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BL] 오 캡틴, 마이 캡틴

스페이스오페라 / 이니셜 치환 / 부분 공개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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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사 H! 오늘부로 함장님의 보좌를 명받았습니다.”

 

눈앞에서 바짝 기합이 들어가 경례하는 순둥한 얼굴을 보고 I가 이마를 짚었다.

 

‘말은 바로 해라. ‘임시’ 보좌겠지.’

 

구태여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잔뜩 긴장한 H가 불쌍한 탓은 아니었다. I는 원체 붙임성 좋은 성격이 아니었고 그저 지금쯤 병상에 누워 부러진 갈비뼈를 붙잡고 샐샐 웃고 있을 제 실 보좌관의 생각에 울컥 짜증이 치민 까닭이었다.

슬쩍 눈앞의 신참을 살피니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무척 어려 보였다. 책상에 삐딱하게 걸쳐 서 있다 보니 생각도 말도 삐딱하게 나가버린다.

 

“졸업은 했고?”

“예, 지난달에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배에 힘을 준 채 외치는 목소리에 I이 팔짱을 끼고 있는 손끝으로 팔꿈치를 두드렸다.

 

“차석….”

 

아차 싶었는지 커다란 눈망울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I가 제 턱을 쓸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본데, 난 차석 안 받습니다.”

 

냉기가 쌩쌩 부는 상관의 모습에 H가 뒷머리를 긁었다. 이 호랑이 사령관, 듣자하니 수석만 받는다는 콧대 높은 소문이 있던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저… 그럼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 단호한 목소리에 저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H가 목에 힘을 줬다.

 

“차석이지만, 항해술은 자신 있습니다!”

“실전 경험 있습니까?”

“실습차원에서 B 엔터프라이즈에 오른 적 있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I의 모습에도 H는 뒷걸음질 한 번을 치지 않았다. 조금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 I라는 독설가는 말랐다 뿐이지 어깨며 골격이 단단하게 잡혀있는데다 키도 훤칠하게 커서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쨍한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I의 모습은 묘한 위압감을 줬다.

 

“H ‘차석’ 항해사. 지금 내 말 이해 못 합니까? 나는 실습 말고 실전 경험을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실전 경험도 없는 차석 항해사를 내가 왜 받아야 합니까?”

 

그 말에 입이 딱 붙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I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기에 감히 대들 수 없었다. 분한 듯 저 너머 흰 벽만 노려보는 H의 모습에 I가 피식 웃어버렸다. 혈기왕성한 건 좋다만, 실전 경험도 없는 꼬맹이한테 뭘 믿고 항해를 맡겨?

 

“상부에는 내가 얘기하겠습니다. 가봐도 좋아요.”

 

그 담백한 말에 H가 기어이 벙쪘다. 진짜 이대로 가라고? 고작 차석이라는 이유로? 꼴찌를 한 것도 아니고, 차석으로 졸업했다는 이유로?

기가 막혀 “I 함장님!”하고 말을 붙였더니 매서운 눈초리가 돌아왔다.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H 항해사.”

 

생긴 건 곱상하니 생겨서 하는 짓은 소문대로 재수가 없다. H는 마음 같아서는 있는 대로 힘을 줘 문을 박차고 싶었는데 결국 허리를 접어 공손히 인사한 뒤에 얌전히 함장실을 나서야 했다. 아무렴 함장 중 가장 잘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I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소음도 없이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I가 책상으로 돌아가 수화기를 들었다. 바로 연결되는 교환처에 “I입니다.”하자 가타부타 별말 없이 사령부로 연결이 이뤄졌다.

 

“차석을 보내면 어쩌자는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다짜고짜 따져 묻는 소리를 예상이라도 했는지 수화기 너머에선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고루한 되물음이 훌쩍 날아들었다.

 

“수석 아니면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고집스런 목소리에 수화기로 허허 웃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차이가 있다고 고집을 부려?]

“실전 차이는 무시 못합니다. 실전 경험 있는 수석으로 다시 보내십시오. 저도 양보 못합니다.”

