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지아이샤] 행복
“젠장, 아젬 네가 생기 있게 된 건 좋은 일인데, 염장질은 다른 곳에서 해주길 바란다.”
* 최소 효월의 종언 6.0은 클리어하고서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존재함 !
* 지인분의 자컾, 아이샤와 주지아로 쓱싹. 제가 이 커플을 아주 매우 정말 찬성합니다.
* 오리진 설정이 다채롭게 가미되어있는 빛의 전사 아이샤 보더워커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하 링크한 글을 포함해 해당 시리즈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음.
* 두 캐릭터의 빛둠전님께서 설정모순 등을 언질해주시면 크게 수정될 수 있습니다. 그 외 오탈자 및 비문도 시시때때로 수정될 수 있음
* 230510 : '보더워커'는 제7성력에서만 사용한 이름이라고 하셔서 화다닥 삭제하고 왔음!
* 240303 : 펜슬로 옮겨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존재함 !
아젬―아이샤에게 있어 이 세계는 어떤 거대한 방직물과도 같았다. 모든 것은 별을 위해. 우리 인간은 별의 의지라는 거대한 세상을 흐르는 혈액과도 같은 존재. 그 슬로건 아래에서 고통도 슬픔도 모르는, 일견 완전하지만 결코 온전하지는 못한 이들이 바지런히 별의 정원을 가꾸는 이곳은 세계 바깥에서 전해진 기억을 품은 그를 언제고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른 것에는 이런 까닭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집을 집으로 여기지 못하던 시절을 조금이나마 희석해준 친구들이 있어 고정된 거주지를 가졌고(물론 엄밀하게 따져서 이곳의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것이지만), 어쩌다 맘이 내키면 그곳을 흔히 말하는 집처럼 다루기도 했다. 하데스나 휘틀로다이우스도 이곳의 인류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보편’에서 벗어난 사람이지만, 사고의 근본은 결국 이 세계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물론 그 두 사람은 감히 이곳에서 얻은 저의 절친한 친우이고 동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주 깊은 골짜기는 메울 수가 없는 법이므로. 그것이 세계 밖에서 옮겨 심어진 이방인의 숙명인가, 싶었다.
그러므로 아이샤는 때때로 냉소적으로 가라앉는 언어를 삼키고 그것을 표층에 내놓지 않았다. 스승이자 저의 기이奇異를 교정하려 들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인 베네스는 그것을 꿰뚫어 보았지만, 제아무리 명망 높은 전 아젬이라도 근본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더랬다.
“세상은 결국 다름으로 인해 성립하죠. 그렇지만, 아이샤, 당신과 결이 닮은 이는 어딘가에 있을 거랍니다. 세상에 오로지 혼자인 존재는 없어요. 그건 당신도 그 많은 기억에서 확인할 수 있을 거고요.”
그 말에 저는 무어라고 답했던가. 그랬으면 좋겠네요, 따위의 미지근한 대답이었나. 어쨌든 기억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영혼 없이 답했던 모양이다.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끝에서 그랬던 것처럼 청아한 눈동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둥근 선을 그리는 그 표정만 기억이 났다.
그러니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아이샤는 꽤 동요했다.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서 나갈 기세로.
―중앙에 거센 항의를 넣었다가 의회는커녕 아모르트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다지?
―퇴출을 명령받고도 굽힐 기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곳에서 쓰던 자기 이름을 훼손했다며? 뜻 자체는 같지만, 훨씬 조야한 언어로 바꿨댔어. 라크네, 라고 했던가.
―변방을 떠돌아다니는 모양이던데.
전대 아젬인 베네스 역시 떠돌아다니며 꽤 오만 일을 벌였고, 현재의 아젬인 저 역시 별별 사건․사고 속을 헤집고 돌아다녀서인가 아젬의 갑작스러운 “나갔다 옵니다.” 선언은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머리가 식고 생각해보니, 남들에게 그건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더랬다. 여기에는 저의 친우 둘의 공이 혁혁했다.
