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는 절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스테리스크 : 은하수를 걷는 용 / 드림 NCP 커미션 / 전체 공개
*자늘님(@ZNMAJJI) 커미션입니다. (10,000자)
별에서 태어난 우리는 결코 별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억겁의 시간을 뚫고 내게 닿은 고향의 빛이 사실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별의 잔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슬픔이었나. 배신감이었나.
그도 아니면, 분노였나.
아킬레우스는 절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곤히 잠든 쥬노를 내려다보는 가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때때로 제게 일어난 이 기적을 곱씹어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는 가젤은 저만의 이 고요한 시간을 좋아했다.
‘잠깐 다녀오는 건 괜찮겠지.’
한동안 계속된 강행군에 힘이 온전치 않은 쥬노가 느낄 피로는 상당할 게 뻔했다. 쉴 수 있을 때 푹 쉬게 해주자는 가젤의 배려에 첫눈처럼 하얀 용은 꿈속에서 하늘을 유영했다.
최근 새로운 신비 생물을 둘러싸고 왕성한 소문이 연기처럼 퍼지고 있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여독을 풀 겸 가젤은 신비 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산에 오르기로 했다. 혹자는 휴식이야말로 여독을 푸는 방법이라 하겠지만, 가젤에게 있어 탐구만큼 좋은 휴식은 없었다. 탐구를 향한 가젤의 열망은 순수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닮아있었다.
루시아와의 재회에 들뜬 사샤가 조르는 통에 엑시와는 잠시 개별 행동을 개시한 참이었으니, 탐색을 나서기에 이만한 좋은 조건이 없었다. 운이 좋다면 쥬노의 마력에 관한 단서 역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가젤은 모쪼록 주어진 이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은 대자연이 으레 그렇듯 높지 않을지언정 결코 오르기 쉬운 곳은 아니었다. 산 중턱을 오를 무렵, 구슬땀과 함께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허억…. 헉…. 이거, 상당히 높은데.”
쉬고 싶다고 피로를 호소하는 다리를 채찍질해가며 산을 오르던 가젤이 묘한 기운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신비 생물 서식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새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까맣게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새떼의 날갯짓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떼?’
새떼가 서식지를 두고 날아오르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하물며 이런 인적도 드문 산속에서는 더더욱. 가젤은 그제야 저물기 시작한 태양의 붉은빛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밤의 산은 안전하지 못하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내려갈지, 얼마 남지 않은 신비 생물 서식지를 탐색할지 가젤의 이성이 탐구심과 천칭을 겨뤘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가젤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을 불끈 쥐자 그의 푸른 눈이 빛을 더했다. 기왕 올라온 거 끝까지 가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가젤의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인간?”
가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용은 모두 좋지만, 언제나 인간에게 호의적인 용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고개를 올리자 마치 이제 막 찾아온 어둠처럼 검은 몸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젤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침소리가 컸다.
‘화산의 용…!’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산의 용을 앞에 두고 가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인간을 향한 호의를 알아보기 위해 가젤이 질문을 고심하는 사이, 화산의 용은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을 깜박이며 눈앞의 작은 소년을 유심히 바라봤다. 기억의 서랍을 뒤지던 그녀가 해답을 찾고는 밝은 탄성을 질렀다. 용의 표정은 알기 어렵지만, 분명 웃고 있는 듯했다.
“가젤?”
“나, 나를 알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음성에 화산의 용이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용의 눈이 서서히 반달처럼 휘었다.
“너… 내가 보이는구나?”
가젤 톰슨이 위버가 됐다.
