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
라하빛전│1절2절3절뇌절온 페이트AU
- 그라하가 마스터/빛전이 서번트
- 오리지널 빛전이 이름까지 등장합니다.
* 기본설정
> 그라하에게는 FF14의 기억이 '전생'에 해당, 마술사로 환생했으나 빛전은 환생하지 못하고 영령으로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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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나직한 사용인의 목소리가 혼곤해졌던 정신을 급하게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파득거리며 깨어났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오지도 않으므로. 나는 숨을 가다듬고 태연한 척 문 너머로 대답했다.
“……조금, 피곤한 정도야.”
“알겠습니다. 불편하실 때는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그래. 고마워.”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함께한 노인의 염려가 배어있었다. 성의껏 대답하고 잠시 말을 고르느라 침묵했는데,
“‘그 분’은 잠들어 계십니다.”
노인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문 너머에서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온다.
무리도 아니긴 했다. 그 앞에서 그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필히 무언가 있으리라 짐작했겠지. ‘이번’의 나를 평생 보아온 사람에게는 약간의 침묵조차도 쉽게 간파당한다. 다만 설명하지 않는 나를 굳이 추궁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배려심은 마치 오랜 과거의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들어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백 년의 시간 동안 감정을 감추는 건 꽤나 능숙해졌다 여겼는데.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깨어날 때까지 건드리지는 말아줘.”
“예. 따로 방에 모셔 두었습니다.”
“고마워. 어느 방인지 알려주겠어?”
주인 한 명과 세 명 남짓 되는 사용인이 머무르기에는 다소 큰 저택이었다. 사람이 지내는 방은 나와 그들이 쓰는 방이 전부였기에 거주용으로는 실속없었으나, 마력 수맥이 흐르는 땅인지라 그저 차지하고만 있어도 그 가치는 충분했다. 먼 옛날처럼 그것에 속박되어있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이 땅은 나의 지위와 힘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그녀가 머무르는 공간은 내 방과 그리 멀지 않았다. 일부러 멀리 둘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녀를 본 순간 내 표정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러지 않았으리라. 노인은 나의 모든 삶을 머릿속에 기록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나를 위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구분했다.
방의 위치를 알려준 뒤 노인은 돌아갔다. 이제 정말로 고요해졌다. 복도까지 깔린 정적을 실감하며 그제야 한껏 쌓아두었던 한숨을 내뱉었다.
고뇌와 망설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영웅의 서사시가 신화로 남아 떠도는 세계. 생소한 문명과 마주하며 시작된 새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기어이 다시 ‘빛의 전사’를 찾아냈다. 사실 반은 체념하면서도 매달렸다.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내 눈 하나 때문이었다. 그 의미와 본질이 상이했으나 이 눈은 여전히 ‘마안’으로써 기능했고,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단이 되어주었다. 가령 내가 본디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도 기억하게 해주는.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찾아내었다. 사실은 이 세계를 파악하고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되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맞이할 운명, 그 운명과 맞닿은 곳에서 나의 영웅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절망 역시도 함께했다. 나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역사를 만드는 이의 곁에 나란히 서서 그 자리를 잠시나마 허락받는 것. 그 시간 속에 함께 할 것을 약속받는 것. 감히 그러지 못하리라 여겼던 소원은 한 때 이루어졌고 나를 완성시켰다. 서사시는 수많은 음유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렸다.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한 그 세계의 이야기는 지금의 내 시간 속에서는 이미 아주 오랜 옛날의 ‘신화’가 되어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걸어온 그 시간은 기록으로서, 어쩌면 허구의 서사시로서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 이야기가 나의 꿈은 아니었을까. 그렇게는 믿고싶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무수한 기억들이 정교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영웅의 곁에 머무르며 영웅의 수많은 얼굴을 알았다. 기록되지 않은 비밀들과 시시한 특징들마저 읊으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사람이 되었고, 그녀는 이 세계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채 그저 허구의…어쩌면 그저 먼 과거에 지나지 않을 기록으로만 남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망에서 금방 일어섰다. 내가 그녀를 ‘데려올’ 권리는 처음부터 주어졌으므로. 마술사의 혈통은 그들의 쌓아온 시간이 결정한다. 이번 생의 그라하 티아는 ‘홍혈의 마안’을 계승해온 유서깊은 마술사 가문의 자제가 되었다. 권리를 얻었으니 그 다음에는 행사할 차례였다.
