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에메히카] 무광층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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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5 작성

※ 5.0부터 5.4까지의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날조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글에서 빛의 전사는 설정된 종족, 성별, 이름 등이 없습니다. 편의상 인칭대명사는 '그'를 사용합니다. 


< 무광층 >

무릇 태양이란 생명의 근원이며, 그 찬연함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자애롭게 내리쬐는 따사로움은 대지를 적시고, 누군가에게는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된다. 그러나 태양에 다가가고자 날아오른 이의 날개는 불타 녹아 버리고, 오랫동안 태양을 좇은 이는 색이 바래 버린다. 그렇다면 사라진 자신의 색은 어디에 있는가. 에메트셀크는 관념으로 폐잔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각난 세계를 복구하고자 했던 노력은 무산되었다. 육체는 빛의 전사가 내꽂은 일격 아래 무너졌고, 분명 그에게 작별의 말을 전했건만. 무엇을 위해 힘을 잃은 육체가 망령되이 남아있단 말인가? 에메트셀크는 제 양손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에테르가 흩어지는 순간의 감각은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에메트셀크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잃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했다. 오로지 언젠가 되찾을 낙원을 그리며 끝없는 시간 속에 무너지는 의지를 정립하고, 희미해지는 기억을 동료들의 가면을 붙잡아가며 되새겼다. 생과 사를 결정짓기 위한 진공전 끝에 패퇴한 에메트셀크는 그리운 태양의 파편에게 제 목숨을 내어 주었다. 태양은 조각이 났다 한들, 변함없이 찬란하고 강렬한 탓이었다.

모든 집념, 희망과 절망을 모조리 떨쳐 낸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굴레를 벗어던지기라도 한 듯이. 해방의 쾌감은 역설적이게도 패배 이후에 찾아왔다. 묘한 일이었다. 에테르의 바다로 향했어야 할 무너진 영혼은 여기, 태양의 파편이 존재하는 세계에 이끌리듯 발을 디뎠다. 대부분의 힘을 잃고 겨우 형체를 유지할 정도의 여력만 남은 채로도. 

영혼은 일생토록 좇은 태양을 얼기설기 엮여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상태에서도 끈질기게 바랐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이라면, 저 스스로도 모르는 채 이치를 역절하고 이 세상에 기어이 발을 붙인 이유라면. 에메트셀크의 금빛 눈이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제가 내도록 그리워한 태양은 제 의지로 조각나, 겨우 백여 년의 생을 사는 존재로 화했다. 부서진 태양은 더 이상 태양이 아니어야 했건만.

길을 지나치는 이들이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를 힐끗 보았다가, 갈 길을 재촉했다. 빛이 범람한 이후,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한 땅은 한 줌이었으나 살아남은 이들은 그 땅을 다 이용할 만큼의 수도 되지 못했다. 끝나지 않은 재앙은 시시때때로 사람의 영혼이며 육체를 앗아갔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고통으로 신음했고, 재물로 배를 불린 이들은 환란이 채 미치지 못하는 도시로 들어가 그 밖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러니 에메트셀크의 복식은 이곳에서 한없이 이질적이었다. 

이제 막 밤을 되찾은 세계는 재앙의 여파로 신음했다. 누군가는 부상자를 모아 돌보고, 누군가는 제 한 목숨을 부지하려 애를 쓰고, 어떤 이는 자신이 누렸던 안전을 되돌아보았다. 에메트셀크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쪽에 가닿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황폐한 대지를 걷고, 또 걸었다. 제가 무너트린 세계를 무심히 지나쳐 열기의 근원으로, 더 가까이.

크리스탈 타워가 치솟아 무너진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된 도시, 크리스타리움. 도시에는 저 밖의 이들과 달리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까지 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순간 에메트셀크의 형체가 사라졌다가, 빛의 전사가 머무는 거처에서 다시금 나타났다. 빛의 전사는 느지막한 시간에 홀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면 음식을 씹는 턱의 움직임이 느려지다가, 종래에는 완전히 멈춰 버렸다. 이쪽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눈이 깜박이고, 뒤늦게 입안에 든 것을 삼켰다. 그 표정 안에는 무엇이 담겼는지. 그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음식을 입에 떠 넣었다. 상황이며 그의 반응이 제법 우스워, 에메트셀크는 입을 다문 채 빛의 전사가 앉은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젠 하다 하다 헛것을 다 보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때때로 초월하는 힘이 보여주는 장면도 환상 같았으므로. 그러나 두통도, 어지러움도 없이 찾아든 환각은 이질적이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도, 상 위를 짚은 장갑 낀 손도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이었으나 눈앞에 선 사람은 이곳에 실재할 수 없었다. 제 몸을 갉아 먹던 에테르를 실어 내던진 일격의 감각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에 머무른 채였다. 

