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알케] 제목도 까먹은 뭐시기의 백업

2019년에 썼던 가벼운 종전 후 if. 공작가가 백작가였던 시절 쓰여진 물건입니다. 나는 진짜로 하얀별 잡으면 끝날줄 알았어...

- by Lio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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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연금술종탑 때려부수던 시절에 썼던걸로... 추정됩니다. 백작가가 공작가 될줄도 몰랐던 시절에 가볍게 쓴 글이기에.. 걍 가볍게 읽어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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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트 헤니투스 백작은 바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제국은 아직 혼란스러웠고 왕국 역시 왕좌의 계승을 준비 중이다. 아직 어리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동안 제 아들이 쌓아 올린 업적을 보면 영주의 자리는 케일에게 어울리다 못해 부족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케일이 주군으로 섬기는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제 아들이 작위 하나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백작은 서둘러 작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케일은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게 할 것이다. 자신이라고 완전히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부인과 차남인 바센, 막내 릴리도 물심양면으로 케일을 뒷받침 해줄 것이다. 백작은 부인과 밤새워 논의한 끝에 가족들과 집안의 사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하여, 나는 이 헤니투스의 영지와 작위를 장남 케일 헤니투스에게 물려주기로 하였다."

간결한 선언이 끝나자 사용인들 사이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의문을 품는 얼굴은 없었다. 백작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케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케일 헤니투스의 얼굴은 백작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당황하거나, 얼떨떨해 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케일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하얗게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왜 접니까?"

"네가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이냐."

"바센은 두었다 뭐 하실 겁니까? 영지의 일은 바센이 성실히 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바센은 너를 돕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걸음 뒤에 서 있는 바센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거면 바센을 시키세요. 저는 모릅니다. 안 합니다. 못합니다."

케일은 3번이나 부정했다. 그 발언에 백작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바센이 한걸음 나서서 거들었기에 참았다.

"바쁜 형님을 대신하여 영지 일은 열심히 배워뒀습니다. 형님은 그저 영주가 되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맙소사, 사색이 된 케일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케일의 마음을 대신하듯 머리 위에서 용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 바람이 살랑였다. 그 순간 케일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

왕세자! 케일은 손을 뻗어 용을 낚아채고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어둠의 숲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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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크로스만은 바빴다. 계승식을 코앞에 두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차가 식는 줄도 모르게 서류를 넘겨대는 와중에 수정구가 울렸다. 나중에 받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통신을 끊었지만 수정구는 잠시 틈을 두고는 다시 울려댔다. 알베르는 고개를 들었다. 이 수정구는 케일 헤니투스다. 또 무슨 돌아버릴 일을 물고 왔는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쯤 되면 심각한 일이리라. 수정구를 연결하자 대문짝만한 케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했고 시선은 처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수정구가 정상적으로 연결된 걸 확인하자 케일 다급하게 외쳤다.

-  백수 시켜주신다면서요...!

"지금 한참 즐거운 백수 생활을 만끽하는 중 아닌가?"

-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랬죠.

"뭐가 문제야?"

- 제가 백작이 되게 생겼습니다.

짝짝짝. 느릿한 박수가 울렸다.

"축하하네. 미래의 헤니투스 백작"

- 저하!!

케일이 절규하듯 언성을 높였다. 아이고 귀 아파. 알베르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 백수 시켜주신다면서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 좀 말려주십시오.

"정당한 작위 계승을 막는 건 왕세자의 권한이 아닌 것 같은데."

케일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 이건 약속과 다릅니다. 저는 작위 따위 받기 싫다고 했잖습니까. 뭐라도 좋으니 핑곗거리 좀 만들어주십시오. 아, 백작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파견이라도 보내주십시오. 아주 오랫동안 말입니다. 10년, 아니 30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질렸다는 얼굴로 케일을 바라보던 알베르는 곧 좋은 생각이 난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적절한 핑계를 만들어보지. 조만간 헤니투스 백작 앞으로 소식을 보내겠네. 그러니 그만 귀찮게 하고, 조만간 보자고."

