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히카] 경해
2021.10.18 작성
※ 커미션
< 경해 >
은빛 검신에 날카로운 손톱이 부딪쳤다. 쩌엉, 묵직한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손목에 충격이 전해졌다. 건블레이드를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터져 나왔다. 짧은 기합과 적절한 반동이 뒤섞여 빛을 반사하는 검이 하얀 궤적을 그렸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커다란 괴수는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고, 살이 갈라지는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달려들었다. 예상보다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비는 이를 악물고 괴수를 응시했다. 일반적인 괴수보다 맷집이 지나치게 좋다. 숨통을 끊어놓기 전까진 계속 달려들 것처럼.
조금 전의 비명을 들은 또 다른 괴수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빨리 결판을 짓고 이곳을 떠야 했다. 어차피 소리로 이곳이 발각되었다면 제 쪽에서도 가릴 것이 없었다. 여명의 노을을 닮은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한 호흡, 바닥을 박차고 뛰어든 그녀가 괴수의 양팔 안으로 몸을 던졌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거칠게 휘둘렀다가, 그 힘을 그대로 붙잡은 채 목을 횡으로 가른다. 그 순간, 머리를 겨냥해 격발하면 반쯤 갈라진 목이 충격 탓에 거칠게 뒤로 꺾였다. 갈라진 살 틈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내내 빠르게 구르던 괴수의 눈알이 뒤집어졌다.
키만큼이나 긴 팔이 꿈틀거렸으나 최후의 발악은 이비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괴수를 밟고 선 채, 건블레이드를 휘두르면 맺혀 있던 피가 떨어져 나갔다. 사체에서 쓸 만한 걸 챙겨야 하건만.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괴수 여럿이 나타났다. 지금 저 수를 다 상대할 순 없다. 팔자 좋게 전리품을 챙길 여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욕지거리를 삼킨 이비는 괴수가 없는 방향으로 몸을 굴려 도망쳤다.
유난히 운이 없는 날이다. 아니, 세상이 망해 버린 뒤로 운이 따라준 적이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오랫동안 달린 다리는 이미 제 것 같지 않았다. 피가 엉겨 붙은 살갗이며 옷이 찝찝했다. 숲속을 내달리는 탓에 마른 가지가 몸 여기저기 부딪혔으나 일일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싹 바른 낙엽이 버스럭거리며 부서졌다. 밭은 숨을 삼키는 순간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얼마나 뛰었을까, 뒤를 쫓는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확신이 서고서도 한참을 더 이동한 후에야 멈춰 선 이비는 굵직한 나무 등치에 기대 서 숨을 골랐다. 하필 그 순간에 다른 놈이 나타날 게 뭐란 말인가. 숨을 죽이고 주변을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그대로 죽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자락에 풀물이 들 테지만 이미 너절해진 옷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추위로 곱은 손을 녹여 가며, 이비는 체액 따위가 묻은 건블레이드를 손질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리라. 세상의 멸망과 함께 인공적인 빛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깊은 숲속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난 수목 덕에 달빛마저 가려, 밤이면 칠흑 속에 잠기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기를 손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탐색은 가능하지만, 무기 없이 싸우는 건 버거운 일이었으므로. 검신이 붉은 노을을 반사하며 날카롭게 빛날 즈음에야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산중의 태양은 짧다. 내려가는 것보단 차라리 근처에 몸을 숨길만 한 동굴 따위를 찾는 게 안전했다. 무언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도록 건블레이드를 양손에 꼬나쥔 채 이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하룻밤 머무를 은신처보다 먼저 발견한 건, 하필 맨바닥에 쓰러진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이는 여기저기 부상을 입어 얼핏 보기에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의 가슴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뒤돌아 그에게서 멀어지던 이비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면 신경이 쓰이지도 않을 텐데. 이대로 두고 가면 이 사람은 곧 죽을 것이다. 부상으로 죽거나, 얼어 죽거나. 타인을 쉬이 믿지 못하게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죽어가는 걸 구해 줬더니 외려 제가 가진 것을 탐내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런 이들에게 대처하는 건 이미 지긋지긋했다. 뒤돌아선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세상이 이런 꼴이 된 후로 죽어 나가는 이들이야 어디에나 있다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의식을 잃은 사람은 멀쩡한 이보다 몇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남자의 키가 꽤 큰 탓에 적당히 둘러업었음에도 바닥에 발이 끌렸다. 그것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지. 무엇보다 아직 적당한 동굴 따위를 찾지 못했다. 이비는 다시금 남자를 적당히 내려놓고, 가방 속에 있던 방한용 담요로 그의 몸을 대충 감쌌다. 이 정도면 은신처를 찾는 사이에 얼어 죽진 않으리라. 파리한 안색을 한 번 살핀 그녀는 몸을 돌렸다.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나무뿌리를 기둥 삼아 만들어진 굴은 혼자 숨기에 적당했지만, 두 사람이 머무르기엔 작았다. 어떤 땅굴은 작은 짐승이 만든 듯, 애초에 저 혼자서도 들어갈 수 없는 크기였다. 큼지막한 동굴은 앞이 너무 훤히 뚫려 있어 은신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장소를 제외하고, 마침내 찾은 곳은 거대한 바위틈 사이 벌어진 공간이었다. 입구는 좁고, 눈에 잘 띄지 않으며 그에 반해 내부는 넓었다. 게다가 동굴 안에는 작은 개울까지 자리했다. 이 정도면 며칠 이상을 지내도 괜찮은 곳이었다.
