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에메히카] 은흑빛 현혹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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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1 작성

*커미션


〈 은흑빛 현혹 〉

작은 창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여린 빛이 날이 밝았음을 알렸다. 작은 빛은 다 가닿지 못할 공간, 줄지어 자리 잡은 수조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인어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성체 하나가 체 몸을 기댈 수조차 없는 협소한 공간. 간혹 물이 첨벙이는 소리만이 울리는 곳에 누군가 설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어 부르는 노래가 퍼졌다. 

긴 밤, 채 잠들지 못하고 희미한 빛을 응시하던 인어는 입을 열었으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듯 단단히 다물린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자의로 버린 목소리는 쉬이 돌아올 줄 몰랐으므로. 누구도 화답하지 않는 소리는 흐느낌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파르스름한 창밖이 희게 물들었을 즈음, 여전히 어둑한 실내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조명이 켜졌다. 햇빛을 흉내 낸 빛이 좁디좁은 수조 안을 환히 비추었다. 이곳의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였다. 여러 사람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그 안에 든 인어의 상태를 살피기도 하고, 빈 수조에 새로운 인어를 잡아넣기도 하는 때. 인부들은 익숙하게 반항하는 인어를 수조 안에 처넣은 뒤 뚜껑을 닫아 잠갔다. 

날카로운 비명, 주인을 알 수 없는 울음소리 따위가 울리는 장소의 정체는 상시 판매를 동반하는 경매장이었다. 인간의 기준에서 가치가 높은 인어는 경매로, 그렇지 못한 것들은 그대로 진열되어 살 수 있도록 하는 곳. 느지막한 오후가 되면 경매장이 개방되고, 말끔히 차려입은 이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수조 앞을 지나쳤다. 

가장 구석에 자리한 수조에 갇힌 이, 엔디미온은 상시로 판매되는 인어 중에서도 가장 오래 이곳에 있었다. 인어의 용도는 가지각색이었으나 무엇보다 큰 가치는 그들의 목소리였다. 인간의 것과는 비교부터 어려운, 사람을 홀린다는 말이 따라붙는 아름다운 목소리. 엔디미온은 이곳에 온 뒤부터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흔한 비명이나 신음조차도. 

그녀의 외관에 이를 드러내며 웃던 경매장의 오너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그를 하자품이라 칭했다. 오너는 엔디미온을 멸시했고, 그 태도는 빠르게 전염되었다. 애초에 인간은 인어를 동급의 존재로 보지 않았지만, 고가의 상품이기에 최소한의 조심성은 보였다. 엔디미온은 유일한 예외였다. 매일 점검을 할 때마다 수조를 툭툭 쳐 보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음식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제대로 쉴 곳 하나 주어지지 않은 수조 안에서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매일을 보내고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그대로 떼어 놓은 듯한 비늘에 실내의 빛이 반사되어 은하수가 수놓아졌다. 하늘거리는 꼬리지느러미가 좁은 수조 속을 느리게 부유하고, 상흔 하나 없는 살갗은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채 부드러운 곡선을 그대로 내보였다.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파란 눈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냉대에도, 수조를 들여다보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시선 앞에서도 내내 무심했다. 희번덕이는 눈은 그녀가 노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그것을 다행이라 칭해도 괜찮을지 알 수 없는 엔디미온은 다만 어디에도 해저와 같은 곳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무대 위에서는 경매가 진행되고, 상등품을 살 능력이 되지 않거나 경쟁을 원치 않는 이들은 줄지어 놓인 수조를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치는 일상. 에메트셀크는 그러한 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동행한 이에게 적당히 대응하며 걷는 이의 금빛 시선에는 지루함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눈치 없는 동행자를 적당히 떼어낼 생각을 하던 중에 한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주위의 움직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동시에 에메트셀크는 깨달았다. 눈이 마주친 게 아니었다. 인어의 파란 눈동자는 이쪽을 향했으나 공허했다.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한 듯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떠벌리는 일행의 목소리가 이토록 거슬린 적 있었나. 에메트셀크는 이름 모를 인어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은근히 밀었다. 