유성절을 기준으로 기현상이 일어났다는 건 세상 만물 모두에게 알려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모든 게 저와 관계없다며 시큰둥했던 화산의 용은 비로소 찾아낸 즐거움에 두 눈을 반짝였다. 하얀 겨울의 땅에 총성이 울려 퍼졌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하니 가젤에게 기현상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가젤 톰슨이 위버가 되다니! 운명의 수레바퀴에 굴러들어온 작은 돌멩이 하나로 잘 굴러가던 수레바퀴가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산의 용이 새로운 흥밋거리로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일 때, 가젤은 생각보다 유한 태도에 슬금슬금 궁금증이 솟고 있었다. 화산의 용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었다.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쥬노의 새파란 눈동자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걸까. 고민보다 먼저 반 발자국 앞서버린 걸음에 화산의 용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
하마터면 가젤의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뻔했다. 화산의 용은 그런 가젤의 모습에 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어댔다. 얼굴을 붉히는 가젤은 제가 아는 무심한 인간과 무척 달라 재밌었다. 그래, 놀리면 이 정도 반응은 나와줘야지.
“내가 둥지 보여줄까?”
용의 둥지라니!
갑작스러운 제안에 가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쉽게 볼 수 없는 기회였다. 원래대로라면 신비 생물과 마력을 조사하고 쥬노에게 돌아갔을 테지만, 거절하기에 너무 엄청난 제안에 가젤은 그만 고민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눈에 훤히 보이게 갈등하는 가젤을 바라보며 화산의 용은 느긋했다. 그녀는 가젤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지식을 탐닉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미끼를 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젤이 조심스럽게 바늘을 물어왔다. 저를 아는 것처럼 구는 이 용이 제게 호의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 놓치면 다신 만날 수 없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젤의 등을 떠밀었다.
“좋아.”
단단한 심지가 타오르는 푸른 눈을 앞에 두고 화산의 용은 어쩌면 그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달리.
*
가젤은 화산의 용이 소개한 ‘둥지’를 보고 그만 말을 잃었다.
글쎄. 둥지가 맞긴 하지. 용이 아닌 인간의.
“저기, 여긴….”
노바레 공작저잖아.
말을 끝마치지 못한 가젤이 뒷말을 삼켰다. 삼키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그만 척수반사처럼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뭐야?”
하필 요즘 들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제게 말을 붙여올 때면 그나마 느껴지던 일말의 애정마저 더 느껴지지 않는 이의 음성은 불쾌한 티를 감추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있던 가젤은 또 가슴이 쓰리고 말았다. 어렵긴 했어도 저를 특별히 여기던 친구의 본심을 알아버린 것 같아 그랬다.
화산의 용은 이 흥미로운 재회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관전했다. 제가 아무리 장난을 쳐도 흥미 없던 레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가젤을 끌고 온 게 정답처럼 느껴졌다. 알비레오의 관심을 끄는 일엔 제법 품이 든다. 물론 언제나 냉소적이던 그의 변화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레오는 제멋대로 계약을 파기할 땐 언제고 불쑥 찾아와 노바레 공작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화산의 용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저 멍청한 용이 또 사고를 쳤군. 그녀의 장난에 반응해봤자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될 뿐이니, 레오는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무시해줄 셈이었다. 오늘은 기어이 공작저를 나가기에 드디어 계획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했건만, 가젤 톰슨이라는 강수를 둘 줄이야. 천하의 알비레오도 그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돌아가.”
단 한 마디를 위한 근육의 움직임에 턱이 욱신거렸다. 그깟 별거 없는 주먹에 후유증 따위가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마치 환상통처럼 통각이 되살아났다. 레오는 눈앞의 시각 정보와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환상통에 불쾌감이 일었다.
‘성가셔. 눈에 거슬린다고.’
항상 웃는 가면을 쓰고 있던 레오의 눈이 빛을 잃고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다시금 제 버디를 자처하는 옛 계약룡의 장난질임에 놀아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젤이 당장 제 눈앞에서 사라져준다면 이번 일은 후하게 불문에 부쳐줄 셈이었다.
그러니 가젤이 떨리는 주먹을 감추고 다시 푸른 눈으로 제게 날을 세웠을 때, 울컥 차오르는 분노와 혐오를 감출 길이 없었다.