신화 속, 신들의 사랑을 받은 땅을 구한 구세계 영웅. 그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마침내 점점 완전한 영혼을 갖춘 끝에 종말의 세계에서도차도 수호자로 막을 내린 자.
니시나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이미 역사가 아닌 신화가 되었다.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 거대한 적과 맞서기를 거듭한 끝에 신적인 존재로 거듭났다는 기록. 누가 그의 이야기를 이토록 상세하게 풀어두었을까. 또한 신기하게도(어쩌면 절망스럽게도) 그 거대한 신화 속에는 내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이곳에 태어날 수 있었던 개연성이 아닐까 했다. 무슨 억지력이 우리를 갈라놓았는가 하는 슬픔도 느꼈지만 마냥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필 골라도 기록조차 허구에 가깝다 여겨지는 영웅을 택한 나를 가문은 잠시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성유물이 존재하는 한 가능성은 무한했다. 영웅의 기록이 처음 발견된 땅에서 전해지는 석판 조각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성유물이었다. 신기하게도 보자마자 그것이 진짜임을 알았다. 그녀의 존재는 신화가 되어있으나 내가 존재함으로써 연결 고리를 남겨준 것일까? 그렇게라도 우리가 운명이라 믿고 싶었다.
「기다렸어……니시나.」
반신반의의 상태로 진행한 영령소환 의식에서 나는 기어이 그녀를 다시 불러냈다. 쓴 웃음을 속으로 삼켰었다. 다른 세계에서 그녀를 불러내고, 대의를 위하여 함께 싸워줄 것을 청할 나의 모습을 그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만나고 싶었으나 우리가 만날 명분은 또 이런 식으로 마련되는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이번에는 이 운명에 감히 반역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향해 기꺼이 내밀었다. 기대와, 초조함과 함께.
소환진 위에 서 있던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그저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할지 그토록 긴장했던 순간은 전생을 포함하여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서번트가 폭주하거나 복종하지 않을까 일가의 다른 마술사들은 경계태세를 감추지 않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누구지? 너……」
한 문장을 끝맺지도 못하고 서번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대기하고 있던 마술사들이 달려나와 급하게 서번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소환 과정이나 마력이 허술하여 생긴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력이 너무 충분한 탓에 서번트에게 과부하가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괜찮다 설명하는 마술사의 이야기에 모두가 안도했으나, 홀로 다소 충격받은 얼굴이 되어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에 했던 말을 여지껏 곱씹고 있었다.
……각오했는데. 나의 서사가 빠진 이야기 속의 영웅이라는 것을. 나의 각오는 내 생각보다 큰 충격과 함께 함락당했다. 기묘한 듯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그나마 희망이었으나 마냥 긍정적으로 관망할 수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나를 설명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만 급급했지, 정작 다시 만났을 때 ‘나를 정말로 잊었을 가능성’에 대한 매뉴얼은 차일피일 회피하다 맞이한 결과임을 체감했다. 오히려 나는 줄곧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만나 나를 알아본 그녀가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 미소짓고, 결국 언제나 그랬듯 머리를 쓰다듬어 줄 거라고……
“아아아아…….”
