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 고죠 사토루 드림] 소년시대少年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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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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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시 47분.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서 텅 빈 몸으로 힘없이 굴러다니는 맥주 캔이 다섯 개. 그리고 난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을 따 보리 맛 가득한 어른의 음료를 입에 흘려 넣었다. 고개를 젖히자 눈치 없이 또 흐르는 눈물이 입가를 타고 흐르는 맥주와 턱 언저리에서 만나 물길을 합쳤다.

안다. 지금 편의점 안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어쩌지도 못한 채 나를 불안한 눈길로 살피고 있다는 것쯤은. 그래도 오늘 1년 연애에 종지부를 찍은 여자를 눈감아 주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것도 아니면 세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박해졌나? 1년간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은 한순간에 코 푼 휴지처럼 내버리고 새로운 엠보싱 휴지를 찾아 떠난 그 개새끼처럼?

“크흥.”

연애도 이별도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별을 상정해놓고 시작하는 사랑은 없으니 이놈의 지긋지긋한 실연의 고통은 매번 바보같이 웃고 행복해하던 지난날의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비웃었다.

“이 개자식아! 결혼하자며!”

만취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20대 여성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행인은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불과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은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고 걸음을 재촉했으니까.

맥주 캔을 끌어안고 엉엉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저희끼리 귓속말로 뭐라 뭐라 지껄이고는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해댔다. 피해망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난 세상에 버려진 기분이거든. 심지어 이번에는 꽤 오래갔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남자였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훌쩍 떠나버리긴 했어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그리 넓지 않아도 오붓하게 둘이 지낼 수 있는 신혼집을 구해 살자고 속삭였던 목소리가 벌써 그리웠다. 정말 그렇게 한순간에 날 버린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플라스틱 테이블에 쾅 엎어지자 빈 캔끼리 부딪혀 카랑카랑한 소리를 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코만 훌쩍이는 내 옆으로 편의점의 밝은 빛을 가리는 검은 그림자가 졌다. 충격으로 쓰러진 빈 캔을 세우는 커다란 손을 보면서 오기가 치밀었다.

“왜 왔어?”

내 퉁명스런 음성에 캔을 치우던 손이 잠시 멎었다.

“나인 건 어떻게 알았대?”

피식 웃는 소리마저 재수 없다.

난 고개를 휙 쳐들어 테이블의 파라솔에 가려진 그를 노려봤다.

“너밖에 더 있어?”

허리를 숙여 파라솔 안으로 불쑥 들어온 얼굴은 놀라울 것도 없는 고죠 사토루였다. 유리구슬처럼 푸르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 어린 장난기는 10년 넘도록 변하질 않았다. 그저 부모의 출장이 잦은 이웃의 어린아이를 돌봐줬던 인연이 10년이나 이어질 줄 몰랐다. 어려서는 귀엽기라도 했지, 언젠가부터 내가 실연을 겪고 있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나를 놀려먹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버릇이 잘못 들었을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열 살 차이가 무색하게 이 녀석은 이미 6년 전에 내 키를 앞질러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쑥쑥 자라고 있었다. 아직도 성장기라니. 무서운 녀석.

“이번에는 꽤 오래가더니.”

내 맥주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진 사토루는 싱글벙글 웃는 낯을 하고서 뻔뻔스럽게도 안타까운 음성을 냈다. 사이코패스냐? 울컥했지만, 난 오랜 경험으로 여기서 화를 내봤자 녀석이 원하는 대로 말려들 뿐이란 걸 학습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난 너와 달리 어른이라는 걸 인식시켜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천천히 호흡한 나는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녀석을 훈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흐윽.”

흐느낄 줄은 몰랐지만.

실연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나 보다. 무슨 짓을 해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평소처럼 웃어넘기면 됐을 걸 꼴사납게 어린 남자애 앞에서 다 큰 어른이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천하의 고죠 사토루도 내가 오열하는 건 옵션에 없었는지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댔다. 꼴좋다. 어른 놀려먹더니.

“흐아앙! 이번에는 정말 느낌이 좋았다고!”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허어엉…. 나도 더 오래갈 줄 알았어어…. 결혼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이런. 큰일 났다. 달래주기 시작하니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참고 있던 술기운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내 등을 토닥이던 사토루의 손길이 더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좆됨을 감지했지만, 이미 터져버린 입은 멋대로 설움을 토로해댔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좋아질 수 있어? 미친 거 아니야? 그럴 거면 잘 해주지나 말던가!”

“그 말 진짜야?”

“크흥. 그래애.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는 거야. 사토루, 너도 그래? 너 정말 나중에 사귀는 사람 생기면 그러지 마. 알았어?”

“아니. 그거 말고.”

“응?”

사토루가 내민 손수건에 코를 킁 푼 나는 술기운에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바라본 사토루의 동공이 풀려있어서 하마터면 뺨을 칠 뻔했다. 미친 거 아니야? 개무서워.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거.”

슬그머니 손을 들어 녀석의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내 손을 잡아 누르는 힘에 순순히 항복했다.

“응? 당연하지. 진지하게 만났는걸.”

“너…!”

“얘가 또 너라 그러네. 반말은 그렇다 쳐도 누나라고 부르랬지?”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지. 내가 차인 게 중요하지.

내가 침울해지든 말든 사토루는 풀썩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탈탈 터는 머리카락은 항상 느낀 거지만,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반짝 예쁜 색이었다. 버릇처럼 사토루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자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꾹 잡아왔다. 가로등 탓인가. 애 얼굴이 조금 빨간 것 같기도.

“너 나랑 결혼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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