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떠나며
최후의 저주 下
-주의: 6.0 효월의 종언 및 기공사 60~70레벨 잡 퀘스트 직간접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 빛전 없는 에스빛전 / 이슈가르드 100년(300년?) 후 if / <남은 초침을 세는 대신에>의 뒷이야기
에스티니앙은 200여년 만에 성도를 떠나기로 했다. 마음먹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챙길 거라고는 창과 갑옷, 약간의 여비, 갈아입을 옷가지 정도였다. 그 밖의 소지품이라고는 단단히 봉한 유골함, 멈춘 시계, 예비 시곗줄 몇 개가 다였다.
여행자 차림으로 교황청 귀빈 숙소를 나서자 에스티니앙의 탈주 행각에 익숙한 사제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그는 가차 없는 발길질 몇 번으로 그들을 떨쳐냈다. 현역 시절과 다르지 않은 다릿심으로 교황청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요란하게 움직였으니 곧 추적이 따라붙을 터였다. 곧장 이슈가르드 총사대 건물로 달려갔다.
“아주 떠나신다고요, 발리노 경?”
11대 총사대장은 대뜸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특별 고문을 붙잡지 않았다. 취임한 지 5년 안팎인데도 벌써 대처가 노련했다. 에스티니앙은 그동안 대장 자리를 거쳐 간 이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녀석들을 지속적으로 뽑을 수 있는 조직이라면 이제는 뒷배가 없어도 잘 굴러가겠지, 싶었다.
에스티니앙은 내심과는 다르게 으름장을 놨다. 언제든 돌아와서 불시점검을 할 테니 그때 개판으로 굴러가고 있으면 특별 고문 자리를 다시 내놔야 할 거라고. 총사대장은 서류를 꾸며둘 테니 나중에 확인해보시라고 응수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에스티니앙은 초대 총사대장, 길쭉귀 힐다의 유언으로 지급받은 총사대 특별 고문 견장을 벗었다.
“잘 사세요, 에스티니앙 씨.”
견장을 반납하자마자 ‘발리노 경’에서 ‘에스티니앙 씨’였다. 힐다의 혈육도 아닌데 어디서 저런 물건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렸다. 총사대장은 호호 웃으며 영광이라고 답했다. 전직 특별 고문은 전관예우로 쫓아오는 녀석들 적당히 막아주고, 곧바로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벌금 물리겠다고 쫓아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총사대장은 노인네가 비공식 관행에만 빠삭하다고 질색하면서도 부탁을 들어주었다.
총사대 건물 근처의 지붕과 굴뚝, 담장과 빨랫줄을 건너뛰었다. 심판의 문을 지키는 위병들까지는 아직 소식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가시냐는 깍듯한 물음에 에스티니앙은 이렇게 말해줬다. ‘시계 고치러 간다!’ 그러곤 위병이 말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커르다스 중앙고지로 빠져나갔다.
계획은 이랬다. 용머리 전진기지에서 초코보를 빌린 다음 북부삼림에서 갈아타고, 그리다니아에서 동부삼림까지는 배를 탄다. 검은장막 숲만 벗어나면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랄거의 손길까지 가면 다시 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탈출을 대비해 그동안 받은 품위유지비를 각국 은행에 꿍쳐놨던 덕이다.
교황청을 뛰쳐나오기 전 에스티니앙은 펑퍼짐한 로브를 둘러 갑옷을 가리고 창을 단단히 포장해두었다. 여기에 특징적인 백발과 눈 아래를 꽁꽁 가리자 ‘성도의 수호기사’는 순식간에 추위에 겁먹은 외지인 모험가가 되었다. 그 꼴을 본 포르탕 가 위병들은 몸이라도 녹이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커르다스 날씨에 질린 모험가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
기라바니아 땅까지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렸다. 검은장막 숲과 밤의 숲을 가르는 관문을 넘은 뒤부터는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었다. 이 근방에서 에스티니앙은 그저 지나가던 여행객일 뿐이었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얼굴이 알려질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으니까.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였다.
아이메리크 드 보렐은 애국자인 동시에 에스티니앙의 가장 오랜 친우였다. 그 말은 곧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전직 푸른 용기사에게 이런 말을 남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가끔 이슈가르드를 돌봐 달라’고….