“레오. 네가 날 부른 거야?”
“뭐?”
“화산의 용까지 이용해서 쥬노와 날 떨어뜨릴 셈이었어? 지난번 일로 우린 끝난 거잖아.”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말아줄래?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다니. 노바레를 뭐로 보는 거야?”
“그럼 이 용이 왜 자신의 둥지라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지금 쥬노가 날 찾을지도 모르는데….”
구역질이 치미는 단어의 조합에 레오의 표정이 우그적 구겨졌다. 아마 총이 있었다면 이번엔 실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태워죽일 듯 서로 노려보는 가젤과 레오의 사이에 멀뚱히 상황을 구경하던 화산의 용이 고개를 쏙 끼워 넣었다.
“너희 왜 싸워? 사이 좋았잖아.”
그 말에 순간 가젤의 얼굴에 옅은 슬픔이 스쳤다. 레오와 사이 좋았던 시절이 마치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가젤은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고, 레오는 그의 모든 걸 긍정할 수 없었다.
“궁금해서 데려왔는데 또 싸우네.”
화산의 용이 흥미가 식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난 싸우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아카데미 때처럼 좀 더 어울리는 걸 보고 싶었는데.”
“잠깐. 잠깐만. 아카데미라니.”
풀리지 않는 의아함에 가젤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난생처음 보는 용이 제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를 알고 있다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가젤을 보고 화산의 용은 그제야 기분 좋은 콧김을 뿜었다.
“나 버디야!”
가젤은 제 기억 속 번개의 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레오의 변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종종 계약룡을 장난감 바꾸듯 갈아치우는 자였으니까.
레오는 가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가젤의 생각 따윈 옛날부터 눈에 보이듯 뻔했다. 그는 거짓말도 할 줄 몰랐고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게 잘못됐든 아니든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바보처럼 모든 걸 긍정했다. 그런 가젤을 원했다. 특별함에 취해 점점 자아가 거대해지는 장난감은, 알비레오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절에 레오하고 계약했던.”
“뭐?”
예상치 못한 과거형 답변에 가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의 터져 나왔다 따위야 알 바 아닌 화산의 용은 흥분한 목소리로 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때는 네가 위버가 아니어서 장난도 많이 쳤는데. 기억 안 나? 갑자기 망토가 위로 솟는다거나, 아무것도 없는 혼자 넘어진다거나 했던 것들.”
대부분 가젤이 피해자인, 버디만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내내 심각하던 가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제게 장난을 친 용이라는데 싫지가 않았다. 위버가 되지 못했더라면 평생 몰랐을 진실이 반가웠다.
“그렇구나. 네가 그 용이었구나. 그때는 레오의 계약룡이 항상 궁금했어.”
본인은 평생 볼 수 없을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시절에 언제나 텅 빈 공간에서 홀로 넘어진다든가 책이 날아다닌다거나 하는 심령현상을 겪었더랬다. 당시엔 그저 덤벙대거나 잠을 못 자서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었다. 레오가 작게 웃어줬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레오가 웃으니 가젤도 그저 웃고 말았다.
추억에 잠긴 가젤의 머리 위에서부터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목소리가 내렸다.
“이 멍청한 용이 또 장난을 쳤나 본데, 난 어울려 줄 생각 없어. 돌아가, 가젤.”
“너무해, 레오. 예전처럼 다정하게 버디라고 불러주는 건 어때?”
“둘만 있으면 못 불러줄 것도 없지.”
싱긋 웃은 레오가 버디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장단을 맞춰 가젤을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그렇지만 이미 레오를 긁을 수 있는 장난에 눈을 떠버린 버디는 아이처럼 웃으며 가젤의 편을 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 거야? 노바레의 이름이 울겠어, 레오.”
“아니…. 난 괜찮은데….”
“쉿. 가만히 있어, 친구.”
