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winJin ::Story::

《화려한 밤》

커미션 신청본

ⓒ실락원

*

얇은 커튼 직물에 거른 고운 햇살이 창가로 비쳐들고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증기가 뽀얗게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조용한 오후였다. 엘빈과 진은 거실 소파에 배를 깔고 엎드려 나른 한 휴식을 말없이 즐기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엘빈은 정자세로 책을 읽으며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앉았을 뿐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함께 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를 듣 고 바깥에 나가 본 엘빈이 배달부도 없이 문간에 덜렁 놓여 있는 고풍스럽고 휘황찬란한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봉투는 얼핏 보기에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 가지의 장치로 칭칭 감겨 있었다. 엘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진에게 건넸다.

“이건 뭔가, 진?”

“아, 그거...”


진은 꽤나 귀찮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가 손을 대자 편지에 감겨 있던 봉인은 마치 엉킨 실을 가위로 잘라 버린 것처럼 툭 끊겨 스르르 녹아 버렸다. 진은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내용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착 소리가 나도록 종이를 그대로 다시 접었다.

“귀찮은 일일 뿐이야. 무도회 초대장.”

꽤 규모는 큰 모양이지만, 뭐 상관은 없으려나...말끝을 대강 흐리던 진은 엘빈의 눈에 슬쩍 흥미가 어리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진은 허겁지겁 뒷말을 덧붙이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런 덴 말이야, 쓸데없이 격식 차리기만 해서 불편하다고. 거기 가봤자 한자리 하는 놈들끼리 모여서 으스대면서 주워 먹을 부스러기나 찾을 텐데 뭐하러 가?”

그러니까 그 무도회는 몹시 ‘정치적’인 모임이었다. 단순히 춤이나 추면서 술이나 마시며 즐기면 그만인 사교 파티가 아닌, 교활한 손익 계산과 숨겨진 속셈 따위가 곳곳에 덫처럼 놓여 있는 복잡한 자리. 물론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진의 시각에서 그랬다는 뜻이며 그런 판단에는 다소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진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엘빈이 정치나 계산 따위를 별로 싫어하 지 않았으며 그런 숨막히는 자리를 경험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허어. ...재밌을 것 같은데.”

“뭐?”

“자네 지인들은 만난 적이 없어서. 소개받기에 괜찮은 기회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닌가?”

엘빈은 힘이 쭉 빠져버린 진의 손에서 초대장을 빼내어 펼쳐 보았다. 봉투만큼이나 아름답고 화려한 내지 장식과 어렵고 유려한 어휘들이 마구 남발되는 본문 내용에 엘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씩 웃었다. 이 정도의 격식을 요구하는 자리라면, 한 번쯤 가 보아도 즐거울 것 같지않은가. 엘빈은 어느 사교계에 내놓기에도 손색없을 만큼 교양있고 신사적인 남자였지만, 아쉽게 도 조사병단에서 일할 때는 그의 그런 면모를 드러내 보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진이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역시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게 엘빈의 본심이었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음.”

진은 한숨을 푹푹 쉬며 골치아픈 티를 냈지만 이미 초대장에 정신을 쏟고 있는 엘빈의 결정을 되돌릴 방도는 없었다. 하긴, 엘빈이 그의 지인들을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할 만큼 그들의 사이는 꽤 진전되어 있었다. 연인끼리의 관계에 그런 게 중요한가 싶으면서도 엘빈이라는 사람의 성격과 살아온 배경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지인들을 소개해달라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오래 참았다 싶었 다. 결국 진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엘빈의 결정을 수긍했다.

“알겠어, 가면 되잖아.”

“분명 즐거울 거네.”

엘빈은 싱긋 웃으며 다시 봉투 안에 곱게 접어넣은 초대장을 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런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진에게는 마냥 재미있는 자리가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기는 해도, 엘빈은 자신의 존재만으로 진을 기분좋게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

무도회에 가기로 결정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단순히 무도회에 가자, 라고 엘빈과 진 둘이서 합의를 하는 것 이상의 일이었다. 무도회라는 것은 남들에게 그들을 내보이는 자리이므로, 적어도 추레한-집에서 늘상 입는 편한 옷 따위를 입고 갈 수는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엘빈은 늦지 않게 이 골치아픈 일을 떠올렸고 그 덕에 두 사람이 파티의 드레스코드를 완전히 무시한 채 무도회장에 입장하는 꼴사나운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혹시, 무도회 복장에 관해서는 생각해 둔 게 있나?”