갑작스레 쓰러진 아이메리크의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다시 쓰러진다면 이렇게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튀어나온 유언 아닌 유언. 당시 아이메리크는 60대 중반이었다. 엘레젠 기준으로 아직 20년은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이 너무 많았다. 쓰러진 것도 과로 탓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친구의 소원 정도는 들어주고 싶었다. 그것을 망설이게 된 데에는 초대 이슈가르드 총사대장, 힐다의 역할이 컸다. 귀족가 사생아 출신으로 한때는 역모 죄를 쓸 뻔했던 반동분자. 그러나 국제적인 혼란을 틈타 발생한 치안 공백기를 계기로 국가 조직도에 평민 자경단의 이름을 올린 행운아. 신식 무기를 적극 채용한 끝에 천 년 부동의 성도에 총사대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호걸. 총사대장과 서민원 의원을 동시에 역임할 순 없어 의원직을 고사하고 있을 뿐, 가장 유력한 차기 서민원 의장으로 꼽히는 거물.
힐다도 당연히 아이메리크의 병문안을 왔었다. 오랜 인연이라면 인연이었고, 신전기사단 총장과 이슈가르드 총사대장이라는 직위 상으로도 만날 일이 많았으니까. 그 대부분이 항의와 기각, 설득과 반박으로 점철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친구를 걱정해 자주 방문한 에스티니앙과 마주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힐다가 아실과도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에스티니앙은 그저 신기해했을 것이다.
“푸른 용기사, 시간 있지? 얘기 좀 할까?”
“전직이라니까. 세월이 이 정도 흘렀으면 좀 기억해라.”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렸다. 이어진 대꾸에는 반박할 수 없었지만.
“너 혼자 우기는 거겠지. 온 성도에서 그걸 믿는 사람 딱 세 명밖에 없을 걸. 너, 나, 그리고 아실.”
힐다는 성도 시민 대부분이 ‘비스마르’라고 알고 있는 아실을 ‘아실’이라고 부르는 다섯 사람 중 하나였다. 에스티니앙, 기공방주인 스테파니비앙, 수석 기공사 조이와 총사대장 힐다, 그리고 갈레말드에서 동고동락했던 루키아 말이다.
“아이메리크는?”
“하하! 총장님이야말로 불신의 선봉장에 서 계실 걸. 네가 아실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아실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처음 병문안을 다녀왔던 날, 이야기를 듣던 아실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에스티니앙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고 투덜거리다가, 그 말이 아이메리크의 유언 아닌 유언이라는 에스티니앙의 추측에 입을 다물었다. 싫어하는 건 알았지만 힐다에게까지 말할 정도인가, 싶어 에스티니앙은 조금 화가 났다.
“부부싸움은 얌전히 해라? 너희가 소란 피우면 연약한 우리가 말리러 가야 한다고.”
“본론부터 말해.”
에스티니앙은 이를 드러냈다. ‘얼마나 대단한 얘기라서 사람 속을 박박 긁어가며 밑밥을 까는지 궁금하니까.’ 하지만 왕년의 길쭉귀는 주눅 든 기색조차 없었다.
“별로 대단한 얘긴 아니야. 형평성에 관한 거지.”
힐다는 말했다. 에스티니앙이 총장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면 자신의 얘기도 들어 마땅하다고. 네가 그의 친구로서 성도의 살아있는 전설로 남을 거라면, 살아있는 전설로서는 총사대의 뒷배가 되어줘야겠다고.
“보렐 자작님께서는 참 나라를 사랑하시지. 근데 애국심이 태생적 한계를 보완해주진 않거든. 결국 귀족이라고. 너도 알겠지만.”
비단 복잡한 정치 얘기 뿐만은 아니었다. 당장 보렐 자작저에서부터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저택에 상주하는 주치의, 추운 날씨에도 꽃이 피어 있는 자그마한 온실, 한 사람만을 위해 지은 맞춤 의복. 여러 사람 손을 거친 끝에 완성된, 식사 시간에 딱 맞춘 한 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원래 그렇게 살았으니까, 어떤 일은 나도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우리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아이메리크 경에겐 그런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거. 가정 형편과는 상관없어. 가난한 귀족들도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런 데 돈을 쓰거든. 열 명 중 여덟 명 정도? 차이점이 쌓이다 보면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아이메리크와 나는 영원한 앙숙으로 남을 거야.”
