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타이밍

가비지타임 샼쿨 상호준수

*상호왼 준수른

*소재 주의

 

고백에는 타이밍이 있다. 그 타이밍이 언제나면,

1. 자신의 마음을 신경쓸 여유가 있을 때.

2. 감성팔이 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 때.

3. 상대도 날 좋아할 때.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될 때. 그 때가 바로 고백의 타이밍이다.


*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아 씨바거, 니 늦게 냈잖아!" 

"에엥 전하, 생사람 잡지 마시옵소서." 

"아닌데! 태성햄 늦게 낸 거 제가 봤는데요!" 

"뭐임 개찌질함! 그냥 빨리 다녀오셈!" 

아니 이 새끼들이... 진짜 이자식 늦게 냈다니까?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으려 했다가, 김다은의 한 마디에 급히 입을 닫았다. 아니, 늦게 내긴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더 따지는 건 좀 가오 떨어져서, 공태성만 한 번 째려보고 목덜미를 긁었다. 에이씨, 다음번에는 꼭 저새끼 내보내야지. 

기상호는 김다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태성을 내보내자고 따졌다. 늦게 냈잖아요! 안 내면 진 거라면서, 늦게 낸 건 안 낸 건데, 왜 넘어갑니까! 듣다보니 맞는 말인데, 가만. 쟤는 왜 이렇게 열불을 내지? 꼴랑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오는 건데. 왜 저렇게 정색하며 따지고 드냐? 뭐, 나랑 나가는 게 싫다 이거냐?

"나 때문이냐? 왜 아직까지 쫑알거려. 안 가?" 

"엇,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빨리 신발 신고 나와. 뭘 다 끝난 거 가지고…" 

"쿨한 척 하지 마시옵소서!!" 

저 자식이? 공태성의 말에 절로 뜨끔해 눈살이 휘었다. 쟤는 날이 갈수록 깝치네. 괘씸한 공태성을 한 번 더 노려보고 현관 문고리를 꽉 쥐었다. 저새끼는 아맛나 사와야겠다. 한참을 공태성을 째려보며 신발 구겨신고 현관에 서있다가 - 햄, 안 가요? - 그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기상호 얼굴이, 

"아씨, 야, 떨어져!" 

코앞에 있었다. 기척없이 다가와 언제 신발까지 신고 옆에 내려와 있던 건지. 나는 기상호의 등을 팍팍 치며 문앞으로 밀어냈다. 

"아이 햄, 현관이 좁은데.ㅠㅠ" 

"나가, 빨리 나가." 

기상호를 꾹꾹 밀어 밖으로 먼저 내보냈다. 기상호가 한 발 앞으로 내딛자 기상호의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이새끼… 나보다 커진 것 같은데? 중학교 때 키 멈췄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잖아. 괜히 밖으로 옮기던 발을 치켜올려 나가는 기상호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 쳤다. 

"에, 왜요 햄!" 

기상호가 치인 엉덩이를 부여잡고 득달같이 반응했다. 예상을 어긋나지 않은 반응에, 절로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짜식, 승질은. 대놓고 씩 웃기는 뭐해서, 빨리 나가라며 재촉했다. 다 나왔는데요!-하고 외치는 그가 꽤나 억울해보였다. 결국 푸핫, 웃음이 터져나왔다. 

쾅-. 그때 동시에 문을 닫아, 웃음소리가 기상호에게까지 닿지는 않은 듯 했다. 

"가자." 

입술 대빨 튀어나온 그를 뒤로하고 앞장서 걸었다. 미처 터지지 못했던 웃음이 피식하고 마저 튀어나왔다. 뒤에서 기상호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같이 가자며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기상호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햄, 오늘 밤인데 날씨 별로 안 춥다, 그쵸." 

저를 향해 웃는 얼굴이 가로등빛에 비쳤다. 

그러게, 오늘은 좀 날이 좋네. 생각했지만 대답은 모음 한 자로 끝냈다. 어. 

 

 

이 밤중에 뭔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거야? 생각해보니 쌀쌀한 늦은 밤중에 아이스크림 사러 나가는 꼴이 우스웠다. 다들 빠져가지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가만히 걷고 있는 기상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에휴.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이내 입을 닫았다. 지금 불평해서 뭐하겠냐. 

거리를 걷다보니 낡은 야외 농구코트 하나가 나왔다. 바닥 페인트도 다 벗겨져 엉망이었다. 미끄럽기도 하겠지만, 저 골 사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릎이 남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기상호가 농구를 처 하셨었지? 멀리서 봐도 그 폼이며, 자세며 전부 기상호라서 쉽게 알아봤었다. 공을 퉁퉁 튀기는 모습이 꽤나 허세 들어보여 웃으면서도, 덩크넣는 모습에 꽤나 놀라면서도, 왜 여기서 이 지랄이지? 부상은 안중에도 없냐?-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버려서 혼을 냈던 기억이 났다. 기상호 이 자식도 지금 그때 생각하겠지? 눈을 형형히 뜨고 째려보니 그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 것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두 눈을 저 멀리 둔 후였다. 

"몸 아껴라. 이딴 데서 다시 한 번 더 농구하기만 해봐. 그땐 진짜 가만히 안 둔다." 

"에이, 제가 여서 우째 다시 농구를 한답니까. 다시 하면 제가 미친 놈이죠."

그러면서 슬긋 웃는 모습이 꽤나 능청스러웠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저만 보면 벌벌 떨던 그 헛바리가 어디 갔나, 싶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이차선 도로에 차 하나가 없었다. 우리 외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길가의 상가들은 죄다 불이 꺼져있거나 간판만 환했고, 간간히 보이는 편의점만이 속까지 환했다. 고요한 거리. 우리의 말소리 하나하나가 양옆의 빌라와 주택에까지 닿아 밤잠을 깨울까봐, 나와 기상호는 농구코트를 스쳐지나가면서 서서히 말수를 줄였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말 없이 걸었다. 조용한 거리에 우리의 발소리만 울렸다. 뒤따라오는 기상호의 발소리도 귀기울이며, 그렇게 잘 걷는데, 

 

쿠웅- 

 

뭐야? 

갑자기 사방이 진동하더니, 쿠웅, 쿵, 쾅... 큰 폭발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퍼엉- 눈앞에서 새하얗게 섬광이 번쩍였다. 땅이 울리고, 폭발하는 굉음이 들리고, 시야가 하얗게 질리고… 뜨거운 열기가 사방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 몇초만에. 나는 희게 질렸던 시야에 다시금 상이 맺힐 때까지 나는 몸이 굳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울리는 땅에 균형감각이 무뎌졌다. …뭐야? 정신을 겨우 차리고 고개를 휙휙 돌렸지만, 사방은 밤인 것을 까먹어버릴 만큼 불길로 밝았다. 그리고 쿵-쿠웅- 하고, 사태를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사방에서 폭발음이 계속해서 미친듯이 들려왔다. 폭발음 하나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또 폭발이, 그리고 또, 또… 사방이 굉음과 섬광으로 가득찼고, 내 시선은 갈길을 잃었다. 소리만 들으면 마치 불꽃놀이, 보이는 것만 보면 마치…

"씨발, 이게 뭔…" 

전쟁통 같았다. 

