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BL] 아킬레우스의 고해
포말 커미션 작업물 / 이니셜 치환 / 부분 공
신은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K는 종교가 없었다. 공평하게 기회를 나누지 않는 신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았다.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 K에게 있는 것이라곤 춤뿐이었다. 노래라고는 고작해야 음악 시간에나 부르던 가창 또는 홀로 집에서 남몰래 흥얼대던 콧노래가 전부였다. 변변찮은 스승이 있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기에는 퍽 부끄러웠으니까.
제 춤을 알아봐 주고 선뜻 거두어준 소속사엔 그저 고마웠다. 그간 흘린 피땀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생각에 자신은 턱없이 부족했고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날마다 지옥이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온몸에 멍이 가득했다. 파스를 얼마나 붙이고 뗐는지, 살이 다 터서 매일 보습제를 챙겨 발라야 할 정도였다. 남들은 다들 저를 보고 연습벌레라고 독종이라고 수군댔다. 충분히 잘하는데 왜 그리 목을 매느냐 물었을 때 K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제 절박함은 아무도 몰라주었고 물론 누구도 알아줄 필요는 없었다.
거울 속의 제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턴을 돌다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던 땀방울에 미끄러져 그만 자세가 무너졌다. 아, 넘어진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K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어깨와 다리만은 부상을 피해야 했다.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K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시끄럽던 노랫소리가 뚝 멈췄다. 숨을 몰아쉬면서 위를 올려다보니 마치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얼굴이 무뚝뚝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뷔하기도 전에 몸 부서지겠다.”
살살해.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얼음이 적당히 녹은 페트병을 건네주던 H. H는 어땠던가. K는 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저보다 네 살 많은, 가수를 꿈꾸지 않았다는 형. 연습생 중 가장 잘생겼고 가장 겉돌았던 그 형. 남을 배려하면서도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알던 그 형.
K가 페트병을 받아들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감각에 오늘 저녁쯤엔 피멍이 생기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넌 춤도 잘 추는 애가 연습 진짜 열심히 한다.”
“형도 많이 하잖아요.”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켠 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H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뭐가 물이고 뭐가 땀인지 알 수 없는 K의 까무잡잡한 모습을. 소매를 끌어다가 그 주변을 문질러 닦아주자 낯선 스킨십에 도톰한 눈매가 어색하게 접혔다.
“내가 너랑 같냐?”
K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연습생 중 가장 많이 혼나는 형이니까. 그래도 K는 자기 다음으로 연습을 가장 많이 하는 게 H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H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세울 거라곤 춤뿐이라 그 영역이 침범당했을 때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망쳐 울음을 토해내는 자신과 판이하였다.
“내가 뭐 백 날 해봐야 다른 사람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 내가 아무리 계속 연습을 한다고 해도 너희 경험치도 계속 올라갈 텐데. 지금 네가 100이면 나는 이제 5? 내가 100이 될 즘엔 네가 아마 200이 넘을 거고. 그리고 너 지금 독보적이야. 연습생 중에 100되는 애가 너 말고 또 없잖아. 얼마나 대단하냐, 그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그러다 몸 다치면 네 손해야.”
땀에 전 머리를 헤집어 주는 손은 저보다 한참이나 컸다. K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갑자기 왜요?”
평소에 친하다기에는 어폐가 있는 형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K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H는 대수롭지 않게 “너랑 데뷔하고 싶은데 너 다치면 안 되잖아.” 했다. 잘생긴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으려니 어째 쑥스러워 K가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방금까지 H가 헝클어놓은 탓에 붕붕 떠있었다.
“저랑 왜요? 다른 애들도 많은데.”
“난 연습생 중에 네가 제일 대단하던데.”
“진짜요?”
“어. 그리고 나 춤도 잘 가르쳐주잖아.”
장난스러운 투에 K가 부슬부슬하게 웃었다. “사실 그거 노린 거 아녜요?” 하니 H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니까 다치지 말라고.”
결코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는 말투였지만 K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꽤 위로를 받았더랬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