환각이라 한들 제 손으로 죽인 이를 눈앞에 두고 밥을 먹는 취미는 없었다. 식사 때가 어긋나 크게 배가 고프지도 않았던 탓에, 최소한의 영양은 섭취했다 판단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금 눈앞에 선 사람을 훑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원형 아씨엔 중 하나였던 이. 제게 기억할 것을 종용하고서는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아집과 미련의 결정체. 

“다 살펴봤나, 영웅님?”

“……”

“아쉽게도…… 허깨비는 못 된 모양이더군.” 

빛의 전사는 제 손을 응시했다가, 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눈앞에 선 이는 빌어먹게도 현실 그 자체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료를 잃어 왔고, 그들은 모두 제 죽음에 후회는 없다 말할 이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꿈 자락에서조차 단 한 번, 한 번만이라도 모습을 내비쳐 보이지 않았던 것은.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이 찾아들면 그들의 이름이, 얼굴이, 행동이 그리워 홀로 울음을 삼켰다. 그들의 목소리조차 이제는 바스러져 희미하건만 제 손에 최후를 맞이한 적이 되살아나 뻔뻔스레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치란 말인가. 아는 것이 많아진 지금, 오롯이 적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가 왜. 

이제 와서 건네는 말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그 누가 고별 이후를 상상하겠는가. 이미 끊어진 실을 억지로 이으려 해 봐야 매듭이 생길 뿐이다. 제 앞에 선 에메트셀크의 얼굴은 이전과 똑같았다. 심통 맞은 표정, 멀쩡한 허우대를 가지고서도 굳이 구부정한 자세를 고집하는 이. 그러한 사실이 못내 불쾌해 빛의 전사는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나가.”

“……”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추수양안 안에 스친 감정을 부르기에 적합한 이름은 알지 못했으나, 에메트셀크는 그것이 지닌 무게를 알았다. 실낙원을 그리워하던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일생을 건 목표의 실패 이후 모든 짐을 털어내 버린 에메트셀크는 감히 그를 위로할 수도, 동감할 수도 없었다. 들끓는 감정에 뛰어드는 건 위험했다. 제게도, 그에게도. 영웅이라 칭송받는 빛의 전사라 한들 결국에는 한낱 인간이었으므로.

에메트셀크는 익숙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허공에 뜬 균열을 노려보던 빛의 전사는 에메트셀크의 기척이 완전히 끊기고서야 비척비척 걸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곤했다. 어느 순간부터 어지간한 일로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는데도. 에메트셀크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법을 안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되살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쯤이나 되는 인간이 타인이 따라 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하진 않았을 게 뻔했다. 

하지만 대체 왜 제 앞에 나타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껏 되살아났다면 다른 아씨엔이 그러했듯 모습을 숨기고 계략을 꾸미면 될 일이었다. 그가 바라마지않던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기 위해. 동시에 빛의 전사는 그의 최후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린 듯 희미하게 웃던 얼굴. 단지 강한 적으로만 여길 수 없게 했던 에메트셀크의 이야기들을.

그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그는 목적을 이루고자 수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어떤 세계의 멸망에 일조했다. 그러나 에메트셀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저였다. 영웅이라 칭송받고 있을 뿐, 제 손에선 언제나 피 냄새가 났으므로. 누군가는 저와 에메트셀크는 다르지 않으냐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목숨값을 잴 자격이 있겠는가. 어느 목숨만 특별히 무겁거나, 혹은 가볍겠는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운 빛의 전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안다. 에메트셀크가 이미 아씨엔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같은 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마지막에 가서 웃을 수 없었겠지. 하데스라 부르는 쪽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무엇도 확언할 수 없었다. 잃은 것, 잃을 뻔했던 것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이었다. 그 모든 게 에메트셀크의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제게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를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게도 뜻밖인 일이었건만, 목숨을 걸고 싸운 빛의 전사라고 달랐을까. 무작정 찾아오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크리스타리움 바깥으로 나온 에메트셀크는 모습을 감춘 채, 뒤늦게 세상을 둘러보았다. 재해로 망가진 부분을 수복하려 애쓰는 움직임들. 더 나은 방향으로 발돋움하는 이들. 