“더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 경매에나 참여하지 그래.” 

그의 입이 다물리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남자는 불만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에메트셀크를 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뒤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하자가 있다던데. 그따위 게 무슨 상관인가. 에메트셀크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남자는 헛웃음 치면서도 그를 더 말리지 않았다. 조금은 떨떠름한 인사와 함께 일행이 멀어졌다. 

마침내 혼자 남은 이, 에메트셀크는 더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눈길을 사로잡은 인어가 갇힌 수조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확신하지 못한 채로 인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단 한 번도 인어 따위에 관심을 둔 적 없었다. 이곳에 온 것 또한 조금 전에 자리를 뜬 일행 때문이었다. 차가운 시선이 제게 향하는 찰나, 그는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었으나 이상했다. 

해저 속 인어의 눈은 깜박일 줄 모른다. 언젠가 흘리듯 들은 말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사실을 확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발 뒤로 물리는 걸음이 흔들리고, 에메트셀크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제 모습이 수조의 유리에 비치는 것인지, 유리알 같은 인어의 눈에 비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직원의 친절한 말에 에메트셀크는 겨우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유니폼을 말끔히 차려입은 직원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보았다. 짧은 눈싸움 끝에, 에메트셀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인어를 사고 싶은데. 말을 잃은 이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미소에 옅은 금이 갔다. 

“……F-1-928을요?” 

누가 그 얼굴에서 균열을 알아채지 못할까. 에메트셀크는 인어에 하자가 있다던 일행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인어가 완벽하지 않을 게 분명하건만, 이 정도의 반응이 돌아올 이유가 있나.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에메트셀크는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몇 번이고 입을 여닫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은 화려한 바깥과 달리 정결했다. 커다란 테이블과, 그에 뒤처지지 않는 검은색 가죽 소파. 곧 대표님이 오실 거라는 말을 남긴 직원은 자리를 떴다. 방안을 살펴보기라도 할까 싶은 차에 문이 열렸다. 에메트셀크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무례한 태도에도 경매장의 오너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F-1-928이라 불리는 인어, 엔디미온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외관에 흥미를 보인 이들 또한 그 사실을 들으면 금세 돌아섰다. 자리를 차지하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는 것까지 알려준 후에, 그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정말 사고 싶냐 물어 왔다. 팔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외려 흥미를 잃게 하려 험담을 하는 것만 같았다. 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끝이 제 무릎 위를 가벼이 두드렸다. 

오너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제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오는 이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 자본을 가졌다지만 에메트셀크는 달랐다. 고급스러운 옷이며 태도, 자연스레 사람을 하대하는 것까지.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오래 대하며 쌓여온 직감은 어지간해서는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왜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인어를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의문은 에메트셀크의 의사 결정에 티끌만 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다만 직원이 당혹스러워했던 이유를 깨달았을 뿐. 하자를 설명했으며, 해당 이유로 인한 환불이나 교환은 불가능하다며 몇 번이나 강조하는 오너는 일견 절박하기까지 했다. 유려한 글씨로 계약서 위에 사인한 뒤에, 그는 뒤늦게 자신의 집에 당장 인어를 들여놓을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며칠 정도 이곳에 맡겨 둘 수 있나?”

“짧은 기간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일주일. 필요하면 웃돈을 얹어 주지.” 

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메트셀크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오너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간이처럼 굴었던 것치고는 응대가 매끄러웠다. 그 인어가 모든 문제의 중심점이었나. 이젠 제 소유가 되었으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으리라. 에메트셀크는 일행에게 일이 생겨 급히 돌아간다고, 성의 없는 문자를 남겼다. 직후 울리는 기기를 태연히 무시한 그는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했다. 