정면에서 쾅-하는 폭발음이 들려 바라보니 눈앞에서 화마가 일었다. 투둑, 폭발에 튕겨져나온 잔해가 발밑에 떨어지고, 고개를 들어보면 잔해들이 날아오고 있고... 

"햄!!" 

아차. 몸이 훅 당겨지는 감각과 함께 눈을 다시 깜빡이니 시야가 바뀌어 있었다. 곧 몸이 나자빠지는 감각과 함께 페인트질 벗겨진 농구코트 바닥에 몸이 누웠다. 햄 괜찮아요? 묻는 목소리가 폭발음과 뒤섞여 웅웅거렸고, 아까 봤던 하얗고 빨간 섬광이 눈앞에서 잔상처럼 남아있던 탓에 기상호의 얼굴도 흐렸다. 어어, 괜찮아.-하고 답해줘야 하는데 몸이 굳어 턱조차 잘 움직이지 않았다. 울긋불긋해진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겨우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나 앉았다. …뭐야? 상황파악이 덜 된 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모르겠어요. 다… 다 폭발했는데." 

기상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굴렸다. 사방으로 바삐 눈을 굴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길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 그러니까 모든 곳에서 폭발음이 지속됐다. 불꽃놀이도 이처럼 무식하게 터지진 않았다. 이렇게 폭발음이 크지도 않았고, 또 다발적이지도 않았는데... 

겨우 섬광의 후유증에 벗어난 두 눈을 그와 함께 이리저리 굴렸다. 시야에 담긴 풍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사방이 불바다였다. 빌라, 주택, 상가, 아파트, 마트... 

간간히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나와 기상호 둘 만이 온전히 이 화를 피했다는 걸 체감시켜주었다. 

"......" 

"......" 

둘 중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 하나임을 깨달을 때까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건물이 다 터진거지?" 

"가로등도 터졌어요." 

가로등 빛이 필요없는 지경이라 눈치 못 챘었는데, 정말로 가로등이 전부 다 깨져있었다. 왜, 어쩌다, 뭐 때문에? 머릿속이 온갖 의문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든 또다른 의문. 어디까지 터진 거지? 눈에 들어온 시야에는 불길밖에 안 보여서, 서울은 멀쩡한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급히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폰을 꺼내들었다. 급히 잠금을 풀고 전화를 거는데, 네트워크 오류. 여섯 글자가 폰 화면 중앙에 깜빡였다. 아. 이거, 되게…

좆된 것 같다. 많이.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아, 이건 꿈이다. 끔찍한 악몽. 지금 이걸 깨달았으니 이제 지각몽이야. 이제 일어나면 돼. 악몽 많이 꿔봤잖아. 

근데... 지각몽은 한 번도 안 꿔봤는데. 

질끈 감은 눈을 떴다. 눈이 다 뻑뻑해지는 관경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끈적한 농구코트 바닥까지. 다 생생했다. 꿈이라 믿을 수도, 감히 생각할수도 없을만큼. 

희망? 그딴 걸 꿈꿀 수도 없었다. 사방이 불길이고 모든 건물이 폐허가 됐다. 간간히 폭발음이 들려왔다. 2차 폭발 그런 거인 모양이다. 기상호와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건물들과는 거리가 있어 꽤 안전한 장소였다. 애들은? 학교는? 감독님은? 코치님은? …부모님은? 어느 하나 물을 수 없었다. 답이 뻔해서. 기적처럼 숙소만 멀쩡할 리도 없었다. 기적처럼 기상호 집만 멀쩡할 리도 없었다. 이것을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 서울 걱정을 했다. 엄마 아빠 지수는 괜찮나? 거기도 이럴까? 그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다보니 기상호네 부모님은 이 근처에 있겠구나, 깨달았고 그걸 깨닫자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기상호가 무슨 표정일지 보는 것조차 그당시 내겐 버거웠다. 

우리는 한참동안 조용했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여기 곧 불 번질 거예요. 고립되기 전에 일단 나가요." 

잠시 뒤 기상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이미 일어선 후였다. 어서요. 재촉하는 목소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가라앉아있었다. 그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일단 우리 먼저, 우리 먼저 대피해요. 기상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그 앞에서 내가 호들갑 떨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입 꾹 닫고 그 뒤를 쫓았다. 기상호가 앞서 걸었다. 기상호의 걸음 만큼이나 내 걸음도 빨랐지만, 나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뒷꽁무니만 쫓았다. 몇 걸음 걷다보니 훌쩍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조금 더 늦췄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만. 

"…어디로 갈 거야?" 

그의 발걸음에 정신은 실어놨어도 목적지까지는 실어두지 못한 것 같아, 그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을 대신하여 물었다. 그 물음에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이내 멈춰서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불길탓에 그의 눈이 심히 반짝였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다 가자." 

너 나 대학 합격발표 나면, 바다 데려갈 거라며. 그냥 지금 데려가줘봐. 미래를 바라보자니 너무 아찔해서, 과거를 끄집어내기로 했다. 바다 여기서 멀어? 정말 막무가내에, 어쩌면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기상호는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도망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 말은 삼켰다. 

우리는 꽤 오래 걸었다. 뜨거운 거리 사이를 걷고, 뜨거운 도시를 가로질렀다. 사방이 불길이었고 사람은 없었다. 숙소에서 나오며 걸었던 그 길이 생각났다. 지나는 이 하나 없었는데. 늦은 밤에 왜 아무도 안 나온 걸까. 답이 뻔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지만 야속했다. 

모든 건물들은 거의 다 창문이 없었다. 이제 건물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그저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활활 타오르는 중인. 불길속을 걷다보니 덥고 답답했다. 몇 번 마른 기침을 해대니 기상호가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묻는 낯빛이 나보다 괜찮지 않아보였다. 저런 얼굴인 애한테 어떻게 안 괜찮다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오려던 기침을 꾹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가 길을 다시 돌아와 내 옆에 섰다. 같이 가요. 시선을 돌리니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힐끗 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가야하는 길이 멀었다. 

부산 토박이라 그런지, 기상호는 이곳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길눈이 밝은 탓도 있겠지. 걷다 보면 끔찍한 광경도 몇 번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사방이 화염으로 훤해서 동서남북 구별이 잘 가지 않았지만,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리가 슬슬 아파올 때쯤, 폰을 켜보니 이미 7시가 넘어있었다. 다 와가? 물으니 기상호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르켰다. 

"다 왔네." 

바다는 푸르렀다. 모순적일만큼. 도시는 시뻘겋고 뜨겁고 난리났는데, 모래사장은 희었고 바다는 파랬다. 매캐히 솟아오른 연기가 하늘에 자욱한데, 바다 위 하늘은 파랬고 이에 바다도 파랬다. 나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저멀리 보이는 윤슬과 수평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었다. 저곳으로 가면 마치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처럼. 

"햄, 저기." 