뭘 해도 뚱한 편인 그 아젬이 타인의 소문에 거기까지 반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데스는 어디서 오다 주웠다는 톤의 목소리와 함께 ‘라크네’의 추방 건에 대한 공식 서기기록 따위를 정리해다 주었고, 휘틀로다이우스는 발이 넓은 사람답게 변방을 떠돈다는 그의 현재 거주지를 알아내 넘기면서 마침 거기에 ‘아젬’이 가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며 장난스럽게 윙크해 보였다. 새 에메트셀크의 취임을 잇듯 자리에 오른 신임 창조물 관리국 국장님께서는 때때로 먼 곳의 이데아 심사를 위해 제출된 서류만으로도 소동의 전조를 읽기도 했다. 전례가 있으니 그의 말을 모두가 믿은 듯 한데, 저 태도를 보아 사실은 문제없는 것을 문제 있다고 속인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들뜬 와중에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읽은 걸까, 하데스가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며 쏘아붙인다.
“어차피 네가 가면 일이 무조건 커져, 아젬. 손바닥만 하게 탈 들판을 사람이고 동물이고 전부 소개疏開시킨 다음에 통째로 태우고서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네 주특기잖나. 휘틀로다이우스, 너도 지금 그런 사태 만들고서 따라가려는 속셈 아냐?”
“너무하네, 하데스. 물론 아젬이 벌이는 사건은 재밌지! 서로 높은 자리 올라간 뒤론 그런 모험이 드물어져서 아쉬운 것도 맞지만, 나는 성실한 창조물 관리국 국장님이라구. 거기에 문제가 생길 확률은 적어도 0%는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100%도 아니겠지. 네 여유로운 표정을 보아하니 기껏해야 30% 정도 아닌가?”
“30%는 뭐 확률도 아니니?”
여전히 야박하게 군다며 입엣말로 투덜거리던 휘틀로다이우스는 금방 표정을 바꾸고 아이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어쨌든 이데아의 폭주확률 30%라면 아주 낮지도 않잖아? 우리의 현 아젬이라면 얼마든지 처리하겠지만. 앗, 그래도 에피스켑토마이 평원 싱크홀 조사 때처럼 되지 않게 조심해. 필요하면 꼭! 우리를 부르고!”
“그게 언젯적 일인데 넌 아직도…. 당장 우리 두 달 전에 회의하다 말고 이 녀석한테 끌려갔던 건 기억하냐? 얜 그런 실수를 여러 번 할 녀석이 아니야.”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는 두 친구를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아젬은 제 손에 건네진, 창조물 관리국으로부터의 공식적인 협력 요청 서류에 자신의 에테르를 흘려보내 싸인을 마쳤다.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면, 저의 부평초와도 같은 부유감을 곧잘 걱정하곤 하는 두 사람이 미소를 돌려준다. 이 거리감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과연 이 세계에서도 생길 것인가. 은은하게 부푸는 기대와 설렘과 그것이 깨졌을 때의 두려움이 각자 한껏 몸피를 불려 나가며, 아이샤는 목적지를 향했다.
그래서 현 아젬의 절친한 친구 두 명이 적극적으로 주선한 만남이 어떻게 되었느냐면, 하데스의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젠장, 아젬 네가 생기 있게 된 건 좋은 일인데, 염장질은 다른 곳에서 해주길 바란다.”
아이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친구의 내면에 깃든 묘한 반항심과 이방인 특유의 부유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위원회를 비롯해 주류와 선도자를 썩 곱게 보지 않는 반항아와 꽤 잘 맞지 않을지 예측한 것은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저희 둘만으로는 도무지 덜어낼 수가 없었던 그 애의 그림자가 경감된다면, 따위의 마음으로 건 도박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성공적이었더랬다.