 

눈두덩을 꾹 누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씨름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자네가 그토록 찾는 수석 말이네만, 그 실전에서 돌아오질 못했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감겨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예?”

[공문은 읽어봤나?]

“아직 문서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구두로만 전달받았습니다.”

[가끔 보면 자네도 참 저돌적이란 말이야. 이만 끊겠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기계가 문서를 토해냈다. 재빠르게 활자를 훑어내린 I가 “아, 씨발, 진짜.”하고 욕을 씹어뱉으며 문을 박차고 나섰다.

 

*

 

팔자 좋게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뒤적이는 모습에 I가 그 뒤통수를 갈겨주었다. 뻑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머리에 진짜 돌대가린가 싶기도 하고. 돌아보는 매서운 눈매가 I를 본 순간 헉하며 순둥하게 풀어졌다. 헉…. 캡틴, 어쩐 일이세요….

 

“M 부함장님.”

“넵.”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서늘한 눈초리에 M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일단 병문안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거 왜 얘기 안 했습니까?”

“뭐를….”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 지는 종이를 쭉 훍어본 M이 태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말씀드렸는데? 내일 출항 맞지 말입니다.”

“야.”

 

오랜만에 들어보는 “야.” 소리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옛날 군기 잡던 시절에나 들어봤던 소리였다. 예전처럼 불시에 주먹이 날아들까봐서 두 눈을 질끈 감은 M을 바라본 I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참자. 참아야 한다. 허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M이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이게 말 한 겁니까? 내용은 죄다 빼먹었잖습니까.”

“아이, 뭐, 이렇게 문서로 오면 이제 다 아실 거를 가지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웃기지 말입니다.”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농담을 던졌는데 I가 “아오, 이걸 확 그냥!”하고 손을 올렸다. 팔을 들어 제 머리를 가드한 M이 아무리 지나도 타격감이 없어 실눈을 뜨고 봤더니 I는 심각하게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졸업생 하나가 실종됐다잖아요. 이게 가벼운 일입니까?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예?”

“그 구출을 또 우리 캡틴이 맡으셨으니 말 다했지 말입니다.”

 

크으. 쌍 따봉을 들어 보이는 모습에 I가 이마를 짚었다.

 

“근데 또 우리 부함장은 거기 가만히 누워 계시고, 그렇죠?”

“부상이 컸지 말입니다.”

“자랑이다.”

“헤헤.”

“그래서 지원 요청했더니 차석을 보내왔더라고요.”

“엇. 캡틴 차석 안 받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M을 보며 I가 질린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이 맹한 놈도 수석은 수석이었는데. 오히려 오늘 봤던 차석이 더 똘똘해 보일 지경이었다.

 

“M 부함장님.”

“넵.”

“문서 제대로 읽어 보셨습니까?”

“당연하지 말입니다.”

“실종자가 누군지 압니까?”

“어….”

 

큰 눈이 데굴데굴 구르기만 하고 마땅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결국, 씩 웃고 마는 얼굴에도 이미 M과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I에게는 그리 미워 보일 것도 없었다.

 

“아카데미 수석 생도입니다.”

“네에?”

“우리가 그 생도 찾아오는 임무를 맡았다고, M아.”

 

얼굴을 감싼 I이 끙 앓는 소리를 내니 그제야 M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켰다.

 

“아니, 어쩌다가 실종됐다는데요?”

“실전 투입됐다가 그 길로 실종 처리 됐어. 졸업식에도 없었다나 봐.”

 

M은 제 입을 합 다물었다. 하긴. 임무 전달받은 날 그 길로 만취해 어떻게 전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걸 알려봐야 제 까칠한 함장님 기분만 건드릴 것이 뻔하니 되도록 모른 척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침만 꿀꺽 넘기고 피로에 찌든 잘생긴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이번엔 누가 동행합니까?”

 

그 말에 I가 얼굴을 감쌌다. 호기 가득하던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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