기상호가 그런 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기상호가 가르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우리 둘은 너나할것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미성년자였고, 어느 누구라도 붙잡고 이 상황을 묻고 싶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저기요!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져나왔다. 큼큼, 목을 가다듬는 사이 기상호가 저를 대신해 사람의 인영을 불렀다. 그러자 저 멀리 서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고, 그 사람이 중년의 남자임을 확인한 우리는 더욱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른을 만났다는 것. 그것에서 오는 흥분감이었다. 

"너네!" 

그 사람도 우리처럼 사람이 꽤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있는힘껏 달려가고 있었기에 몇초면 눈앞에 닿았을텐데, 그이도 그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우리를 향해 몇걸음 걸어왔다. 너네 어디서 왔어? 다른 사람은 없어? 그가 멀리서부터 외치듯 물었다. 우리는 마저 달려와 대답했다. 

"그, ○○동에서 왔구요, 저희 뿐이에요." 

"○○동? 거기도 상황이 이래?" 

"예." 

"하, 이것 참... 서울은 멀쩡한가 모르겠네. 아니지, 인터넷이며 네트워크며 라디오도 안 되는데 서울도 이꼴 난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저씨는 다른 사람 못 보셨어요?" 

"저 어디서 엉엉 우는 소리 들리긴 했는데 모르겠다. 더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지금 대피할 곳이 마땅히 없으니 다 이 근처로 오지 않을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곧 저 도시 자체가 불바다가 될 것 같은데. 타죽기 싫으면 바다 근처로 오겠지. 아저씨는 주변에 사람 더 있는지 보고 온다며 해안가를 따라 걸어갔고, 우리는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새벽 내내 걸은 탓에 다리가 아팠고 피곤했다. 졸리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크게 숨 한 번 내쉬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뒤에선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들리고 앞에선 쏴아쏴아 파도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이 버거워 눈을 감았다. 그 모든 생각을 미루고 싶었으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이 사태의 규모는 어느정도일까. 아저씨 말마따나 전국적인 사태일까? 그렇다면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상가, 가로등, 아파트, 학교, …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기."

기상호가 짧게 내뱉었고, 나는 그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것 같다. 말은 우회했으나 거의 확신했다. 가로등까지 터져버린 거면. 그리고 그 폭발음. 한 번씩 티비에서 보던, 과전류로 인한 전자제품 폭발사고, 뭐 그런 것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전류 문제였을까? 

이정도까지는 추론해냈으나, 주어진 정보가 아무것도 없기에 더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세찼다. 몸을 웅크리니 기상호가 옆으로 와 붙었다. 춥죠. 어. 그 짧은 대화 새에 느꼈다.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겠구나. 곧 겨울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이것이 우리의 해결과제였다. 그럼 우리, 서울 갈까. 걸어서 보름이면 간다더라. 기상호에게 물었다. 

"서울... 서울이면, 안전할까요?" 

"안전하지는 않아도, 여기보다 낫지 않을까. 이게 전국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해외에서 원조 도움을 받겠지. 그 도움은 1차적으로 서울 아니겠냐?" 

"그렇긴 하죠. 서울이랑 여기랑 연락도 안 될 것 같고. 보름만에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고." 

여기에 남은 것도 없고. 기상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 말에 끄덕이던 고개를 멈췄다. 그래, 이곳에는 더이상 남은 게 없구나. 가장 공감되는 말이었으나 공감할 수는 없었다. 기상호 그가 잃은 게 더 많았으니. 

"일단 자고, 오늘 저녁에 갈까?" 

"그 전에, 식량 먼저 구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잠깐 축축히 젖는가 했던 기상호의 눈이 다시 도르르 돌아 저를 쳐다봤다. 그는 나만큼이나 이 상황 속에 침착했다. 

"식량도 구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다 불타서. 다른 사람들 가져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좀 찾아봐요." 

아니, 나보다 더 침착했던 것 같다. 내가 그를 보며 얼타고 있는 새 기상호는 벌떡 일어났다. 가방도 찾고 식량도 찾으러 가요. 

 

 

"멀쩡한 건물 자체가 없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기를 안 쓰는 건물이 없었고, 이에 폭발하지 않은 건물이 없었고, 그래서 불길을 피한 건물이 없었다. 어쩌냐. 전기 차단기가 아예 내려가있을 건물 없나? 이날 휴일, 이렇게 딱 정해져있는 건물. 

"학교, 가보실래요?" 

그러네, 학교가 있네. 수의아저씨가 계실 1층만 빼면, 다 전기가 꺼져있을텐데. 대기전력, 그게 문제였다. 과연 전력을 아예 차단해놨을지. 

약간의 기대를 품고 간 학교는 불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기상호가 운동장 한가운데에 멈춰섰다. 별관은요? 그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별관은 우리 농구부와 같은 운동부 애들이 쓰던 창고 겸 아지트였는데(쌍용기 우승 한 번 하고 나서야 우리도 어깨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날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교감선생님은 어짜피 안 쓰는 곳이었다며 수리를 미루셨고 결국 우리는 깜깜한 채로 그곳을 사용했었다. 밤에만 못 쓸 뿐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래. 거기, 전기 안 들어오잖아. 기상호와 나는 눈빛을 주고받다 후다닥 별관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별관은 멀쩡했다. 화단 옆에 숨겨둔 자물쇠를 꺼내, 문을 땄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을 활짝 열어재꼈다. 간식 어디뒀더라? 

"햄, 여기 넣어가요. 가방 큰 거 세 개나 있어요!" 

"두 개만 챙겨." 

야구부 애들이 사용하던 가방 두 개 먼지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우리가 숨겨뒀던(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한테 좀 더 많이 넣어놓으라고 할 걸 그랬다) 간식들과 야구부가 곳곳에 숨겨둔 간식을 찾았다. 우리는 해봤자 초콜릿, 젤리, 감자칩이 전부였는데 야구부는 라면부터 시작해서 음료수며 냄비와 가스버너까지 구비해놓았다. 미친 놈들, 여기가 캠핑장이냐? 하고 말했지만 사실은 좀 고마웠다. 

"다 가져갈 거예요?" 

"……." 

라면을 담던 손이 멈췄다. 손에 든 라면들은 야구부의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지 않을까? 우리처럼 야밤에 아이스크림 사러 간 애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들도 학교로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두지도 넣지고 못한 채 멈춰있으니 기상호가 옆에 다가와 라면을 든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움직여 간식을 챙겨넣던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럼 여기까지만 가져가요, 우리. 이것만 해도 우리 아껴먹으면 이주는 족히 먹을걸요?" 

"…그래." 

손을 털고 일어나 가방 지퍼를 잠궜다. 그리고 다시 나가려 한 발자국을 떼는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떼묻은 손잡이가 눈에 들어오고, 흙 범벅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 흔적들에, 애들이 생각났다. 이 간식들 다, 애들이 나 몰래 숨겨둔 건데.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짧은 찰나에 애들 모습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야구부 몰아내고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좋아하던 그 모습들. 훈련하다말고 여기 숨어들어와 간식 먹다가 걸려서 혼냈던 그 모습들. 밤에 오면 불 안 들어와서 무섭다며 야간훈련 중에는 양손으로 폰 후레시 켜고 들어가던 모습. 다, 여긴데. 그게 온전한 과거가 되어버렸으니. 

