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기반 자캐커플] 원이비

준비되지 않은 소원

(파판14 기반 자캐커플) 수호천절 기념 원이비, 그런데 이제 수호천절은 거의 끝나갈 때 마감한.

Dreaming Blue by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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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긴 디지르 가의 문을 다시 열게 되었습니다.

수호천절 기념 비밀 무도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라고, 그리고, 꿈꾸던 모든 것을 만나보세요.

드레스 코드 : 어울리는 의상을 저택에서 직접 제공해 드립니다.

장소 : 아래의 나침반을 보고 따라오세요.


“재밌네. 구체적인 장소를 일부러 적지 않고 마법으로 대체했나 봐. 초대장 없이는 찾아가지도 못하도록.”

원은 손에 든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리고 팔락거리며 아래쪽의 나침반 그림을 유심히 살폈다. 초대장 아래쪽에 그려진 나침반은 종이의 움직임과 별개로, 자침을 이루는 선이 돌아가며 계속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구의 위치도 계속 변하는 모양이에요. 가만히 둬도 그림이 어느 순간 갑자기 움직이네요.”

이브리스는 자신 몫의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관찰하다가, 팔짱을 낀 채로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평범한 무도회라면 이렇게까지 숨겨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아무래도…….”

“의뢰인의 말대로, 구린 구석이 있는 거지.”

원이 이브리스의 말을 물 흐르듯이 이어받고선 씩 웃었다.

“들켜선 안 되는 이유 같은 것 말이야. 사람들을 저택으로 유도해서 가둔 다음 에테르를 쪼옥 빨아먹는 것이 목적이라거나, 하는.”

“마력의 수준도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아요. 단단히 무장하고 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 너무 눈에 띄면 곤란해. 정말로 전투 능력이 강하지 않은 요마가 범인이라면,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초대장을 없애고 도망갈 수도 있어. 위치도 계속 변한다며?”

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비는 천구의 외형을 작고 예쁜 모양으로 투영해 두면 괜찮을 거야. 멋내기용… 떠다니는 장식품? 뭐 그런 거라고 우기자.”

등에 지고 있는 대검을 눈짓으로 가리킨 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대검은 숨기기도 어렵고, 투영을 바꿔봤자 기본적인 크기가 너무 커. 오랜만에 작은 검을 들어야겠네.”

이브리스가 원의 허벅지 부근에 달린 단검을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이브리스의 시선을 따라간 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이걸론 어림도 없지! 오랜만에 한손검을 들 거야. 레이디를 모시기 위해 참석한 호위 기사 정도로 위장하고 장식이 가득한 예식용 검을 차면 어떨까?”

원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에 말한 적 있었지? 난 원래 암흑기사가 아니라 검술사였다고. 한손검을 들고 지낸 기간이 훨씬 길었어. 이참에 보여줄게.”

“와아, 정말요? 기대되는걸요!”

“오랜만이니까, 좀 어색해 보여도 적당히 놀려야 해?”

“놀릴 리 없잖아요. 그리고 원 씨라면, 분명 능숙하게 다루실 것 같은걸요.”

따뜻하고 밝은 눈빛이 원을 직시했다. 흔들림 없이 신뢰로 가득 찬 그녀의 미소에 오히려 원이 조금 머쓱해져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고마워. 그러면 내일, 해가 뜨면 여기서 만나서 같이 가자.”

“네! 오늘 푹 쉬셔야 해요?”

“너야말로. 긴장하지 말고!”

이브리스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고 떠나가는 원의 뒷모습을 보며 이브리스는 생각했다. 아마 전투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겠지만, 다른 쪽으로 두근거려서 잠을 설칠지도 모르겠다고. 이브리스를 등 뒤에 두고 문을 열고 나가며 원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재밌겠다! 굉장히 오랜만에 참여하는 무도회였다. 그는 창고에 쌓여 있을 수많은 검들을 떠올렸다. 어떤 걸 들고 가야 이비가 좋아할까?


— 3일 전.

“이번 수호천절도 평범하게 지나가진 않겠구나.”

봉투를 건네받은 원이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중얼거렸다. 이브리스는 원과 똑같이 생긴 다른 봉투를 받고선 미심쩍다는 듯이 테이블 건너편의 의뢰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요마 토벌을 의뢰하시는 건가요?”

“조금 달라요. 요마가 저택에 걸어둔 요술을 파훼해서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문제의 요마는 잡아서 제게 데려오는 것까지가 의뢰 내용이에요……. 제압 방법은 두 분의 판단에 맡길게요. 키득키득.”

수상쩍은 호박 모형을 머리에 쓰고 있는 의뢰인이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가리고 웃었다.

“전투 능력은 보잘것없는 요마에요. 특유의 매혹과 환영만 조심한다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제가 두 분께 저항력을 올려주는 연금약도 챙겨 드릴 테니 어지간해선 안전하겠죠.”

원이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거짓 의뢰를 하거나 악의적으로 속일 사람은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다만,”

원의 입에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배후에 요마 하나만 있는 게 아닐 가능성은?”

“없어요. 하지만…… 만약 언급한 것 외의 존재가 있다면, 마음대로 행동하셔도 좋아요.”

“요마뿐이라고 가정해도, 무조건 살려서 잡아 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어. 우리의 안전이 우선이니까. 그래도 의뢰하겠어?”

“그래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없애버려도 따지지 않을게요. 하지만 의뢰 그대로 ‘충분히 할 수 있는’ 당신들의 실력을 믿으니까.”

“이것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 그대로의 칭찬으로 들으면 되잖아요?”

“그 바보 같은 호박머리 때문에 표정이 안 보여서 놀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당신은 표정이 보여도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피장파장이군요……. 키득키득.”

이브리스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두렵기보단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건 왤까. 이브리스는 둘을 내버려두고 의뢰인이 건네준 봉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고급스러운 재질에, 꽤 고풍스러운 인장이 찍혀있었다. 그 외엔 별다른 장식이 없는데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예쁘다는 감상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탐을 낼지도 모르니 품속에 숨겨서 나중에 몰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브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평범한 초대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뢰인의 설명에 따르면, 작년 수호천절 축제 기간에 묘한 실종 사건이 몇 건 있었다고 한다. 장소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에오르제아 전역에서 드문드문 일어났기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에오르제아는 이런저런 이유로 실종 사건이 많은 곳이니까. 그러나 한참 후 검은장막 숲 으슥한 곳에서 실종자들이 단체로 발견된다. 에테르가 모조리 빨려 나간 시체 상태로.

