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사니] 첫 일주일
카슈 키요미츠는 자신이 그 남자의 단 한 자루였던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츠쿠모가미로서 살아 온 세월과 비교하면 굳이 시절이라고 일컫기에도 무색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일주일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했다. 누군가 눈꺼풀 안에 뜨겁게 달군 바늘로 새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눈만 감으면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먼지 냄새도, 텅 빈 복도와 방마다 내달리던 가을 바람도,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던 바닥도……. 유난히 발소리가 컸던 것은 이 커다란 혼마루에 인기척이라곤 오직 둘뿐이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이 혼마루에, 한 사람과 한 자루뿐일 때의 이야기.
물비린내가 난다 싶더니 금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선뜩하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오른다. 역시 초저녁의 가을비는 춥네, 그런 생각을 하며 카슈 키요미츠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가 이 혼마루에 현현한 것은 딱 사흘 전의 일이다. 오래된 우물처럼 깊은 잠 속에서 불쑥 끌어올려지는 감각은 익숙한 동시에 지독히도 낯설었다. 분령(分靈)의 경험은 본령(本靈)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으니까. 물론 기억과 경험을 분명히 구분하는 도검남사들도 있다. 그러나 카슈는, 적어도 이 혼마루의 카슈 키요미츠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이 까닭 모르게 그리운 동시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모순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이에게 첫 인사를 건네던 순간까지도.
아, 강 밑의 아이야. 카슈 키요미츠. 다루기 힘들지만 쓸만하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서양식 인사법이었다. 카슈는 그 손을 맞잡아 흔들며, 눈앞의 남자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일반적인 단도의 상황이라면 대동하고 있을 근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슨 자신이 이 혼마루의 첫 도검남사라는 뜻이 된다. 초기도, 혹은 시작의 한 자루. 어떻게 부르든 좋았다. 아이가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도검남사도 자신이 묶일 혼마루와 심신자를 선택할 수 없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모든 카슈 키요미츠는 현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의 초기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처음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는 카슈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은 다음 놓아주었다. 살가운 말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투도 아니었다. 인사치고는 퍽 건조한 한마디를 남긴 남자는 앞서 방을 빠져나간다. 잠시 그 등을 바라보던 카슈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손끝에는 희미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사흘 전의 일이라는 거다. 이 사흘간 카슈 키요미츠와 남자가 나눈 이야기라곤 겨우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 중에서도 심신자 쪽에서 먼저 말을 붙여온 것은 딱 한 번뿐.
카슈.
응?
솔직히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중요한 문제야.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기에 드디어 주인다운 일을 시키려나 했더니, 김이 빠질 정도로 시시한 소재였다.
된장국엔 무를 넣는 편이 좋아? 아니면 안 넣는 파?
부엌에서 한참 나오지 않나 싶었더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냐고.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대답하면, 이 남자는 푹 끓여 흐트러진 무가 맛있다느니 하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한참이나 해 오는 것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말수가 적나 했더니 이럴 때는 또 잘만 떠들어 댄다. 이번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주인을 만나 버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면 슬그머니 불안이 스며든다.
이 남자에게, 이번의 주인에게 자신은 제대로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만큼이나 싸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복도를 걷다, 툇마루에 면해 있는 장지가 훤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 외에 이 혼마루에 있는 이는 심신자뿐이므로…… 마루에 앉아 있는 이도 그 남자일 터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다가가면 마루 위에 늘어진 감색 하오리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곁에는 주전자를 올린 목제 화로가 놓여 있다. 조그마한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등에 가려져 무엇을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카슈는 부러 큼, 목을 울려 헛기침을 한다.
주인, 뭐 하는 거야?
음, 잠깐만.
한참을 더 꿈지럭거리던 남자가 몸을 돌려 카슈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이 눈에 띈다. 조그만 톱니바퀴와 나사 따위였다. 카슈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회중시계 부품이야.