"햄."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흘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상호가 제 앞에 서있었다. 별관 밖에 온통 불길인지라, 문을 등지고 선 기상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방은 이미 그의 어깨에 짊어졌고, 두 손은 주머니에 꽂힌 뒤였다. 기상호는 짧게 저를 부르고는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내어 내 양 볼을 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눈밑을 쓸어내렸다. 손이 부드러운 동시에 뜨거웠다. 주머니 속에서 주먹이라도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기상호가 나즈막히 말했다. 경기 때나 들었던 낮은 음성이었다. 단호한 그 목소리가, 그 나름의 위로라는 것도 알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우리는 꼭 살아야죠. 그래, 우리는 나아가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도중 농구공 하나가 발끝에 툭 차였다. 고개를 숙여보니 누구의 손떼인지 모를 흔적들이 잔뜩 묻은 공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 공을 가방에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을 잊지 않고 품에 안은 채 미래를 살아가겠다는 내 다짐이 아니었나 싶다.  

 

 

가방 두 개를 두둑히 챙겨 학교 밖으로 나왔다. 일단 다시 바다 쪽으로 가볼까요? 기상호가 물었다. 그게 낫겠지. 아무래도 이동에 있어서도 해안선 따라 가는 게 길 잃을 확률도 적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는 숙소 근처였다. 식량을 찾아 다시 숙소 근처까지 걸어오다니. 꽤나 우스웠지만 수확이 좋아 후회는 없었다. 우리 둘은 자연스레 늘 가던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인모를 폭발에 풍경이 죄다 바뀌었음에도 우리가 밟아둔 길만은 여전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숙소로 향하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쓰잘데없는 희망. 그 혹시나 하는 마음을 완전 끝내버리기 위해. 기상호도 나와 같았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살아있을까. 하는 그 마음. 

그러나 우리는 그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입밖으로 내뱉기엔 단어가, 그 문장이 너무 잔혹했다. 우리는 조용히 익숙한 길을 걸었고, 익숙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걸었다. 뒤를 돌아도 숙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으며,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바다나 갈까요." 

"그러자." 

불길 속을 걸으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매캐한 연기에 눈이 뻑뻑해서 절로 눈물이 났다. 기상호도 눈을 몇차례 비볐다. 

"야, 눈이 너무 뻑뻑한데. 물 하나 딸래?" 

"아, 그럴까요?" 

어디 앉아있을 데 없나, 주위를 살펴보니 죄다 불길이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어젯밤만 해도 멀쩡했는데... 하필 거리가 어제 아이스크림 사러 가던 그 길이었다. 멍하니 주변만 보고 있으니 기상호가 손을 잡고 나를 끌었다. 어제 농구코트 보러 가요. 아직 거긴 멀쩡할 수도 있겠는데요? 

"와, 진짜 멀쩡하네. 코트 다 녹아있을 줄 알았더니." 

"그러게요. 근처에 나무가 없어서 불이 안 옮겨 붙었나봐요. 여기 그을린 자국 있는 거 보면, 불쏘시개가 없어서 금방 꺼지는 듯요." 

기상호가 발로 그을린 가장자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다행이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바닥에 퍼질러앉았다. 바닥에 앉아 바로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열어재끼니 학교 별관에서 마지막으로 주워 온 농구공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앞으로 농구를 할 수 있을까. 괜한 생각이 들어 농구공을 구석으로 밀고 밑에 있던 500ml 생수병을 꺼내들었다. 까드득, 물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눈 안 씻어?" 

물으니 기상호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쫌만 뿌려주세요. 말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턱을 왼손으로 잡았다. 오른손으로는 물통을 조금씩 기울였다. 찰나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바로 주륵, 물통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의 눈을 적셨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고, 나는 시선을 물통으로 옮겼다. 

"으, 옷 다 젖네." 

"저 불 앞에 가서 말려." 

"그 전에 햄도 일로 오세요. 물 건네주시고." 

기상호는 눈을 꿈뻑이며 일어난 후, 한 손으로 축축히 젖은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기상호가 내민 손에 3분의 2 가량 남은 물통을 얹었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방 치우시고. 그 말에 가방을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햄 눈 빨개졌어요. 그의 말에 그러냐, 하고 짧게 답했다. 고개를 든 채 성대를 울렸더니 목소리가 떨려 희한했다. 기상호가 손으로 내 턱을 들어올리고, 입술에 엄지를 붙였다. 손 큰 줄은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나중에 손 크기나 한 번 물어볼까. 멍하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 주륵 쏟아지는 물줄기에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햄요, 눈 떠요." 

그 소리에 다시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다. 망막에 맺힌 물 때문에 굴곡이 져 그의 얼굴이 흐렸다. 주륵, 다시 얼굴 위로 물이 쏟아졌고 난 눈을 더 크게 떠 눈에 물을 가득 담았다. 물줄기가 멈추고,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떠나고, 고개를 내려 눈을 질끈 감으면 물이 줄줄 흘렀다. 이 핑계에 삼켰던 눈물도 좀 흘리면 좋으련만. 한 번 삼킨 눈물은 다시 끄집어내지지 않았다. 

"눈 좀 낫죠? 해상도 360에서 1080 된 것 같아요."

"난 8k." 

아무생각없이 툭 내뱉은 말인데, 갑자기 옆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싶어 고개를 들어보면 기상호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웃겨요 햄. 하고는 계속 웃었다. 그래, 저 얼굴이 기상호 얼굴인데. 순박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이 모습을 보고 나니, 어젯밤 그리고 오늘 그의 모습을 내가 꽤나 불편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지 않게 진중한 모습. 답지 않게 무표정인 얼굴. 그게 겁이 났던 것 같다. 

...왜?

"야, 작작 웃어라. 한 번 받아줬더니 이렇게 웃어?" 

이 좆같은 상황 속에서, 내 모든 걸 잃어버린 이 상황 속에서, 기상호마저 잃어버리면 좀 슬플 것 같았다. 

 

 

앉은 자세를 바꾸자 찐득한 코트바닥이 쩍쩍 다리에 들러붙었다. 바닥을 보니 내 앉은자리에 흰 라인이 쭉 나 있었다. 3점라인이었다. 다시 농구 할 수 있을까? 어처구니 없게도, 이 상황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농구를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겠구나. 이제 다시는 경기를 뛸 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먼지앉은 농구코트 바닥을 손을 훑으니 메고 왔던 가방 끈이 손끝에 닿았다. 시선이 가방끝에서 가방으로, 가방에서 가방 안 농구공으로 옮겨졌다. 농구공. 

"기상호." 

부르며 농구공을 꺼냈다. 

"원온원?" 

기상호가 날 돌아봤다. 그런 그의 뒤에는 안전장치 하나 없는 농구골대가 있었다. 부딪히면 최소 골절일 것 같은데. 신발에 달라붙는 바닥은 제대로 뛰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여서 다시 농구하면 가만히 안 둔다면서요." 

"그랬지." 

"저 여서 농구 한 번만 더 하면 미친놈이다 캤는데." 

기상호가 다가와 농구공을 건네받았다. 그럼 햄이랑 저 둘 다 미친놈 할까요? 그가 농담스레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마주친 그의 눈이 반짝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씨익 웃었다.