종말의 여파가 남아있는 세계에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공포와 혼란을 심어줄 수 있는 사건이다.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고 판단한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일단 이 사건의 진상을 비밀리에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흔적을 추적해 보니, 공통적으로 실종 전 비밀스러운 저택에서 날아온 수상한 초대장을 받아 떠났다는 주변의 증언이 있었다.

그 사이 1년이 훌쩍 지나고, 다시 수호천절이 돌아왔다. 조사는 진척이 없었지만, 올해 수호천절은 ‘호박 머리의 마인’이 개입하며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됐다. 요마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호박 머리의 마인은 각 도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각자의 이유로 바쁜 지도자들이 반신반의하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자 실망했다. 차라리 유능한 모험가에게 따로 의뢰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그 길로 원과 이브리스를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는 알려줄 수 없어요. 초대장을 어떻게 얻었는지도 알려줄 수가 없군요.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올해도 누군가는 죽고 말겠죠. 그것만은 막아야 해요.’

수상쩍은 의뢰였으나 원은 바로 수락했다. 그녀와는 구면이라고 했다.

‘원 씨는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한 건가요?’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알아.’

어이없어하는 이브리스 앞에서 원은 능청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응수했고, 호박 머리의 마인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이것이 몇 분 전의 상황이었다.

“초대장에도 요술이 걸려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도록 해요. 연금약은 충분히 있으니 모자랄 것 같다면 더 요청해도 좋아요.”

“지금도 양은 충분해. 맛을 좀 더 조정할 순 없을까? 기왕이면 맛있는 게 좋잖아.”

마인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호박 머리의 표정이 새겨진 쪽이 이브리스를 향했다. 흰 호박에 파여있는 구멍 너머로 마주한 것이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붉게 번뜩이는 빛뿐이라는 점이 은근히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한 장도 겨우 얻어낸 거지만, 어렵게 초대장을 두 장까지 마련한 이유가 있어요.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와 이브리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이 혹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든……”

“어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호박 머리의 마인은 원을 가볍게 무시하고 꿋꿋하게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야 몸을 돌렸다. 그동안 이브리스의 얼굴은 심각해졌다가 빨개졌다가 침착해지는 등 다채롭게 변했고, 원은 그 모습을 보며 팔짱을 끼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나만 빼놓고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야?”

“…키득키득.”

“이비, 쟤가 뭐래?”

“…원 씨가 바보라고 하셨어요.”

“어머, 분명 비밀이라고 당부했는데……. 키득키득.”

“호박머리 넌 나중에 나 좀 따로 보자.”

“그럼, 이만 가봐야겠어요. 두 분 모두 무사히 잘 다녀오시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무시하지 말고!”

“걱정 마세요, 멋지게 완수하고 올게요!”

원은 빠르게 인사하고 멀어져가는 호박머리 마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즐거워서 꼬리를 살랑거리던 이브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즐거우면 된 거지, 뭐.


— 그리고, 무도회 당일.

부드럽게 돌아가며 저택의 위치를 가리키던 초대장 위의 나침반 그림이 어느 순간 멈추더니 검게 물들었다. 검은 잉크는 종이 아래쪽으로 넓게 번진 후에 다시 조금씩 뭉치며 새로운 글자로 변했다.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동시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크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과 이브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것 같았다. 조금 앞서서 걷는 원은 전투용 갑주가 아닌 단정한 정장 차림에 보석이 잔뜩 박힌 은빛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고, 이브리스는 움직임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한껏 멋을 낸 파티 드레스를 입은 채로 그 뒤를 따랐다. 이브리스의 등에서 원판형의 금속 장식이 반짝거렸다. 튀어나온 부분이 얼핏 작은 날개처럼도 보였다.

“이야, 돈깨나 들었겠는데.”

활짝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며 원은 휘파람을 불었다. 저택의 입구까지 이어진 길의 양옆으로 보이는 정원의 조경 상태가 수준급이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와 꽃밭 사이로 그림처럼 세워진 파고라, 섬세하게 조각된 석상과 제법 크고 화려한 분수까지. 그러나 식물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고, 파고라 안쪽은 지나치게 어두웠으며, 조각상은 섬세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이 과한 면이 있는 데다, 분수는 바짝 말라 있었다. 드문드문 놓인 창백한 조명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조각상을 한껏 노려보던 이브리스가 속삭였다.

“평범한 조경물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 이를테면 ‘평범한’ 석상인 척 숨을 참고 있는 가고일이라던지.”

원은 어깨를 으쓱하곤 근처에 있는 조각상으로 성큼 다가가더니 받침을 노크하듯 똑똑 두드렸다. 깜짝 놀란 이브리스의 꼬리가 소리 없이 부풀었으나 다행히 조각상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난스레 미소 짓는 원이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다. ‘아쉽게 됐네?’ 이브리스의 꼬리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대신 귀가 옆으로 바짝 누웠다. 원은 ‘놀리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이브리스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이브리스는 작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주위를 흐르는 마력의 흐름에 집중하며 천천히 걸었다. 수상한 에테르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바로 보호 마법을 시전할 생각이었다. 느긋하게 걷는 원 역시 겉으로는 싱글거리고 있지만, 살기나 적개심이 느껴지면 바로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집중하고 있었다. 정원에 감도는 스산한 적막 속에 한동안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사이로 낯선 기척이 섞여 들자, 원과 이브리스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두 사람이 주시하는 대문 쪽에서 곧 무언가가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귀부인은 한껏 경계 중인 원과 이브리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원이 이브리스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진짜 사람인 것 같지?”

“네, 요마 특유의 에테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원은 싱긋 웃으며 칼자루에서 손을 거뒀다.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작은 천구의를 다시 집어넣은 이브리스도 온화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웠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드레스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친 여성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들도 초대장을 받고 이 저택에 온 사람들인가요?”

“이거 말하는 거야?”

원이 장난스레 초대장을 들고 팔락거리자, 부채 너머로 얼핏 보이는 여성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마부가 몇 번이고 멈춰서서 여기가 길이 정말 맞냐고 묻더군요. 제대로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무사히 도착한 것도 다행이에요.”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너도 마물인 줄 알았지 뭐야. 놀라게 했다면 미안~”

“괜찮아요. 제가 당신들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군요.”

여성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부채를 내리고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연인끼리 온 건가요? 부럽네요.”

이브리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제대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그녀를 힐끗 바라본 원이 대신 답했다.

“지금은 아가씨를 모시는 호위 기사, 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그렇군요. 좋은 시간 보내길 바라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쪽도 잘 놀다 가길 바라.”

