 이름이라. 그런 거라면 뜬금없이 라라펠식 이름이 붙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야수와 맞선 자리가 옛 장성 터였고, 관문은 장성의 잔해를 녹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납득했다.

“한데 어르신은 그런 얘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젊은 상인이 물었다. 나이 든 상인은 우쭐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내 조상 되시는 미미라님께서 그 현장에 계셨다오.”

그 조상님은 불멸대 소위여서 당시 ‘빛의 전사’ 일행을 아주 가까이에서 수행했다느니, ‘카스…뭐시기스’의 ‘토토리모 관문’ 개명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덕분에 관문을 처음으로 넘은 백 명 안에 들었다느니, 당시 관문 이쪽과 저쪽의 흙을 담은 항아리가 집안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느니…. 그런 자랑이 이어졌다.

“따지고 보면 나는 파파리모 토토리모님 덕에 이 자리에 있는 셈이지!”

노인의 마무리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후일로 이어지는 역사의 신묘함에 감탄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옛날엔 그런 희한한 일도 다 있었다며 흥미를 품었다. 또 누군가는 오랜 세월 궁금했던 관문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어 속이 다 시원했다. 처음 말을 꺼낸 젊은 상인은 마지막 유형이었다. 상행의 목적지인 알라미고에 도착한 그가, 현지 토박이 친구와 대화를 나눈 끝에 보다 공식적인 기록을 읽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울다하로 돌아가던 상인은 다시 관문을 지나치며 엄숙하게 묵념했다.

그때까지도 토토리모 관문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떠나고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아주고 배웅하면서, 그들이 관문의 이름에 얽힌 내력을 알든 모르든 간에. 흐르는 세월에 이끼가 끼고 녹이 슨 끝에 기둥부터 무너지는 훗날에도 이름만은 자랑스레 남은 채.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