자택으로 돌아온 에메트셀크는 가장 먼저 사람을 불러 방 하나를 치웠다. 방 크기에 맞춰 수조를 주문한 그는 돌연히 빈방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인어와 같은 생물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주변 이들과 함께 인어 전문 경매장을 방문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반했다, 사랑에 빠졌다, 따위의 짧은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어느 하나도 들어맞질 않았다.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나,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수조와 그 안에 자리할 푸른 눈의 인어는 무엇보다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게 문제지. 차라리 낮잠이라도 자고 올까, 머리가 괜히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시간이 오래 소요될 일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일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텅 비었던 방은 화려하게 꾸며진 수조가 자리했다. 일주일 안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나, 에메트셀크는 자본을 이용해 쉬이 해결했다. 이른 오후, 자택 앞에 화물차가 멈춰 섰다. 인부들은 긴 나무상자를 내려놓은 뒤, 뚜껑을 고정하려 박아 둔 철심을 뽑아냈다. 꼭 관처럼 생긴 상자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생물체임에도. 

“안에 들여놓을까요?”

“아니.” 

화물차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에메트셀크는 약간 어긋나 있는 뚜껑을 쉬이 열었다. 운반의 용이함을 위해서인지, 혹은 상품에 상처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인어는 잠들어 있었다. 물 먹은 천이 몸에 감겨 있었지만, 이 상태로 오래 두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조금 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잠시간 후회하다가, 곧 인어의 등허리와 꼬리 아래에 팔을 집어넣어 안아 올렸다. 하얀 셔츠가 젖어 들고 있었건만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축축한 천을 풀어내면 나신이 드러났다. 결 좋은 피부 위로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고, 물기가 남은 비늘이 밝은 실내등을 사방으로 반사했다. 매끈한 살갗은 부드러웠으나 사람에 비하면 차가웠다. 제 체온이 옮겨붙는 듯한 감각에 그는 흠칫 제 손을 물렸다. 이 정도 온도에 화상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이 없는 인어는 수조 아래로 느리게 가라앉았다. 꼬리지느러미가 부드러운 물살에 먹처럼 퍼져 하늘거렸다. 

정신을 차린 엔디미온은 갑작스레 변한 환경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더 넓은 공간과, 낯선 물의 흐름을 눈을 뜨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자신 또한 결국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팔려 왔음을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드넓은 대양과 그보다 더 큰 자유는 꿈속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제게도 분명 자유롭게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너무나 먼 과거의 기억 같았다. 엔디미온은 한없이 느리게 눈을 떴다. 

에메트셀크는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하염없이 인어를 응시했다. 처음 마주쳤던 그 날, 그 순간의 기억이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인어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에메트셀크는 끝끝내 답을 찾아냈다. 제가 홀린 거였다. 공허한 사파이어 빛 눈을 가진 인어에게. 단 한 번도 동등한 존재라 생각한 적 없고, 여전히 그 생각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덧없이. 

일전에 본 적 있는 금빛 눈이었다. 유난히 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가 싶더니, 기어이 이곳에 데려온 게 분명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살아 있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일족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인간은 인어를 노예로 부리며 감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지느러미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제게서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는 이는 그런 짓을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떠나온 곳에 있던 이들보다는 어쩌면 나을지도 몰랐다. 끔찍하게 작은 공간과 아무것도 먹지 못해 상한 비늘이 떨어지던 것을 기억했다. 잊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과거였다. 불쾌한 상념에 젖어 들 때 즈음, 유리 너머에 서 있던 사람이 자리를 떴다. 그의 발걸음이 불안하게 보였던 것은 단지 인간에게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착각인가. 

인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도록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방문을 닫은 에메트셀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수많은 의문이 스치고, 스러지길 반복했다. 그는 그 중 어느 것도 건져내지 못했다.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제 손으로 문제를 키웠다. 관심도 없던 인어를 사들이고, 그게 머물 수 있을 법한 공간을 만들었다.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헤집는 고뇌와는 별개로, 에메트셀크는 차분하게 인어가 먹을 생선을 준비했다. 단단히 봉해진 비닐을 뜯고, 내용물을 쏟아내면 생선이 팔딱팔딱 뛰어 여기저기 짠물이 튀었다. 날것을 먹으니 크게 손질할 부분은 없었다. 대강 불순물을 씻어내고, 여전히 싱싱한 생선을 적당한 양동이에 담았다. 