알고 있다, 시계 정도는. 개체와 상황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도검남사는 현현할 때 본령으로부터 기억의 파편을 물려받게 되어 있다. 자신의 주인은 정부에게 그 정도도 듣지 못한 걸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차에, 남자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겼다.
좀 앉을래?
별난 주인이지만, 곁에 있게 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슬쩍 옆에 가 앉은 카슈는 가만히 남자가 하는 양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보니 주전자는 차를 마시기 위해 올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인은 끓은 물을 수건에 적신 다음 살짝 식혀 부품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동그랗게 여문 손끝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쇳덩어리를 스쳐 지날 때마다 수건에 녹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슈 키요미츠는 문득 깨달았다. 남자는 지금 시계를 수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사니와가 되기 전에는 시계 수리공이었으니까.
헤에, 그렇게 적당히 맞장구를 친 카슈가 턱을 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에게 누군가의 칼로 쓰이던 과거가 있는 것처럼 주인에게도 심신자가 되기 전의 인생이 있었을 터다. 물론 보안이니 안전이니 하는 시답잖은 이유로 심신자의 신상에 대해 캐묻는 것은 금기였다. 그렇지만 이 정도 문답은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 혼마루엔 우리 둘뿐이잖아. 정부에 일러바칠 녀석도 없고. 카슈 키요미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있잖아, 주인.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줄게.
왜 단도(鍛刀)하지 않아?
부지런히 부품을 끼워맞추던 손이 멈추었다. 정곡을 찔린 걸까, 그런 생각으로 카슈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보통의 사니와라면 착임한 그 날부터 부지런히 자원을 모아 단도실을 드나들기 마련이다. 역사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선 혼마루 하나하나가 소중한 전력이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도검남사도 마찬가지다. 본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현현한 분령들이 각자의 경험을 갈고닦으며 싸워 나갈수록 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은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카슈의 주인은 그가 현현한 그 날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자루도 새로 단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혼마루의 도검남사라곤 초기도로 현현한 카슈 딱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주인은 싸우는 게 무서워?
카슈는 그로서는 드물게도 솔직하게 묻기로 했다. 어쩐지 지금의 주인이라면, 이 남자라면 대답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우는 것 자체가 싫은 거라면……. 최악의 경우엔 이 혼마루는 폐쇄, 자신은 도해되겠지. 그러나 이 가능성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속삭이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부러지는 게 싫어서?
한참 말을 아끼던 남자는, 결국 들고 있던 핀셋과 수건을 내려놓았다. 카슈 쪽으로 돌아앉은 그가 시선을 마주쳐 온다.
너, 된장국에 무를 넣는 게 좋은지 싫은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
또 그 얘기야?!
사람이 모처럼 진지한 기분으로 어울려줬는데!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려 버린 카슈에게, 심신자는 다시 말을 건넸다.
나한테는 중요해. 왜냐하면 넌 지금 사람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사람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있어.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도 있고. 좋았다가 싫어지는 것도, 싫었다가 좋아지는 것도 있지. 카슈, 이번의 너는 처음이잖아. 사람으로 사는 거.
긴 정적이 흘렀다. 한 사람과 한 자루분의 숨소리, 그리고 화로의 숯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사람으로 살다 보면 알게 돼. 자신이 푹 끓인 무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차는 뜨거운 게 좋은지, 미지근한 게 좋은지. 겨울 이불은 너무 두꺼워도 답답하기만 하니까 적당히 얇은 게 좋다, 그런 거.
그런 거, 아무래도 좋잖아.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중요한 거야. 이건 수많은 카슈 키요미츠 중에서도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카슈밖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니까.
남자는 다시 핀셋을 집어들었다. 카슈 키요미츠는 자신의 주인이 속눈썹만한 초침을 조심스레 끼워넣고, 유리판을 덮고, 조그마한 나사를 돌리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시계의 꼭지를 돌려 제대로 바늘이 움직이는 것까지를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잔뜩 생길 때까지 둘이서 지내자.
둘이서…….
그리고 무를 넣고 싶은지 아닌지 정해지면 말해 줘.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라고 그의 주인은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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