레오가 한숨을 밀어냈다. 노바레의 이름을 들먹이며 대접 운운한다면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는 노바레의 이미지를 잃을 수 없는 몸이었고 어느덧 불을 밝힌 가로등에 두 사람의 모습이 훤히 노출된 까닭이었다.
가면을 쓰는 게 어렵지 않은 레오는 밝게 웃는 얼굴로 가젤을 공작저 안으로 들였다. 쥬노에게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에 하룻밤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며 차게 웃자, 가젤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서로에게 할 말이 남아있었다. 기나긴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
노바레 공작저의 화려하고 웅장한 복도를 걷는 동안 레오와 가젤 사이에 대화가 실종했다. 가젤은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레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날의 총성을 떠올렸다.
‘타앙-!’
지금 살아있다 하더라도 고통은 실재한다. 총알이 날아든 순간 엄습한 그것은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레오가 선사한 죽음의 공포와 고통은 그날 가젤의 잠재의식 깊숙이 뿌리내렸다. 가젤은 차게 식은 주먹을 작게 말아쥐었다.
그 모습을 흘끗 돌아본 레오는 누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작게 한숨 쉬었다. 중정을 따라 날고 있는 저 자유분방한 화산의 용이 원하는 대로 되고 말았다.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레오는 그녀에게서 제 모습을 보곤 했다. 닮은꼴인 그녀의 흥미본위였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가젤은 모르겠지만, 버디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레오는 저와 가젤의 과거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그녀가 느낀 호기심과 흥미만큼은 인정했다.
그저 레오는 그날, 가젤의 눈 속에서 반짝이던 별의 기억이 역겨울 정도로 싫었다.
‘내가 알던 가젤 톰슨은 죽었어.’
비록 도금처럼 벗겨지면 별거 아닐 붉은 머리카락이지만, 알비레오는 노바레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과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같은 것의 가치를 높이 샀다. 마치 먼 옛날 노바레가 거둬들인 뒷골목의 소년처럼.
레오가 바라본 가젤 역시 두뇌와 능력 모두 뛰어난 가치 높은 인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젤에게 느낀 가장 큰 매력은 ‘열등함’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우정보다 큰 우월감. 위버의 자질 하나로 갈라지는 지독한 입장 차이.
‘언제나 내 뒤에 있어야 할 네가 날개를 달다니.’
아랫입술을 짓씹은 레오가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커다란 아치형 창이 여러 개 나 있는 방은 손님이 기거하는 곳이라기에 지나치게 훌륭했다. 가젤이 노바레의 규모에 놀라는 사이, 레오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인사를 고했다.
“여기가 네 방이야. 내일 아침이면 널 다시 데려다 주라고 해놓을게.”
“아…. 응.”
“그럼.”
쿵 닫히는 문틈을 타고 안쪽에서 가젤의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풀썩 침대가 가라앉는 소리까지 들은 레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묘한 밤이었다. 제 버디를 자처하는 옛 파트너가 가젤을 끌고 와 저택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될 줄이야. 아카데미 시절에도 겪은 적 없는 사건에 실소가 다 나올 지경이었다.
레오가 제 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 일의 원흉이라고도 볼 수 있는 화산의 용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를 반겼다.
“레오. 운명이라는 게 재밌지 않아?”
그녀의 붉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평소라면 시큰둥했을 레오의 눈이 작게 반짝였다. 그녀와 계약 관계일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사고의 공명이었다.
“어쩐 일로 생각이 맞네.”
“그래도 가젤을 데려오면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매사 감정에 큰 변화의 폭이 없는 레오가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볼멘소리를 내는 버디의 음성에 레오는 어깨를 으쓱 털었다.
“글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버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화산의 용은 천진한 아이처럼 감정의 변화가 뚜렷했다. 귀찮긴 해도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았다. 체스판 앞에 선 레오의 느긋한 말투에 버디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너 가젤 좋아하잖아. 네가 가젤만큼 좋아했던 친구는 본 적 없는데.”