살짝 몸을 숙이며 이브리스와 인사를 주고받은 여성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원은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브리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날카롭게 찔린 듯 아픈 마음을 억눌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원은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야말로 ‘사귀는 것 빼고 다 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어정쩡한 관계에 둘은 계속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연인은 아니지. 알고 있지만 무심결에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시무룩해진 채 입을 삐죽 내밀던 이브리스는 그가 고개를 내려 마주 보자 황급히 표정을 지우고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원은 순간 스쳐 간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지만, 모른 척 웃으며 이브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조심스레 올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받아 잡는 커다란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늘 그랬듯이. 그렇게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늘한 정적 속에 다시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작고 말랑한 손을 꽉 잡아 가까이 당기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는 원의 속만 조금 시끄러울 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정원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저택 내부는 밝고 화려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집사가 다가와 초대장을 확인하더니 두 사람을, 정확히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기 쪽을 번갈아 빤히 바라봤다. 원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비틀렸다.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은 누가 봐도 무기가 맞지만, 이브리스의 등에 있는 천구의는 평범한 사람에겐 생소하고 한 번에 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무기다. 이걸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위험한 물건은 들이지 말라는 주인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맡아 두었다가 퇴장하실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거 은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검이야. 쓸데없는 보석이나 잔뜩 박힌 거 보이지? 휘거나 깨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어떻게 휘두르겠어?”

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호위 기사라면 당연히 이 정도쯤은 차고 다녀야지. 이런 귀중품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믿고 맡기는 것도 역시 말이 안 되잖아.”

“제 등에 있는 건 어머니께서 제가 무도회에 간다 하니, 장신구로 쓰라고 빌려주신 거예요. 특이하게 생기긴 했는데, 이게 문제가 될까요? 날카롭지도 않은데...”

이브리스가 순진한 아가씨인 척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바라보자, 집사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될 시 퇴장조치가 내려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무도회장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원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본 집사는 곧 몸을 돌려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브리스가 슬그머니 원 옆으로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원 씨, 정말 은으로 만든 무기에요?”

“설마. 이거 티타늄이야.”

웃음을 꾹 누르고 시선을 교환한 둘은 그사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는 집사를 얼른 따라잡았다.

이브리스는 무언가 튀어나오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주위를 경계하며 걸었다. 복도는 벽에 걸린 액자나 창백한 조명 외에 별다른 장식이 거의 없이 깔끔하게 이어져 있었다. 다만 액자마다 이상하게 뭉개진 풍경화나 얼굴이 흐린 초상화가 걸려 있어 기괴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원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수상할 정도로 말수가 적은 집사는 대부분을 엄숙한 침묵으로 일관한 탓에 쓸만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이브리스에게만 작게 들렸다.

연회장이 입구에서 지나치게 멀리 있는 건 아닌가, 제대로 안내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할 때쯤 나타난 거대한 문 앞에서 집사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러고 보니 옷을 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일단 들어가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집사는 꾸벅 인사하고는 뒤돌아 사라졌다. 멀어지는 집사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좇던 원은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품속을 뒤적이다가 작은 약병 두 개를 꺼냈다.

“이거, 지금 마시자. 이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환혹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원은 병뚜껑을 열고 한 번에 들이킨 다음, 다른 한 병을 이브리스에게 건넸다. 이브리스 또한 잠시 망설이다가 빠르게 마셔 삼켰다. 엄청나게 쓰거나 비린 맛 등을 각오했으나 생각보다 지독하지 않았다. 은은한 떫은맛 정도만 느껴졌다.

“호박 머리가 나름대로 신경은 써 줬네.”

원은 피식 웃으며 이브리스로부터 빈 약병을 건네받아 다시 품속에 넣었다.

“자, 이제 들어가 볼까?”

“네! 전 준비됐어요.”

“읏쌰.”

원은 힘주어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그 안에서부터 어떤 기운이 쏟아져나와 원과 이브리스를 덮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금방 돌아왔다.

그렇게 펼쳐진 내부의 광경은 놀라울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바깥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밝은 조명,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음악과 향긋한 냄새, 웅성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부서지는 행복한 웃음. 정원은 분명 밤으로 착각할 만큼의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이곳의 커다란 창문에선 눈부신 햇빛이 가득 넘어와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가운데의 넓게 트인 공간에서 어울려서 춤을 추거나, 옆으로 빠져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홀의 양옆에 일렬로 놓인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과 디저트, 술과 음료 등이 넘치도록 있는데도 사용인들은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음식과 음료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식기도 은 세공을 넘어서 아예 보석을 깎아 만든 건 아닌지 의심될 만큼 모든 것이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

이브리스 쪽을 돌아본 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어깨 아래로 늘어져 찰랑거려야 할 그녀의 긴 생머리 대신, 꼼꼼히 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가 희게 반짝였다. 머리 장식 사이로 영롱한 빛을 뽐내는 보석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면서 드러난 가느다란 목을 멍하게 응시하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아래로 향했다. 어깨를 모두 드러내다 못해 가슴까지 깊게 파이고, 몸의 곡선이 눈에 띄게 드러날 정도로 딱 달라붙은 드레스 자락이 다리 아래쪽에 가서야 예쁘게 퍼지는 하얀 이브닝드레스였다.

“빌려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워, 원 씨, 머리가,”

이브리스 쪽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원의 옷이 변한 것은 바로 눈치챘다. 그러나 원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자, 단지 옷만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주 전, 최근 유행한다는 머리 스타일이 크게 그려진 미용실 카탈로그를 무심하게 보고 넘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쉼표 머리라고 했던가, 이마를 일부 드러내고 둥글게 옆으로 늘어뜨린 짧은 앞머리에, 그 뒤로 층층이 짧게 쳐낸 머리 스타일의 어디가 그렇게까지 멋진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만 원이 평소의 짧고 동그란 숏컷 외에 다른 머리 스타일을 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가 저런 머리를 하면 어떨지 잠시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어쩌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실은 그냥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좀 심하게 두근거릴 정도로 잘생겨 보였다.

“응, 옷도 바뀌었네.”

원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끙 소리를 내다가, 짧게 숨을 내뱉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이브리스를 바라봤다. 그녀가 입은 옷을 두고 머메이드 드레스라고 부르던 것 같았다. 언젠가… 의상실에서 보고, 이브리스가 입으면 정말 예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직접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라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동시에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눈동자만 잘게 흔들렸다. 좀 전의 파티 드레스도 충분히 귀엽고 예뻐서 좋았지만 지금은,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한 심호흡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신기하네요. 와아....... 잘 어울려요!”