성도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부탁이 실제로는 혼란을 야기할 거라고, 힐다는 예측했다. 힐다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 놓일 총사대를 지키고 싶었다. 순순히 이권을 놓지 않을 오래된 귀족 가문들에 대항해야 했으니까. 평민 자경단에서 출발한 만큼 총사대는 하류 계층이 딛고 설 사다리가 되어주어야 했다. 최소한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무너질 때까지는.
총사대 역시 아유나르트의 장남이 세운 기공방과 연계 중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기공방이 금전적으로 완전히 자립하고, 차기 기공방주를 가문과 관련 없는 사람으로 뽑는 등 차근차근 해결 중이었다. 스테파니비앙은 소유권과 지분 문제로 장난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의 정은 알아도 가문의 이익은 모르는 괴짜였으니까.
당장 걱정할 일은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공정함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힐다가 염려하는 것은 그가 죽고, 자신도 죽은 뒤의 일이었다. 네 생각엔 그때 이슈가르드 총사대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권력은 깊이 파인 물길로만 흐르는 경향이 있다. 천 년 성도의 역사에 대면 이슈가르드 총사대의 활동은 짧고도 짧다.
“난 곧 은퇴해. 그 다음부턴 서민원 의장이고. 천지가 개벽해서 의장 자릴 놓친다 하더라도 총사대 하나 지킬 힘은 있단 말씀. 저 독한 년은 언제 뒈지나 욕을 들을 때까지 오래 살 거야. 근데 너처럼 영원히 살 순 없잖아? 이제 와서 용의 피를 마실 수도 없고.”
자기는 치사하게 ‘가끔’같은 단어를 쓰지는 않겠다고, 힐다는 말했다.
“백 년! 딱 백 년 정도만 돌봐 줘. 마음 같아선 그 두 배를 부르고 싶지만 나도 양심이 있고, 너도 네 인생이 있으니까. 제안을 언제 수락하든 문제없도록 준비해 둘게. 부탁을 들어준다면 기쁠 거야. 마음을 다해 감사를 표하지.”
에스티니앙은 고민했다. 힐다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아이메리크에 관한 힐다의 평가도 일리가 없지만은 않았다. 그의 됨됨이와 한계점에 대한 의견이 자신과는 다를 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에스티니앙은 오랜 친구를 험담한 사람의 제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그 사다리가 또 다른 신분제를 만들게 된다면 어쩔 건데?”
힐다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총사대 내부의 제도와 절차, 규약으로 해결할 수 있게끔 기틀을 닦아두어야 한다고.
“나머지는 후배들을 믿는 수밖에.”
힐다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내 얘기를 들은 네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이다.
며칠 뒤 에스티니앙은 힐다가 보렐 저택으로 귀한 약재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데없는 스캔들에 온 성도가 들썩이는 바람에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평소 사이 나쁘던 독신 남녀를 ‘숨겨진 연인 관계’ 따위로 묶어대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차를 마시러 온 힐다는 그것도 일종의 전략이라고 했다.
“총사대 입지를 깎아먹으려는 거지. 이게 길쭉귀 힐다의 업적이 아니라 사실은 총장 애인의 소꿉놀이였다, 그런 쪽으로. 은퇴식에 화환 보낼 생각은 말라고 해둬야겠어. 서민원 의장 선출이 끝나면 총장이 뒤에서 손을 썼다고 시끄러워질 테니까. 이게 총사대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잡음 생기는 꼴 절대 못 봐!”
힐다는 단숨에 차를 들이키…려다가 찻물이 뜨거워 입술만 적시고 말았다. ‘진짜 열 받네! 누군 결혼하기 싫어서 안 한 줄 알아?!’ 잔에 얼음을 넣어주던 아실이 지적했다. ‘싫지는 않지만 할 생각도 별로 없었잖아.’ 힐다는 이번에야말로 다 식은 차를 벌컥 들이켰다.
“아무튼 에스티니앙, 내가 구설수까지 감수해 가며 네 친구 챙겨준 거야. 이 고마움을 잊지 말도록 해. 갚고 싶으면 언제든 총사대 건물로 찾아오렴.”
있는 대로 생색을 내는 통에 고마운 마음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힐다가 요즘 집에 들락거리는 이유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이면 없던 반항심도 생기는 법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찻잔을 입에 대며 힐다를 외면했다. 힐다는 깔깔 웃으며 자신의 차에 술을 섞고, 술통을 테이블에 돌렸다.
