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연말
논커플링 올캐러
-메인 퀘스트 5.4까지의 스포일러 포함
모험가라는 직종은 근무 시간이 들쭉날쭉하기로 유명했다. 빛의 전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영웅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 탓에 에오르제아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가는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도 일했다.
그런 영웅조차도 연말이 되면 일을 쳐냈다. 크리스탈을 이용한 강신 사건이나 제국의 침략 정도 되는 일이 아니라면, 연말 즈음 그를 부려먹을 사건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게 얻은 휴일 동안 빛의 전사는 어딘가로 훌쩍 사라졌다.
워낙에 유명인이다 보니 단편적인 목격담 정도는 심심찮게 돌았다. 동부 다날란, 마른뼈 야영지의 에테라이트 앞. 검은장막 숲 동쪽, 바일사르 장성 방면. 모르도나, 망자의 종소리 서문. 용머리 전진기지 북문. 이슈가르드 비공정 승강장.
여행지의 면면은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각의 장소 사이의 연관성 역시 희박했다.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이동 거리가 어마어마했다. 휴가 중의 영웅이 늘 들고 있던 꽃다발에 대해, 사람들은 낭만적이거나 음습한 추측을 나눴다.
진상을 아는 것은 영웅과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는 사람들 정도였다. 이를테면 프라민은 매해 연말, 민필리아의 묘지에 바쳐진 꽃다발 두 개를 볼 수 있었다. 산크레드 역시 이맘때쯤 성 아다마 린다마 교회 입구에서 모험가와 마주치곤 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민필리아를 찾아가면, 묘석 앞에 이미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문브뤼다의 무덤 앞이긴 했다만, 낯선 꽃다발과 마주치는 것은 위리앙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선객의 꽃다발에도 보존 술법을 걸어주곤 했다. 재미있게도, 모험가와 마주치는 것은 늘 이른서리 고개로 가는 길목에서였다. 성묘 후 돌아가는 중이었거나, 고갯길을 앞서 걷고 있었거나, 혹은 위리앙제를 따라잡은….
프란셀 드 아유나르트는 맹우의 무덤 앞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봤다. 한참을 서성거렸는지 비석 주위의 눈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어느 해에는 발자국 대신 앉아 있던 흔적이, 또 다른 해에는 잘게 뿌려진 프리즘 가루가 남아 있었다. 고인의 평소 말버릇을 보건대, 프리즘에 어떤 환상이 투영되어 있었는지는 알 만했다.
리세는 매년 아마리세 감시초소를 방문했다. 해가 갈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책임지게 되었고, 시간을 내기도 덩달아 어려워졌다. 언젠가 보초병은 영웅이 매년 연말에 바일사르 장성을 둘러보고 간다는 얘기를 귀띔해주었다. 그 뒤로 리세는 가끔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파파리모는 고작 자유 시간 때문에 그러느냐 잔소리를 했겠지만…. 파파리모도 가끔은 일을 관두고 싶었을 텐데, 뭐 어떤가? 리세도 이제는 알았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순간’ ‘항상’ 어른스러울 수만은 없다는 걸.
어느 연말, 귀향한 에스티니앙은 이슈가르드의 모든 온실에서 니메이아 백합의 씨가 마른 것을 알았다. 그는 오랜만에 본 아이메리크에게 실컷 성질을 냈다. 성도의 영웅이 범인이라는 얘기에 나선 발착장으로 날아갔더니, 사방에 놓인 백합 때문에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그 길로 돌의 집에 쳐들어갔지만 모험가를 만나지는 못했다. 영웅의 심술은 한 번뿐이었으나, 그날 이후 에스티니앙은 꼬박꼬박 성묘용 꽃다발을 예약했다.
그렇게 사나흘에 걸쳐 다섯 지역을 순회하고 나면 빛의 전사 목격담이 뚝 끊겼다. 마치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영웅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누군가는 낭만적인 추론을 이어갔고, 누군가는 오사드 지역으로 휴가를 가지 않았겠느냐 말했다. 영웅은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도 몰랐다. 에오르제아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곧장 노르브란트로 달려가기 바빴던 탓이다.
에오르제아의 새해가 아침부터라면, 노르브란트의 새해는 저녁부터였다. 지난 한 해를 보내며 밤새 꼬박 축하한다는 점만은 같았다. 새로운 아침을 위하여, 돌아온 밤을 위하여.
연말을 맞은 빛의 전사가 떠나간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냈다면, 어둠의 전사는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해주고 다녔다. 린은 준비성이 좋았지만, 산크레드와 위리앙제의 편지를 읽은 뒤에는 언제나 준비해둔 종이가 모자랐다. 그래서 모험가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언제나 린이었다.