이브리스는 들떠서 감탄을 연발했다. 변해버린 옷의 디테일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이 원래 여기까지 입고 왔던 옷은 단순화된 일종의 턱시도에 가까웠다. 오는 길에 옷 가게에 들러서 불편해 보이지 않을만한 정장을 대충 사서 입고 왔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설레서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 무도회장에 들어와서 바뀐 옷은 제대로 각이 잡힌 검은색 테일코트였다. 척 보기에도 비싼 원단에 은은하게 들어간 패턴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고, 여기에 그의 훤칠한 체격이 옷걸이가 되어주니 깔끔하게 떨어지는 옷 핏이 가히 예술에 가깝다, 고 이브리스는 생각했다. 평소에도 이런 옷을 입어주시면 좋겠다. 임무가 끝나면 한 번 더 부탁해 볼까? 의식하지 못한 새에 그녀의 귀가 쫑긋 서고 꼬리가 살랑거렸다.

한편 원은, 멍해진 정신을 다잡으려 재차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브리스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다가 문득, 그녀의 옆얼굴에 미처 다 묶이지 않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빠져나온 것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거슬렸다. 홀린 듯이 천천히 몸을 숙여 뻗은 그의 손이 부드럽게 이브리스의 귓바퀴를 따라 잔머리를 넘겼다. 이브리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숨결 한 자락도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온몸이 굳었는데, 얼어붙었다고 표현하기엔 피부가 홧홧하니 뜨겁게만 느껴졌다. 아직 시간이 멈추지는 않았음을 증명하듯 각자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연금약, 한 병 더 딸까?”

아스라이 멀어지던 무도회장의 소음이 확 커지며 현실감이 돌아왔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이브리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원은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는 소리를 냈다.

“여태 겪어본 것 중에 손꼽을 정도로 강한 환영 마법이 이곳에 걸려 있는 것 같아. 이대로는 위험할 것… 같네.”

“네에, 한 병 더 주세요.”

부끄러워하면서도 묘하게 토라진 모습마저 귀엽다, 고 느낀 순간 원은 황급히 연금약을 꺼내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며 다른 한 병을 이브리스에게 건네자, 이브리스는 뾰족한 시선으로 원을 응시하더니 한숨을 폭 내쉬고 뚜껑을 열어 연금약을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도회장 안의 풍경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확히는,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며 분리되었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분리되는 순간에 원래의 형상이 얼핏 비쳐 보이는 것을 발견한 이브리스의 눈이 커졌다. 화려한 샹들리에 대신 낡아빠진 조명등이 순간 깜빡였다. 음식이 가득 넘치던 테이블 위엔 텅 빈 접시와 잔만 남았다가 다시 채워졌고, 북적이는 중앙 댄스홀에서 사람의 일부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모습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중해서 자세히 보면 무도회장에 들어오기 전, 원래의 착장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원 씨도 보여요? 이 잔상… 같은 것요.”

“응, 이게 전부 환영이라니 대단하네.”

원은 기재개를 쭉 켰다.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이브리스는 아름다웠고, 마음이 동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꺼내서는 안 되는 욕망은 제대로 억누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좀전의 충동적인 행동 역시 요마의 마법의 영향을 받은 걸까 싶어 골치가 아팠다. 진상을 알고 있고, 저항력을 올려주는 연금약을 마셨는데도 이 정도니,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곳의 환혹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겠다 싶었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안전하게 구출해야 한다면, 일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원은 빠르게 무도회장을 눈으로 훑었다. 이곳에 있는 ‘진짜’ 사람은 하나, 둘…

“이비. 춤출 줄 알아?”

“네? 네, 어느 정도는…….”

“그럼 레이디, 한 곡 추시겠습니까?”

원은 다시 원래의 여유를 되찾은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고 낮게 속삭였다.

“중앙에서 상황을 더 살펴야겠어. 무도회장 한복판으로 그냥 걸어가면 너무 이질적일 테니까, 어쨌든 춤은 춰야 하지 않겠어?”

가까이서 한쪽 눈을 찡긋하는 원 앞에서 이브리스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긴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당장이라도 어깨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녀가 흔든다고 그의 몸이 정말 흔들릴지는 둘째치고, 그에게는 이게 별다른 의도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이브리스는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속이 답답했다. 당장이라도 키스할 듯이 굴다가, 알아서 분위기를 깨질 않나, 그러다 또 이렇게 사람 두근거리게 만드는 건 정말 반칙이다. 얄미워. 턱 끝까지 차오른 두근거림을 간신히 삼킨 후에 이브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잠시간, 원은 이브리스가 머뭇거리고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는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익숙하지 않아도 걱정 마, 리드는 내가 할게. 몸 쓰는 일에는 자신 있어.”

이전에 원과 몸을 섞었던 기억이 확 떠올랐다. 그때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덕분에 이브리스에겐 방금 그의 발언이 단순히 말 그대로의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겨우 진정시킨 것이 무색하게 다시 새빨개진 얼굴을 그녀가 양손으로 어설프게 가리고 중얼거렸다.

“짓궂어요.”

“응? 뭐가?”

“그 점이요.”

원은 씩 웃기만 했다. 사실 대충 짐작은 갔다. 좀 전의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것에 대한 작은 복수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손 떨어질 것 같아요, 레이디.”

“정말……!”

그녀가 겨우 내민 작은 손을 원이 소중히 받아 쥐었다. 능청스레 궁중 예법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풍스러운 인사를 한 원은 이브리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얼른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아 당기며 본격적인 자세를 잡았다. 음악에 맞춰 박자를 세는 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좀 전의 당황이 가시지 않은 탓에 스텝이 꼬여 원의 발을 몇 번이고 밟았으나, 그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춤을 이어 나갔다. 그가 부드럽게 이끄는 힘을 따라 몸을 움직이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이브리스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고, 어느새 즐거운 미소가 입에 걸렸다. 리듬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그녀도 곧잘 따라오며 원과 호흡을 맞췄다.

“생각보다 더 잘 추시네요. 왠지 원 씨는……”

“이런 쪽에 관심도 인연도 없을 것 같지? 하하. 그럴 뻔 했는데, 살다 보면 궁중 무도회 같은 어마어마한 곳에도 가야 할 일이 생기더라.”

“그럼 독학으로 이만큼 해내신 거에요?”

“그건 아니고. 전문 무용수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았어. 어우, 잔소리도 수준급이던데.”

키득거리는 원과 함께 이브리스도 작게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움직임에 여유가 더 생겼다. 원은 그 김에 쭉쭉 나아가며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는 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브리스도 함께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뜬 그녀의 표정을 보고 원이 속삭였다.

“네가 보기엔 어때?”