"10점 내기?" 

 

 

하아. 흐아.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숨차. 한 마디 내뱉자 옆에 누운 기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아니, 승부가 나지도 못했다. 기상호가 덩크 넣을 거라며 뛰어오르다, 공이 림에 맞고 저 멀리 튕겨나가버렸다. 눈으로 공을 좇다보니 보이는 건 불길이었다. 

"그러게 덩크도 못 하는 게 왜 그 지랄을 해서." 

"에? 저 덩크 넣을 수 있거든요?" 

"웃기고 있네. 그래서 공을 그렇게 날려버렸냐?" 

그건 아인데... 그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저새끼 덩크 넣는 거 한 번 더 보나 했더니. 대차게 말아먹고, 농구공도 말아먹고. 

"됐다. 그냥 가자."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겨우 진정됐을 때,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기상호도 뒤따라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우리는 다시 바다로 향하기로 했다. 다시 사람들을 만나, 함께…

"근데 햄. 그쪽은 식량이 아예 없었는데. 가면 다 뺏길 것 같은데요."

"......" 

"그냥 우리끼리 다님 안 돼요? 전 햄만 있음 되는데." 

가지 말까? 그의 말에 바다 쪽으로 향하려던 상체가 돌아가 다시 골대 쪽을 향해 섰다. 우리가 바다로 가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는 미성년자라서. 우리는 어려서. 우리는 보호가 필요하고, 또 의지가 될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지만 변하지 않을 사실이 하나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기상호만을 나의 옆에 둘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상호 하나로 충분한가?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어른보다, 기상호가 더, 든든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까지 닿고 나서,  

“그럴까.” 

짧게 말했을 땐 이미 나의 세상은 그와 나뿐이었다. 그가 대답 대신 미소지었다. 나는 뒤돌아 농구코트를 빠져나온 뒤 바다를 등지고 섰다. 나는 반드시 너랑, 서울까지 가서, 살아남을 거야. 다짐하며 뒤를 돌았다. 기상호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국민여러분…대피…, 현재 서울…보금품을…, 또한… 문제로 물자를… 보급하는 것은… 직접 방문… 바랍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라디오를 주운 것은 정말로 운이 좋았으나,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우리는 안내방송을 몇 번이고 듣고서야 대충 이야기를 파악했다. 안내방송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보급품을 마련해두었으며, 도시마비 문제로 지방까지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 어려우며, 그에 보급품이 필요한 사람은 직접 서울까지 방문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울도 이 지경이겠구나. 어쩌면 서울은 이보다 더, 심각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울은 이곳보다 건물도, 전선도 훨씬 많으니. 서울로 간다고 해서 끝은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우리는 서울로 향해야 하며, 도시 전체가 불바다이기 때문에 우리는 6차선 이상의 도로 중앙을 걸어다녔다. 길은 통하니까, 이정표만 보고 걸으면 서울로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근데 햄, 귀가 뜨끈뜨끈하지 않아요? 이러다가 저희도 익을 것 같은데.” 

“엄살 마, 이정도로 안 죽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눈앞이 일렁일 정도로 이곳은 화마였다. 곧 겨울인 날씨임에도, 우리는 반팔을 걸친 채 땀을 죽죽 흘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것임은 뻔했다. 이렇게 땀을 흘리다보면 금방 목이 마를 것이고, 물을 마시다보면 금방 동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있나?  

“그래도 햄, 마이 더운데… 이거 나중에는 도로로도 못 갈 것 같지 않아요?” 

“그럼 뭐, 어쩌고 싶은데? 못 걷겠다 이거냐? 그럼 뭐, 차라도 타게?” 

가만, 차? 기상호와 눈이 마주쳤다. 기상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차는 전기를 안 쓰지 않나? 지나쳐왔던 길을 떠올렸다. 갓길에 차가 있던가? 있었다. 차가 멀쩡했던가? …멀쩡했다. 

“햄, 차키 꽂혀있는 차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우리는 동시에 눈을 반짝였고, 동시에 발걸음을 돌려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갓길에는 차가 뺴곡히 주차되어있었고,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각각 좌측 우측을 맡아 차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호가 나를 불렀다. 햄!-이 짧은 한 마디에 난 즉시 고개를 돌렸고, 처음 보이는 건 기상호가 이빨 내밀며 웃는 모습, 그리고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운전석 문이 활짝 열린 모습.  

하얀 중형차. 연식이 꽤 된 차였지만 관리가 잘 된 것 같았다. 차키는? 물으니 기상호가 내 손에 차키를 쥐어주었다. 여기, 차키도 있어요. 좋네. 차키를 가볍게 쥐었다. 열쇠형 차키였다. 내가 운전석에 타는 동안 기상호는 후다닥 달려가 옆 조수석 문을 열었다. 와, 차 꽤 괜찮은데요? 하며 들뜬 목소리로 몸을 구겨 차에 탔다. 그러게, 꽤 괜찮네.

차마 잘 찾았네- 하는 칭찬까지는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차에 탄 뒤, 문을 닫고, 차키를 꽂았다. 그러자 옆에서 달칵, 하고 안전벨트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보면 뻣뻣한 미소를 지은 채 손잡이를 꼬옥 잡고 있는 기상호가 보였다. 

“뭐냐?” 

“해, 햄 면허도 없고 운전도 해본 적 없잖아요.” 

“야, 그렇다고 내가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차를 뒤엎기라도 하겠냐?”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입니까… 그, 그리고 안전벨트는 기본이거든요!” 

기본같은 소리하고 있네… 신호등도 다 꺼졌고 차도 하나 없는데, 모든 도로가 일방통행이다, 이 새끼야. 나는 일부러 드르륵,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맞췄다. 힘껏 밀어 직접 끼워넣어야 하는 수동 기어. 기어를 맞추다보니 아빠 생각이 났다. 괜찮으실까. 지금 우리 가족은 나를 찾고 있을까. 잡생각이 자꾸 들어 기어를 잡은 손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햄, 기어 맞출 줄 아시죠? 그, 앞으로 가는 건 뭐게요?”

“D, D 이 새끼야. 누굴 바보로 아나.”

기어에서 떼어낸 손은 기상호의 머리통으로 향했다. 한 대 빡, 소리나게 치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기상호가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 부웅- 다행히 바퀴는 멀쩡히 굴러갔고, 차는 유유히 도로에 진입했다. 그리고 엑셀을 천천히 밟아나갔다. 30, 40, 50, 60…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상호가 손잡이를 쥔 손이 더 희어졌다. 그로써 아무도 없는 황량한 도로 위 고독한 질주의 시작이었다.

정정. 딱히 고독하지는 않았다.

