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DC][OC/클리브/잭/레드 후드] 갈빛잔상

[사이퍼즈] [OC/클리브] 갈빛잔상 - Prologue

기념적 사건

잔상

1. 명사: 외부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상.

2. 명사: 영상이 지나간 뒤에도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

3. 명사: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

갈빛잔상

펼쳐진 책을 얼굴에 덮은 채 숨을 쉬면 오묘한 향기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그에게 책이란 항상 그러했다. 바스러진 낙엽, 혹은 낙엽이 바스러지는 순간, 또는 인공적으로 덧입힌 표백제의 체취··· 그래, 새하얀 표백제의 은근한- 아, 은근한가?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펼쳐진 채 얼굴을 덮고 있는 책을 큰 숨으로 들이켰다. 아, 은근하다, 아니다, 음- 확실히- 그래, 명료하게 말하자면··· 은근하지 않다. 정정하자면, 표백제의 체취는 은근하지 않았다. 표백제의 체취는 강했다. 다만 복합적인 책의 향기에 섞여 들어 묻힐 뿐이었다. 새하얀 표백제··· 문득 흰머리의 직장동료 하나가 떠올랐다. 어쩌면 머리카락이 흰색인 작자들은 대체로 표백제 같은 특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마주치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지, 남자는 단숨에 떠오른 생각을 단숨에 마쳤다. 그는 얼굴을 덮은 책을 왼손으로 잡더니 소파 아래로 떨어트렸다. 빛을 차단하던 책이 치워지자 새하얀 형광등 빛이 시야를 찔렀다. 갑작스레 침범하는 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꼭 며칠 전 보았던 바다 같았다. 낡은 곰 인형을 발견한 그 바다. 그 바다에서 일렁이던 파도 빛도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 방에도 파도 빛이 일렁이나, 그런 상념이 뇌리를 스치기 무섭게 정신이 들었다. 파도에 비춘 빛 같은 것은 방에서 일렁일 수 없었으니까. 남자는 현실감을 잃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를 몹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는 파도의 일렁임을 느꼈다. 정확히는 빛이 파도에 부딪히던 순간 느낀 어떠한 부유쾌감을 느꼈다. 이유가 뭐지? 남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 붙여놓은 우표를 떠올렸다. '그래, 그 우표 스티커.' 표백제 같은 동료가 떠넘겼던 싸구려 기념품, 확실히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원인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싸구려 기념품이 원인이라기엔, 솔직히 조금 많이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결론을 묻어두기로 했다. 소파에 누워있던 남자는 눈가를 문지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시선을 돌려 땅바닥에 떨어진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이지색 책은 거꾸로 펼쳐진 채 러그 위에 엎어져 있었다. 책등 위에 쓰인 이름이 보였다. 레이먼드 카버, 남자는 허리를 숙여 책을 잡으려 했다. '괜찮은 단편집이었어. 비타민이 가장 괜찮았지, 아니, 역시 신경써서가-' 남자는, 리처드 브라운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책을 집기 직전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책 속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스피린 어디 있지?”

그는 하던 행동을 멈춘 채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자신이 썼던 기사가 생각났다. 진통제가 심리적인 부유쾌함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남자는 소파 옆 협탁을 열었다. 분주한 손길로 하얀 플라스틱 약통 몇몇 개를 꺼내서 열어보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아스피린, 아스피린, 아스피린이···

그는 좀 더 많은 것들을 손으로 쳐서 어지럽혔다. 협탁 속이 어지럽혀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것저것 계속 어지럽혀졌다. '어쩌면 협탁 안에 없을 수도 있겠는데.' 남자는 협탁 서랍 하나를 통째로 빼 들더니 소파에 내려놓고 찬찬히 살폈다. 하얀, 하얀, 온통 하얀 플라스틱 약병뿐이었다. 뭐가 아스피린인지 열지 않고서야 알 길이 없었다. 색이 있는 것은 노을 색으로 칠해진 작은 우표 갑, 정확히는 우표 스티커 갑 하나밖에 없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걸 안 버렸었나?

우표 스티커, 분명 마지막 장에 붙여놨었지, 그는 고개를 돌려 땅바닥에 떨어진 책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책을 집었다. 남자는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아닌 책의 마지막 장이었다. 책날개에 반쯤 감싸인 마지막 장은 남자의 눈동자와 같은 녹색이었다. 그는 그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책날개를 벗기자마자 녹색 종이의 한구석에 붙은 우표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바다가 인쇄된 우표 모양 스티커였다. 남자는 눈매를 찌푸리며 한참 동안 그 스티커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인상을 써가며 약간의 아쉬움과 짜증을 담아 책을 덮었다. '떼버리고 싶은데.' 그러나 스티커는 녹색 종이를 상하게 하지 않고서야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자신에게 싸구려 스티커를 떠넘긴 걸로도 모자라 책에 붙여놓은 직장동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클리브 스테플, 경박하고 꽤나 기분 나쁜, 그리고 나와 같은···

"···"

남자는 생각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읽어오던 책의 마지막 장이 덮인 날은 기념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브라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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