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기반 자캐커플] 원이비

[원이비] 작은 과거가 커다란 미래에게

(FF14 기반 자캐커플) 어린 시절의 원, 그러니까 라우루스가, 원과 이비가 함께하는 현재로 건너온 이야기

Dreaming Blue by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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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2살이 된 비에라, 라우루스는 마을 장로들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들끼리만 쑥덕거리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재밌고 신기해 보이는 물건들은 모두 비밀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그들의 손에서만 얌전히 잡혀 있다가 다시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나도 갖고 놀고 싶어!’라고 한두 번 말해 본 게 아니었다. 그때마다 라우루스는 아주 깔끔하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치사해. 완전 치사해.

그렇게 잔뜩 골이 난 라우루스는,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장로의 집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수업 시간에도, 식사 시간에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 가며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렇게 건진 ‘굉장한 작전’은, 곧 있을 마을 밖 거대한 나무의 장례 의식 당일에 몰래 빠져나와, 장로가 자리를 비운 집에 몰래 숨어드는 것이었다. 의식을 진행하는 내내 장로들은 마을 밖까지 나가 감독하느라 바쁠 테니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사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라우루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그러나 장난꾸러기 라우루스가 의식을 방해하는 것도 곤란하므로, 몇몇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만약을 대비해 촌장이 마을 젊은이 하나를 불러 라우루스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도 설마 꼬맹이가 겁도 없이 장로의 집 안에 숨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렇게 라우루스는 고풍스럽지만 조금 어수선한 집 안에서 보물찾기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널린 약초 특유의 진한 냄새, 밟을 때마다 끼익 소리를 내는 나무판자,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정체 모를 보석들까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했고, 일부는 라우루스의 흥미를 끌기도 했으나, 라우루스가 기대한 것은 이런 시시한 것들이 아니었다. 조금 더 이상한 것. 좀 더 신기한 것. 이럴 때가 아니면 절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며 뒤적거리던 라우루스는, 햇빛이 닿지 않는 어느 구석진 벽 앞에서 멈춰 섰다. 눈에 띄지 않는 짙은 색의 두꺼운 커튼. 딱 봐도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다. 다년간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접근금지 구역’에 익숙해진 라우루스는 직감했다. 바로 이곳에, 재밌을 만한 것이 있다!

단번에 커튼을 걷어버린 라우루스는 조금 후회했다. 도대체 얼마나 방치되어 있던 건지, 확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에 재채기와 기침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란하게 몇 번이고 뱉어내서야 조금 진정된 라우루스는 커튼에 가려져 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씩 웃었다. 작고 낡은 나무문이었다. 비밀 창고 같은 것일까? 힘주어 밀자, 문은 곧 열릴 것처럼 덜걱거렸지만, 단단히 잠긴 문고리는 쉽게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라우루스에게 잠금장치를 풀어낼 열쇠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금방 묘책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라우루스는 멀리서부터 달려와 모든 힘을 다해 몸을 부딪쳤다. 낡은 경첩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문이 기울고 뒤틀리며 생긴 구멍은 작은 아이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라우루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문의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서늘한 공기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지만, 라우루스는 겁을 내긴커녕 더 신나서 방 곳곳을 기웃거렸다. 두꺼운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린 나무 지팡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구슬,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이 조각된 가면... 연신 감탄하던 라우루스는 가장 먼 전시대 위에 놓여있는, 제법 멋져 보이는 기다란 검을 발견했다. 곧바로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던 라우루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우뚝 멈춰 섰다. 방금, 뭐가 움직였는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른편을 바라본 라우루스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누, 누구야?!”

처음 보는 비에라가 서 있었다. 자신을 많이 닮아있는, 그러나 훨씬 거대하고 조금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성인 비에라는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팔짱을 낀 채 라우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그가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은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방금 저거, ‘젠장’이라고 했다!

“왜. 뭐, 왜!”