*

기름은 반 정도. 길이야 뭐, 이정표 보면서 찾아가면 되고. 우리는 몇시간동안 계속 차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에 운좋게 고속도로를 타서, 수월히 이정표를 보며 서울 방향으로 향했다. 햄, 여기 말고 절로 가야 하는 것 같은데요? 저기가 서울방향. 기상호의 손끝을 따라 이정표를 살펴보면… 어, 맞네. 브레이크를 살살 밟아 차를 멈추고, 냅다 후진 기어로 돌렸다. 어짜피 도로에는 우리밖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참나, 처음 운전해보는 게 무면허에다가 중앙선 침범에다가 역주행에다가…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챙겨온 과자 몇 개 까먹고, 물 조금 마시면서 가다가, 날이 어두워져 전조등을 3단계로 키고 주행했다. 사방이 캄캄한데 저 산 뒤는 붉었다. 여기도…

우리 둘 다 터널에서 나왔을 때, 산을 빠져나왔을 때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여기는 멀쩡할까, 하는 희망이 담긴 행위였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안 가 그 짓도 그만두었다. 보는 족족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희망은 커녕 마음만 더 착잡해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고속도로에서 전조등 하나로 이정표를 보기란 쉽지 않았고, 날도 어두워졌겠다 피곤하겠다, 우리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다니는 차가 없다고 해도 갓길에 세우는 게 마음 편했다) 시트를 뒤로 젖혔다. 얼룩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끝없는 적막을 실감했다. 그 속에 우리의 숨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햄, 운전 수고하셨어요.”

“뭐 앉아서 발만 움직이면 되는 건데… 걷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지.”

“그러게요 금방 서울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쩌기 방금 칠곡휴게소 지나왔잖아요. 칠곡이면… 대구 지났으니 뭐 거의 반 왔네요, 반.”

“지리 잘 아네.”

“헤헤 이정도는 기본 아입니까~”

칭찬을 받아 신났는지(사실 칭찬의 의도가 아니라 그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기상호가 두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덕에 차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에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잠이나 자라,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넵. 하며 기상호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다시 우리 둘은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어쩌면 둘이 같은 개꿈을 꾸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 사태 일어나고 처음 자는 건데, 눈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게 꿈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누워있다가, 아까 낮에 부산 바닷가에서 봤던 아저씨 한 분이 떠올랐고, 야외 농구코트에서 기상호와 했던 농구가 떠올랐다. 아직 발에 쩍쩍 달라붙던 바닥과 먼지 잔뜩 묻은 공의 감촉이 생생했다. 꿈이라 희망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온 것 같았다.

“…햄. 저 사실은요,”

그리고 이 말 또한 내 꿈이었다면 절대 나오지 않을 대사였다.

“쌍용기전만 끝나면 농구 그만둘라캤어요.”

왜? 너 농구 좋아하잖아. 상상도 못 해본 말에 온갖 의문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찼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이 또한 다 과거기에. 기상호는 그래도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그러냐.”

한 마디가 내 대답이었다. 기상호 또한 내 대답의 의미를 아는지, 말을 이었다.

“저도 농구 좋아하죠. 마이 좋아하고 또 재밌는데… 맨날 벤치만 데푸고 있으니까는 의미를 모르겠더라구요. 이렇게 미련부리면서 앉아있는 게 맞나… 내한테는 소질이 없는 거 아일까… 농구는 내한테 니 소질 없다꼬, 이제 포기하라고 그래 말하고 있는데 내가 눈치없이 뻐팅기고 앉아있는 거 아인가… 싶어가.”

“너 농구 잘하잖아.”

“햄이나 그렇게 말해주는 거죠.”

“너 모르냐?”

“뭘요?”

“나도 농구 못해서 지상고 온 거잖아.”

“아,”

“농구 못 해서 전학가라더라, 원중고에서. 여기 있어봤자 주전 못 뛴다고. 그래서 전학왔어. 뛰고 싶어서.”

“…….”

“명문고가 무슨 소용이냐. 농구는 뛰어야지, 내가 직접. 안 그러냐.”

“그쵸.”

“…미안하다, 내가 너 경기 많이 뛰게 해줬어야 하는데. 나도 8강에 급급해서 너 봐줄 시간이 없었다.”

“에이, 그게 뭔 소리예요. 제가 몬 해서… 피해만 됐던 게 사실인데요 뭐…”

“그래도, 일찍 미리미리 경기 뛰어봤으면, 너 그렇게 디펜스에 소질 있는 거 더 빨리 알았을텐데.”

“…….”

“…….”

우리 둘은 이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감독님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감독님 덕이었다. 8강에 간 것도, 기상호가 제 능력을 찾은 것도, 내가 대학에 합격한 것도…….

“감사하다는 인사 한 번 못 했네.”

“그러게요.”

과거를 회상해봤자 남는 건 후회 뿐이라는 걸 우린 잘 알았다. 그럼에도 과거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후회가 뼈저리게 아픔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억이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전 햄이 제 선배라 너무 좋아요.”

“왜?”

“햄은 멋있잖아요. 늘 느끼던 거예요. 햄은, 진짜 멋있어요. 닮고 싶어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기상호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

“비라도 왔으면 좋겠어요. 불이라도 꺼지게.”

“그러게, 불만 꺼져도 좀 여유로울 것 같은데.”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눈부셔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깼다. 뭐야? 싶어 몸을 일으켜 앞을 살펴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아침이 아니라 오후였다. 많이 걸었더니, 골아떨어졌네. 나는 마른세수를 벅벅 하며 옆을 힐끗 쳐다봤다. 기상호가 없었다. 어딜 간 거야? 언제 내린지 모를 기상호를 따라내렸다.

공기가 매케했다. 저 산 너머도 아마 불난리, 이 산 너머도 불난리, 저 휴게소도 불난리인 탓이겠지. 벌써 뻑뻑해지기 시작하는 눈을 비비며 기상호를 찾았다. 기상호. 부름에 답이 없었고 저 멀리서는 벌써 불이 여기까지 번졌는지, 일렁이는 불길이 보이는 듯 했다. 하루 뒤면 여기도 불바다가 될 것 같았다. 기상호 얘는 어딜 간 거야. 차에 다시 타 뒷좌석을 살폈다. 가방 다 두고 갔는데. 아, 볼일보러 갔나? 그렇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의자에 몸을 누웠다. 또 얼마나 가야하는 걸까. 앞길이 막막했으나 뒷길도 막막했다.

“햄? 일어났어요?”

그때 기상호가 운전석 창문을 똑똑 치며 나를 불렀다. 햄, 이거 봐요. 문을 열자 기상호가 내미는 건 꽃송이였다. 꽃송이? 뭐야 이건. 퉁명스레 받아들고 말하자 기상호는 실망했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 풀때기도 보기 힘들 것 같아가 예쁜 걸로 따왔어요.”

“이쁘긴 하네. 근데 뭔 남자끼리 꽃이냐.”

“엥, 이거 드리는 거 아닌데요? 제꺼 보여주는 건데요!”

“아 그래 가져가라.”

씨이… 기상호가 나를 째려보며 꽃송이를 다시 받아들었다. 제가 상상한 반응이 아니라 삐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겨 웃음이 새어나왔다. 야 솔직히 말해, 니도 그거 필요없지 않냐? 그 물음에 기상호는 정곡이 찔렸는지 몸을 들썩이더니, 아인데요 전 이거 억스로 필요한데요. 하면서 조수석에 탔다. 음 꽃향기 좋다~ 하면서 나 들으라고 큰 소리도 냈다. 그러더니 꽃가루가 코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 모습에 난 바보냐며 놀리다가, 눈물까지 흘려가며 요란히 재채기 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 그러자 기상호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햄, 시작이 반인데 저희 거의 반을 왔거든요. 그니까 저희는 다 온 거예요. 기상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의문을 제기했다. 그게 뭔 개소리냐.