이전이었다면 쉬이 비웃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빛나는 의지, 그 자체와 부딪혀 패배한 이에게는 비웃음은커녕 동정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비웃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으며 오롯하게 세상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그들의 희미한 영혼은 생리적인 불쾌감을 이끌어냈고, 재앙의 후유증에 신음하는 이들의 모습에는 잃어버린 동포들이 떠올랐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많았다. 좁은 세계를 얼추 살펴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한순간에 바뀔 리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 사람들의 태도에는 차이가 생겼다. 에메트셀크는 희망이 가지는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모조리 타 버린 잿더미 속에 겨우 힘을 부지한 작디작은 불씨를 키워내는 것이 희망이었다. 설령 희망이 한없이 멀고 덧없다 하더라도. 

에메트셀크는 세상을 살피면서도, 빛의 전사 쪽의 소식에도 귀를 열어 두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생을 바쳐 염원했던 바람이 꺾이고, 에메트셀크는 고대 인류의 뒤를 잇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굴레를 벗어던졌다고 할지언정 현생 인류와 똑같은 입장이 될 순 없었다. 호기심이 조금도 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게 기대를 걸어보게 된 원인이라면 더더욱. 완벽한 소환 덕택에 세계에 구애받지 않는 이는 수시로 1세계와 원초세계를 오가며 말을 전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이리저리 뛰었다. 

더없이 맑은 하늘에 일순간 어둠이 드리웠다. 흔히 지나가는 비구름이 아니었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고서도 무뎌지지 않는 기억 속 재앙의 풍경이 1세계에 재현되었다. 빛을 잃어버린 하늘과, 땅과 건물을 무너트리며 떨어지던 유성우. 금빛 눈이 아득한 하늘을 응시했다.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손끝이 자꾸만 떨려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과거의 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하얀 로브를 걸친, 원형 중에서도 유난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 엘리디부스. 매번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을 벌였으니,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불완전한 인류의 영혼에도 화인은 그대로 남아, 재앙을 마주하면 유실되었던 힘을 이끌어냈다. 

엘리디부스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건,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마주한 날것의 기억 탓에 모조리 잊은 줄 알았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게 전부였다. 에메트셀크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만에 하나라도, 엘리디부스의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제 근원을 형성한 도시를 그려냈다. 

다시금 드러난 금빛 눈은 가라앉아 짙었다. 돌아가더라도 그곳엔 제 자리가 없다. 다 꼽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은 현생 인류에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제국을 건설하고, 황제 노릇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가정을 이루기까지 했지. 하얀 종이 위에 스며든 잉크 자국을 말끔히 지워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악할 필요가 없던 시절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짧았고, 그 뒤를 따르는 설움은 길었다. 오래전부터 인식했던 사실이었다. 꺾여 버린 목적을 재인하게 하는 유성우를 피해 그는 자리를 옮겼다.


엘리디부스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의 행동으로 계획을 읽어낼 수 없는 탓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의 원인을 알게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맹목적인 믿음이 그 자신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이. 공존할 방법은 없다. 제가 죽거나, 그를 죽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공멸하게 되리라. 빛의 전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대의 건축 양식과는 다른, 그러나 깔끔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무엇 하나 거대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곳에도 활기가 돌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그 시절의 에메트셀크는 어떤 모습이었을는지. 손안에 쥔 크리스탈의 감촉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음에도. 며칠 전 제가 머무는 곳에 태연하게 나타난 이가 떠올랐다. 그때 에메트셀크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 꽤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건만. 그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언제였던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쫓겼던 때가. 지금 저를 쫓는 이들이 어느 세계의 누구인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의 기억이 흐려지지 않았음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나 분명 그때와는 달랐다. 제가 이곳에서 했던 일, 그와 맞닿아 생긴 인연들이 제 손을 잡아 이끌며 길을 열어주었다. 

하늘을 반으로 가를 듯이 치솟은 크리스탈 타워, 그 안에 엘리디부스가 있다. 오르고 또 오르며 저와 함께 달린 동료, 그라하가 길을 열어주면 영웅은 머릿속을 침범하는 과거의 기억을 떨쳐냈다.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계단을 밟고 위로, 더 빠르게. 