제대로 무서워지기도 전에 심통이 잔뜩 나버렸다. 동시에 호기심이 발동한 라우루스는 수상쩍은 비에라가 보이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행히 라우루스를 놀라게 만든 것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벽면에 걸린 전신 거울이었다. 단지 그 거울이 별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다른 누군가를 비춰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뭘까? 거울 너머의 비에라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입 모양을 알아보기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았다. 라우루스는 해석하려 애쓰는 대신, 그를 흉내 내듯 팔짱을 끼고 섰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려면 목이 꺾일 정도로 그를 올려다봐야 했지만 태도만은 당당했다.

“너도 내 말 안 들리지? 메롱이다.”

낯선 비에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헉, 여기 말은 저기서 들리는 건가? 움찔했지만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면 라우루스가 아니다.

“어차피 거기서 못 나오잖아!”

거울 너머의 비에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저리 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실, 라우루스에겐 이 짜증 나는 거울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라우루스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곳을 더 탐험하고, 가능하다면 마음에 드는 물건까지 챙겨서 들키기 전에 탈출하는 것.

“라우루스!!!!!!”

그 순간 노성이 멀리서 터져 나왔다. 라우루스는 기겁해서 아까 부숴버린 문 쪽을 확인했다. 헉, 벌써 들켰나 봐. 어디로 나가야 하지? 아니면, 어디에 숨어야 하지? 주춤주춤 물러나던 라우루스가 거울 쪽으로 손을 짚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거울 표면이 단단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고, 라우루스는 상식이 깨지는 순간을 무척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나 즐길 수 있는 일이다. 거울을 짚은 손이 쑥 빠져버린 순간, 라우루스는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

급하게 몸을 틀자 오히려 균형이 더 무너졌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넘어진다. 라우루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충격 대신, 몸에 닿은 것은 자신을 단단하게 받쳐 드는 커다란 손과 팔이었다.

“이렇게 된 거였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우루스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고,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문을 열며 방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의 몸 너머로 얼핏 보이는 방의 구조는, 좀 전까지 있었던 장로의 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잘 들어. 지금부터 술래잡기를 할 거야.”

낮고 차분하지만 어딘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라우루스는 소리가 들리는 위쪽을 바라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그 비에라잖아?“

“그래. 네가 아까 잔뜩 놀려먹던 그 비에라다. 당장은 봐줄게. 그렇지만 놀이에서 지면 배로 갚아주겠어.”

“흥, 내가 이길걸? 술래잡기라면 자신 있어.”

“그렇겠지. 근데 이건 좀 특별한 술래잡기야. 이기고 싶으면 지금 규칙을 잘 들어놔.”

라우루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루스를 바닥에 앉혀놓고 일어선 비에라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 규칙. 처음 술래가 되는 사람은 너야. 그리고 내가 잡혀서 술래가 되면 놀이가 끝나고, 네가 이기는 거야.”

라우루스가 곧장 달려들 기세로 일어나자마자 쾅 소리와 함께 바닥 일부가 조금 내려앉았다. 저거 돌바닥 아니었나? 놀란 라우루스가 다시 주저앉아 손으로 더듬어 본 바닥은 분명 차갑고 단단했다. 근데 어떻게 흙바닥처럼 발길질 한 번에 꺼질 수가 있는 걸까?

“아직 말 안 끝났어. 가만히 들어.”

“네.”

마을 최고의 개구쟁이를 한 번에 얌전하게 만든 괴력의 소유자는 라우루스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두 번째 규칙. 너는 나를 잡을 수 없어. 먼저 다른 사람을 잡아서 술래로 만든 다음에, 그 술래가 날 잡게 만들어야 해.”

“꼭 그렇게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해…요?”

“응. 특별한 술래잡기라고 했잖아.”

라우루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제일 믿을만한 사람을 추천해 줄게. 여기서 나가서 숲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보일 텐데, 하얀색 긴 머리에 옷도 길고 하얀 것으로 입고 있는 예쁜 사람이야. 우리랑은 다르게 작은 털 귀가 머리 옆에 달렸고, 하얗고 복슬복슬한 긴 꼬리가 있어. 키는 이만하고.”