에스티니앙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힐다도 만만치 않아서 그의 사후, 에스티니앙은 유언장을 공개하는 자리에 불려갔다. ‘에스티니앙 발리노에게 건넨 제안은 나의 사후에도 유효함.’ 딱 그 한 문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집요함으로 악명 높았던 서민원의 마녀 의장다운 처사였다.
이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라자한에서 보내던 어느 평화로운 오후의 일이었다. 아실은 자기가 죽은 뒤 에스티니앙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네가 오래 살게 된 건 사고 같은 거야. 그러니까 의무 같은 거에 얽매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넌 다정한 주제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너무 적어. 그러니까 내 부탁도 들어줄 테지만.”
힐다에게 아이메리크의 말을 흘린 일로 싸웠을 때, 먼저 화해를 청한 쪽은 아실이었다. ‘네가 왜 화냈는지 이해해. 내가 경솔했다는 것도 알고. 차라리 아이메리크한테 따지러 갔어야 했는데.’ 에스티니앙은 화해를 받아들였다. ‘그 녀석도 자기가 실언했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아실은 대꾸 없이 입을 맞췄다. 그걸 지적하면 다시 맞붙으리란 걸 직감했으므로 에스티니앙도 한 발 물러났다.
아직 성도에 살던 시절, 아이메리크의 부고(당연하고 서글프게도 사인은 과로사였고, 조문을 위해 도착한 꽃다발 중에는 힐다가 보낸 것도 있었다)가 들려왔을 때도 아실은 말없이 조의를 표했다. 묻어둔 문제를 다시 입에 올렸다는 건 더 늦기 전에 마무리를 해둬야 후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겠지. 끝이 머지않았다는 신호였다. 에스티니앙은 화를 내지도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실이 세상을 떠난 것은 에스티니앙의 불안이 가시고도 한참 뒤였지만 말이다.
아실은 마지막까지 이런 당부를 했다. 네가 뭘 해도 괜찮으나 토벌당할 짓은 하지 말라고. 그러면 너를 죽이겠다고 토벌대가 꾸려질지도 모르고, 만약 그때쯤 자기가 다시 태어났다면 반드시 거기 자원할 테니까. ‘죽은 애인 손에 죽는 건 싫지?’ 죽었는데 어떻게 날 죽이냐는 농담으로 받아칠 수 없었던 건,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마지막인데 못나게 우는 소리를 들려주기는 싫었다.
아실이 원한 대로 시신을 화장했다. 유골을 간직할 생각이라고 했더니 브리트라는 유골함 관리에 도움이 되는 마법을 몇 가지 걸어주었다.
에스티니앙은 고요해진 집에 홀로 앉아서 얼핏 이런 망상을 떠올렸다. ‘토벌당할 짓’을 하고 있으면 보다 못한 아실이 나를 말리러 별바다에서 뛰쳐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에스티니앙 발리노는 이미 ‘사룡에게 복수한다’는, 죽음만이 기다리는 목표에 매달린 전적이 있었다. 이게 니드호그와 다를 게 뭐냐 싶기도 했다. 아니, 더 나빴다. 아실이 세상을 떠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쏟아지는 비에 옷이 젖는다고 화내는 것과 똑같은 얼간이 짓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중한 이를 모두 잃은 용이 남긴 최후의 저주가 바로 이것이구나. 비록 이 저주는 여러 조건이 맞물린 끝에 나타난 우연일 뿐이었지만…. 니드호그의 증오는 훨씬 파괴적이었다. 용이 저주를 의도했더라면 그 결말은 에스티니앙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미쳐버리는 장면이었으리라.
아는 사람 없는 성도로 돌아간 이유는 아이메리크와 힐다가 각각 맡긴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슬픔을 견디기 위해 목표에 매달리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나이를 먹을 때까지 몰랐다는 게 좀 웃겼다.
백여 년 전의 영웅을 맞이하며 온 성도가 발칵 뒤집혔다. 힐다의 예측은 정확했다. 총사대뿐만 아니라 온갖 계층에서 에스티니앙의 이름값을 이용하려고 들었다. 용시 전쟁 때의 인연을 들먹이며 만남을 청하는 4대 명가와(정작 에스티니앙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관에 들어간 뒤였다.) 이름도 모르는 귀족 가문들, 보안 좋은 숙소를 찾다 못해 기어들어갔더니 돈까지 안겨주며 은근히 생색을 내는 교황청,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접촉해오는 서로 다른 노선의 서민원 의원들까지.