제일 처음 만남은 나흘, 우려했던 이데아 폭주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뭔가 결이 맞는 사람끼리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모양인지 아모르트로 돌아온 아이샤의 얼굴에는 은은하게 활기가 넘쳤다. 그 이래로 불규칙하게 아이테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던 아젬의 경유지에는 반드시 라크네의 거처가 포함되었고, 굳이 일이 없더라도 먼 변방을 걸음 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 조금 못 될 무렵,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아이샤와 라크네가 각자의 도식 혹은 은유라 부를 수 있는 이데아를 모방한 사역마를 교환한 거다. 개인용으로 개발해 등록도 안 한대지, 게다가 술식의 원천이 중앙에 반기를 들었던 ‘거미’의 것이다 보니 고지식한 무리가 학을 떼며 공격해왔다. 물론 그걸 가만히 두들겨 맞고 있을 아젬이 아니었기에, 폴리레리타 관청 거리에서 벌어진 아젬과 명망 있는 토론가들 사이에의 언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모르트의 명물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 난장판을 지켜보면서 휘틀로다이우스와 하데스는 저희가 목격한 것을 저들은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야 ‘볼 수 있는 자’여야만 알 수 있는 정보였고, 이 아모르트 내에서 그건 한 손에 꼽으니까.
토론을 빙자한 싸움박질을 하면서도 아이샤는 라크네의 거미를 떼어놓지 않은 터라, 볼 수 있는 자인 둘은 새까만 로브 사이로 빠져나와 저 먼 지평선까지 길게 뻗은, 아젬과 라크네 각자의 에테르를 엮어 만든 실의 색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상당히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는데, 그걸 알아보는 게 저희 둘 뿐이니 여기서는 그냥 입을 다물어주는 게 아이샤를 위한 길이다. 대신 속으로 혀를 내두르긴 했다. 저희의 친구는 간혹 극한의 가속 마법을 남발하듯 굴 때가 있는데, 연애마저 이토록 파격적일 줄은.
이번 주말, 아젬은 오랜 여행의 업보(본인은 그렇게 부를 때가 있다) 탓에 아모르트를 떠날 수 없었다. 보고서와 보고서와 보고서. 아래 부하직원이 이제 감당할 수 없다며 울면서 전달한 서류까지 합하면 상당한 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생활패턴을 아주 박살 내가면서 해치우고, 곧장 다음 여정을 향해 걸음을 옮겼을 친구는 때때로 사역마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에 떠밀려 제대로 쉬고, 먹고, 자며 업무를 봤다. 지금은 아무래도 쉬는 시간인 모양이다. 애인과의 장거리 통신만으로도 행복하게 조잘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낯선 감이 있지만, 썩 나쁜 건 아니다.
“사역마의 이데아에 저런 술식도 구현할 수 있는 거였구나~. 아, 정식으로 등록해주면 좋을 텐데. 닷새 꽉꽉 채워서 연구할 보람이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데스?”
“넌 저 눈을 보고서도, 어휴, 됐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는 게 별바다가 뒤집힐 일이지.”
“그런 것치곤 저번에 아젬이 영감님들하고 맞먹었던 건 너도 재밌어 했잖아? 그래도 되는 거야, 현 에메트셀크 님.”
“….”
휘틀로다이우스는 친구의 어깨에 얹혀있는 작은 거미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괜히 아쉬운 소리를 했고(그 말을 들은 아이샤가 “휘틀로다이우스, 너 그거 직업병이야.”라고 톡 쏘았다), 갑자기 화살이 돌아온 것을 툴툴거리며 쳐냈던 하데스는 결국 본전도 못 찾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넌 그걸 꼭 굳이 부끄럽게 입 밖으로 내어야겠느냐는 타박을 담은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보랏빛을 쏘아본다.
오래도록 지켜본 고유 에테르의 결은 순간마다의 감정을 입고 출렁인다. 서로 그걸 볼 수 있으니, 지금 저나 휘틀로다이우스의 마음은 같은 쪽을 향했다고 안다.
그야, 저 애가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그걸로 족하지.
말도 없이 이어진 생각에 두 사람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