엘빈은 초대장의 가장 아래에 쓰여 있는 드레스코드의 안내문을 읽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며 진에게 물었고, 진은 태평한 낯으로 큰일이 날 소리를 해댔다.

“그냥 집에서 입는 거 중에 제일 아끼는 거 입고 가면 안 돼? 그거, 빨간색 후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보자, 군인 신분은 제복 또는 정복 권장. 자네, 제복 있지 않나?”

엘빈이 드레스코드를 입 밖으로 소리내어 또박또박 읽자마자 진은 기겁하며 머리를 헝클었다.

“그거 엄청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단 말이야.”


진의 볼멘소리에도 엘빈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 그의 투정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가드라인 제복이라고 했던가, 그거.”

“정확히는 후계 천사 녀석한테 선물 받은 옷. 아, 그 녀석이라면...”


뭔가가 생각난 듯 급히 허공에 손을 바삐 놀리며 누군가의 소환진을 그려대는 진을 바라보는 엘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후계 천사? 진의 후계자라니? 그런 그의 의문에 답하듯 진이 그린 소환진은 희미한 빛을 뿜었다. 이카엘, 진의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에 답하듯 터무니없이 가볍고 톡톡 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공중에서 튀어나왔다.

“와! 이게 몇 년 만이죠? 얼굴도 잊어버리겠어요, 정말!”

상관을 타박하는 것인지 반가움의 표현일지 모를 말을 줄줄 뱉어내면서 이카엘은 허공을 빙빙 돌았다. 어지러울 만큼 주변을 돌아대는 이카엘에도 불구하고 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에게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이번에 열린다는 그 귀찮은 무도회에 가게 됐는데, 나야 제복을 입고 가면 되지만 엘빈은 마땅한 옷이 없어서...여차저차한 사정이 있으니 옷에 대해 잘 아는 네가 적당히 어울리는 걸로 한 벌 골라 주면 안 될까, 라는. 어떻게 보면 턱없이 어려운 부탁을 했음에도 이카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외려 흥분된 기색으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제가 해야죠! 그러잖아도 엘빈 님을 위해 골라 둔 옷이 있어요!”

보통 옷을 잘 알고 좋아한다고 해도 남에게 선물할 옷을 골라서 갖고 있기까지 한가? 엘빈이 그런 타당한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는 커다랗고 폭신한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엘빈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실과 이어진 방으로 잠시 사라진 사이 진은 오랜만에 보는 후계자에게 가볍게 말을 붙였다. 꾸중 아닌 꾸중이라고나 할까, 솔직하지 못한 감사 표시라고나 할까.

“일은 안 하고 이런 것만 하는 거야?”

“제 상관이신 누군가가 갑자기 잠적을 해서 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졸지에 백수가 됐거든요.”

한 마디도 지지않고 대거리를 해 올 기색인 이카엘의 말에 진은 이마를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던 진이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마침 뒤에서 엘빈의 헛기침 소리가 났고, 진과 이카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고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 봐요! 역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니까요?”

“...와,”

진은 얼이 빠진 얼굴로 엘빈의 매무새를 구석구석 뜯어보며 입을 딱 벌렸다. 그의 것과 똑같은 순백의 제복, 엘빈의 듬직한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고급스러운 옷감, 다소의 활동성을 포기할 만 한 가치가 있는 우아하고 맵시 있는 실루엣까지. 평소에도 점잖고 매력적인 신사인 엘빈에게 그런 옷까지 입혀 놓으니 정말로...

“파티장에서 누가 낚아채 가면 어떡하지?”