“시선이 이상해요.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실제와 어긋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말이네. 역시 이비는 눈썰미가 좋아.”

수줍게 웃는 이브리스를 내려다보며 원이 칭찬하듯 그녀와 맞잡은 손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이어서 그는 무도회장의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홀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웃음과 음악 소리도 조금씩 흐려졌다.

“환영이 ‘진짜’의 춤을 따라가는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보다 미세하게 지연되어 보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 느린 게 아니라…”

“늦은 거야. 환영이 따라가는 속도가.”

둘은 빠르게 음식이 쌓인 테이블 자리 근처까지 빠져나왔다. 원이 손을 놓고 과장되게 궁정식 인사를 하자, 이번에는 이브리스도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무릎을 숙여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원의 눈썹이 곧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몸에 딱 붙는 드레스고, 원래의 파티 드레스 자락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브리스의 손은 분명히 허공을 잡고 있었다. 원은 곧장 옆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집어 들었다.

“이비, 이거 뭐로 보여?”

“마들렌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며칠 전에 원 씨가 선물해 주셨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네요.”

“그렇구나. 난 이게 먹음직스러운 커다란 스테이크로 보여.”

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 옆의 잔을 들어 올렸다.

“이건?”

“네? 찻잔… 처럼 보이는데요? 안에 든 건 홍차인가요?”

“잘 숙성된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아니란 말이지?”

“…네.”

원은 와인잔, 혹은 찻잔일 수도 있는 무언가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각자 보는 환영의 형태가 조금씩 다른 모양이야.”

“그, 그래서 시선이 안 맞았군요.”

테이블 위에 ‘며칠 전 원 씨가 사다 줬던 마들렌’이 유난히 많이 보인 이유는, 그녀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브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 있는 원 씨의 모습도? 그 순간, 원도 머릿속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술과 고기는 그렇다 치자. 이브리스의, 젠장, 내가 저 모습을 원했다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기에 두 사람은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이브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라고, 그리고, 꿈꾸던 모든 것을 만나보세요.’ 초대장에 적혀있던 문장이 이걸 뜻하나 봐요.”

“맞춤형 대규모 환영이라. 여러 명의 에테르를 긁어모아도 유지하기에 한참 모자라겠어.”

“희생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빨리 막아야 해요.”

원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단서를 더 모아보자. 춤추는 쪽은 완전히 홀려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벽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보거나 들은 게 있을지도 몰라.”

“제가 저기 왼편을 맡을게요.”

“좋아, 그러면 내가 오른쪽을 맡을게. 탐문이 끝나면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무도회장 입구 근처에서 만나자.”

“네! 부디 조심하세요.”

“너야말로. 아, 잠시만.”

원은 품속에서 연금약이 담긴 병을 꺼내 이브리스의 손에 쥐여줬다.

“지금도 충분할 것 같지만, 미심쩍다 싶으면 꺼내서 마셔. 대충 세 번까지는 몸에 아무 이상 없댔으니까.”

“원 씨는요?”

“한 병 더 남아있으니까, 낌새가 이상하면 나도 알아서 챙겨 마실게.”

그제야 안심하고 왼쪽 테이블석을 향해 멀어지는 이브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원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원은 성큼성큼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렀다.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구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말을 걸었을 때 반응이 있다면 상대가 최소한의 이성은 붙들고 있는 상태였고, 말을 걸어도 알아채지 못하면 환영이거나, 이미 환상에 사로잡혀 붙잡고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탁한 눈에 초점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싶으면 굳이 더 건드리지 않았다. 억지로 환상과 분리하거나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것보다, 마법의 근원을 차단해서 자연스럽게 깨어나게 만드는 것이 정신에 타격이 덜 간다. 수없이 경험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탐문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의 요령도 요령이지만, 대부분 이 무도회장에서 수상쩍은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탓에 더 캐물을 것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정신이 또렷해 보이는 일부가 ‘입구가 아닌 구석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해 준 덕에, 어쩌면 본격적인 에테르 갈취는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단서는 얻을 수 있었다.

오른쪽 테이블석과 그 주위 벽을 모두 둘러본 원은 이브리스와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예상외로 이브리스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빨리 왔네?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원 씨, 제가 요마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 같아요.”

“오, 잘 됐다. 그게 어딘데?”

“직접 안내할게요!”

신나서 앞장서는 이브리스를 따라 원은 무도회장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조명이 닿지 않아 어두운 그늘 속에,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쪽문이 보였다.

“여기예요. 문 너머에 다른 공간이 있다고 했어요.”

“비슷한 얘기를 나도 들은 것 같아.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갈게.”

이브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웬일로 쉽게 보내주네. 나보다 몸도 약하면서 늘 앞장서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원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쪽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로 한 발짝 딛고 나서야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걱정도, 기운찬 대답도 없었다. 이곳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일렁이는 환영의 잔상도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선명하고 밝은 모습의 이브리스가 ‘진짜’ 일 리 없다. 원은 황급히 뒤를 돌았다. 무도회장의 풍경은 이미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지고 있었으며, 기묘한 미소만 남은 이브리스가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쨍하게 울리는 두통이 느껴지더니 곧 온몸이 뒤집힐 듯 휘청거렸다. 원은 단단히 버텨 셔서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쉰다. 하나, 둘, 셋…

목을 조르던 공기가 확 트이며 잔잔한 온기로 피부를 간지럽혔다. 원은 잔뜩 찡그렸던 눈을 천천히 뜨고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실내, 그것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안처럼 보였다. 손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고서야 쥐고 있던 주먹도 풀었다. 가죽으로 된 손보호대가 손톱 모양으로 푹 파여 있었고, 그 안쪽으로 피도 살짝 비쳐 보였다. 임무가 끝나면 더 튼튼한 것으로 갈아껴야지,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신중하게 주변을 관찰했다. 생활감이 묻어나는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포근해 보이는 소파, 책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 그리고 벽면에 장식된 익숙한 무기…?

원의 눈이 커졌다. 그가 평소에 쓰는 대검이 벽에 걸려있었다. 황급히 등을 더듬자, 대검이 메어져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잠시 얼어붙은 그는 곧 아차, 하고 손을 허리춤 쪽으로 옮겼다. 쓸데없이 장식만 많은 한손검이 손에 바로 잡혔다. 맞다, 무기 바꿔 들고 왔었지. 그래서 저기 걸려있나?

머릿속이 아직 혼란스러웠다. 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차근차근 다시 짚어본다. 이 공간은 누군가의 ‘집’이다. 그리고 이 저택은, ‘방문객이 원하는 것’을 현실처럼 꾸며 보여주는 환영 마법이 걸려있다. 문 안으로 들어온 것은 자신 뿐이니, 아마도 환영임이 틀림없는 이 공간을 만든 당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다.