할리크를 비롯한 여행길 여관의 환자들은 해를 거듭하며 호전되고 있었다. 알리제가 따로 전한 말은 없었지만, 모험가는 매해 여행길 여관을 찾았다. 회복된 환자들은 자신을 깨운 목소리를, 더 나아가서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그마한 엘프 소녀였다는 것을 문득 떠올리곤 했다. 간병인들은 건강을 회복하고 떠난 환자들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모험가는 그런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기억해뒀다. 가끔 암기하는 게 벅찰 때면 수첩을 꺼냈다.
긴 답장을 쓰는 사람은 린 말고도 더 있었다. 때문에 모험가는 노르브란트에서의 연휴 첫날을 율모어에서 마무리했다. 차이 부인은 알피노의 편지도, 영웅의 방문도 무척이나 반겼다. 차이 씨는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중이었다. 저녁이나 아침 식탁에서 손님을 맞을 틈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차이 부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산 사람이 하룻밤을 보내기에 일 메그는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섭섭해하는 페오 울을 달래주기 위해, 모험가는 요정왕의 분신을 여행길 말동무로 삼았다. 픽시들 장난에 어울려 주고, 응 모우족과 사소한 거래를 하고…. 그러고 나면 볼레크도르프였다. 세토는 모험가를 오래 붙잡지 않았다. 나이 든 아마로는 그 정도 시간으로도 만족했다. 모험가는 아르버트를 대신해 세토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줬다. 내년 이맘때쯤에도 녀석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이른 오후에 일 메그를 떠나면 늦은 저녁에는 똬리가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슈톨라는 언젠가 세계를 뛰어넘어 직접 회포를 풀러 올 테지만…. 모험가는 몰래 그의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들키면 잔소리 좀 듣고 말지, 싶어서였다. 루나르의 꼬리가 무의식중에 살랑거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정작 루나르는 언젠가 직접 말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 얘기를 삼갔다. 그가 기록해둔 화젯거리가 굴 하나를 꽉 채우기 전에 슈톨라가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노르브란트에서 보낼 때면 매년 장소가 달라졌다. 어느 해에는 똬리가지 마을에서 이틀을 보내며 어둠의 주민들과 함께 새해를 축하했다. 어느 해에는 율모어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올해는 크리스타리움이었다. 자정이 되는 순간 도시는 일제히 불을 껐다. 밤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러면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딘가를 올려다봤다.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탑의 수정이 발하는 은은한 잔광. 지상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노르브란트에서 보내는 답장 편지들을 챙기고, 새해 인사를 하고 나면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황제의 옥좌에 선 ‘수정공’에게는 노르브란트 도착 직후 인사해 두었다. 그의 새해 첫 손님은 당연히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이어야 했다. ‘수정공’은 그들을 위해 남은 것이므로.
성견의 방까지 모험가를 배웅하는 사람은 늘 라이나였다. 새해 축하 인사를 나눈 뒤에는 으레 그랬듯이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영웅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 묘하게도 라이나는 그가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위병대장은 올해도 새해 인사를 건넸다. 어둠의 전사에게, 그리고 의무를 다하고 귀환한 할아버지에게. 영웅은 기다렸던 편지를 받은 사람처럼 웃었다.
모험가는 돌아간다.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안부를 품고, 세계와 세계의 틈을 건너서.
올해 초코보를 끌고 마중 나온 사람은 그라하 티아다. 재작년에는 알리제였고, 작년에는 의외로 야슈톨라였다. 빛의 전사가 연말연시에 맞춰 노르브란트를 방문한다는 걸 눈치챈 뒤, 1세계와 인연이 있는 혈맹원들은 돌아가며 마중을 나왔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가장 빨리 소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 은근히 불꽃이 튄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산크레드는 아직 한 번도 마중 담당이 된 적 없었다.
협곡에는 별다른 마물이 없으므로, 둘은 느긋하게 초코보를 몰았다. 대화를 나누기 편한 속도로. 본론에 다다르기까지 뜸을 들이는 것은 라이나와 똑 닮았다. 그라하가 변죽 울리는 것을 멈추자마자 모험가는 라이나의 새해 인사를 전했다. ‘저희는 잘 지냈습니다…. 당신도 즐거운 한 해 보내시길.’
협곡을 벗어난 초코보가 달리기 시작한 뒤로, 그라하는 침묵했다. 모험가는 그가 크리스타리움에서 온 새해 인사를 곱씹도록 내버려뒀다.
돌의 집에는 린의 편지를 기다리는 산크레드와 위리앙제가 있을 것이다. 알피노는 자칫 먼 길을 다녀온 모험가에게 무례를 저지를까 봐, 알리제는 애처럼 들뜬 것을 들키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테다. 슈톨라는 동생을 만나러 갔을까, 아니면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
새해 인사를 전해야 할 사람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다가,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라이나의 기원이 이루어질 거라는 예감에서였다. 늘 그랬듯이, 올해도 즐거운 한 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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