남자가 수조 위로 생선을 쏟아붓자 수면이 거칠게 요동쳤다. 엔디미온은 생선이 떨어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채 그의 의도를 가늠했다. 단순히 허전한 수조를 채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제게 주어지는 것인지. 그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이전처럼 방을 나가 버리지는 않았다. 엔디미온은 보란 듯이 제 옆을 지나치는 생어 하나를 붙잡아 크게 짓씹었다. 터져 나온 피가 순식간에 깨끗한 물을 더럽히고, 입 안 가득 익숙한 맛이 감돌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는 물 밖까지 전해질까. 

가늘고 긴 손가락이 몸부림치는 생선을 단단히 붙잡고, 날카로운 이가 드러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생선의 머리 근처를 파고들었다. 단번에 목숨을 끊은 듯 생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인어의 파란 눈은 오롯이 저를 향했다. 탁하게 번지는 피 탓에 잠시간 시야가 흐려졌을 때에도 여지없이. 제가 있는 곳에선 먹지 않거나, 먹더라도 소심하리라 생각했던 예상이 그대로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인어는 제 반응을 살피는 게 분명했다. 에메트셀크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먹어.” 

인어는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에메트셀크는 말을 툭 던졌다. 크지 않은 생선이라 하더라도 제법 단단한 뼈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는 인어의 모습은 가냘프고 아름다운 외형과는 대비되었다. 그것이 싫으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터였다. 그는 인어와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괜히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자리를 떴다.

이날 이때껏 살아오며 한 번도 저 자신을 멍청하다 느낀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에 익숙했고, 그보다 더 정확히 자신의 감정을 알았다. 그 인어를 본 뒤로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부러 되짚어 볼 필요조차 없던 것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곱씹어야만 했다. 푸른 눈은 어떤 흔들림조차 내비치지 않았고, 제가 느끼는 감정을 깨닫는 데에만 며칠이 넘게 걸렸다. 글러 먹었군. 에메트셀크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메트셀크가 어떠한 혼란을 겪고 있건,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제법 많은 수를 넣어 주었던 생선은 어느새 인어의 수조 안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에메트셀크가 방에 들어서면 인형이라도 된 듯 굳어 있던 인어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껏 여유로운 유영,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과 검푸른 비늘의 움직임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매번 새로이 홀리는 감각은 그저 달갑기만 했는지. 

여느 때처럼 수조 위로 활어를 쏟아부은 에메트셀크는 특별한 이유 없이 유리 벽에 손을 대었다.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먹잇감에 익숙해진 엔디미온은 수면이 얼마나 요동치든 관심조차 주지 않다가, 유리에 닿아 눌린 손바닥을 보았다. 인간의 손가락 사이에는 피막이 없다. 이전에도 본 적 있었으나 그의 손은 유난히 한 번쯤 건드려 보고 싶어,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마주했다. 

에메트셀크의 손끝이 작게 움찔거렸다. 인어에게도 분명 지능과 감정이 존재했다. 입을 열지 않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 인어는 도무지 감정, 혹은 그 비슷한 것의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 탓에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랬는데. 유리를 사이에 둔 채 마주한 손이었으나 첫날 닿았던 낮은 체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어의 손은 저보다 작았고, 맹수임을 드러내듯 손톱이 날카로웠다. 