지금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 주책맞은 소리가 저절로 진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뜻밖의 말에 엘빈의 귀끝이 붉어지는 것도 모른 채 진은 입을 틀어막고 터무니 없이 단정하고 훤칠한 그의 자태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희미한 기대와 어차피 무도회가 거기서 거기지, 같은 체념 따위로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무도회 당일이 되어 있었다. 출발까지 삼십 분쯤 남았을까, 진은 입는 데만도 한 세월이 걸리는 제복을 겨우 걸치고 거울을 보았다. 이리 꼼꼼히 뜯어보니 새삼스레 엘빈의 옷과 한 쌍이라는 실 감이 들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몸을 꽉 조이는 제복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잘 어울리는군.”

그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제복을 차려입은 엘빈은 싱긋 웃으며 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진은 며칠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지나치게 멋진 그의 모습에 넋이 팔려 있다가 엘빈이 제 손을 슬쩍 잡는 것에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어, 음, 뭐야?”

“...이런 자리에는 약간의 과시도 필요한 법이지.”


엘빈은 검지와 엄지를 이어붙여 동그랗게 만든 손가락을 진의 코앞으로 들어올렸다. 엘빈의 손가락 위에는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원 모양의 무언가가 붙들려 있었다. 설마 이건 반지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진이 엘빈을 올려다보는 사이 엘빈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그의 장갑 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별달리 세공을 하거나 돌을 물리지는 않은 단순 하고 심플한 은 반지긴 하지만, 엘빈은 멋쩍은 듯 덧붙이며 제 몫의 반지 안쪽을 보여 주었다. Leoveaneta devwah -평안하라- 루시드 어의 짧은 각인이 그 안에 새겨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가?”
“당연, 당연하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는 진을 불안한 낯으로 내려다보던 엘빈의 얼굴에 그제야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 진은 허겁지겁 자신의 왼손 약지를 매만지며 반지를 몇 번 돌려 보았다. 이거 분명히 커플링, 인거지? 그는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파르르 떨며 감격에 겨워 입술을 벙긋거렸다. 파티 자체는 여전히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지만, 엘빈이 말한 대로 이 반지를 끼고 자신들의 관계를 ‘과시’할 생각을 하니 어쩐지...조금은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진 것도 같았다.

*

에카미아 전역에서 몰려든 인파로 무도회장은 완전히 만원이었다. 진은 무도회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수많은 참석자들의 한껏 멋을 낸 복장에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것 같지? 진은 자신과 엘빈의 등에 꽂히는 수많은 이들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끼며 가능한 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진 스스로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정확히는 모르는 사항이었지만, 그는 등장만으로 가십이 되는 존재였다. 그가 이번 무도회에 참석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무려 에카미아 가디언이 인간을 동반해 무도회에 온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짜하게 퍼졌고, 그로 인해 이번 무도회의 참석자 수는 전례없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진의 신상 정보는 그의 유명세에 비하여 나름 비밀 에 부쳐지는 편에 속했고 따라서 파티 참석자들은 도대체 누가 ‘그 에카미아 가디언’일지 추측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진이 제복을 입고 등장한 순간 파티장은 그에 대한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을 진이 제대로 알 리 없었다.

“사람 너무 많아...”

“뭐, 무도회가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집에 가고 싶어, 중얼거리는 진을 잠시 내버려 두고 엘빈은 빠르게 파티장 내부를 눈으로 슥 훑었다. 파티의 주최자나 기획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말하면 고급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사치스럽고 향락적이며 퇴폐적이기까지 한 취향의 무도회였다. 널따란 홀의 내부는 온통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곳곳에는 샴페인 글라스가 탑처럼 높이 쌓인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홀 가장자리를 따라 초콜릿이 흐르는 인공 폭포 따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미 거나하게 취한 인어들이 그 갈색 웅덩이 안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엘빈 역시 이 정도 규모의 무도회에 참석한 적은 없었기에 진은 그가 약간 긴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있겠군.”

그러나 엘빈은 도전을 거부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거침없는 미소를 입가에 띠고는 진을 홀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가장 타인에게 많이 노출되는 자리, 가장 빛을 많이 받는 자리, 가장 아름답고 무모한 자리로.

“뭐, 뭐하는 거야!”