이비는 더 망설이지 않고 남자를 두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 다시 그를 들쳐 매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그는 거의 시체처럼 보였다. 미약한 호흡 소리와, 닿은 신체 너머 전해지는 미세한 박동이 그의 생을 증명했으므로 이비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떠나지 않았다. 전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은신처에 도착한 그녀는 우선 자리를 깔고 남자를 눕혔다. 여전히 담요는 그의 몸에 감겨 있었으므로 불을 피우는 것이 급하진 않았다.
뒤늦게 피가 말라붙은 살갗이 찝찝했다. 동굴 속의 개울은 느리지만 흐르고 있었다. 수원이 바깥에 있는지,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대로 씻었다간 저마저 환자 꼴이 될지도 모른다. 바깥은 숲이었으므로 땔감이야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덜 마른 장작은 연기를 피울 테지만, 동굴의 구조상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으니 질식해 죽을 일은 없었다. 건블레이드는 괴물을 죽이는 데에도, 나무의 가지 따위를 베어내는 데에도 유용한 도구였다.
차가운 물을 데워 피범벅이 된 몸과 머리칼을 씻어낸 후에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여분의 옷을 입고, 물가에서 옷을 빨면 물에 붉은 자국이 퍼졌다가 금세 쓸려 내려갔다. 피를 따듯한 물에 씻을 수도 없고. 이비는 한탄하듯 투덜거렸다. 손이 어는 차가운 물에 담근 채 옷을 문지르고, 주무른 끝에 멀끔해진 옷을 쥐어짜 불가에 널고서야 이비는 남자를 다시금 보았다.
대충 말아놓았던 담요를 치우고 본 남자의 복식은 이질적이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에 젖어 볼품없는 꼴이 되었어도 꽤나 화려한 옷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 중에 하나였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괴물에게 먼저 붙잡혀 죽고 말았으므로. 어쨌든 그녀는 남자의 옷을 하나씩 벗겨냈다. 살갗은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다. 여기저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파랗고 빨간 멍이며, 긁히거나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 치명적인 상처는 거의 없었으나, 경상이라도 수가 이 정도라면 위험했다.
“내버려 뒀으면 정말 죽었겠는데…….”