“다른 사람은 안 돼? …요?”

“마음대로 해. 근데 내가 말한 사람이 너랑 제일 재밌게 잘 놀아줄걸?”

“으음.”

“대신 절대 내가 알려줬다고 하면 안 돼. 이 술래잡기는 너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인 거야.”

“술래잡기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너를 찾아서 잡아? 요?”

“아마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날 계속 찾을 테고, 발견하자마자 잡으려 들 거야. 너는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돼.”

“그 사람 술래잡기 잘해? 요?”

“응. 못 믿겠으면 시험해 보던가.”

“…알았어.”

은근슬쩍 존대를 떼 버리고 눈치를 살피는 라우루스를 보며 장신의 비에라는 웃음을 꾹 참고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세 번째 규칙. 어떻게든 네가 잡은 술래 옆에 꼭 붙어있어. 네가 근처에 없으면, 술래가 날 잡아도 무효야.”

“규칙이 뭐 이렇게 많아?”

“아직 세 개밖에 말 안 했잖아.”

“너무 많으면 까먹는단 말야!”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놀이 규칙을 못 외운다고? 네가?”

어떻게 거짓말인 걸 안 거지? 라우루스는 머리를 굴렸다. 이 비에라, 분명 초면인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역시 내가 모르는 가족인가? 건너 건너 얘기를 들은 건가?

“어차피 다음 규칙이 마지막이야. 네 번째 규칙은…….”

성큼 다가와 앉은 정체불명의 비에라에게 귀를 잡히자, 라우루스는 생각을 멈추고 긴장해서 얼어붙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약간 따끔할 수도 있어. 준비됐어?”

“뭐, 뭘 하는데?”

“귀 안쪽에 링크펄이라고 하는 걸 달아줄 거거든? 멀리 떨어진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재밌는 도구야. 내가 이걸로 연락하면 꼭 대답하도록 해. 혹시 아픈 걸 무서워하는 편이야?”

“난 그런 거에 겁 안 먹어!”

“그래. 멋지네.”

그는 우쭐해진 라우루스의 귀에 빠르게 링크펄을 달아준 뒤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았던 라우루스는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자 곧 신기해하며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만지지 마. 그거 떨어져서 잃어버리면 규칙을 어긴 걸로 칠 거야.”

“힝. 알았어.”

“그러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너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왜?”

“음, 사람들이 널 계속 방해할 수도 있거든. 기다려. 금방 사 올 테니까.”

곧 푸른 기운에 휩싸여 공중으로 떠오른 비에라를 라우루스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직 놀이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집 밖으로 나 없이 먼저 나가버리면, 너랑 다시는 안 놀아 줄 거야.”

“뭐?”

황당해하던 라우루스가 뒤늦게 뭘 더 물어보기도 전에 상대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라우루스는 조금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곤 씩 웃었다.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된단 말이지?


대도시의 의류 상점에 가서, 다짜고짜 ‘요새 어린 애들이 좋아하는 튼튼하고 활동적인 옷 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트로 줘.’라고 요구한다면 누구든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그 괴상한 손님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꺼내 든다면 말이 달라진다. 옷이 담긴 꾸러미를 받자마자 문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텔레포를 시전하는 손님에게 상점 주인은 살가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또 오십셔!”

텔레포가 끝난 직후 이어서 원이 들은 것은 충만한 생명으로 호흡하는 평화로운 숲의 인사였다. 작게 새가 지저귀고,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수풀 사이로 소동물들이 움직인다. 주변에 다른 수상한 인기척이 없음을 소리로 파악한 그는 곧바로 송골매를 불러서 타고 방금까지 있었던 작은 집으로 향했다.