“내가 집을 바랐다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그것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는 긴 시간 동안 방랑했다. 너무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했다. 겨우 마음 놓고 쉴 곳이 생기나 싶었던 시절엔, 제대로 터를 잡기도 전에 함께 살기로 약속한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것도 벌써 백 년이 넘게 흘러간 과거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을 바란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혼자 사는 집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돈은 남아도니까, 귀찮게 청소하고 관리하느니 여관에서 묵는 게 백배 낫다. 그래서 포기한 지 오래였는데. 정말로 집을 얻는다면, 그건 그만큼, 같이 살고 싶은 소중한 누군가가 생겨야 생각이나 해볼 텐데.

“이제 와서 누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에 스스로 흠칫 놀라 굳었다. 누가? 책이 가득 꽂힌 책장. 옛 연인은 실내에서 독서하기보다 나가서 전시품을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책에는 관심이 없다. 이만큼이나 책을 쌓아두고 볼 사람이라면, 그건…….

멀리서 작은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원은 떨리는 시선을 겨우 돌려, 여태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소원과 마주했다.

“원 씨! 이제야 오신 거예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로 반겨주는 이브리스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당연히 안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눈빛으로 보채고 있다. 실내에서나 입을 법한 편한 옷차림에, 까치발을 들고,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다. 원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 육성으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비명에 가까운 이명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수는 없어, 이래서는 안 돼! 눈앞의 이브리스가 천천히 팔을 내리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예요?” 그러더니 곧 심각해진다. “설마 다쳤어요!? 괜찮아요?”

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좀 전의 상처로부터 미약하게 피 냄새가 났다. 으흐흐, 하고 우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다 손을 뚝 떨어뜨렸다. 그는 더듬더듬 다시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검집에서 빠르게 뽑아 들고 겨누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이 이브리스를, 환영을 노려봤다.

“진짜도 아닌 주제에 그런 표정 짓지 마.”

환영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겁을 내긴커녕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멈춰.”

“제가 도와줄게요.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 만큼의 강한 살기가 환영에게 꽂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원은 그대로 검을 들어 내리그었지만, 검날은 결국 환영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췄다. 이브리스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심한 욕설이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젠장.”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원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무릎을 꿇은 채로 환영을 꼭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럽고 말랑하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자 원은 이를 악물었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잘 들어. 언젠가 너를, 네 마음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아니야…….”

꽉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터뜨려버릴 기세로 힘껏 조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너를 위한답시고 상처 주는 일도 그만둘 때가 됐지. 미안해, 하지만 이것도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쐐기를 박듯 원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제, 이 빌어먹을 가짜 꿈에서 깨어나자.”

공간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팔 안에 가득했던 온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원은 벌떡 일어나 다시 검을 뽑아 들어 가까운 벽에 쾅 소리가 나도록 박아 넣었다. 검이 파고든 곳에서부터 균열이 일기 시작하자 원은 검을 뽑아내고, 구멍 난 자리를 겨누며 한쪽 다리를 치켜들어 접었다. 그가 힘껏 발로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나며 기어이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 일로부터 약 한 시간 전. 다시 무도회장.

이브리스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자세히 보면 환영과 실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만큼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기에 조사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을 골라내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어떤 사람은 재차 물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그래도 비교적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이브리스는 후자에 공을 들이며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법한 단서가 없을까?

그렇게 모든 테이블을 돌고 벽을 샅샅이 살피고 나니 조금 지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가 진짜면 좋았겠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작게 입맛만 다셨다. 목이 타는데, 가지고 있는 마실 것이라고는 연금약밖에 없었다. 이브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마셔서 나쁠 것 없지 않을까? 원 씨도 세 병까지는 괜찮다고 하셨고. 미리 마신다고 손해 볼 것도 없고? 이브리스는 곧장 약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연금약을 들이켰다. 적은 양이지만 목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떫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브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탓인가? 목이 말라서 이렇게 느껴지는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비!”

“어라, 원 씨?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요?”

“네가 너무 늦길래, 찾으러 왔어. 아무래도 내가 요마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 같거든!”

그녀 딴에는 열심히 돌아다녔는데도 딱히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 못했기에, 원의 말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민망했다.

“아……. 저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 원 씨라도 수확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응. 얼른 가보자. 저쪽이야.”

신나서 앞서가는 원의 뒷모습을 보며 이브리스는 묘한 기분에 잠겼다. 방금 원 씨, 무언가 이상했는데……?

짓궂게 장난을 치면서도 다정함을 절대 잃지 않는 사람이다. 작은 위로 하나쯤은 돌아올 법한 상황이었는데, 쌩하니 먼저 가버리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브리스는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원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환영이 분리되며 보여야 할 잔상이 나타나질 않았다. 싸늘하게 식는 듯한 감각에 이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건, 진짜 원이 아니다. 이브리스는 긴장한 몸을 작게 털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원의 환영을 보여주면서까지 유도한다면, 그건 이 환혹 마법의 핵심과 가까워지는 길이리라.

“이비? 안 올 거야?”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이브리스는 황급히 드레스에 달린 구슬 장식들을 뜯어냈다. 원의 모습을 한 환영에게 다가가며 스치는 테이블마다 구슬을 하나씩 올려두었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다. 원이라면, 충분히 알아보고 따라올 수 있으리라. 환영은 점점 더 구석진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브리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며 몰래 바닥에 남은 구슬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자, 여기야.”

조명이 닿지 않아 어두운 그늘 속에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낡은 쪽문이 보였다.

“확실히 수상하네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응, 바로 뒤따라갈게!”

이브리스는 힐끗 원의 환영을 올려다봤다. 절대 원일 리가 없다. 그라면 위험할 법한 장소에 그녀를 먼저 들여보내지 않는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에,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어두워서 앞이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직후 뒤를 휙 돌아보자, 쪽문을 통과한 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브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 너머는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고, 무도회장 조명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만 문 안으로 조금 새어 들어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아무래도 원 씨가 앞장서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래. 내가 안내하는 게 좋겠다.”

환영이 앞장서자 그가 지나간 자리에 흐릿한 빛이 남아 흔들렸다. 그 자리를 이브리스가 지나치면 빛은 그대로 깜빡이다 서서히 사라졌다. 현혹 마법이 더 강하게 걸리리라 예상했는데, 어째선지 한참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됐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니, 정말 ‘가고 있는’ 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브리스가 제자리에 멈춰 서자, 앞장서던 환영은 곧장 뒤돌아보며 원의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이브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반복되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애매하게 맨정신으로 꿈을 꿀 때처럼 묘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혹시 아까 마신 연금약 때문인가? 환혹 마법이 그녀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브리스는 눈을 감고 그녀가 지금 원하는 것을 강하게 떠올렸다. 이를테면, 일단, 밝고 화사한 꽃밭!