레오의 손끝이 홀로 고고한 킹을 훑고 천천히 미끄러져 폰에 닿았다. 아주 살짝 힘을 주자 달그락 소리를 낸 작은 기물이 킹 앞에서 힘없이 쓰러져 내렸다.
“모든 장난감엔 역할이 있어, 버디.”
그녀가 레오의 ‘버디’ 소리에 꼬리를 한 번 살랑였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낯선 반가움이 용의 발끝을 간지럽혔다.
“장난감은 주어진 역할을 다 할 때 가장 사랑스러운 법이야.”
이 둘의 관계는 무척 흥미롭다.
화산의 용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소리를 삼키고 슬그머니 레오의 방을 빠져나왔다. 레오의 위세를 등에 업지 않아도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자유로운 용이었다. 커다란 날개를 펴 노바레 공작저의 상공을 활공하던 그녀의 눈에 먹잇감이 포착됐다.
낯선 곳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던 가젤이 한순간 눈에 가득 들어찬 화산의 용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창문을 여는 가젤에게 들어갈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비록 저를 레오의 앞으로 납치하긴 했으나, 달을 등에 인 화산의 용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젤은 넋을 놓고 밤하늘과 어우러진 용의 모습에 경탄했다.
“너.”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헤 벌리고 있던 입에서 침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가젤이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레오랑 왜 싸웠어?”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싸웠다고 할 수 있나? 일방적인 살인 미수라고 생각하는데. 미수도 아닌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싸운 게 아니야.”하자, 화산의 용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레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긴 해도 나쁘지 않아.”
“…그건.”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 위에서 한데 뒤엉켜 쓰러졌다.
“널 데려오면 레오가 좀 더 반응을 보일까 했는데, 으음. 레오한테 한 번 가봐!”
“어? 아니, 잠깐. 레오는 날 안 만나고 싶어해.”
“그렇게 안 보이던데.”
못마땅한 듯 눈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에 가젤은 어째서인지 쥬노가 떠올랐다. 전혀 닮은 부분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정반대의 두 용인데, 놀랍게도 그녀의 위로 제 새하얀 용이 겹쳐 보였다.
“레오는 정말 싫은 건 상종도 안 해.”
해답을 찾은 듯 경쾌한 음성에 가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레오가 제게 했던 말들이 우박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 레오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저의가 어떻든 간에 그날 자신은 레오에게 못다 한 말이 분명 있었다. 안절부절 제자리를 오가는 가젤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의 “달려.” 그 한 마디에 그가 육중한 문을 힘껏 밀고 새벽의 텅 빈 복도를 달렸다. 중정에서 레오의 방을 알려준 화산의 용 덕분에 가젤은 어렵지 않게 그의 방 문앞에 설 수 있었다.
스읍. 후우.
크게 심호흡한 가젤이 문을 두드리자, 사용인이라고 생각했는지 허락이 금세 떨어졌다. 작은 마찰음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 사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레오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 한가득 별이 담겨 있었다.
“…레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레오의 얼굴이 불시에 굳었다.
“별, 같이 봐도 될까?”
죽임을 당할 뻔하고도 또 내 옆을 찾는 바보 같은 가젤 톰슨.
레오의 입술이 달싹이다 곧 굳게 닫혔다. 침묵으로 대신한 긍정에 레오는 쓰게 웃으며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유성절만큼은 아니어도 별이 가득한 하늘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난 그날 네가 한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어.”
가젤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레오는 그에게서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고독의 맛에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가 흐려지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제게 주어진 특별함을 선망하던 소년의 시선이 흐려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가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 말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레오의 자조에 가젤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따라붙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그 눈길이.
“상관없어. 난 널 내가 알던 가젤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나는 상관있어.”
레오는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정을 호소하는 가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친구를 잃는 게 생각보다 더 힘들더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가득한 별 무리가 싫었다. 그 용과 똑같아 보여서. 그 용을 보는 것 같아서.