찰나 엔디미온의 입꼬리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눈을 한 번 깜박이기도 전에 사라진 미소는 신기루를 닮아, 에메트셀크는 얼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유리에 반사되어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며칠 전, 경매장의 오너를 얼간이라 칭했으나 제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인어의 목을 향했다. 숨을 쉬는 데에 맞추어 갈라진 틈 사이로 선홍빛 아가미가 얼핏 비쳤다. 어디에나 있는 인어였다. 겨우 인어 하나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한 걸음 잘못 내딛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틈바구니에 매몰되고 만다.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에메트셀크는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심정으로 인어를 관찰했다. 홀로 위태로운 일상이 며칠이고 이어지는 탓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관자놀이 근처를 문지르는 손길에마저 짜증이 묻어났다. 그까짓 게 다 무엇이라고. 에메트셀크는 스스로를 비난했으나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처음으로 본, 웃음이라 하기도 어려운 옅은 그 표정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문득 에메트셀크는 수조를 청소할 시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보통 이런 일엔 사람을 쓰곤 했지만, 몸이라도 움직여 상념을 털어내고 싶었다. 이제 인어는 제법 손을 탔다. 직접적으로 닿지 않더라도 분명 길이 들었다는 걸, 에메트셀크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배수가 되도록 기기를 조작해 두고, 그는 수조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을 붙잡은 인어의 꼬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청소할 거야. 잠시 다른 곳에 있어.” 

엔디미온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으나, 모르는 척 잡았던 손을 놓고 부드럽게 유영했다. 수위가 낮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근래에 그는 이전보다 이곳에 방문하는 횟수도, 머무르는 시간도 줄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괘씸하게 느껴졌던가. 인간에게 익숙해져서 좋을 건 없으니 그를 마주하지 않는 쪽이 제게도 더 나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 좁았고, 동족 하나 없이 혼자 보내는 하루는 지루했다. 무언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기대가 나쁜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곳은 경매장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결국 바다는 아니었다. 

물이 더욱 빠지면 남자가 자신을 홀로 빼내기는 힘들 터였다. 엔디미온은 장난을 그만두고, 여전히 손을 뻗은 채인 그를 보았다.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면 에메트셀크의 몸이 단단히 굳었다. 허리께를 감싸 안는 체온, 뒤이어 몸이 붕 뜨는 감각. 수면에 겨우 닿은 지느러미가 어렴풋이 흔들리고, 아가미가 의미 없이 벌어졌다가 완전히 닫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미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는 물을 얕게 받아 둔 작은 수조에 엔디미온을 내려놓았다. 하체 절반 정도만이 잠기고, 꼬리는 수조 안에 채 담기지 못해 바깥으로 길게 늘어졌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이 정도면 부족하진 않으리라. 인어를 안아 옮긴 탓에 이미 축축한 셔츠 자락을 걷어 올렸다. 말을 알아듣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무던한 성격인지. 허공에 뜬 인어의 꼬리지느러미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처음 마주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내내 유리구슬 같았다. 푸른색 계열의 보석을 그대로 박아 놓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에메트셀크는 거의 다 비워진 수조로 향하려다 말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어를 이곳에 들인지 벌써 세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건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변인들은 때때로 그를 고리타분하다고 평했고, 에메트셀크 또한 크게 틀린 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태껏 달갑지 않게 여겼던 건 기복이 아니라 안정감이었다는 사실을 인어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제 안의 무언가로 두고 싶지 않아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일부러라도 거리를 두었고, 때때로 그날 경매장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모든 게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인어였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자, 어떤 수를 써도 해결할 수 없는 본질이었다.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사치품으로, 그저 비싸고 아름다우며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책잡힐 일 없는 장신구로써 대할 수 있었다면. 자기혐오와 불안, 목적지를 잃은 분노 따위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어느 하나를 분리할 수도 없이 얽힌 감정은 괴악한 덩어리가 되어 자신을 더욱 괴롭혔다. 

에메트셀크의 손이 인어의 부드러운 뺨을 스쳤다. 제 손을 향하는가 싶던 인어의 파란 눈길은 곧 제게로 돌아오고, 그는 여린 윤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가는 목 양쪽에 자리한 긴 선의 감촉이 선연했다. 잡아 벌리면 쉬이 붉은 섬모를 드러내고 말,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기관. 아가미의 흔적을 가리려는 듯, 에메트셀크의 손이 인어의 목을 감싸 쥐었다. 사람이라면 으레 느껴져야 할 맥박이 없었다. 

