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파판14 세계관 드림
*칠흑의 반역자까지 보고 쓴 글입니다
하이델린은 어머니이자 자신의 구원자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항상 재능이 있는 녀석들에게 밀려 어둡고 축축한 자리에서 버텨왔던 모험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에 이끌려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자신을 쳐다보는 마부와 두 명의 아이들이 있어 얼굴을 붉힌 채 황급히 내린 기억만 있을 뿐, 정확히 이 힘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다른 때와 똑같은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자신에게 달려와 울며 부탁하던 소녀가 아니었다면 평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몇 달 간은 몰랐을 것이다. 소녀의 추레한 몰골에서 배고파 걸을 힘조차 없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했겠지.
평소에는 한 대조차 때리기 힘들었던 몰볼 한 마리가 오늘은 제 창에 몇 번이고 가격당해 잔뜩 악취를 내 뿜으며 죽어버렸다. 자신의 몸에서 이런 힘이 어떻게 나왔는지 생각 할 겨를도 없었다. 힘겹게 몇 마리를 죽였고 모험가는 소녀의 의뢰를 가까스로 끝마쳤다. 그 아이는 그 잔해더미 깊숙한 곳에서 손을 뻗어 떨고 있던 자신의 토끼를 챙겼고 모험가에게 감사하다며 울먹였다. 모험가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지만 아이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힘겹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찾아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자신이 이 몬스터들을 쓰러뜨린 것은 순전히 천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디 소녀가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이 자라나기 만을 바랐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부모가 없었는지 그 뒤로 자신을 쫓았다. 에오르제아 국가중에서 그나마 평화로운 그리다니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경우다. 아이를 버린 건지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수순을 밟고 떠난 이들인지. 모험가는 그 아이를 계속해서, 계속해서 보살폈다. 자신또한 발붙일 곳 하나 없는 이였기 때문에.
모험가는 먹고 살기 위해 일했다. 정령의 목소리를 듣거나 멀리서도 정확히 사물을 저격하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리다니아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창술 밖에는 답이 없었다. 근력의 차이는 노력으로 메꿔진다지만 타고난 감각은 그러질 못했다. 딱 입에 풀칠할 정도의 실력이 됐을 때 자신의 성장이 멈췄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힘을 믿고 쭉쭉 나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언젠가 그들이 위험한 의뢰를 수행하다가 죽어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들을 때면 이 정도의 힘이 딱 적당하다는 못된 생각을 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부탁을 들어준 그 시점부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게 됐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불량배를 때려눕혔고 악의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죽였고 마침내 에오르제아를 위협하던 높디높은 제국의 장벽을 허물기에 이르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아니, 잘못된 걸까? 이게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나.’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는 말을 전했을 때 현자들과 동행하기 전 작별하면서 울먹이던 소녀의 얼굴을 뇌리에서 지운 채 싸웠다. 이것은 그 아이들을 위한 싸움이다. 힘없고 돈 없어 자신과 같은 이름 없는 모험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위한....
얼마 안가 그 아이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크살 족과의 전투에서 휩쓸렸다는 이유였다. 헤어짐의 순간에 계속 울고 있던 아이를 위로하려고 주었던 목걸이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 새벽의 현자들이 위로했지만 분통이란 감정이 모험가를 덮쳤다. 모험가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 약한 자들의 죽음은 수 없이 스쳐지나간다.
그 아이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지켜냈다던 토끼를 전해 받았다. 마지막에 보던 것보다는 꽤 자라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토끼를 감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덜덜 떨면서도 최대한 몸을 웅크려 그 연약한 생명체를 보호했다. 그 환영에 몇 달 전 구해줘서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던 모습이 생각나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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