“가젤, 네가 좋아할 만 한 이야기를 해볼까?”
“응?”
“인간은 모두 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혹할만 한 이야기에 가젤의 몸이 레오를 향해 기울었다.
“정말? 그건 꼭, 꼭 우리가….”
“용 같다고?”
“응!”
감정 없는 음성에도 가젤의 뺨은 붉게 상기됐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나누던 대화 같았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애석하게도 기뻐하는 가젤과 달리 레오는 이 이야기를 무척 싫어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태어난 별은 어떤 모습일까?”
“가설대로라면 우린 그 별을 영원히 알 수도 볼 수도 없을 거야. 우리가 보는 이 빛은 이미 억겁의 시간을 건너 달려온 거니까. 이미 그 별은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치만 이 존재하는 빛을 좇는다면 언젠가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꼭 우리가 아니어도 말이야.”
레오의 생각에 저 가설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동화였다. 그토록 특별한 운명이라면 이토록 도박 같은 인생이 존재할 리 없었다. 순수한 열망을 지닌 이로부터 빼앗은 재능과, 오로지 빌어먹고 사는 게 전부였던 자에게 부여된 재능. 한데 그 순수한 열망에 선물까지 부여한다면, 제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저 억겁의 시간을 건너온 기적의 별빛은 알비레오에게 있어 한낱 반딧불이만도 못한 것이었다.
“설령 그렇대도 너와 난 영영 수평선처럼 걸어가겠지.”
“레오.”
“날이 밝으면 이 시간도 끝이야. 이것까지 무시하면 내 버디가 또 귀찮게 굴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정말 그뿐이야.
변명 같은 말이 이어질 것 같아 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가젤은 눈동자 가득한 별을 털어내고 제 친구를 담았다. 어려서는 좀 더 커 보였던 레오였는데 어느덧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때로 추억을 공유한 친구 사이가 달라지는 주변 환경으로 인해 멀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들 한다. 레오의 조금 어긋난 애증이 원망스럽지 않은 건 그와의 추억이 그만큼 큰 탓이 분명했다. 그만큼의 레오를 이해하고 있어서.
“버디가 널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 용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
레오는 따지고 보면 이제 계약 관계도 아닌 그 말괄량이 용을 들먹이는 가젤의 저의를 알 수 없어 불쾌했다. 저를 웃겨보겠다는 마음도 그저 억지스러운 유흥에 지나지 않을 게 뻔한데 말이다.
“둘이 닮았어.”
서툰 점이나, 잔인할 정도로 순수한 점 같은 것들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하다는 걸 그 둘만 몰랐다.
크게 웃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레오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아 가젤이 입술을 꾹 물고 웃음을 참아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레오에게 익숙한 가젤 같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고작 그 한 마디에 가젤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구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
화산의 용은 떠날 채비를 마친 가젤이 조금 더 남아있어 주면 좋겠다 생각했다. 가젤이 있으면 레오가 조금 더 감정 표현이 풍부해지는 걸 보고 있는 게 무엇보다 즐거운 탓이었다.
“저기, 버디는 레오를 좋아해?”
가젤의 물음에 버디의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흥미를 관심으로 치환한다면 인간 중 제 관심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건 레오였다. 가젤은 모르겠지만, 지금 저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레오의 시선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좋아해.”
그 말 한마디에 안심한 듯 웃는 가젤 톰슨 역시, 그녀의 기준으로 ‘좋아하는’ 범주에 속했다. 둘이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에 부풀어 있던 마음은 마치 파괴적인 실험을 앞두고 설레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바위에 부딪혀 깨질 것만 같았던 달걀은 보기보다 말랑한 구름에 닿아 아무 상처 없이 돌아왔다. 그 옛날, 제 장난에 눈물을 훌쩍이던 꼬마 가젤은 여기 없었다.