개중에 크게 베인 상처를 깨끗한 천에 물을 묻혀 닦아내고, 가방 한구석에 굴러다니던 붕대를 감고 나면 더 치료할만한 상처는 없었다. 나머지는 적절한 휴식과 그의 의지가 해결해 줄 것이다. 남자의 옷도 마저 빨아 제 옷 옆에 널어둔 뒤에 이비는 양 무릎을 감싸고 앉아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깨어날 때까지만 이곳에 머무르면 되겠지. 일단 의식이 돌아오면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부상이었다. 성의 없는 손길이 마른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짐 가방을 베개 삼아 몸을 누이고 잠들었던 이비는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눈을 떴다. 등을 맡길 동료가 없고, 생존자가 이룬 마을에도 적을 두지 않은 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이비는 꺼져가는 불 속에 장작을 더 넣고, 기지개를 켰다.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시계가 그사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지나야 시야가 확보될 터였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 속은 마냥 적막했고, 자연스레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적어도 곧 죽을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온기 덕에 혈색이 돌아온 이는 그저 잠든 사람 같았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면 내일쯤에는 눈을 뜨리라. 근방에는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구역이 없었다. 그는 어디에서 왔고,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벽지에 만신창이로 쓰러져 있었을까. 옅은 주황빛 눈은 다시금 동굴의 입구 쪽을 향했다.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굳이 말을 붙여 엮일 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좁은 바위틈 사이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비쳤다. 이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짐을 내버려 둔 채, 이비는 무기 하나만을 가지고 동굴 밖으로 떠났다. 이비가 내내 앉아있던 자리의 온기가 다 식기도 전에 기절해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다, 일순간 선명해진 금빛 홍채가 주위를 훑었다. 불을 피운 탓에 훈훈한 공기가 맴도는 넓은 동굴에는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구석에 자리한 가방이며, 제 몸 여기저기에 감긴 붕대 따위가. 그는 제게 덮인 담요를 가만 쓸어 보았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은 짐을 그대로 둔 채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떠나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였다. 떠나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사람을 구해줬다고 한들,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시기였으므로. 그러나 남자는 주위를 살핀 끝에, 이대로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겠노라 마음먹었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죽이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이런 세상에도 타인을 구하는 이들이란 대체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으므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현존하는 시계 대다수가 멈춰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 태양전지를 쓰는 종류였으나, 그에게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사이 남자는 담요를 둘둘 감싼 채 주위를 살폈다. 흐르는 개울도, 대충 널린 옷도. 불길이 꺼지기 전에 한구석에 쌓여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넣을 때쯤,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점점 다가오는 기척은 사람의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가 곧 한 손엔 짐승의 사체를, 한 손엔 땔감을 든 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묶어둔 땔감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리 작지 않은 짐승을 들고 물가로 향했다. 큼지막한 건블레이드로 태연스레 멱을 따 피가 빠지도록 방치해둔 뒤에야 이비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정이 있는 타입을 생각했건만. 남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깨어 있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은 이였다.
“이름.”
“…….”
“네 이름.”
“하데스. …너는?”
“이비. 생각보다 빨리 깬 것 같은데, 하루 정도는 더 쉬는 게 좋아.”
“네가 나를 구했나?”
“그래.”
대화가 뚝 끊겨 버렸다. 침묵이 어색할 법도 한데, 이비는 아랑곳 않고 그사이 대충 피가 빠진 짐승을 익숙하게 손질했다. 벗겨낸 가죽이며 뼈와 힘줄은 대개 생존자 무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바꿀 때 쓰고, 고기는 식량으로. 쓸 만한 것들을 분리해내는 손길은 빨랐다. 마지막으로 피 묻은 손을 씻어낸 이비는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불가로 다가와 손을 녹였다. 그의 이름을 물어본 건 어떤 충동에 가까웠다. 하루쯤 보고 말 사이에 이름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건만.
동굴 안을 감도는 피비린내는 오래지 않아 사라질 테다. 하데스는 조금 덜 말라 꿉꿉한 제 옷을 다시금 걸쳐 입었다. 조금 너절한 구석이 있지만, 이 정도면 큰 문제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제 옷차림이며 발견된 장소가 분명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외려 제게 궁금한 게 없느냐고 떠보고 싶을 정도였다.
“상태가 괜찮아지면 떠나, 하데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눈을 깜박이는 법을 잊은 듯, 눈이 시린 감각이 느껴질 즈음에야 하데스는 찰나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낯선 이와 쉬이 동행하려 들지 않을 터였다. 이 정도로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무엇이 제 결정을 미루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렇다 할 확답을 내리지 않았고, 이비도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아무런 대화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틀 후 해가 떠오른 아침, 그녀는 꺼내 놓았던 물건들을 챙겼다. 첫날 손질해 두었던 고기는 잘 말랐고,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칠 것 같던 하늘은 맑게 개었다. 떠나기에 좋은 때였다. 딱히 두고 갈 만한 물건이 있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기 상태를 점검하고, 가방을 둘러매는 동시에 이비는 제가 가야 할 방향을 확정 지었다.
“이비, 동행해도 되겠나.”
“왜 따라오려고 해.”
“글쎄…. 너와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따라오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나는 발붙인 곳 없이 계속 떠돌아다녀.”
“상관없어.”
“짐이 되면 두고 갈 거야.”