이 주인 없는 집은 검은장막 숲 중부의 구석진 곳,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 사이로 숨겨져 있었다.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있지만 꽤 오래 방치되었다는 것도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 지금은 버려진 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곳에 왜 원이 찾던 물건이 처박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던 것 자체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벌어진 돌발 상황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도 잘 풀렸다고 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고민은 나중으로 제쳐두고, 원은 송골매 위에서 뛰어내려 문제의 집 마당에 가볍게 착지했다. 공중에 남은 송골매를 돌려보내고, 몇 걸음만에 작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어쩐지 원은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어 노크 없이 문을 벌컥 열고 집 안 꼴을 확인한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거기서 뭐해?”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된다면서?”

이 당돌한 꼬마는 역시나 가만히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도대체 멀쩡했던 전등은 왜 떨어져 깨져 있으며, 볼에는 어쩌다 상처가 난 거고, 떠나기 전까지 바닥에 앉아있었던 애가 어떻게 그 짧은 새에 천장의 대들보까지 올라가 있는 걸까?

“그래. 말 잘 들어줘서 고오맙다. 내려와 봐. 선물 가져왔으니까.”

“선물? 뭔데?!”

곧바로 뛰어내려 달려오는 꼬마를 보며 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꾸러미를 내밀자마자 잡아채어 포장을 뜯은 아이는 곧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겨우 옷이야?”

“아까 옷 사 온다고 했잖아.”

“참, 그랬었지……. 그래도, 뭔가 더 굉장한 선물이 있는 줄 알았지!”

“일단 놀이에서 이기고 나서 요구하던가.”

“흥, 그러려고 했어. …근데 이거 어떻게 입어?”

다른 종족이었다면 독특하게 생긴 비에라 전통 복장을 어떻게 벗겨야 할 지부터 고민했겠지만, 원에게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원이 사 온 옷이 신기했는지 생각보다 순순히 말을 들어준 꼬마 덕분에 새 옷으로도 금방 갈아입을 수 있었다. 원은 그 과정에서 발견한 아이의 볼과 팔 등에 있는 상처들을 유심히 살폈다가, 옷을 갈아입은 후에 그의 가방 안에 있던 포션과 연고, 반창고를 꺼내 꼼꼼히 치료했다.

“앗, 따거.”

“간지럽다고 긁다가 떼어내면 안 돼. 하루쯤은 내버려둬야 깔끔하게 나아. 마을에서 치료하는 건 더 귀찮으니까 이걸로 끝내자.”

“으음.”

“옷은 잘 맞아?”

“응! 엄청 편하고 신기해.”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옷 곳곳을 확인하려고 끙끙거리던 아이는 모습을 비춰볼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기묘한 일이 벌어졌었던 거울을 떠올려냈다.

“맞다, 거울! 지금도 이상한 게 보일까?”

아이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곧장 벽을 돌아 달려갔으나 거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어라?”

“일찍도 알아챈다. 천장을 올라갈 생각은 했는데 저길 확인해 볼 생각은 안 했어?”

“깜빡하고 있었지. 네가 먼저 재밌는 얘기를 했잖아!”

“그래, 그래.”

“근데 거울이 없으면, 집으로는 못 돌아가? 나 아까 거울로 넘어온 거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바깥 구경하고 싶지?”

“응! 엄청!”

“생각해 봤는데, 나도 숨을 시간이 필요하잖아? 아까 말한 하얀 술래를 찾으면, 같이 좀 놀고 나서 날 잡으러 오는 건 어때? 내가 적당한 시간에 링크펄로 시작 신호를 줄게.”

“완전 찬성!”

신나서 방방 뛰는 아이를 보며 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만하면 청개구리 꼬마도 어지간해선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 줄 것이다. 평범하게 어르고 달래는 방식으로도 설득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꼬마가 다 자랄 때까지 마을 밖으로 내치지 않고 성심성의껏 돌보고 어울려 준 동족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됐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200년이 넘게 지났으니 이제 그 감정을 받아 줄 사람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겠지만.

원은 집의 대문을 열고 오솔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길을 따라서 쭉 가면 그 사람이 보일 거야. 시작할까?”