언젠가 레오 곁에서 짓던 웃음 그대로 웃는 그는 새로이 태어난 별.
“버디 네가 레오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버디가 두 눈을 깜박였다.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레오와 깊은 사이였던가.
“넌 참 이상한 말을 하네.”
“그래?”
“옛날부터 재미있는 인간이긴 했지만.”
가젤은 제가 없는 제 추억 이야기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곳에 레오와 버디가 있듯, 저를 기다릴 쥬노가 있는 그곳으로.
“다음에 만날 때는.”
숨을 한껏 들이마신 가젤이 운을 뗐다.
“나도 널 친구라고 생각해도 될까?”
친구가 그렇게 중요한가.
버디는 가젤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갯짓 한 번에 점점 밝아지는 가젤을 보며 퍽 좋은 기분이 들었다. 제 장난에 레오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어 주면 나오던 그 미소만은 변치 않았다.
“고마워, 버디!”
손을 붕붕 흔들고는 제 용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가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버디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그녀의 꼬리가 좌우로 두 번 흔들렸다.
‘친구가 되는 것에 허락이 필요한 건가? …인간은 참 쉬운 걸 어렵게 생각해.’
그에 비해 성격이 약간 꼬여있을지언정, 제 감정에는 솔직한 레오는 버디에게 있어 너무도 신인류 그 자체였다. 흥미가 관심이 되고, 관심이 호기심이 되는 감정의 이동은 마치 관성의 법칙과도 같았다.
버디가 방에 돌아왔을 때, 레오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쉽게 볼 수 없는 레오의 모습을 하룻밤 사이에 여러 번 볼 수 있는 건 그녀에게 제법 쏠쏠한 즐거움이 되었다. 너무 감정이 없어서 사실 인간이 아니라 인형은 아닐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레오. 그러고 보니 가젤이 떠나기 전에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
“보나 마나 쓸데없는 말이었겠지.”
“그런가? 내가 레오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하던데.”
창가에 대고 있던 그의 손끝이 힘을 못 이기고 하얗게 질렸다. 그의 손끝에 긁힌 창문이 뽀드득 비명을 질러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게 그런 말까지 듣고…. 우리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 많이도 흐른 모양이지. 역시 건방져, 가젤. 언제부터 네가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게 된 거야?’
조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버디, 준비해.”
망토를 걸치는 레오의 부름에 버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갈 거야?”
그러면서도 버디는 착실히 그의 뒤를 따랐다. 계약룡이 아닌 저를 부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무척 신 나는 일이었다. 레오는 용이 아닌 개 산책이라도 시키는 기분이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분노의 감정을 삭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날 가르치려 드는 건 못 참겠네.”
“응? 그런 일이 있었던가?”
질린 눈빛으로 버디를 흘긴 레오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 털어냈다.
“하아. 너랑 있으면 기운이 빠져, 정말.”
“무슨 소리야!”
투덜거려도 잔뜩 신 난 버디가 “다음엔 가젤도 같이 놀자.”하고 던진 말에 레오는 크게 웃고 말았다. 그토록 큰 레오의 감정은 처음이라, 버디는 말없이 그의 웃음을 바라봤다. 눈물까지 날 정도로 웃은 레오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
결코 없어, 버디.
저 영영 볼 수 없는 별의 본래 모습처럼 말이야.
뒷말을 삼킨 레오는 저를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 버디를 살폈다. 세상엔 두 개의 문이 있다지. 한 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열리는 다른 한쪽의 문. 레오는 문득 그 문 중 하나가 이 바보 같은 용은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가젤 톰슨에게 생긴 기적과 비슷한 무언가가 제게도 일어났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레오가 ‘그럴 리 있나.’하고 제 망상을 갈무리했다. 오늘은 어딜 갈 건지 묻는 버디에게 그는 미소를 띤 채 친절히 답해주었다.
영영 닿지 않을 빛을 삼킬 어둠을 찾아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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