하데스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그건 꼭 어디 해 볼 테면 해 봐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다면 굳이 떼어내고 갈 필요는 없을 터였다. 예상보다 더 빨리 회복했으니, 부상으로 제 발목을 붙잡히는 일도 생기지 않겠지. 헛되게 이름을 알린 꼴은 아니게 되었다. 이비는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하데스는 의문을 표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아는 것은 서로의 이름뿐인 동맹의 첫걸음이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보낸 지가 이미 두 달을 훌쩍 넘어섰다. 혹한기의 끝자락이 찾아들었다. 겨우내 말라 죽은 것처럼 보였던 가지엔 새 눈이 트고, 어떤 나무는 이른 꽃을 피워내는 시기였다. 더는 곱은 손가락을 녹이려 애를 쓸 필요가 없는 때. 바람에는 아직 찬기가 남아 뺨이며 코끝을 빨갛게 물들였으나,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 되고 만다. 낯선 평화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허덕이며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시시때때로 이름도 없는 괴수가 나타나 수십 명을 단번에 쓸어버리기도 하건만.
큼지막한 돌 더미 위에 앉아 따스한 볕을 즐기고 있자면, 이내 저 멀리서 하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언젠가 제가 그러했듯, 숨통이 끊어진 짐승을 한 손에 든 채. 그는 줄곧 이상했다. 긴 옷자락 따위는 거슬리지도 않는 것처럼 산속을 누비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겨서는 잘 지치지도 않았다. 처음 동행을 제안한 날, 자신만만한 웃음을 증명하듯. 무엇보다 하데스는 이렇다 할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털레털레 사라졌다가 전리품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이제 와 익숙해진 일이었다. 여전히 손질하는 데에는 익숙해지지 못한 탓에, 뒤처리는 늘 제 몫이었으나 직접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잠시간 공기 중에 피비린내가 머무를 때, 문득 이비는 생존자들이 꾸린 마을에 내려갈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물품은 혼자서도 충당할 수 있지만, 어떤 건 직접 만드는 것보다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게 더 나음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이 깨달은 탓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조금 더 일찍, 겨울의 냉기가 가시기 전에 인가를 들렸겠지만 동행이 생기며 시기가 늦어졌다. 조금은 의지할 데가 생기니 그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신뢰와 의지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토록 불안한 동맹이었으나 관계의 근간을 뜯어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래 불안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에. 이비는 상념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내고, 고개를 돌려 멀뚱히 선 이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인가로 갈 거야.”
“아, 이 근처의.”
“거길 알아?”
“그럭저럭.”
별일이네. 하데스가 주변 지리에 알은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제가 먼저 말한 적이 드물긴 했다. 하지만 매번 어디로 간다고 말해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딱히 궁금해한 적도 없었는데. 그의 출신지거나, 어쩌면 잠깐이나마 거주했던 곳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건 하데스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목적지까지는 쉬엄쉬엄 가더라도 하루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이미 생각보다 지체된 계획이었으므로, 그들은 여유를 부리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아직 채 다 녹지 않은 눈밭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해가 하늘의 중앙을 조금 넘어간 시간, 시야 안에 인가가 비쳤다. 작은 마을과 다름없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적막하다고. 이비는 망설임 없이 내딛던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나란히 걷던 그도 멈춰 섰다. 제게 향하는 시선을 알았지만 하데스의 호기심을 풀어줄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들렸을 때, 이곳은 세를 불리고 있는 중이었다. 유난히 습격 횟수가 적던 이곳에는 자연스레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우연히, 또 다른 이는 알음알음 퍼지던 소문들 듣고. 시끌벅적하진 않더라도 적막함이 내려앉을 만한 곳이 아니었건만.
그럴만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내부에 파벌이 생겨 서로 반목했거나, 괴물이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거나. 이비는 거의 달리다시피 인가로 다가갔다. 점점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징후들은 단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분명 이곳에 대대적인 습격이 있었다. 마을 초입부터 음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엉성하게 지은 판잣집이며 괴수가 등장하기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 온통 부서져 파편이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통행을 방해하는 파편조차 치울 여력이 남지 않은 걸까.
“근처에 있을 테니 다녀오는 게 어때.”
“……”
곧은 시선 속에 담긴 기이한 열망은 분노를 닮았던가. 그녀는 하데스를 잠시간 바라보았다가,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 풍경에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드물게 알은체를 했던 이가. 이렇게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지? 의문이 머릿속을 메우려 들 때쯤, 매번 거래했던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지친 기색이 가득한 이가 뒤돌아섰다.
“이비?”