자신의 이름을 써도 되는 건 총사대뿐이다, 입장을 정리한 뒤에도 잡음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에스티니앙은 총사대 건물과 훈련장, 대원들의 제복이 새 것처럼 말끔해질 때까지는 성도에 머물렀다. 그런 다음에는 링크셸을 파서 총사대장에게 던져준 뒤 고지 드라바니아로 튀었다. 고달팠던 첫 귀환에 아이메리크뿐만 아니라 힐다 탓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몇 년쯤 더 걸렸다.
가끔 시계를 고치러 알라미고로 여행한 걸 빼면 에스티니앙은 200여 년 동안 커르다스와 고지 드라바니아 근방을 떠돌았다. 총사대의 근황을 파악하기 위해 성도에도 이따금 들르긴 했지만, 그가 보살필 수 있는 일은 성안보다는 성벽 바깥에 더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에스티니앙은 ‘성도의 수호기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것 중 신분증 역할을 할 만한 소지품이 총사대 특별 고문 견장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면 성도의 이름을 파는 게 가장 빠르다는 이유도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이만하면 아이메리크의 부탁을 대충은 들어주지 않았나 싶었다. 총사대와도 당초 약속한 기한을 훨씬 넘겼으니 힐다의 부탁 역시 차고 넘치게 들어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200년 정도는 이슈가르드 쪽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에스티니앙은 두 번째 은퇴를 만끽했다.
숲 초입에서 마물의 습격을 받던 상단을 도와준 뒤, 알라미고까지 간다는 라라펠 상단주와 즉석에서 호위 계약을 맺었다. 돈이 굳은 덕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고용주는 에스티니앙의 시계를 무척 탐냈다. 그의 골동품 컬렉션은 특히 7재해 직후부터 200년 전까지 걸쳐 있었다. 에스티니앙에게는 무척 익숙한 연대였다.
“어르신, ‘빛의 전사’가 살았던 시대를 꽤 좋아하시는군요?”
에스티니앙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신이 난 것인지, 고용주는 그를 붙잡고 자신의 수집품들을 자랑했다. 노인의 열변에 감화된 에스티니앙은 수상해보일 만한 부분을 쳐내고 새벽의 혈맹이나, 아실과 여행 다닐 때 겪었던 일화들을 말해주었다. 고용주는 아주 즐거워했다.
“그런 얘기는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용병이라 이런저런 야사를 잘 아는 겐가? 관문의 옛 이름을 아는 것도 그렇고, 자네 혹시….”
에스티니앙은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가족 대대로 비에라 족 모험가와 친하게 지내기라도 했나?’였다. 전직 푸른 용기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비슷하긴 한데…. 출처는 묻지 마십쇼. 영업 비밀이니까.’ 고용주는 30년 지기 친구라도 된 양 우리 사이에 무슨 영업 비밀이냐며 껄껄 웃었다.
일행은 벨로디나 관문 방면을 지나갔기 때문에 랄거의 손길 쪽에는 들르지 못했다. 호반지대를 빙 돌아 알라미고에 도착한 뒤 계약도 끝났다. 상인은 보수를 지급하는 자리에서까지 시계에 미련을 내비쳤다. 더는 말을 돌릴 수가 없었기에 에스티니앙은 솔직하게 밝혔다. 소중한 사람이 선물한 물건이라고, 사실 알라미고에 온 것도 시계를 고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상인은 무척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그래, 그 사람하고는 지금?”
“…헤어졌죠, 뭐.”
“아이구, 이를 어째. 다음에 우리 딸이 이슈가르드에 가거든 소식이라도 좀 알아다 줄까?”
에스티니앙이 순간 경계하는 기색을 띠자, 상인은 빙그레 웃었다.