“하자! 나 먼저 간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쌩하니 달려 나가는 라우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원은 허허 웃었다. 이제 이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 내야 한다. 저 꼬마가,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이, 미래에서 어떤 사고를 칠 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해결책을 생각해 내기에도 바쁜 시간에, ‘잊고 있던 과거’까지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의 그는 약 75일름 쯤 되는 장신이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또래보다도 키가 작은 편이었다. 방금 집 밖으로 달려 나간 꼬마 정도의, 51일름 쯤 되는 키라면 아마 12살 즈음일 것이다. 더 크고 싶다고 산양 젖을 마구잡이로 마셔대던 시절, 그의 이름은 원이 아니라 ‘라우루스’였다.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니 기억은 희미하지만, ‘라우루스’가 다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사건사고를 몰고 다녔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다. 악의는 없었다. 그저 심심했고,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뿐이다. 장난꾸러기 어린아이가 힘도 머리도 또래보다 훨씬 비범했다는 점에서 그 작은 마을이 감당해 내기엔 조금 벅찼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견뎌야지.

그런 라우루스가 어느 날 장로의 집 안에서 ‘미래와 연결되는 거울’을 발견하고, 거울에 비친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심지어 그 거울을 사용해서 미래로 직접 넘어가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왜 여태 잊고 있었을까. 조금 더 일찍 떠올렸다면 좋았을 텐데. 최소한 이 거울을 발견하기 전에 기억해 냈다면, 없던 일이 됐을 수도……. 아니, 과거에선 이미 벌어진 일인데, 미래에서 막을 수는 있는 건가? 이전의 모험들을 떠올려 보면, 망각조차도 ‘현재’라는 미래를 만드는 일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골치가 아파졌다.

다시 정리해 보자. 애초에 원이 이 거울을 찾아낸 목적은 과거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과거와 연결되는 거울’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연인 이브리스를 위한 깜짝선물이 될 예정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거울을 찾기 위해 엄청난 정보료를 지불하고, 고생해 가며 던전 속에서 헤맸다.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의 어느 구석진 폐가에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과거와 연결되는 거울’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을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 위치로 달려가 거울 앞에 서고서야, 원은 기억해 냈다. 거울을 찾는 과정 내내 왜 계속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는지, 거울 속의 ‘어린 자신’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입이 열렸다. 젠장.

과거의 어린 라우루스는 거울 너머의 원이 자신의 미래라고 바로 연결 짓지는 못한 것처럼 보였다. 원은 라우루스가 거울에서 멀어지기를 바라며 이런저런 말로 설득했지만 소리는 거울 너머로 닿지 않는 듯했고, 그사이 어릴 적의 기억은 점점 더 또렷해져만 갔다. 저 꼬마는 결국 이곳으로 넘어온다. 아니, 넘어왔었다. 하지만 원은 그것이 착각이기를 바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라우루스는 방의 다른 물건들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라우루스가 갑자기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며 넘어졌고, 원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 꼬마를 받아 들었다.

그 직후 원이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가며 한 말과 행동들은 모두 어린 시절 자신의 성향을 고려해서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물이었다. 흥미를 잃지 않고 집중하도록 주의 사항 대신 ‘놀이의 규칙’으로 설명한다. 엉뚱한 장난을 치지 않도록 적절하게 겁을 주되,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할 만큼 강제하는 일은 삼간다. 원이 이 상황의 해결책을 찾을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보호자는 이브리스이므로, 라우루스를 그쪽으로 유도해서 절대 떨어지지 않게 한다. 돌아다니다가 소문이 새면 곤란하므로 관련된 얘기는 모두 비밀에 부친다. 이후 라우루스를 집으로 돌려보낼 때의 상황을 대비해서, 원에게로 돌아와야 놀이가 끝나도록 만든다.

아슬아슬했지만 이 모두를 잘 해냈으니, 이제 라우루스를 돌려보낼 거울을 다시 찾는 일과, 이브리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 남았다. ‘과거와 연결되는 거울’의 또 다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거울이 만들어진 던전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이미 가본 적이 있는 던전이므로 공략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브리스에게 연락하는 일은……. 잠깐?