그러잖아도 아까부터 자신들에게 쏠린 시선에 질식할 것 같았던 진이 엘빈의 귓가에 대고 거세게 항의했으나 엘빈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왼손을 잡아올려 반지에 입을 맞췄다.

“남들의 시선을 피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숙였던 허리를 펴고 그는 태연히 뒷말을 이었다. 엘빈의 푸른 눈에는 드문 장난기가 감돌았다.

“애초에 나와 여기를 오면 안 되는 거였네.”

그러니까 엘빈의 논리는 간단했다. 엘빈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당히 맞서는 게 오히려 가장 나은 해법이라고 말하는 거였다. 그게 지금껏 제법 잘 먹혀온 그의 방식이기도 했고.

“첫 춤은,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그 이상은 바라지 않겠네.”

홀 가장자리에서부터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흥겨운 춤곡의 가락을 띠었다. 그들 주위를 둘러쌌던 이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파트너를 찾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 인파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거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터였다. 진은 못 이기는 체 고개를 끄덕이며 엘빈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

첫 춤을 추고 나자 엘빈은 약속대로 진을 놓아주었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너무나 산뜻하게 자신을 놓아 주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엘빈을 보며 진은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파티에 두 사람이 왔으니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계속해서 얼굴을 비치는 게 예의다. 진이 어딘가에 숨어서 숨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려면 엘빈은 그를 대신해 사람들과 사교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런 속내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아무런 아쉬움 없이 내 손을 놓아 버리는 건 조금 섭섭한걸. 진은 미묘한 기분에 눈을 가린 앞머리를 가지런히 매만지고는 발코니로 향했다.

북적이는 파티장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파티장 바깥은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운이 좋게도 그가 고른 발코니는 연인들의 밀회 장소 따위로 쓰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진은, 오가는 이가 하나도 없는 파티장에도 어김없이 놓여 있는 샴페인 병과 잔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과음하기 좋은 구조다. 물론 이 정도로 도수 낮은 술을 얼마나 마셔야 성이 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은 한숨을 푹 쉬고 샴페인 글라스를 집어들었다. 복잡한 파티장도, 몸을 불편하게 조이는 옷도,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엘빈도. 이 질척하고 불쾌한 감정들을 술로 씻어내고 싶었다.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은 평소 자신이 있던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평소 입던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평소처럼 엘빈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 일탈은 괜찮겠지. 진은 그렇게 자신의 음주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잔을 채웠다.

불이 훤히 밝혀진 건물 안에서는 끊임없이 와글대는 말소리와 더불어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빈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역시 춤을 추고 있겠지? 다른 사람들과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고...여기 처박혀 있는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겠지? 진은 금빛 기포가 보글 보글 끓어오르는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먼저 이곳에 오는 게 싫다고 그토록 고집부렸던 주제에, 여기 오면서도 엘빈의 기분을 맞춰 주러 오는 거라고 스스로 기분을 북돋았던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우스운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엘빈에게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무도회에 오고 싶은 티를 그렇게 내는 파트너를 집에 처박아 두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다 알고 있는 일이고, 틀린 말이라고는 없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까. 진은 텅 빈 잔을 내려다보다 다시 술병의 목을 틀어쥐었다.

*

엘빈이 다시 진을 찾은 것은 두 사람이 떨어지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진의 발치에는 텅 빈 샴페인 병이 두 개나 뒹굴고 있었다. 놀란 엘빈은 세 병째의 샴페인을 따려는 진의 손을 낚아챘다.

“자네, 뭐 하는 건가?”

“아, 엘빈...”

고작 샴페인만으로 취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진의 목소리는 힘없이 축축 처졌다. 정말 취한 건지, 아니면 취한 척 연기를 하는 건지. 그는 아직 약간의 술이 깔려 있는 잔을 들어올리며 실쭉이 웃었다. 오늘따라 술이 달더라, 그렇게 웅얼거리는 파트너의 목소리에 엘빈은 미간을 짚었다. 대체 내가 자리를 비운 한 시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람? 다행히도 그 시간 동안 발코니를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니, 아무에게도 이런 추태를 들키지 않았다는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대체 왜...”

“네가 너무 멋져서 그래.”