“설원에서 도망친 사람 티를 팍팍 냈으면서 뭘 그러나, 자네. 무기부터가 그 동네 것이고. 상인 눈을 우습게보다간 큰코다친다네. 다음부터는 그리다니아 같은 데서 옷을 처분하는 것도 좋을 게야. 시간이 촉박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에스티니앙은 입단속을 부탁해야 했다. 골동품에 혹하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함구해 준다면 수집품에 조금 보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상인은 역사 애호가 동지 간의 의리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에스티니앙은 기어이 상인이 운영하는 상회 본점 주소를 받아갔다.
“어느 가문의 미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상회도 이슈가르드에서 꽤 힘을 쓰거든. 편지 정도는 보내줄 수 있다오.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연락해 봐요. 애인 선물 하나 고치러 성도에서 알라미고까지 혼자 갈 생각을 하는 남자가 어디 흔한가? 자넬 붙잡을 기회도 안 주는 건 상대에게 너무 가혹한 짓이잖소.”
에스티니앙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성도로 장사하러 다녀온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내 정체를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알려지지 않은 야사를 수상할 정도로 잘 아는데다, 창술 솜씨가 빼어나고, 무엇보다 ‘성도의 수호기사’와 인상착의가 꼭 같았으니 말이다. 물건을 추적당하지 않게 보낼 방법을 고민하며 에스티니앙은 상인과 헤어졌다.
지금 가진 돈으로도 수리비가 모자랄 것 같진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곧장 보석공예 공방으로 갔다. 수리 견적을 내려면 의뢰서를 작성하거나 상담원과 대화해야 했다. 에스티니앙이 선호하는 쪽은 면대면 대화였다. 이쪽이 의뢰서를 쓰는 것보다 빨리 끝났고 덜 귀찮았다. 아직 손끝이 여물지 않은 초짜 장인들은 시계의 외형이나 제조년도를 들으면 기겁하며 일어나곤 했다. 그런 뒤 모셔오는 게 나이 지긋한 선배 장인들이었다.
“마지막 수리가 언제인지 아시오?”
“한 40년쯤 전으로 기억하는데.”
“못해도 10년 단위로는 와 주쇼. 이 정도로 골동품이면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그 정도 수고는 들여 줘야 맞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티니앙은 일을 넘겨받은 장인이 재고를 확인한다, 후배를 불러 모은다 부산을 떠는 광경을 익숙하게 지켜봤다. 오래된 시계는 일감으로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는 어쨌든 의뢰가 들어오긴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그걸 대비해 젊은 장인들에게 수리 방법을 가르쳐놔야 했다. 200년 된 시계 하나 때문에 공방이 순식간에 멈췄다. 수리를 맡은 장인은 붙임성 있게 말을 걸며 손을 놀렸다.
“이거 못해도 백 년 넘은 물건인데 아직 돌아가는구려. 애지중지 쓴 걸 보니 가보라도 되는 모양이오?”
올 때마다 시계를 봐 주는 수리공이 바뀌었는데도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에스티니앙은 머쓱해져서 처음 받았을 때 들은 당부를 잘 지킨 것뿐이라고 대꾸했다.
“그게 가장 어려운 거야…. 다른 분들이 손님의 반만이라도 물건을 아끼면 일이 편할 텐데…. 다 됐군. 별 충격 없이 시계가 멈추면 그냥 나사가 헐거워진 거니까 귀찮아지기 전에 미리미리 오시고. 부품 몇 개는 너무 많이 닳아서 교체했소이다.”
내친김에 시계 틀을 청소하고 잔상처가 많이 난 유리도 갈았다. 시곗줄을 찾는 에스티니앙에게 연계된 가죽 공방을 소개해준 뒤 공방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갔다. 경력이 오래 된 장인 중 한 사람이 ‘어!’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소리를 지른 것도 그 즈음이었다. 좀 더 쉬고 싶었던 다른 장인들은 무슨 일이냐며 미끼를 물었다. 공방 견습생 시절에도 저 사람을 봤던 것 같다는 말에 자기들끼리 아버지를 쏙 빼닮았나 보다, 수군거리다가….
“아니, 부자관계가 아니라 진짜 ‘저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그런 반박에 무슨 헛소리냐며 비난이 속출했다. 착각 아니냐는 말부터 사실 귀신이다, 아니다 용 같은 거다, 술이라도 먹었냐…. 소란이 가라앉은 것은 일이나 하러 가라는 최고참 장인의 일갈 덕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공방의 소란을 알아채기는커녕 시곗줄을 고르기도 바빴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계와 함께 그는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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