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베티, 나의 베로니카 1

주술회전 / HL 네임리스 드림 / 창작 샘플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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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죠 사토루, 게토 스구루

*최강샌드 네임리스 드림

*타계정 업로드 작품이며 샘플용으로 해당 계정에 아카이빙합니다.


하교 시간이 지나고 복도의 긴 창을 투과하던 노란 빛이 하루의 끝을 붉게 태울 즈음, 그나마 남아있던 학생들도 내일을 기약하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나갔다.

복도의 창틀에 기대 아이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걸음도 그제야 보건실로 향했다. 일단 하교 시간이 되면 교사들은 그제야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생긴다. 적어도 학교가 끝나면 제게 찾아올 학생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건교사의 생활은 더욱 편리했다. 학교가 끝나면 업무도 끝. 가끔 교사가 아파서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일도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여 오늘은 비품 파악만 해두고 돌아갈 셈이었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보건실의 수장은 나였고 그곳의 사정은 내 머릿속에 저장이라도 해둔 것처럼 훤한 일이었으니까.

“누구…!”

그러니 나는 이 풋풋한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보건실 가장 구석진 창가 옆 침대에 누워있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봤을 때, 잠시 상황 판단이 늦어지고 말았다.

학생? 교사?

내가 아는 한 저토록 덩치가 큰 사람은 우리 학교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고작해야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는 그의 몸에 턱없이 좁아 보였다.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침대의 철제 프레임이 삐거덕삐거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고요한 보건실을 시끄럽게 울렸다. 잠시 굳어있던 난 그가 얼굴을 덮고 있는 팔의 가장 끝, 꽉 움켜쥔 주먹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서둘러 트롤리를 끌고 그의 곁에 다가섰다. 새까만 옷은 아무리 봐도 교복인데, 우리 학교의 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럼 뭐 어쩔 건데!’

다친 애를 내버려두는 보건교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크윽.”

“! 미안. 아팠니? 조금 쓰릴 거야. 소독할 거거든.”

팔을 슬쩍 든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 없이 길게 쭉 찢어진 눈이 가늘게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도로 팔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난 그걸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이의 주먹을 살살 달래가며 펴 보였다. 주먹이 어찌나 큰지 손바닥을 다 펴자 내 손이 그의 손에 감춰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좋던데 이 아이는 우리 학교 학생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체격이 좋을 게 뻔했다. 스멀스멀 보건교사로서의 궁금증이 머리를 들이밀고 자랐지만, 난 일단 잡념을 떨친 채 그 아이의 다친 손을 치료하는 데에 전념하기로 했다.

소독 솜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 상처에 별수 없이 알코올을 그 위에 뿌리기로 했다. 상처 위에 소독용 알코올을 물줄기처럼 흘리자, 그 아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아무리 덩치가 크고 위험해 보이는 학생일지라도 이런 상처는 누구에게나 아픈 법이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거야? 꼭 베인 것 같은데.”

고등학교의 보건교사로 일한다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이주에 한 번은 험한 꼴을 보기 마련이었다. 제법 손에 익은 바늘과 봉합실을 꺼내 들고 그 아이의 손을 꿰매어 나갔다. 삐뚤빼뚤해서 예쁘진 않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처치였다.

그 외에 타박상에 연고까지 발라주자 어느덧 어두워진 교정에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미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환자가 있으니 꼼짝없이 발이 묶인 나는 어느새 상체를 일으키고 앉은 다른 학교의 학생과 멀뚱히 마주한 채 어색한 공기를 공유할 뿐이었다.

“…어디 학생이니?”

“고전이요.”

오, 대답했다.

드디어 목소리를 들려준 아이의 대답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변두리에 있는 종교계 학교를 떠올리고는 작게 탄성을 냈다.

“싸우기라도 한 거야? 상처가 심상치 않던데 병원에 꼭 가봐. 여기선 응급처치만 했으니까.”

“친절하시네요.”

조금 지친 듯 조소를 띈 음성이었지만, 아이들에겐 아이들 나름의 고충이 있을 테니 내가 동요해선 안 될 일이었다.

“선생님이 학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전 이쪽 학생도 아닌데요.”

“내 보건실에 들어왔으면 임시로라도 내 학생이지. 네가 교복을 입은 이상 밖에서 쓰러져 있었대도 돌봤을걸.”

“교복을 안 입으면요?”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었지만,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었다.

“그럼 내 알 바 아니지. 나도 일인데.”

지나치게 솔직한 내 대답에 그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웬 학생이 나보다 머리가 길다니. 아주 우리 학교였으면 바로 바리깡으로 갖다가…

“고맙습니다. 덕분에 치료까지 받았네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어쨌는지 그 아이는 조금 선을 그은 채 몸을 뒤로 물렀다.