왕세자는 더 듣기 싫다는 듯이 통신을 뚝 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보인 웃는 얼굴이 어딘가 몹시 찝찝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다시 통신을 걸어 왜 그렇게 웃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킬 줄 아는 남자였다. 믿어야지. 형님. 믿습니다.

왕가에서 초대장이 날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초대장에 적혀있는 초대 상대는 '헤니투스 일가. 케일이나 백작이 아니라 가족을 초대한 것이다. 5명이 움직이려면 힘들 테니 왕성의 텔레포트까지 허가하는 아주 극진한 대접이었다. 케일은 대체 자신을 어디로 날려 보내려고 온 가족을 모아서 발표하려는 것인지 찝찝했지만 일단 국왕의 부름이니 달려가야 했다.

왕국으로 초대받은 헤니투스 일가는 텔레포트진 앞까지 마중나온 왕세자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만찬장으로 안내되었다. 오늘따라 눈부시게 차려입은 왕세자를 보며 케일은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인간아! 왕세자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할 테니 표정 관리 잘하란다!

젠장. 케일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합의되지 않은 작전이 무서웠다. 케일의 울적한 마음과 다르게 만찬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알베르 크로스만과 케일 헤니투스가 합심한 것처럼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고 거기에 백작이 한마디씩 보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 그런 케일 공자에게, 어찌하여 내가 작위 하나, 훈장 하나도 내리지 않는 것인지 백작은 아주 몹시 궁금할 것이라 생각하네."

자연스럽게 흐름을 탄 이야기는 케일의 작위 문제로 흘러갔다. 올 것이 왔구나. 케일과 백작은 교차하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아들이 극구 거절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훈장이야 그렇다 쳐도, 작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왕국을 넘어 서대륙의 영웅이 된 케일 헤니투스에게 어찌하여 작위 하나 내리지 않았는지."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는 것이다. 헤니투스 백작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공작!! 공작인가! 그래. 공작의 작위를 받을 만큼의 업적이 쌓이길 기다리는 거였구나. 뿌듯하고 벅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는 백작의 면전으로 파격적인 이야기가 쏘아져 나왔다.

"내가 케일 공자를 아끼는 마음이 몹시 지극하여, 내 곁에 두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겠더군. 그래서 나는, 케일 공자에게 크로스만의 성을 주기로 하였네."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알베르는 백작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백작은 애써 벌어지려는 턱을 다물며 옆자리의 케일을 살폈다. 아들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제 무릎을 바라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혼인인가. 케일을 왕가의 사람과 혼인시키려는 것인가. 데르트 헤니투스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자리가 아무리 높은 자리일지리라도 아들은 권력을 탐하는 자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누구일지도 모를 왕족과 정략결혼을 시킬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침음을 삼킨 백작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하."

백작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케일이 억울한 목소리가 백작을 가로막으며 왕세자를 불렀다.

"저하..."

"그래, 내가 미안하네. 공식적인 프러포즈는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 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작위를 계승한다는 소식이 들리지 뭔가. 자네가 그곳의 영주가 되어서 내 곁에 오지 못하게 되면 곤란하여 이리 서둘렀다네."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프러포즈라 하였는가? 알베르 크로스만의 처가 된다는 것인가? 백작은 이번에야말로 머리가 띵해졌다. 상대가 아무리 왕가라고 해도... 금쪽같이 키운 내 아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케일 공자와는 이미 끝낸 이야기지만, 나는 왕위에 오른 후, 케일 공자를 왕비로 세울 생각이네."

백작은 참았지만, 케일은 참지 못했다.

"형!!"

케일의 불경함에 백작이 당황했지만 알베르는 순식간에 퍽 연인다운 은근한 눈빛으로 케일을 바라보았다.

