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OC/클리브] 갈빛잔상 - Chapter 1
사건의 시작점
갈빛잔상
2024년 03월 23일, 토요일.
리처드 브라운은 소설을 좋아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생은 소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그는 두 세계의 비슷한 지점을 꼽을 때 항상 같은 지론을 펼쳤다. 사건은 명확한 시작점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지론이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반박하겠지만, 적어도 브라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노스 레인의 골동품 가게를 탐방하며 헌책을 구경하던 지금도 그러했다. ‘조금 구경하다 해변으로 가야겠어’ 브라이튼의 해안가라…
“이것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정정한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약 1분 하고도 30초 정도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들려서는 안 될 직장 동료의 목소리가 브라운의 귓전을 때렸고 브라운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상대를 바라보았다. 짧게 친 흰머리와 능청스러운 붉은 눈이 뜻하는 건 명확했다. 아 젠장, 클리브 스테플, 리처드 브라운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입을 열었다. 사회적인 예의상 인사를 받았으면 대답은 해야 했다. 특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면 더욱 그랬다. 정말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게 설계되어 있는 걸까? 답이야 알고 있었으니 짜증스러운 투정에 불과한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당한 부분들을 고도 발달시킨 사회인이었기에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게요 스테플 씨,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남자의 어투는 부드러웠다. 딱 그가 가진 밀밭색 머리카락만큼, 인공적인지 아닌지 모호한 부드러움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클리브 스테플은 촉이 좋은 기자였다. 그의 촉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반기고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음- 클리브의 머릿속에 잠시 음성으로 된 생각이 스쳐 갔다. 음,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리처드 브라운이 본인을 떨떠름해하든지 말든지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클리브에게는 전매특허 특기가 있었다. 익살스러움, 그건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특기였다. 뭐, 눈앞의 Mr. 브라운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은-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리처드 브라운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니까.
“이야- 이런 데서 마주하다니, 우연이란 게 참 신기하네요. 인사이동 이후로 영 못 뵈었는데.”
“그러게요. 스테플 씨가 아마…”
이 사람 부서가 어디더라? 그런 생각과 함께 브라운은 말을 흐렸다. 시간을 끌기에 괜찮은 방법이었다. 브라운은 그 시간을 알차게 써먹었다.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했다는 소리다. 분명 언제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언제더라- 작년 겨울? 아 그래, 북한.
누군가 브라운의 생각을 알았다면 거기서 북한이 왜 나오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몹시 타당한 마인드맵의 결과물이었다.
-리처드, 복싱 데이에 셀프리지스 백화점 사냥 갈래? 내가 집 나간 자식 모임을 조성했거든.
-복싱 데이면 너무 붐비지 않을까… 그보다. 집 나간 자식 모임?
-일종의 비 런던 출신 런던인 모임이야. 가입 조건 말해줄게, 자의든 타의든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에 코빼기도 안 보임, 꽤 괜찮지? 참고로 난 타의야.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이 한국 여행을 가신다고 하셨거든. 북한으로.
그날 그녀는 북한이라는 단어를 뱉을 때 몹시 질린 것처럼 보였었다.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에 북한 여행을 간다는 게 아무래도 질릴 만한 요소긴 하지,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음, 흥미는 가는데 그때 일정을 좀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섀넌, 방금 북쪽이라고 한 것 같은데 맞아?
-나도 안 믿기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자. 그보다, 제발! 클리브도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사회부 간 다음부터 영 못 봤잖아.
아, 섀넌, 당신 정말 최고야, 북한 여행이라니, 바로 떠오르잖아, 브라운의 일상에 있어 섀넌은 대체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유쾌하고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 드물지, 진짜로, 브라운은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했다. 섀넌은 대부분의 경우 올바른 길을 알고 있었기에 브라운은 이번에도 그녀를 따랐다. '걔 부모님한테 감사해야 할 것 같아.' 그런 생각과 함께 말이다.
“사회부로 가셨었죠?”
그 대답에 클리브는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이것 참, 기억해 주실 줄 몰랐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 역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친구 인사이동을 어디로 했더라? 대충 정치 쪽이었던 것 같은데, 섀넌은 여기서도 유용한 길잡이였다.
-리처드가 못 나온 걸 아쉬워해야겠어요 클리브, 올해 유독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닌 것 같거든요.
-글쎄요 섀넌, 엣취!
클리브는 이때 속으로 생각만 하고 뱉지 않은 말이 있었다. 아마 그 친구는 지금쯤 방에 콕 박혀서 모바일로 ‘사람을 대하는 200가지 태도와 그놈이 쓰레기인 이유’ 이런 걸 보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근거는 없지만 그럴 것 같은데 말입죠. 뭐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클리브는 고도로 발달한 부분이 존재하는 사회인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는 소리다.
-그 친구가 인파에 밀리는 걸 보고 싶으시다면, 역시 그런 게 진짜 친구겠죠? 에취!
클리브의 작년 크리스마스는 원인 모를 재채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마 알러지였을 거야, 상당히 끔찍했기에 기억은 몹시 또렷했다.
-클리브, 몸 괜찮아요? 우리 어디 좀 들어갈까요?
-아이고, 좀 힘들긴 한데 괜찮습니다.
-사실, 리처드랑 제가 국제부 쪽으로 간 뒤로 클리브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까… 쇼핑이 아니라 당신 만나는 게 목적이었어요. 우리 그냥 들어가서 쉬어요.
아, 섀넌, 당신 정말 최고야! 내 재채기도! 바로 떠오르잖아, 클리브에게도 섀넌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한 뒤 조리 있고 즐거워 보일 법 하게 말을 뱉었다. 내 재채기에 만세! 그런 생각과 함께였다.