완전했던 인간은 목적 속에 매몰되어 이제는 기억조차 불완전했다.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이는 발악처럼 힘을 끌어모았고, 첫 번째 빛의 전사라 스스로를 칭했다. 그를 압도하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았다. 분명 그러했건만. 끝없는 공간 속, 온몸을 죄이는 구속구 탓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끝을 맞이할 수는 없다. 

겨우 구속구를 풀어냈을 때, 전경이 바뀌었다. 그를 다시금 전장으로 소환해낸 고대인은 손을 터는 듯 인사를 건네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은 에메트셀크 뿐이었다. 주황빛 작은 크리스탈 안에 기억과 술식을 담아 놓았던 이. 빛의 전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이 전투가 끝난 이후에 생각하는 게 맞았다.


언제 유성우가 쏟아졌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마지막 남은 원형마저 저물었음을. 에메트셀크는 그저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그에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러하였으나, 익숙한 부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별을, 운명을 잇는 힘을 그리워한 지 오래된 탓이었다. 

엘리디부스는 다른 원형과는 달랐다. 그렇다 한들, 오랜 동포의 염원을 꺾는 데에 일조했음은 사실이었다. 오롯한 자신의 의지로, 지금의 인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자 마음을 먹고서. 어느 쪽이 옳은지 이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제 몫이 아닌 일이었으므로. 영웅님께서는 지금 바쁠 테지. 그는 널찍한 나무에 기대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에메트셀크.” 

익숙한 목소리는 지금, 이곳에서는 분명 들리지 않아야 했다. 이제 와 환청을 들을 리가 없었다. 한창 뒷수습에 바빠야 할 이가 대체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생각이 길어지는 차에, 차분한 음성이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유난히 눈에 띄는 푸른빛의 영혼은 제게 언제나 재난 같았다. 막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재해. 그러한 사실은 그 영혼이 조각나 파편으로 남은 지금에 와서도 유효했다. 

빛의 전사는 전투의 흔적을 그대로 매단 채 저를 마주했다. 격렬한 싸움을 반증하듯, 드러난 살갗마다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분명 희었을 옷자락은 피에 물들어 얼룩이 졌다. 그런 꼴을 하고서도 고통을 모르는 듯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그 순간, 에메트셀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오랫동안 그려 왔던 태양은 이미 저물었고, 제게 첫 번째이자 두 번째인 태양이 새로운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음을. 

“상처 정도는,”

“왜.”

“…….”

“왜, 왔어. 내가 부르는 게 뭐였다고. 왜.” 

무슨 말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네가 지닌 그 크리스탈의 주인을 오랫동안 그리워 해왔다는 말? 그 영혼의 일부가 바로 너라는 말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빛의 전사 그 스스로가 어림짐작하거나, 깨닫는 것과는 달랐다. 입이 있으나 꺼낼 말이 없었다. 한때나마 분명, 저는 빛의 전사에게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으므로. 

에메트셀크는 차라리 입을 다물 것을 선택했고, 빛의 전사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 없이 비밀이 많은 이였다. 숨기려는 것을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었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많은 이들을 상대해오며 직접 깨달은 사실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한 걸음 늦은 피로가 당도했다. 피를 꽤 흘렸던 것 같긴 했다. 치유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을 테지만, 필연적인 피로마저 해결할 수는 없었다. 무리해서 이곳까지 달려온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전투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탓이라고 할까. 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저 에메트셀크의 속내가 못내 궁금했다. 굵직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허탈했다. 그 무엇이 특별히 그러한 감정을 불러내는지조차 알 수 없으면서. 빛바랜 기억을 읽어낸 작은 고대인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그에게 건네지 않은 주황색 크리스탈의 주인과 자신은 같은 영혼을 공유했을 게 분명했다. 에메트셀크에게 굳이 말을 꺼낸 것은 일종의 확인이나 다름없었다. 확신이 필요했던 거였지. 일말의 기대며 바람 따위는 매번 쉬이 스러지기 마련이었다. 그의 미련은 여전히 미래를 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련이라 칭하는 것일 테지.