라우루스는 과거의 원의 모습이다. 그 말은, 지금의 원은 라우루스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리고 라우루스가 마을을 나와 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백 년가량을 모험하는 동안, 그의 기본적인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은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고,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절대 빠지려 하지 않는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이브리스라면 자세한 사정을 몰라도, 그 꼬맹이가 원의 과거 모습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절대 그를 무방비하게 두지도, 사고를 치도록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짧은 시간 동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거의 자신과 어떤 재밌는 추억을 쌓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금방 다녀올게. 조금만 버텨 봐.”

라우루스가 달려 나간 방향, 그리고 이브리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방향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 원은 키득거리며 텔레포를 시전했다. 곧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조용해진 작은 집은 다시 숲의 속삭임을 들으며 깊이 잠들었다.


기억하는 모든 시간을 숲에서 살아온 라우루스는, 오솔길을 따라가는 정도는 잠든 채로 굴러가면서도 가능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이상했다. 낯선 집에서 뛰어나와 신나게 달리는 것도 잠시, 갑자기 어지러워서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라우루스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각들이 흘러들어 섞였다. 그것이 기억인지 꿈인지, 남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결국 멈춰서서 근처의 나무에 기댄 채로 숨을 골랐다.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살피는데, 멀리 서 있는 하얀 형체가 라우루스의 시선을 끌었다.

벼락을 맞은 듯한 환희가 머릿속을 물들였다. 달려가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누구지? 누군데 이렇게 반갑고, 즐겁고, 행복한 걸까? 라우루스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근거를 따지거나 핑계를 찾는 대신 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을 좋아했다. 라우루스는 곧장 달렸다. 달리는 동안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왔다. 좀 전까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간절히 찾던 술래인가 보다!

“드디어 잡았다! 이제 네가 술래야!”

“으악! 너!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달려들면 안…… 원 씨?”

하얀 옷을 입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맑게 갰다. 모르는 사람이네? 분명 아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혼자만 헷갈린 것은 아닌지, 상대도 라우루스를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원씨’라니, 정말 이상한 이름이었다. 대화는 계속해서 엉뚱하게 어긋났다. 알아듣기 힘든 단어와 문장들의 향연 속에서 라우루스는 간신히 한 가지만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씨’는 호칭이고, ‘원’이 누군가의 이름인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라우루스의 것은 아니었다.

“’원’이 아, 니, 라, 고!”

말을 더 주고받고 나서야 상대는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라우루스와는 달리, 상대는 다 큰 어른임에도 판단이 늦은 걸 보면 바보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라우루스 또한 처음 상대를 보았을 때의 이상한 감정과 충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도 바보인 걸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라우루스는 진지하게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보다는, 제대로 떠오른 기억을 바탕으로 상대와 재밌게 노는 것을 먼저 택했다. 방금 술래라고 말해버리긴 했지만, 커다란 비에라와 얘기했던 ‘진짜 술래잡기’만 비밀로 하면 된다. 적당히 거짓말을 섞으면서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라우루스는 낯선 사람과 함께 낯선 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재밌는 일도 실컷 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신기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마을에서도 이만큼 만족스럽게 놀아본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나랑 살자’는 말을 들었을 때, 상대를 경계하기보단 혹하는 마음이 앞서버렸다. 이 사람과 계속 같이 지낸다면, 매일매일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완연히 밤이 되어버린 하늘에 박힌 별들은 마을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뿌려져 있고, 코앞에서 빛나는 다른 색깔의 두 눈동자 속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낯섦이 두렵기 이전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을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슬픈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다정한 약속과 아직은 막연하기만 한 기원이 가득 담겨서, 조금 무겁게까지 느껴지는 투박한 단검을 들고, 라우루스는 활짝 웃었다. 만난 이래 라우루스는 수많은 물음표를 장난스레 던져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였다.

라우루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당신에게 물었다.

“근데, 넌 이름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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