"이런, 케일. 그 호칭은 단둘이서만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은밀한 친근함을 어필하는 왕세자 때문에 케일은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열받아서 씨근대는 케일을 뒤로하고 알베르는 한껏 애틋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일 공자가 꽤 수줍음이 많더군. 나도 각별한 사이가 되고 나서야 알았네만..."

그리 말하며 여유 있게 와인을 머금는 모습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내 공자를 아주 귀히 여기며 살겠다 약속하였네. 백작도 허락해 주겠지?"

정신이 빠질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며 만찬의 자리를 마무리했다. 헤니투스 일가는 왕가의 귀빈을 위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케일도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 은근한 손길이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그렇게 속삭이는 알베르를 떫은 얼굴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케일은 자신과 똑같이 떫은 얼굴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끌려가다시피 왕세자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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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케일은 후다닥 알베르에게서 멀어졌다.

"저하, 이제 무슨 짓입니까..."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소파에 쓰러지듯 드러눕는 케일을 본 알베르가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영웅의 작위 계승을 고작 왕세자가 무슨 수로 막겠나? 자네가 영주가 되는것을 막을만한 핑계가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더군."

"머릿속으로 도토리를 굴려도 그것보다는 뾰족한 수가 나왔겠습니다."

"머릿속에서 무려 황금이 굴러가는 케일 공자가 뾰족한 수 좀 생각해 보지 그랬나."

불경죄를 지적하기엔 이제 입이 아팠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허, 참 하고 탄식을 뱉었다.

"그래서 저를 왕비 삼아서 어쩌려는 겁니까? 고대의 힘도 애는 못 낳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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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우리가 낳을 필요는 없지. 나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어."

케일은 이제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처박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백수 시켜준다며... 시켜준다며!! 배신당했어. 이 날다람쥐 같은 왕세자를 믿는 게 아니었어...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절규하는 케일을 재밌는 구경거리 마냥 지켜보던 알베르는 와인병을 따서 병째로 케일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케일은 단숨에 병을 비워버리고는 알베르를 쏘아보았다. 알베르는 입꼬리에 웃음을 올리며 케일의 눈앞에 두툼한 양피지를 한 장 내밀었다.

"동생. 내가 진짜 섭섭하게 하겠어?"

케일은 그제야 눈물을 훔치고 알베르가 내민 종이를 훑어봤다. 그 종이는 한 장의 계약서였다. 계약서의 내용은 이것저것 많았지만 중요한 것만 요약하면 이러했다.

알베르 크로스만과 케일 헤니투스는 부부의 연을 맺는다.

케일 헤니투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헤니투스 영지에서 요양한다.

요양 중에는 모든 외교활동과 사교활동 및 국가적 업무에서 자유롭다.

단, 국가 절기의 행사에서는 알베르 크로스만과 동행하며 국가의 운을 달리하는 중대한 상황에서는 협력한다.

케일의 눈이 양피지 끝까지 닿은 걸 확인한 알베르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백수 하게 해주지. 처음 한두 달은 들썩 하겠지만 그때 뿐일거다. 국가의, 아니 대륙의 영웅에게는 공주라도 내어주는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공주로는 부족하니 왕세자를 주는거지. 왕세자와 결혼한 영웅이 권력에 관심도 없고 심지어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이 아파 매일같이 요양이나 하고있으면 관심은 점차 사그라들거야."

물론 관심을 갖는 이가 있다면 알베르가 다 밟아놓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탐내거나 경계할 국가의 영웅이 국왕의 손에 쥐어지는것 만큼 든든한 것은 없으니 명분도 확실했다. 케일은 다시 한번 서류를 꼼꼼히 읽어보고는 감격에...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야무진 얼굴로 펜을 요구했다.

케일 헤니투스는 계약서 맨 밑에 간결한 문장을 하나 추가했고 만족스럽게 서명했다. 그 문장을 읽은 알베르는 기가 막혔지만 너 답다며 웃으며 서명했다.

"형, 제가 사랑하는거 아시죠?"

"동생, 내가 많이 아끼네."

해피엔딩이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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