빛의 전사는 여기저기 통증이 이는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흙먼지가 묻은 옷자락을 대강 털어냈다. 입을 열지 않는 에메트셀크가 미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 이전에 있었던 이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되었다. 심해 속 도시가 불러일으키던 낯선 향수와, 친절하기 그지없던 고대인들을. 

“갈 거야.”

“…….”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어. 날 선 문장 하나를 눌러 삼키면 속이 베인 것 같았다. 육체의 통증보다 실존하지 않는 고통이 더 선명했다. 빛의 전사는 일순간 비틀거렸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중심을 잡고 꿋꿋하게 걸었다. 따라붙는 시선은 타오를 듯 선명했지만, 붙잡으려 다가오는 발걸음은 부재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척이 멀어졌다. 그게 꼭 그와의 거리감 같았다. 

내내 뒤돌아 걷는 이를 향했던 금빛 눈이 비어 버린 자리를 향했다. 그런 식으로 빛의 전사를 보내선 안 됐다. 하지만 붙잡는다고 달라질 문제도 아니었다. 그다음에는 무슨 말이든 꺼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뒷걸음질 칠 수도 없었다. 결국엔 모두 같은 결과를 도출해낼 것이 뻔했으므로. 

걸어온 길은 이미 두터운 시간 속에 묻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고, 샛길조차 제가 걷어차 어그러진 지 오래였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탓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판단과 기억 따위가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여기저기 후회가 얼룩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돌아간다 한들 같은 선택을 반복할 테지. 

태양은 제게 언제나 버거운 존재였다. 조각이 난 지금도. 이미 색을 잃어버리고 파랗게 변해 버린 추억과 아직은 제 색을 유지하는 기억을 되짚었다. 사랑을 닮은 감정들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 숨통이 막혔다. 문득, 에메트셀크는 제가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고 생각했다. 

빛의 전사는 에메트셀크와의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몸을 추스르고, 이런저런 일을 해결하러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이럴 때에는 차라리 여유시간이 나지 않는 쪽이 좋았다. 잡념을 밀어내는 데에 바쁜 것보다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그러나 한구석에 도사린 생각은 도무지 사라질 생각을 않았고, 자주 허상의 상처가 아팠다. 되살아나지 말지 그랬어. 이상한 문장을 떠올린 그는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성립하지 않아 마땅할 문장이 왜 제게는 실재하는지. 

에메트셀크가 살아 있는 한, 어중간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끝이 어떤 꼴이든 상관없었다. 곪아 버린 상처가 자연히 났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덧나버린 상처를 찢고, 그 안에 고인 고름을 빼내야지. 상흔의 회복은 그 이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이전과 같이 피해 버리지는 않으리라. 설령 그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 제 마음을 까뒤집어야 할지라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들은 결국 제게 돌아온다. 에메트셀크의 이야기와, 그가 남긴 기억의 조각들을 냉정하게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 따위들이. 결국엔 하나의 결과로 흐르는 길이었다. 미련과 애틋함, 낯선 향수와 뜻 모를 서러움을 빠짐없이 합하면 사랑을 닮고 만다. 에메트셀크와 연애, 혹은 그 비슷한 걸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연애라니, 그와 저 사이에 그 보다 어울리지 않는 말을 찾기도 어려웠다. 

매끄러운 주황색 크리스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무기질 덩어리에 남은 흔적을 곱씹기라도 할 듯이. 에메트셀크는 그날 이후부터는 주위에 기척조차 나타나질 않았다. 처음 거칠게 그를 물렸을 때에도 그는 뻔뻔하게 근처에 있는 티를 냈건만. 빛의 전사는 그가 심해의 도시에 있음을 직감했다. 발붙일 곳 없는 이가 향할 장소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심해에 자리한 도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창 너머 비치는 창백한 빛, 이질적이고 아름다우며 헛된 건축물들. 홀로 이곳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되짚어 보자면 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서러움이 몰려오는 이유를 이제는 알았다. 빛의 전사는 굳이 에메트셀크를 찾지 않으며 외로운 도시를 둘러보았다. 

심해 속에 모습을 감추고 시간을 감내하던 이, 에메트셀크는 도시 안에 들어선 선명한 에테르를 빠르게 깨달았다. 찬연한 햇빛조차 닿지 않는 무광층, 이질적인 뚜렷함을 놓칠 만큼 에메트셀크는 닳아 버릴 수도 없었다. 얼기설기 기워진, 이제는 감히 완벽을 말할 수 없는 영혼을 지니고서도. 