*

이날은 꽤 시작이 괜찮았다. 몸은 가뿐했고, 한바탕 웃고 출발한 덕에 기분도 괜찮았다. 잡생각 날 틈이 없게 계속해서 우리는 떠들었고, 중간중간 이정표도 꼼꼼히 살피며 서울로 향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톨게이트를 발견했다. 에? 톨게이트가 왜 나오지. 다시 고속도로 타야겠는데요? 그 말에 차를 멈춰세운 뒤 후진을 하려고 했으나,

 “아 씨발…….”

처참한 광경에 몸이 굳어버렸다. 당연했다. 요금소 안에도 전기가 들어올 것이고, 그 안에는 직원이 있었으니….

우리는 한동안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어쩌면 애들도, 감독님도, 우리 가족도 저렇게 폭발에 휘말려, 불길에 휩싸여서…. 그 생각에 사로잡혀 손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계속 회피해왔던 그 불안감이 쌓인만큼 터져나왔고, 차마 내뱉을 방법이 없기에 눈물이 겨우 흘러나왔다. 어딘지 모를 낯선 장소에서 누군지 모를 낯선 이들의 죽음이 우리를 현실로 이끌었다.

그래, 우리는 지금 살고자 하는 것이었지. 모든 것을 잃고도 살아보겠다고 서울로 가던 중이었지.

이게 우리의 현실임을 깨닫고 나니 웃음은 커녕 농담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차를 돌려 다시 서울 방향 고속도로를 탔고, 고독함을 느꼈다. 그때 기상호가 핸들에서 내 손 하나를 떼낸 뒤 손깍지를 꼈다. 그 의미를 나는 잘 알았다.

“우리는 살아야지.”

우리. 그것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

기상호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상호가 있어서 다행이다. 두번째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개씨이발.”

우리는 대전 근처에서 멈춰섰다. 기름이 부족한 탓이었다. 젠장할, 서울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름이 얼마나 빨리 줄어드는지 감각이 없었기에 반 정도 가고 멈춰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밟아도 속도가 안 나서 고장났나, 싶었는데 기름이 없는 거였다. 그걸 좀 일찍 깨달았으면 국도로 내려갔을텐데. 아니지, 다시 그 요금소를 지나갈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 어떡할까요? 묻는 기상호를 빤히 쳐다봤다. 뭐, 고속도로 계속 걸어가던지, 다시 차를 찾아보던지 해야지. 그 말 후 우리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차 맛을 본 탓에, 걸어서 서울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걷다가, 빠지는 길 나오면 거기로 갈까요? 나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 빠지는 길이 나오기 전에, 밤이 되었다. 좀 일찍 일어나기만 했어도, 고속도로는 벗어날 수 있었을텐데. 해가 지고 나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한 발자국 내딛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흐음, 이럴거면 차에 있을 걸 그랬나봐요. 우리 여기에 누워가 자게 생겼는데요.

“아오 뭐 어때, 그냥 자자.”

나는 벌러덩 갓길에 누웠다. 산속에 위치한 도로라서 불길이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뭐, 추운 거야 어쩔 수 없고…. 가져온 가방을 베개삼아 누우니 까만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야, 너도 누워. 그 말에 기상호도 엉거주춤 가방을 베고 누웠다.

“와, 별 많네요.”

“그러게.”

평소였다면 별 많다고, 저 별자리는 뭘까요,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댔을텐데. 우리는 오늘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예뻤으나, 예쁜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됐다. 감성팔이도 도움이 하나도 안 됐다. 기상호와 나는 둘 다 지지리도 이성적이라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와중에도 베개 삼은 가방이 딱딱해 불편했고, 아스팔트 바닥이 등에 배겼다.

“춥지 않아요? 우리 붙을까요 더.”

“여기서 어떻게 더 붙냐.”

“이케 이케 펭귄처럼.”

기상호가 몸을 꿈틀거리며 내 목에 자신의 머리를 끼워넣었다. 이게 뭐야. 어이없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흐흐흐, 따뜻해요. 기상호가 웃자 내 몸도 같이 울렸고 그 울림이 썩 나쁘지 않았다. 바보같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떴다. 저 멀리 떠있는 별 따위가 얼마나 빛나던 감흥이 없었는데, 기상호의 행동 하나는 뭐가 그리 우스웠을까. 우리는 한동안 키득거렸다. 몸을 겹쳐보기도 하고, 깔아뭉게보기도 하고, 마주보고 누워 다리를 겹쳐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찾아낸 가장 따뜻하고 편한 자세는, 옆으로 누워 껴안는 자세였다. 기상호가 나를 껴안아 누웠다. 따뜻하고 편했다.

“이거 봐요, 제 팔이 더 길다니깐.”

“그래, 팔 길어 좋겠다.”

기상호가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등에 얼굴을 처박았다. 여서 햄 냄새나요. 어쩌라고, 코 막아. 아니, 나쁜 게 아니라 그냥 햄 체향 나요. 당연하겠지, 난데. 기상호가 손을 꼬물거릴 때마다 그의 손이 닿아있는 내 배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 잠에 들었는지, 언제 잠에 들었는지는 둘 다 몰랐다. 그저 어느샌가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기상호가 있어서 좋았다.

*

“억!”

기상호가 내지른 단일마의 신음에 눈을 번쩍 떴다. 신음과 함께 기상호의 몸이 크게 들썩이더니, 무언가가 지익 끌리는 소리와 함께 힘차게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뭐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면 해가 막 뜨는 듯한 새벽이었고,

“저 새끼 가방 갖고 튀는데요?!”

저 멀리 달려가는 새끼는(어른인 것 같았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가방을 들고 튀고 있었다. 아이 씨발…! 우리는 허둥지둥 일어났으나,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우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있었구나. 당연한 건가? 다들 고속도로 타고 서울로 갈 생각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저거 라면 든 가방 아니냐? 내 말에 기상호가 후다닥 내가 베고 잤던 가방을 열어보았고, 애석히도 그곳에는 물 몇 병과 과자 한 봉지가 전부였다. 아 씨발… 이렇게 되면 어제의 모든 일 그리고 오늘 일어나기 전까지의 모든 일을 후회하게 된다. 그나마 여유를 부릴 수 있던 이유가 식량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오늘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물으로 이틀은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차 먼저 찾자. 식량은 찾기도 힘들 거니까.”

그 즉시 우리 둘은 말과 행동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쓸데없는 일에 맘 쓸 여유가 없었다. 1순위 생존. 2순위 생존. 3순위 생존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남짓 걷고서야 국도로 빠지는 길을 발견했고, 또 요금소를 지나게 되었다. 이제 이딴 것에 감정소비 할 여유도 없었기에, 우리는 하이패스 쪽으로 건너 지나갔다. 그리고 마주한 건 당연히 불바다였다. 무너지지 않고 여전이 우뚝 솟아있는 건물들은 커다란 불기둥이었고, 모든 상가와 주택은 형태만 겨우 유지돼있거나, 형태조차 유지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서 멀쩡한 차 한 대, 게다가 차키가 꽂혀있는 걸 찾을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비교적 멀쩡한 골목에 들어가 주차된 차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키가 꽂힌 차가 아니라 멀쩡한 차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9할은 멀쩡하지 않았기에. 골목 하나만 살펴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거 못 찾겠는데…. 그러고 있자니 기상호가 다가와 말했다.