진은 취한 척 본심을 툭 내뱉고는 얼마 남지 않은 샴페인으로 마저 입술을 축였다. 이제 톡 쏘는 발포주의 맛에도 별 감흥이 없을 만큼 실컷 마셨다. 그는 앞머리 속에 꽁꽁 숨긴 눈으로 티 없이 깨끗한 엘빈의 순백색 제복을 올려다보았다. 천사인 자신보다도 더 위엄있고, 더 우아하고, 더 품위있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런 자신의 못난 투정이 더 우스워 보이는 거겠지만. 진은 묘 하게 가시가 돋힌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재미는 있었어? 네가 만족했다면 나도 좋으니까, 뭐.”

엘빈은 눈치빠르게 사태의 근원을 파악하고 눈을 빙글 굴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진은 엘빈이 자신만 남겨 두고 파티를 즐기다 온 일에 대해 단단히 토라져 있는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무도회에 오기로 결정한 건 너 아니었느냐고 언쟁을 시작하거나 귀찮은 일을 막으려 우선 사과부터 하고 봤겠지만 엘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진의 손 에 들린 잔을 슬쩍 빼앗았다.

“재미 없었네.”

“-뭐?”

의외의 대답에 진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엘빈은 진의 손목을 문지르며 장갑과 진의 손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그는 푸른 눈을 얇게 접어 웃으며 진의 귓가에 뒷말을 속삭였다.

“자네가 여기 숨어 있어서 말이야.”

엘빈은 진의 눈을 가린 앞머리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그의 눈동자마저 옅은 베일 같은 앞머리 너머로 얼핏얼핏 비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엘빈의 말에 제법 동요한 모양이었다. 엘빈은 진을 놀리는 것은 이쯤 하기로 했다. 기껏 숨어 있을 시간을 마련해 주었더니 제멋대로 토라져버린 파트너에게 짓궂게 구는 것은 이 정도만 해도 족했다.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긴장과 당황으로 굳은 듯한 진의 얼굴을 이렇게 올려다 보는 것은 또 색다른 재미였다.

“두 번째 춤을 청하려고 내내 자네를 찾고 있었거든.”

*

엘빈의 커다란 손이 진의 손을 꼭 맞게 감쌌다. 진은 엘빈의 서늘한 옷깃에 제 홧홧한 뺨을 기대고 그가 이끄는대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멀리서 과히 시끄럽지 않은 잔잔한 춤곡이 울려퍼졌다. 파티장 안의 소란은 이제 한풀 수그러든 모양이었다. 음악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게 발코니까지 전해져 왔고 그 덕에 두 사람은 굳이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도 바깥에서 춤을 즐길 수 있었다. 엘빈은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은 진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좀 정신이 드나?”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사실은 진이 애초에 취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엘빈도 알고 있었다. 진은 엘빈을 볼 면목이 없는지 발개진 얼굴을 슬쩍 찡그렸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했던 걸까? 엘빈이 잠시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무척 나빠질 만큼 여기가 불편하고 거북했던 것일까? 그럼 그냥 집에 엘빈을 가둬 두는 게 나았을까? 그가 가둔다고 가둬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아니, 아니다. 오늘 밤의 엘빈은 너무 멋져서 그의 말대로 ‘과시’ 해주지 않으면 아까울 정도였다. 진은 복잡해진 머리를 붕붕 흔들면서 아직도 이리저리 엉키는 스스로의 생각들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고맙네.”

“뭐가?”

자네가 이런 곳에 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엘빈은 진에게 나직이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분명 터무니없이 불편하고 어색한 일일텐데도 엘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진은 큰 결심을 했다. 그러니 이 정도 서비스도 해 주지 않으면 미안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정치니 사교니 하는 것은 엘빈에게는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진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흥미를 두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이, 진도 자신처럼 이 무도회를 나름대로 즐겨 주었으면 했다. 엘빈은 향긋한 꽃향기가 섞인 밤공기를 힘껏 들이켜 폐에 가두면서 춤곡에 맞춰 진의 몸을 뒤로 천천히 기울였다.

“이제 조금, 즐길 마음이 들었나?”


그들의 맞잡은 손 사이에서 매끈한 은반지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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