“이네스, 안 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내쉬는 한숨에는 무력감이 진득하게 베여 있었다. 이비는 자연스레 이끌려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마주 앉고 나서야, 이네스의 입이 열렸다.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남자가 실은 모습을 꾸며낸 괴물이었고, 그게 이곳을 초토화했다는 내용이었다. 목숨을 끊기 직전에 괴물이 도망쳐 버렸다고. 기존에 살던 이들 다수는 죽었거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데에 극도로 두려움을 느껴 거부하는 통에 이곳을 복구할만한 여력이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네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들은 이렇다 할 이름을 얻지 못했다. 괴물, 혹은 괴수라 칭해지는 놈들이 제각각의 모양새를 하고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탓이었다.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 어떤 놈도 사람의 모습을 꾸며내지는 못했다. 단 하나의 진리. 신뢰의 밑바닥에 자리한 명제가 무너진 사람들이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이네스가 말한 남자의 인상이 하데스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진갈색 머리칼, 앞머리 한쪽 부근만 희었으며 금빛 눈동자를 지닌 이. 키는 평균을 웃돌고, 옷차림이 보기 드물게 화려했다. 얼핏 듣기에도 하데스가 떠오르는 묘사였다.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거의 죽어가는 꼴이었던 것마저. 이네스는 결국 눈물을 보였으나 달래 줄 여유가 없었다. 하데스를 만나야 했다.
질문을 할 기회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흘려보낸 기회만큼이나 많은 의문을 삼켰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는 두 달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간 단 한 번도 하데스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괴수는 언제나 제가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매번 큰 위협조차 되지 않는 약한 놈들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저 멀리, 하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폐허 속을 여유롭게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옷자락이 흔들리고, 부드러운 훈풍이 머리칼을 스쳤다. 이비는 날듯이 달려가 그에게 제 무기를 겨누었다. 그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삐뚜름한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 마주한 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아연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오는 저를 막지도 않고, 심지어 여기에 알은체했던 걸까.
“네가 여길 공격했어?”
“…….”
“대답해.”
“그래, 이비. 나였다. 사람의 모습을 꾸며낼 수 있는 괴물.”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비는 그에게 들이민 건블레이드의 끝이 불안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는 것은 이름뿐이었음에도, 그 사이 저도 모르게 하데스를 믿었던 모양이었다. 제 꼴이 꽤나 우스웠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의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과, 믿을 수 없는 체력 따위는 애초부터 사람의 범주를 넘어 있던 거였다. 처음부터 의문점을 물었다면 이제 와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은 사람이었고, 하데스는 사람이 아닌 탓이었다.
“왜 내 옆에서 사람인 척을 했어?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하데스의 꾹 다문 입술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발아래서부터, 칠흑을 닮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하데스는 웬 무기를 든 채 팔을 죽 뻗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무기는 석장을 닮아 있었다. 그가 취한 자세는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하데스! 이비는 제가 그와 대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어 불렀다.
날카로운 끝이 가슴을 파고든다. 옷을 찢고, 살갗을 사정없이 벌리며. 피가 옷을 적시는가 싶더니, 그의 발아래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검은 기운이 상처 틈 사이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귓가에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가는 봉을 감아쥔 손에서는 힘이 빠질 줄을 모르고, 끝 모르고 쏟아지는 검은 기운이 하데스의 신체를 휘감았다.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외려 지켜보는 이비의 얼굴이 더 희게 질려 있을 정도로. 마침내 그의 등 뒤로 빠져나온 무기 끝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엉망이었다.
연기처럼 퍼지는 기운은 곧 하데스의 모습을 모두 덮어 버렸다. 폐허 위에 빛을 모조리 흡수하듯 나타난 암흑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검은 덩어리로부터 큼지막한 형체가 양옆으로 죽 뻗어 나왔다. 날개인지, 팔인지 확신할 수 없는 신체 부위가 웅크렸다가, 다시 한번 기세를 펼치면 검은 기운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선명한 일광 아래 드러난 하데스의 모습은 조금도 사람과 닮지 않았다. 그의 본모습일 터였다.
이제껏 만난 괴물과는 급이 달랐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아직 움직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끝이 차갑게 식고, 호흡이 흐트러진다. 두려움을 채 다 이겨내지 못한 다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비는 발을 꾸욱 눌러 자세를 잡았다. 제 본모습을 모조리 드러낸 하데스는 느리고 차분하게 제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볕이 가려 그림자가 졌다.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었지.”
귓가에 속삭이듯 전해지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가? 도대체 어디에 시선을 맞춰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담보로 한 동행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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