“우짜죠, 자전거라도 찾아보까요.”

“그게 낫겠다.”

그래서 우리는 자전거라도 찾아보려 애썼지만,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그저 불, 불, 불 뿐이었다. 간간히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가 있었는데, 아마 이 사람들도(우리 가방 들고 튄 새끼도 여기 지나갔을까?) 여기 별 게 없어서 떠난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식량만 찾고, 다시 고속도로로 가요. 여기는 위험해서 걸어다니지도 못할 것 같고, 어짜피 우리 첨부터 서울까지 걸어가려고 했잖아요.”

그렇지. 그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식량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눈앞이 눈이 시리도록 밝았으나 지독히도 캄캄했다. 하아, 내쉬는 한숨이 두 배로 무거웠다.

그렇게 밤이 됐다. 수확은 커녕, 에너지 소비만 한채 밤을 맞았다. 우리는 근처 학교 운동장에 몸을 누였다. 사방에 밝아 별은 보이지 않았다. 가방 한 끈은 내 팔에, 다른 끈은 기상호 팔에 묶어 놓았다. 그러고 나란히 누우니 몸을 붙일 수도 없었다.

“햄.”

그가 나를 불렀다.

“준수햄. 저 서울 구경 시켜주세요.”

“뭔…”

“우리 부산 바다도 봤잖아요. 전 서울 구경 시켜주세요.”

“그래.”

“저 남산타워도 가보고 싶어요. 가서 자물쇠도 채워보고 싶고, 또 이태원도 가보고 싶고 홍대도 가보고 싶어요.”

“그래, 가자.”

“꼭 같이 가요, 햄. 저는 진짜 햄만 있으면 돼요…….”

그치, 너도 나밖에 없구나. 너도 나에게 기대고 있었구나. 나돈데……

“애새끼.”

기댈 수 있다면, 맘껏 기대게 해주고 싶었다.

“비 한 방울도 안 내리네요. 비라도 왔으면, 좀 덜 서둘러도 될텐데.”

“그러게, 근데 오늘 잠깐 비 날렸지 않냐?”

“아, 그게 비였어요? 뭔 물방울이 한 두개 떨어지더니.”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아마 지금 전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비라도 내리면, 한숨 돌리겠는데.

*

아침이 되고, 우리는 오랜만에 라디오를 다시 켰다. 여기는 전파가 잘 잡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로.

-현재… 다국적 전략항공수송대… 긴급 출동… 서울에 위치하여… 구호물품 조달이…

방송 내용이 변했다. 서울에서는 계속하여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고 있는 듯 했고, 지방은 계속 소외되고 있는 듯 했다. 아쉬운 사람이 서울로 오라는 것이었고, 우리는 아쉬운 사람들이니 직접 서울까지 가야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방송을 끝까지 듣지 않고 뚝 껐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늘 당장 서울로 출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좀 더 있었다가는 이 도시는 다닐 수 있는 도로 하나 없이 불바다가 될 게 뻔했기에. 더이상의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아 빨리 이곳을 떠나기를 택했다.

그 전에, 식량 한 번만 더 찾아보고 가기로 타협했다.

“저기 가봤어요? 식료품 매점?”

“거기 불에 다 탔던데.”

“그럼 그 뒤에 창고는요?"

“창고도 있었어?”

“예. 전에 보니까는 있는 거 같던디요.”

그럼 가봐야지. 나는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창고는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더라도, 거기는 다 포장돼있으니까. 하나쯤은…. 난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 향했고, 기상호가 천천히 내 뒤를 쫓아왔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 이외의 다른 발소리가…

다른 발소리? 나는 황급히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가방 내놔 이 새끼야!”

두 남자가 기상호가 들고 있는 가방을 뺏으려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식량은 없었지만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한 명은 칼, 한 명은 길다란 파이프…

이 새끼들이…! 나는 바로 그곳으로 뛰어갔다. 루즈볼을 잡으려 미친듯이 뛰어가던 때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간절했다. 공을 잡아내고 넘어지더라도, 부딪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공을 잡아내는 게 목표인 것처럼…

“기상호!”

가방을 지키려 몸을 굽히는 기상호를 불렀다. 햄, 가방…! 기상호가 저를 보며 말했고, 동시에 두 남자도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그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식량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기상호를 지키고 싶었다.

“오지 마요!”

찰나에 눈이 마주쳤고, 기상호가 외쳤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남자 하나를 들이박았다. 쿠당탕, 그 남자와 함께 넘어지자마자 쇠파이프를 뺏어들고 주저없이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기상호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고, 나 또한 고개를 돌려 기상호를 쳐다봤다. 기상호를 겨냥한 칼끝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그 칼끝을 향해 몸을 던졌다. 동시에 쇠파이프를 창처럼 쥔 뒤 기상호 뒷편에 내리꽂았다. 쇠파이프가 퍽, 박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반짝였다.

처음엔 살고 싶었다. 무척이나.

많은 것들이 죽었으나 나는 살아있었기에, 서울로 가 끝까지 살아남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살길 희망했다. 기상호와 함께.

기상호 없이 홀로 살아남는 건 싫었다. 함께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

그간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목덜미에 꽂힌 칼이 뽑혀나가고, 기상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처음 이 사태가 시작됐을 때, 그때도 이 표정이었어? 기상호의 눈썹이 슬퍼보인다. 기상호의 눈이 슬퍼보이고, 입이 슬퍼보인다. 그리고 내 목을 부여잡는 그의 손끝이 슬퍼보인다. 섬광이 터지듯 눈앞에 하얗게 변하고, 몸에 힘이 빠진다. 그대로 기상호 품에 안겨 쓰러진다. 햄……. 기상호가 말한다. 그리고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눈을 감고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보면 얼굴 위로 물이 툭 툭 떨어진다.

“야, …이제 비 오려나봐.”

비가 내리면 불길이 사그라들 것이다. 그럼 여유가 생기겠지. 그렇게 되면 너에게도 좋아한다 말할 수 있을텐데. 그건 못하겠다, 그치.

“햄…….”

기상호가 울며 나를 부른다.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을 뒤덮었던 불길이 서서히 죽어갔다. 불길 속에, 연기 속에 꽁꽁 숨겨진 것들이 빗물에 씻겨 드러난다.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한다는 감정도 그제서야 드러낸다. 나는 대답대신 웃는다. 쌍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

고백에는 타이밍이 있다. 그 타이밍이 언제나면,

1. 자신의 마음을 신경쓸 여유가 있을 때.

2. 감성팔이 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 때.

3. 상대도 날 좋아할 때.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될 때. 그 때가 바로 고백의 타이밍이다.

 고백의 타이밍

기상호x성준수

^_^

기력 이슈로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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