밀려오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착잡함과 막막함, 섭섭함, 슬픔……점점 무거워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부끄러움이 범람한다. 정신 차려, 그라하 티아. 아직 성배전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고. 내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황급히 자기 최면에 가까운 소리를 입 속으로 복창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우리의 관계가 전생에 어땠든 간에 지금의 우리는 서번트와 마스터라는 관계로 재정립되었다. 지난 대의 항쟁으로 부모이자 선대 당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가문의 염원을 지켜나갈 사람은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 염원이란 실로 간단하다. 진리로의 도달. 근원을 향한 오랜 염원. 마술사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강한 소망…성스러운 잔을 향해 기도할 나의 바람은 이미 정해져있다. 잔에 작은 소망을 위탁하기보다는 근본 자체를 깨달아 나의 손으로 이루는 것이 이 전쟁에 뛰어드는 마술사들의 가장 기본적인 탐욕이었다. 이 삶에 적응한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근원을 거머쥠으로써 본래의 ‘나’를 되찾는 것.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이 대의 밑에 잠들어있었다.
다만 그건 어찌 되었든 나의 이야기이고,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바로 그녀였다.
영령의 좌에 오른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그들만의 크고 작은 소원이 있다. 잃어버린 왕국의 소생, 죽기 전 만나보지 못했던 연인과의 재회, 빼앗긴, 분실된 보구의 회수, 또는 그저 성배가 보물이니까. 개인적인 소망부터 시작하여 마스터를 위한 소망을 품는 서번트까지 그 부류는 실로 다양하다 들었다. 대개 역사 속 그들의 사정이나 특징에 따라 쉽게 유추할 수 있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녀의 소원은 뭐지?
우습게도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말문이 턱 막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져 버린 것이다. 전생에는 나름……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그녀의 모든 모습을 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기억을 갖고있는 지금은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그녀의 소원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차라리 모르고 싶은 쪽이지.’
그랬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저 그녀의 소원을 아는 게 두려웠다. 소환 직전까지도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한심해서 상처받았으니까. 그 서사 속에는 그라하 티아가 없다는 걸 이미 충분히 확인했음에도 결국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거다. 바보같이…기대해서. 그런 이유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던 중 현실을 주입당하지 않았나.
“…….”
한참 뿌리를 뻗던 자책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기로 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털어버리고 엎드려있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깨어났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녀를 찾아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누구지? 너……」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겠다. 다만 쓰러지기 직전 마주쳤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분명 혼란이었다.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실려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면 억지일까. 단순한 내 희망사항이나 염려는 아니었다. 애시당초 그 기록을 찾아볼 때부터 나는 의심만 거듭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서번트에 관련된 꿈을 꾸는 건 매우 흔한 일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꿈이 아닌 온전한 기억이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이 충분한 시간과 개연성을 갖고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록 속에는 ‘그라하 티아’라는 인물의 언급조차도 없고 심지어 미지의 누군가가 그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인물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의 개입이 들어가야 할 부분은 모조리 기억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로 뒤바뀌어 있었다.
가능성은 오로지 두 가지다. 나의 모든 것이 잘못 되었거나, 혹은 이 기록이 잘못 되었거나.
어느 쪽으로든 오류가 있음은 확실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멋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이 기억이 거짓이라면 내가 그녀를 찾아내고자 했던 그 모든 감정까지도 부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어느 때보다도 괴로울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와 그녀가 있을 방을 찾았다. 앞에 사용인이나 감시자를 굳이 두지 않은 건 의심이나 경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설령 그녀가 갑자기 문을 부수고 나와 적대한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 상대할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굳게 닫혀있는 문을 보고 솔직히 안심했다. 깨어났다면 반드시 나를 찾아왔을 텐데, 아직 눈을 뜨지는 않은 모양이다.
“후우…….”
문고리를 잡기 전 괜히 손가락을 풀며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거에도 잠이 얕은 편이라 문 여는 소리에 금방 눈을 뜨던 그녀였다. 그걸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결국 덤덤하고 싶었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잘, 잤어?”
어느 새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는 순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나는 웃고 말았다.
그녀에게 건넨 첫 마디조차도 지독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 탓이었다.
이 마음이 거짓일 수는 없다는 확신마저 드는, 가슴이 미어지는 그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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