인어의 목은 가늘었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살갗 위를 단단히 디뎠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힘을 가하더라도 제 목이 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이렇게나 숨을 쉬기 버거운가. 인어가 죽어 사라지면, 이 모든 혼란과 감정을 모르는 척 가슴 속에 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지는 못해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을 수는 있었다. 무기질의 눈에 비치는 얼굴은 얼마나 불안에 가득 차 있는지. 

목을 내맡긴 채로도 인어는 태연했다. 미지근한 살갗이 제 열을 빼앗아 이제는 따듯했다. 인어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면 늘 불안정함이 커지며 사고가 정상적인 회로에서 벗어났다. 휘청휘청 흔들리는 것은 의지인가, 이성인가. 자신을 저지할 생각 따위는 없는 듯 가벼이 늘어진 팔이. 느리게 깜박이던 눈이 종래에는 눈꺼풀 아래 가두어졌다. 체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순응에 가까웠다. 손끝이 잘게 떨려,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겨우 들이마셨다. 

“나를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낯선 목소리의 주인은 제 눈앞의 인어였다.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내내 굳게 닫혔던 입술이 움직이고 문장이 완성되는 광경을 목도하고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분명 노래는커녕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토록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완벽한 패배의 순간이었다. 긴 부정과 혼란이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얼핏 허탈했고, 동시에 기묘한 희열이 가슴 한구석에 들끓었다. 

“그러려고 했지.” 

그의 팔에 힘줄이 드러났으나 애초부터 목을 감싸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인어의 목에는 옅은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청소를 하려 돌아섰다. 이전에도, 지금도 머리가 복잡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므로. 그런 이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은, 

“왜 못해?” 

그녀의 태도만큼이나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어투였다. 무엇을 묻고자 하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것은 호기심일까, 분노일까, 그도 아니라면 아쉬움일까. 에메트셀크는 다시 뒤돌아 인어를 내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어째서 숨을 끊으려 든다는 걸 알면서도 목을 내어주고 있었냐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떤 것도 꺼내지 못했다. 

“……이름이 뭐야.” 

수많은 의문을 뒤로 한 채,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결국 시답잖은 물음이었다. 엔디미온. 간결한 대답이었다. 몇 달 만에 알아낸 이름을 곱씹었다. 이름도 꼭 저 같다, 고 생각한 직후 에메트셀크는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로 이럴 생각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지 않았고, 그는 남모르게 안도했다. 

“당신은.”

“에메트셀크.”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목 근처가 따듯한 감각이 남아 어색했다. 찰나 바다를 떠올렸다. 꿈에서나 가 닿을 수 있는 곳을. 어설프게 남은 감촉을 떨치려 괜히 아가미를 벌렸다가 금방 닫았다.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는 것도,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에메트셀크가 알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외려 내보였던 상처받은 표정이며 닿아 있기만 했던 손까지 모두 의문스러웠다. 침묵은 그 자체로 대답이 되었으므로, 엔디미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에메트셀크의 태도가 바뀌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금빛 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희미한 다정함이 자리했다. 기저에 배려가 깔린 격식 있는 태도. 자주 보여 주던 당혹스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그 짧은 순간으로부터 에메트셀크는 무엇을 얻었는지. 그러나 에메트셀크는 이유를 물으면 여전히 묵언했다. 세 번째 침묵이 지나간 이후, 엔디미온은 더 이상 묻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대답은 지금 당장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기적 같은 변화는 실존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때때로 드넓은 대양을 떠올렸고, 하루의 절반을 홀로 보냈다. 그저 유리 건너, 그것도 세 발자국은 떨어져 자신을 지켜보던 에메트셀크가 이제는 가까이 다가오는 데에 스스럼이 없어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의 모습이 사라졌으니. 엔디미온은 몸을 빙글, 돌려 오늘따라 유난히 심각한 낯을 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계속…… 말을 안 했지?” 

물속으로 둔탁하게 울려 들리는 목소리는 작지만 명확했다. 저조차 잊고 있었던 이유였다.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던 탓이었다. 엔디미온은 깊은 곳에 파묻힌 기억을 되짚었다. 한때는 저 또한 심해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렸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라고 확언하기 어려울 만큼 먼 옛날의 기억 같았다. 