눈을 뜨자 일 메그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봄의 한낮처럼 밝고 따스한 햇살이 머리 위에서 빛을 뿌렸다. 환영은 여전히 원의 얼굴로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이브리스는 눈을 감고 원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렸다. 지금의 모습도 좋지만, 나는, 평소의 원 씨가 더 마음에 들어.

다시 눈을 뜨자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원의 모습이 보였다. 동그란 숏컷에, 청록색으로 포인트 색이 들어간 검은 가죽 갑주를 입고 장난스럽게 씩 웃고 있었다. 좋아, 훨씬 낫네. 이브리스는 이번엔 눈을 뜬 채로 상상을 이어 나갔다. 머리에 리본을 묶은 원 씨가 조금 보고 싶을지도? 곧장 원의 머리 위로 커다란 청록색 리본이 달리자 이브리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켰다. 귀엽긴 한데, 어울리지는 않았다. 리본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 뒤로도 그녀는 그동안 원에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끝없이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꽤 재미있었다. 어쩌면 내가 정말 바랐던 건…….

“즐거워 보이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덮치듯 울렸다. 이브리스는 상상하던 것을 멈추고 환영과 시선을 맞췄다. 환영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진 원의 모습으로, 마치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다음엔 또 어떤 놀이를 해 볼래?”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방심했다. 마음을 내주는 게 아니었다. 이대로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연금약도 더는 없는데…! 위기감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친 순간, 멀리서 희미하게 쾅,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무너지는듯한 진동이 약하게 느껴졌다. 공간이 한차례 깜빡였다. 이브리스는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초점이 맞춰진 채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 공간에, 그녀가 만들어내지 않은 이질적인 무언가가 침입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주의를 기울일 틈은 없었다.

“이비, 네게 할 말이 있어.”

소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영은 갑자기 이브리스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말이야.”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이브리스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 상황도, 그녀가 바란 것이 아니다. 떠올린 적도 없다. 이상했다.

“진작 말해야 했는데, 망설여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아서 말하지 못했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브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홀린 듯이, 환영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뒷걸음질도 어느 순간부터 그만뒀다.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나 사실, 너를, 정말, 좋……”

“닥쳐.”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에테르로 이루어진 불투명한 선이 환영의 뒤쪽에서 빠르게 뻗어 나와 이브리스와 이어졌다.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예리한 검이 환영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비명도 없었고, 피가 튀지도 않았다. 정적 속에서 검날이 미세하게 비틀리더니, 한순간에 뽑혀 나갔다. 검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구멍을 이브리스는 멍하니 바라봤다. 문장이 되지 못한 물음표가 수없이 떠올랐다.

구멍으로부터 하얀 실금이 생기더니 쩍쩍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환영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드러난 뒤편에 그녀가 정말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환영의 잔해를 노려보던 원은 숨을 훅 내쉰 후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 위로 조금 지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진짜 원 씨에요…?”

“가짜일지도 모르지. 맞춰 볼래?”

장난스러운 대답에 ‘진짜 원’이 맞다는 걸 확신한 이브리스는 곧장 달려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브리스의 머리 위로 손을 얹고 토닥이듯이 쓰다듬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도.”

곧장 나온 진심 어린 대답에 놀란 이브리스가 커진 눈으로 원을 올려다봤다. 원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환영이 깨지면 공간도 금방 무너지더라.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

“…네!”

“잠시 실례할게.”

“네?”

원은 곧장 이브리스의 허리와 다리를 두 팔로 받쳐 안아 들었다.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잠시 눈과 귀를 닫고 계세요.”

평소처럼 장난을 치듯 가볍게 굴고 있지만, 어쩐지 훨씬 위험한 느낌이 드는 분위기 속에서 원은 씩 웃었다.

“원흉이 나올 때까지, 다 부숴버릴 테니까.”

원의 품속은 편안했다. 가만히 늘어져만 있으면 정말 임무가 끝날 때까지 안전할 것 같았다. 어쩌면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이브리스는 작은 흔들림과 함께 근처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흠칫 놀라며 원을 올려다봤다. 무표정하게 앞만 보고 달리던 원은 잠시 이브리스를 내려다보더니 씩 웃고 다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걱정 말라는 뜻 같은데, 딱히 안심이 되진 않았다.

“이러다가 집 무너지겠어요, 원 씨!”

“안 무너져. 괜찮아.”

대답하는 원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이브리스를 안은 채로 원은 몇 번이고 벽을 부수며 나아갔다. 그렇게 나타난 공간은 빈방일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환상으로 가득 찬 방일 때도 있었다. 원은 무엇이 나오든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벽을 발로 내리찍었다. 잘 안된다 싶으면 이브리스를 잠깐 한 팔로 받친 후에 검을 박아 넣고, 그렇게 생긴 균열에 발로 충격을 가해 무너뜨렸다.

“내벽이 튼튼하지 않으니까 할 만 하네. 조금만 더 시공이 꼼꼼했더라면 곤란할 뻔했어.”

농담하는 건지, 진담인지 이제 구별도 잘 되지 않았다. 벽 너머에 멍한 표정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가 만든 환영의 세계는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로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사람, 환상에서 깨우지 않아도 될까요?”

“환상을 부숴버리면 공간 자체가 무너져버려서 안 돼. 환상에 취한 상태의 사람들을 일일이 밖으로 옮길 수도 없고.”

“그치만,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도 엄연히 임무 내용에 포함되는걸요.”

요마의 거처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무방비로 내버려두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의 속을 읽은 듯, 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비, 네가 한참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낯선 사람이 공간 일부를 쳐부수고 난입해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밖으로 뚫고 나가버리면 어떨 것 같아?”

“굉장히… 당황스럽겠죠?”

“그렇지. 이건 뭔가 싶을거고. 꿈의 흐름이 끊기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의심해 볼 수도 있겠지. 정신력이 강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서도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도, 미약하게나마 인지했다면 마법이 중단되었을 때 입을 수 있는 정신적 타격을 완화할 수 있겠군요.”

“정확해. 내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우는 것보다 이편이 나아. 게다가 마법의 근원을 빨리 끊어버리는 것이 더 확실한 해결법이야.”

