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BL] 화化

포말 커미션 작업물 / 이니셜 치환 / 부분 공개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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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털 돌아가는 선풍기에 미처 환기되지 못한 먼지바람이 교실 안에서 헛돌았다. P는 간지러운 코 아래를 거칠게 문지르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영어단어를 외우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노란 볕이 머리 위로 쏟아져 자꾸만 눈꺼풀이 아래로 쳐지는 것을 참는 게 최선이었다. 부디 영어 선생이 지문 읽기에 저를 호명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그럼 이건 8번이 읽어보자.”하는 소리가 저 멀리 교탁에서 들렸다. 의자 밀리는 소리에 조금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P는 눈으로 8번을 좇았다. 제법 큰 키에 곧게 편 등허리를 따라 올라가자 가느다란 목과 조막만 한 뒤통수. P는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절대 어울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정반대 타입의 J와 연결고리가 생긴 탓에.

지문을 다 읽어낸 J가 자리에 앉기 전 따가운 눈총을 느꼈는지 잠시 뒤를 돌아보다가 P와 시선이 얽혔다. 방금까지 서늘하던 푸른 눈빛이 저와 마주친 순간 가늘게 휘며 주홍빛으로 바뀐다. 잠시 방황하던 J의 눈빛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몸에 밴 예절마저 J스럽기 그지없다. P는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같은 반이 되고 다섯 달이 꼬박 지나서야 처음 나눠본 인사였다.

*

J는 그날을 기억한다.

한 동네 안에서 이사한 것치고 학원이 멀어지는 바람에 집 근처에서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과외 선생의 집으로 찾아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으슥한 골목 어귀를 지나야 나오는 붉은 벽돌집이었다. 다 컸으니 무서울 것도 없지만, 가로등도 깨져있는 후미진 골목을 지나야 하는 것은 겁이 많은 J에게 제법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과외가 끝난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낡은 오토바이 정비소 한 군데가 다였다. 그 흔한 편의점조차 없다니. J에겐 상당히 고역일 터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과외가 끝나고 제법 익숙해진 골목을 잰걸음으로 빠르게 지나치려는데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모님께 전화한다면 다 큰 녀석이 겁도 많다며 잔소리를 할 게 뻔했기에 J는 그저 그가 행인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부르는 게 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J의 심장은 불안으로 가쁘게 뛰었다.

“이 씨발새끼…! 이리 안 와? 어른이 부르는데 씹어?”

어쩌지. 어쩌지….

고작해야 체육 시간에나 하는 운동이 다인 J에게 술에 취한 성인 남자를 제압할 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던 J가 다시 과외 선생의 집으로 도망치기 위해 재빨리 남자를 지나칠 궁리를 하던 중, 문득 골목 끝자락에 있는 오토바이 정비소를 떠올렸다. 책이 잔뜩 들어 무거운 가방을 원망하며 J는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 내달렸다. 상상력이 풍부한 탓에 남자가 제게 칼을 휘두르는 상상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장기까지 팔리는 상상까지 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정비소가 있는 곳까지 겨우 다다랐을 때 J는 이제 셔터를 내리고 있는 직원의 모습에 절망하며 그의 어깻죽지를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힘에 휘청인 직원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J를 훑어보다가 그를 셔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잽싸게 제 몸까지 셔터 안으로 욱여넣은 남자가 반쯤 내려와 있던 셔터를 안쪽에서부터 내려닫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철판에 귀를 갖다 댄 채 동향을 살폈다. 밀쳐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제 입을 틀어막은 J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달려온 걸음 소리와 셔터 앞에서 씨근덕대는 남자의 숨소리에 몸을 후르르 떨어냈다.

바깥 상황을 살피던 정비소의 직원이 한참 뒤에야 셔터에서 몸을 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익숙하게 손을 내밀어 불을 켜자 갑자기 쏟아진 불빛에 눈이 부신지 J가 얼굴을 감쌌다. 점차 빛에 적응해가는 시야 속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찼다. 캡모자를 벗어 한껏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다.

“…P?”

도톰한 입술에서 멍하니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낯설었다. 낯간지러워 뺨을 긁적인 그가 넘어져 있는 J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뭐냐? 저 아저씨는 또 누구고.”

불퉁하니 나가버린 제 말투를 속으로 자책한 P는 어느새 제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J의 모습에 놀라 팔을 휘저었다.