잡혀간 동족의 수가 늘어가며 우리들은 더 깊은 곳으로, 인간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곳으로 이주했다. 인어의 목소리와 그 육체까지 인간들이 탐을 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거주하는 곳 근처까지 인간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닿았을 때, 그의 주변인은 그를 붙잡고 설득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에게 잡혀간다면 절대 입을 열지 말라고,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옳은 말은 아니었다. 돈벌이에 미친 인간은 목소리를 잃은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놓아 주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덕분에 팔려 갈 뻔한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의 집에 온 이후로도 입을 다물었던 이유는. 그저 아주 오랫동안 입을 닫고 있었던 탓에 정말로 말하는 법을 잊었던 걸지도 몰랐다. 변화가 두려웠던가. 엔디미온은 이 모든 이야기를 짧게 압축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엔디미온은 오랫동안 침묵한 후에 싱거운 대답을 꺼냈다. 이유를 말하기 싫거나, 혹은 귀찮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그녀는 더 말할 의사가 없을 터였다. 더 캐물어 보아야 싫은 티를 내는 이를 마주하게 될 뿐임을 알아 에메트셀크는 허, 짧게 탄식하고 말았다. 말문이 트인 이후로도 그녀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버릇되기라도 한 건지, 애초에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지.

 


 

일상은 큰 파란 없이 흘렀다. 에메트셀크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남는 시간을 엔디미온의 곁에서 보냈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던 엔디미온 또한 때때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거창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그들의 일상만큼이나 여유롭고 굴곡이 없는 대화였다. 

어느 날, 에메트셀크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멈추어 섰다. 그는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싫어 라디오 따위를 켜놓는 일이 없었다. 엔디미온이 있는 방 안에는 더더욱 그러한 소음을 유발할 만한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들려오는 노랫소리의 근원이 될 이는 한 명뿐이었다. 인어의 노래는 선원을 홀려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든다고 했던가. 인어를 사로잡아 장신구로 쓴 뒤로는 회자되지 않던 이야기였으나 에메트셀크는 그러한 전설이 생긴 이유를 깨달은 것만 같았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엔디미온이 노래하는 것을 그만둘까 봐, 그는 그저 문고리를 붙잡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목소리는 제법 익숙해졌건만, 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또 새로워서. 노래가 끝자락에 다 다를 때 즈음 에메트셀크는 망설임 끝에 문을 열었다. 그대로 끊어지리라 생각했던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침내 엔디미온이 노래를 끝마쳤으나 그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에메트셀크?”

의문 섞인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른 이후에야 에메트셀크는 정신을 차렸다. 성큼성큼 내뻗는 다리는 수조 앞에서 멈추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꾹 다문 입술과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금빛 눈. 한 번도 제 노래를 들은 적 없을 이였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알 것 같아, 엔디미온은 언젠가 그러했듯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척, 문제가 있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몇 달간의 경험으로 에메트셀크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엔디미온은 기묘한 확신을 가졌다. 본성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더 참을 필요가 없었다. 오랫동안 즐겨 부르던 노래는 기억을 되짚지 않아도 선연했다.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가슴 속을 시원하게 적셨다. 

“바다에 갈까.”

“……”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에메트셀크가 줄곧 바라왔던 것을 알았다. 그가 자신을 피해 도망칠 때에도, 꾸며낸 표정을 덮어썼을 때에도. 그러한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그가 고민한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에메트셀크가 제게 건네는 것과 똑같다고는 하기 어려웠으나 결이 비슷한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저를 붙잡는 만큼, 그를 당장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긴 고민 끝에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메트셀크는 제가 내뱉은 말을 일순간 후회하였으나, 그녀가 긍정의 답을 내놓은 순간 후회를 저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손아귀에 완전히 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할 수 있겠지.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을 들이면 됐다. 에메트셀크는 빈손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폈다. 엔디미온의 노랫소리가 한참이나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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