언뜻 논리정연하고 합리적인 의견처럼 들렸다. 원이 좀 많이 흥분한 상태처럼 보인다는 것만 뺀다면. 이브리스는 다시 걱정에 가득 차서 원을 살폈다. 평소의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상태도 아니었다. 여전히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이브리스의 짐작대로, 원은 멀쩡하지 않았다. 그의 소원이랍시고 본 풍경도, 이브리스의 방 안에 난입하자마자 본 풍경도 원의 속을 뒤집어놓기엔 충분했다. 특히 후자는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스스로를 죽여가며 여태 참아왔던 말을, 감히 환영 따위가? 이브리스의 앞에서 ‘원’의 모습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이브리스에게는 유감이 없었다. 그녀도 이런 상황은 의도하지 않은 듯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고, 원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브리스의 방으로 들어간 순간, 속삭임이 들렸다. ‘네가 원하는 것도 같이 보여줄까?’ 결국 그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풍경이다. ‘이브리스에게 고백하고 싶다’는 마음…….

망할 요마 자식, 죽여버리겠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오직 감 하나만을 믿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사실, 굳이 벽을 부술 필요까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벽이 하나씩 무너질 때마다, 오히려 분노는 커져만 갔다. 어느 시점부터는 부수는 것 자체에 몰두하고 있었다. 경비용 가고일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멀쩡한 석상을 빠개버렸다. 의뢰 목표가 아닌 것들은 살려두라는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로, 복도에서 마주친 집사를 바로 베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사조차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다.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에게 안겨있던 이브리스는 끌어안는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아무래도, 의뢰인이 알려줬던 방법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다 예상하고 그런 말을 해줬던 걸까?

원이 복도의 끝까지 달리자 저택 내부에서 지나쳐 온 문 중에 무늬가 가장 섬세하게 조각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다. 그는 확신에 차서 문을 강제로 부쉈다. 찬란하고 환하게 빛나는 크리스탈들이 케케묵은 방 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이브리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만신을 소환하고도 남을 수준의 양이었다. 이러니 그만한 규모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야! 원은 크리스탈에는 감흥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사방을 살피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고정시키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크리스탈의 산 너머로,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커다란 요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브리스 또한 문제의 요마를 발견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요마가 원이 보는 곳과 반대 방향에 있다는 점이었다. 시선이 맞지 않았다. 이브리스는 다급히 외쳤다.

“원 씨, 그쪽이 아니라……!”

“괜찮아, 이비. 나 혼자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맙소사. 환혹술에 이미 사로잡혔다. 이브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요마를 노려봤다. 얼핏 임프를 닮은 듯한, 그러나 더 크고 화려한 생김새를 한 요마는 낄낄거리며 이브리스를 놀리듯 두 팔을 흔들며 슬금슬금 문 쪽으로 움직였다. 빈틈이 많으니 먼저 공격해 올 법도 한데, 도망을 선택한 걸 보면 정말로 전투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개체인 모양이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브리스는 의뢰인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저 사람이 혹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든......’

‘끌어안고 뽀뽀나 한번 해보세요. 키득키득.’

‘안 그래 보여도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약해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특히 더요.’

‘단단히 벽을 치고, 등을 보인 채로 저만치 앞서가서 잘 잡히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당신은 잡아본 적이 있죠? 그럼 쉬울 거예요.’

이브리스는 팔을 뻗어 원의 목뒤로 감았다. 원은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요마가 만들어 낸 환영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건 의뢰인이 알려준 방법이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맞아! 하지만 꼭 필요한 거니까! 호박머리가 키득키득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올랐다……. 핑계를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켜, 원의 목 안쪽으로 깊게 키스했다. 턱 아래에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쪽쪽 소리를 내며 올라가 기어코 볼에도 립스틱 자국을 남겼다. 이만하면 되려나? 입술을 노리기엔 자세가 여의찮았다. 아쉬웠지만, 이브리스는 키스를 포기하고 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반응을 관찰했다.

원은 바로 굳어버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브리스를 마주보는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실시간으로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렸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 소리를 냈다. 도망가려던 요마도 황당했는지 턱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 씨.”

“으, 응?”

“정신 차리세요.”

“응? 어어, 알, 알았어.”

용케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싶을 정도로, 이브리스가 여태 봐 온 원의 모습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심호흡하고, 곧장 고개를 돌려 진짜 요마가 있는 장소를 정확히 노려봤다.

“찢어버리기 전에 거기 멈춰.”

“히익.”

이브리스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주고 요마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원은 요마의 바로 옆에 검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우리, 할 얘기가 아주 많지?”

원은 살벌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천천히 회포를 풀어 보자고. 긴 이야기가 될 거야.”


— 다음 날.

“제가 말했죠? 키득키득.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당신들의 실력을 믿는다고요.”

호박 머리의 마인은 눈에 띄게 즐거워하며 요마가 봉인된 작은 항아리를 건네받아 챙겼다. 원은 못마땅한 듯이 입을 삐죽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너, 다 알고 보냈지?”

“어머, 뭘요? 키득키득.”

“하…….”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원 앞에서 호박 머리의 마인은 대놓고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 내 키득거리다가 이브리스에게 머리를 돌렸다.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브리스는 왠지 그녀가 자신에게 눈을 찡긋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브리스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어요. 착수금을 제외한 나머지 보수도 챙겨드렸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또 보지 말자.”

호박 머리의 여성이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가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뒤돌아 멀어졌다. 원은 잠시 땅을 보며 침묵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이브리스를 응시했다.

“이비, 저택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못 했는데…….”

이브리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긴장했다.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쓴소리를 좀 하시려나? 그것도 아니면, 설마 앞으로는 거리를 더 두겠다던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가 해준 모든 것들에 대해서.”

“…….”

예상에서 빗나갔다. 아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말이기도 했다. 이브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저야말로요. 어디 힘들거나 아픈 곳은 없으신가요?”

“전혀 없어. 괜찮아.”

원은 망설이더니 작게 덧붙였다.

“사실 있긴 한데, 외상은 아니라서. 만약 정말 못 버티겠다 싶으면… 솔직하게 얘기할게.”

이브리스의 귀가 쫑긋 섰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더 열어준 것이 느껴져서 너무 기쁜 나머지 환한 미소가 넘칠 듯이 얼굴에 떠올랐다.

“네! 기다릴게요!”

둘은 받은 보수를 나누어 정산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각자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원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할지를 고민해 볼 작정이었다. 혼자 남은 이브리스는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미소지었다.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은, 하마터면 엉뚱한 방법으로 들을 뻔했던 말은, 언젠가 직접 말해주실 수도 있을까? 조금은 기대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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