“너 왜 울어!”

얼마나 놀랐는지 이제 엉엉 소리까지 내서 울고 있는 J의 모습에 P가 그만 그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누구를 달래본 적이 없어 무작정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생각보다 더 마른 몸에 한 번, 열린 수도꼭지처럼 그칠 줄 모르는 울음에 두 번 놀랐다.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친 J가 어색하게 몸을 떼며 발갛게 튼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과외 끝나고 집 가는데…”

“응. 가는데.”

겨우 제 이야기를 시작한 J의 목소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P는 미지근한 물까지 떠다가 그 손에 들려줬다.

“갑자기 저 술 취한 아저씨가 욕하면서 따라와서…”

“따라와서?”

“여기는 맨날 이 시간까지 하던 거 생각 나서…”

말하면서 또 서러워졌는지 코가 씰룩댄다. P는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밤중에 따라오는 남자가 왜 무서운지 P의 성격상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잔뜩 겁에 질려 제 어깨를 붙잡았던 J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얘는 무서웠을 수도 있지.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니까.

“너 과외 맨날 가?”

“월수금만.”

물어보는 말에는 코 먹은 소리라도 대답이 잘만 나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P가 소매를 끌어다가 J의 젖은 얼굴을 툭툭 닦아줬다.

“무서우면 여기 와도 돼.”

“…진짜?”

“어. 근데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나 여기서 일하는 거 비밀이니까 그것만 말 안 하기로.”

J는 그제야 그에게 안겼을 때 났던 생소한 냄새가 기름 냄새임을 깨달았다. P는 학교에서 보던 모습과 조금 달라 보였다. 매번 사람들에 둘러싸여 실없이 농담 따먹기나 하고 능글대던 모습보다도 이곳이 그에겐 더 편해 보였다. J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P의 비밀을 누설할 마음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의 도피처처럼 느껴지는 이곳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지독한 관찰의 시작이었다. 어울리는 무리도 다르고 무엇하나 접점 없던 두 사람이 비밀을 공유하게 된 일은 제법 짜릿했다. P는 쉬는 시간이면 쪼르르 제 옆으로 달려와 수 개의 질문이 적힌 쪽지를 내미는 J의 모습에 감추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일은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왜 그 일이어야 했는지, 아직 걸린 적 없느냐는 걱정 어린 질문과 정말 나만 아는 거냐고 묻는 무언의 뿌듯함까지. 그럼 P는 그 아래에 하나하나 답변을 적어 그다음 쉬는 시간에 J의 자리에 놓고 오고는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법 줄어드는 질문의 수에 문득 아쉬워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쪽지를 두고 홀연히 돌아서는 J의 손목을 붙잡자 조금 놀란 눈이 저를 돌아봤다. 얘는 뼈밖에 없는지…. 말라 보여도 근육으로 꽉 들어찬 제 팔목과 달리 그저 가느다란 손목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총총히 빛나는 눈동자와 눈이 맞아 그제야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왜 직접 안 물어봐?”

J가 화들짝 놀라 P의 입을 틀어막았다. “야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하는 말에 그제야 내 비밀을 지켜주려는 노력이었구나 깨달았다. 우습게도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지자 막 피어난 꽃 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퍼졌다.

나랑 할 대화가 사라져가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된 게 많은 거구나.

처음으로 제 비밀을 터놓게 된 사람이 생겼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혹자는 약점이 잡힌 게 아닐까 불안해할지 모르나, J는 결코 P의 비밀을 누설하는 법이 없었다.

“레이서가 꿈인데 왜 정비소에서 일해?”

“차근차근 배우면 좋잖아.”

“부모님은 반대 안 하셔? 너 그럼 면허도 있는 거야? 오토바이도 타고 그래? 난 너 오토바이 타는 거 본 적이 없는데…”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 P가 허리를 접고 웃었다.

“숨 좀 쉬고 질문해라. 숨 막히겠다.”

난간에 기댄 P의 듣기 좋은 미성에 J는 어쩐지 그의 눈을 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J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된 채로 노을 탓에 길어지는 제 그림자만을 좇았다. P의 답변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J는 그의 말을 잊지 않으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때때로 학교 옥상에서 또는 텅 빈 교실에서 또는 가로등이 점멸하는 어두컴컴한 골목에 서서 얕은 곳에서 깊어져 가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교실에서도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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