환영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빛의 전사가 그러했듯, 그가 제 존재를 확신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저 심해 속에 자리 잡은 도시를 관광하려는 실없는 목표가 아니었다.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면 모습을 드러내 보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더 이상의 회피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정처 없는 발걸음이 도시의 절반쯤을 거닐었을 때,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영웅의 앞에 섰다.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그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했다. 가면을 뒤집어쓰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였으나, 지금은 이를 벗어 던져야 했다.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일을. 

“뭐가 그렇게나… 나를 견딜 수 없게 했을까. 이 도시를 보며 느끼는, 남의 것 같은 감정이 결국 내 것이라는 사실이? 그게 아니라면 날것의 감정이 결국 사랑의 모양새를 닮아간다는 거?”

“……”

“물론 그것들도 나를 꽤 괴롭게 했지만, 그런 건 결국 나 혼자만의 문제야. 내가 견뎌내야 할 것, 필요한 경우엔 잘라내 버려야 할 것들이지. 하지만 에메트셀크, 너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 내 뒤를 봤잖아. 조각난 영혼이 아니라 완전한 원형을.”

“……너는.”

“왜… 네가 그런 표정을 해.” 

먼저 가장을 집어던진 건 늘 그러했듯, 빛의 전사였다. 에메트셀크는 제 앞에 선 이의 이름을 신음처럼 내뱉었다. 제 입술 사이로 내뱉은 이름은 낯설었다. 동시에, 그는 제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음을 깨달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니, 읽어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빛을 집어삼키는 절망이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죽기 전에도, 심지어는 죽음 이후에도 저는 찬란한 영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빛의 전사가 하는 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벼랑 끝에 선 심정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텐데. 에메트셀크는 차마 웃음 짓지도 못했다.

“내게 아젬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친구였다. 그의 영혼은 내게 이정표였고, 차가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한 기억이었다.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어. 나의 태양은 오래전에 저물었고, 이곳에 떠오른 찬란한 의지를, 뒤바뀐 세상의 새로운 태양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부서지고 조각난 파편일 뿐이라고.”

“…….”

“분명, 네게서 그의 그림자를 찾은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네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뿐이다.” 

생각을 말로 풀어내는 동안, 에메트셀크는 도망치려 움직이는 의지를 끊임없이 억눌러야 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생각이 형태를 지니며 온몸에 휘감겼다. 심해 속에서 마주한 태양은 여느 때보다 더욱 버거웠다. 그 열기도, 눈 부신 빛도. 빛의 전사는 긴 시간 입을 다물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맑은 눈에 비친 제가 그 속에 박제된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몸이 여기저기 뻐근했다. 

에메트셀크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알았다. 제 예상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으나, 그 사실이 가지는 힘은 크지 않았다. 그가 똑바로 저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애초에 잘라낼 생각이었던 마음이었다. 에메트셀크가 되살아나지 않았다면 되짚어 불확실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 들지도 않았으리라. 

그가 살아있는 지금은 다른가. 빛의 전사는 고개를 돌려 심해의 도시를 훑었다. 저 혼자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에메트셀크의 반응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탓이었다. 확인하려 했던 것은 모두 답을 얻었다. 이후에 에메트셀크가 무엇을 하는지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태도나, 여러 상황이 그가 더는 재해를 일으키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지. 

“……그거면 됐어. 잘 지내.” 

인사는 짧고 간결했다. 에메트셀크는 멀어지는 일광을 마주하기 어려워,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으나, 똑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심해는 여전히 어둡고 차가웠으며, 외로웠다. 제가 그려 낸 환상에는 온기가 머물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또다시 자신을 돌아보았다. 

제가 태양이 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저 찬란한 해에 가장 가까운 하늘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색이 바라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나, 제게 남은 파랑은 지나치게 어두운 빛깔이었다. 저 높이 뜬 하늘의 빛과는 다른, 차갑고 무거운 심해의 색. 잃어버린 색은 돌아올 수도 없었고, 찾을 방법도 없었다. 오랫동안 태양을 좇은 자의 말로였다. 

태양을 새긴 크리스탈은 여전히 빛의 전사의 손안에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 한 번쯤은 그가 다시 저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지금과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 심해를 머금은 남자는 미약한 희망의 끝 줄기를 부여잡은 채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다시 한번 부상할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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