“브라운은 분명 국제부로 가셨다고 하셨죠?”
“네, 하하.”
브라운은 살짝 웃으며 좀 쑥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아, 말 좀 그만 걸고 갈 길 가, 제발, 그러나 브라운의 바람이 이루어지기엔 오늘의 일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11월이 미국 대선이니까 그쪽 이야기가 많겠네요. 어휴, 요즘 뭐 말도 아니던데 말입니다.”
브라운은 슬슬 올라오는 분노와 짜증과 신경질을 억누르는 데 얼추 성공했다. 표정에서 약간의 떨떠름함이 티가 났겠으나-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범위야, 적당히 일 이야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겠지, 일 이야기하다가 힘들다고 푸념하는 사람 많으니까, 음… 확실히 그래, 브라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역시- 신경전달물질은 약으로 제어해야 한다니까? 그는 자신이 꼬박꼬박 약을 먹었음을 자화자찬하며 현대의학의과 약학의 힘을 남몰래 추앙했다.
“미국 대선에 신경이 몰려있긴 하죠. 특히… 이번 공화당 후보가 꽤-”
공화당 후보의 이름을 떠올리자니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이름이 좀 낡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이름인 것 같아, 사실 그런 이름 옆에 두면 뭐든 나쁘지 않지.
“캔털루프 바스커빌, 그 사람 말이에요. 기행으로 유명한 보수 인사다 보니…”
어떻게 사람 이름이 멜론 품종이지? 아무리 부친이 히피에 모친이 셜로키언이었다고 해도 미국 대선 출마 후보의 이름은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배경도 해괴했다. 클리브 스테플도 이를 아주 잘 알았기에 이렇게 답했다.
“솔직히 저였다면 차라리 멜론 머스크 바스커빌로 지었을 것 같네요. 아버지가 히피시고 어머니가 셜로키언이라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캔털루프 트럼펫은 좀…”
이건 브라운도 동의하는 바였다. 덕분에 평소와 달리 살짝 빨라진 속도로 말이 나왔다.
“사실 저는 말이죠. 아버지가 히피인데 본인은 자산규모가 조 단위라는 게 안 믿기네요. 그 사람의 미들 네임도 안 믿기지만요.”
놀랍게도 캔털루프 바스커빌의 미들 네임은 트럼펫이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을 저렇게 지을까? 미국이란… 아냐, 사실 멀쩡한 이름이 붙어있었으면 더 놀라웠을 거야, 좀 실망스러웠을 것도 같지만- 브라운은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아까 구경 중이었던 헌책이 들어왔다. 아, 맞다, 책, 그는 조심스레 베이지색 책을 집어 들더니 천천히 돌려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클리브는 브라운이 책으로 관심을 돌리자마자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책 옆에 놓인 우표갑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그 물건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게 눈에 들어와서였다. 굳이 따지자면 강렬한 노을색이 원인이었다. 주홍빛이 섞였다고 해도 붉은 계열은 언제나 원초적인 색이었으니까.
우표갑을 맨손으로 건드린 순간 클리브의 머릿속에는 수만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건을 읽는 능력은 여러모로 그에게 적합한 비밀이었다. 사이퍼, 그러니까 일종의 초능력자, 적어도 클리브의 상황상 그는 본인이 사이퍼라는 것을 밝혀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은 예외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우표스티커라… 손을 꽤 거쳤고…’ 다음 순간 보인 물건의 기억은 참 특이했기에 저도 모르게 흠? 하는 의문이 튀어나왔다.
한편 리처드 브라운은 책에 집중했다. 레이먼드 카버, 베이지색 책등 위에 브라운이 아는 작가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건 폰트려나 손 글씨려나?’ 옆으로 휜 필기체가 궁금증을 몰고 왔다. 이 책을 사서 해변에…
브라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시간을 너무 빼앗겼어, 바다를 보러 온 건데, 그는 다시금 책을 살폈다. 베이지색 책은 매끈함과 거리가 먼 재질이었다. 양장은 아니었고 책날개가 붙어있는 꽤 작은 판본의 책이었다. 브라운은 책이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 책등의 필기체가 괜찮았다. 이걸 사야겠어, 짧은 결론을 내린 남자는 책 표지를 넘겼다. 2024년 03월 23일, 브라이튼에서 그가 읽어갈 책의 첫 장이 열렸다.
복싱 데이: Boxing Day,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로 영연방 국가의 공통 공휴일이다. 영국에서는 이날 축구 리그가 열린다. 미국식 발음으로는 박싱 데이, 영국 발음으로는 복싱 데이에 가깝다. 물론 발음이란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그렇게 들린다. 백화점 세일 주간으로 유명하다.
셀프리지스: 쇼핑의 거리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영국의 백화점이다.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에는 세일로 인해 사람이 미어터진다.
섀넌: 결코 로맨틱한 사이는 아닌 리처드 브라운 삶의 지침서다. 친구 사이고 일종의 애착 지도 겸 애착 인간이기도 하다. 2023년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이 북한 여행을 가서 말다툼이 있었다. 그래도 기념품으로 사 온 선전용 우표가 꽤 신기했는지 부모님의 귀국 후 잔소리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연관되어, 최근 그녀의 머릿속을 떠다니며 묘한 거슬림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 있다. ‘한국에 있는 친척한테 이 우표를 보내도 되나?’ 여기서 한국은 남한을 뜻한다.
캔털루프 트럼펫 바스커빌: 글쎄, 우리의 지구와 [사이퍼즈: 지구-C2]는 좀 다르겠지. 정치인도 전염병도 기업가도 다르니 히피-셜로키언 부모를 둔 대통령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트럼프랑 일론 머스크가 좀 섞일 수도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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