“더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으쌰 몸을 일으킨 그의 덩치에 나는 한 번 더 압도됐다.

“…학생, 혹시 키가 어떻게 되니?”

“음. 190 조금 안될 것 같은데.”

젠장. 뭘 먹고 저렇게 큰지 알고 싶었다.

영양사 선생님과 공유해 우리 학교 애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심지어 키만 큰 게 아니라 덩치 자체가 도무지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동화 끈을 조이던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픈 건 아닌데요.”

“응?”

“입안이 쓸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입안?”

“…맛없는 걸 먹어서라거나.”

“…응?”

“아니에요.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아까처럼 어른스러운 얼굴로 멋쩍게 웃는 아이가 못내 마음이 쓰였다. 우리 학교 애들은 넘어져서 까진 걸로도 어리광인데 이 학생은 그러질 못하는 것 같아서.

“잠깐만!”

창문을 타고 넘어가려던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자 놀란 얼굴이 나를 돌아봤다. 당황한 얼굴은 그제야 제 또래처럼 보였다.

“무슨, 읍.”

“사탕 처방.”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주머니에 항상 사탕이 있었다. 서둘러 레몬 사탕 하나를 입에 물려주자 그의 가느다란 눈이 당황의 색을 덧쓰며 커다랗게 동공을 키웠다.

이때다 싶어 그 아이의 주머니에 사탕을 한 움큼 쑤셔 넣고 그 등을 퍽퍽 두드려줬다.

“그리고 문으로 다녀라. 창문 타고 다니지 말고!”

따끔하게 한마디까지 하고 나니, 그 아이는 멍한 얼굴로 “…고맙, 습니다.”하고는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창문 타지 말라니까.”

하아.

이게 웬 야근이냐.

나의 베티,

나의 베로니카

게토 스구루에게 있어 그곳은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돌아가자니 너무 지쳐서 선택한, 말하자면 간이 휴게소였다.

창밖으로 이제 하교를 하는 듯 왁자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구루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질수록 손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바닥을 적시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하아. 그냥 돌아갈 걸 그랬나.’

비술사의 일상은 스구루에게 있어 슈퍼 싱글.

그런 이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으로 숨어든 게 잘못이었나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한 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우니 오늘 하루의 긴장이 모두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이나 한숨 자고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한 뒤에 돌아가는 편이 효율 높은 선택일 터였다.

“누구..!”

교사들은 모두 퇴근했으리라 생각했던 그였기에 문득 느껴진 인기척은 긴장이 풀려있던 그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제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저보다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인데 이 학교의 보건교사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러운 손길과 음성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작고 부드러운 온기가 방금까지 혈투를 벌이던 제 손을 돌본다는 생각에 그만 스구루의 마음이 방심하고 말았다.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입안이 쓸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음이 풀어지니 별의별 소리가 다 튀어나왔다. 말을 뱉고 난 후에는 이미 아차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기란 불가능한 법이었다.

“…입안?”

“…맛없는 걸 먹어서라거나.”

“…응?”

이봐, 그만 닥쳐줘. 게토 스구루.

스스로 만들어내는 흑역사에 드물게 얼굴을 붉히고 돌아섰는데, 뒤에서 교복을 움켜쥐는 힘에 도망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돌아보기 무섭게 입안에 퍼지는 새콤달콤한 레몬 향에 방금까지 어거지로 쑤셔 넣어 삼킨 주령의 맛이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주머니에 알록달록한 사탕을 한 움큼 쑤셔 넣은 그녀가 등을 두드려줬다.

“그리고 문으로 다녀라. 창문 타고 다니지 말고!”

적당히 인사를 하고 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사고회로가 갑작스러운 해프닝을 따라가지 못해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창문을 타고 훌쩍 넘어버리자, 뒤에서 작게 푸념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구루의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데, 이 정도 상처는 아픈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러니 낯선 학교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만, 거칠어지는 숨에 함께 터져 나오는 새콤달콤한 레몬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스구루. 뭐하느라 이제 오냐?”

심심함에 몸부림치던 사토루의 시비에 반응할 새도 없이 스구루는 제 방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담배를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자, 알록달록한 사탕이 우수수 쏟아졌다. 담배 대신 사탕의 껍질을 까 아직 레몬 맛이 남아있는 입에 딸기 맛 사탕을 던져 넣었다. 달짝지근하고 끈적한 맛은 혀가 아니라 머리에 맴돌았다.

“아.”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름 물어보는 거 깜빡했다.”

*

작게 노크하는 소리에 “들어와.”하고 대답하자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내 컴퓨터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방문자에게 던진 난 이제 제법 익숙해진 그 얼굴에 경악했다.

“스구루, 너 또 왔니?”

“오늘은 문으로 들어왔는데 칭찬 안 해줘요?”

뻔뻔스럽게도 샐쭉하니 웃는 저 얼굴은 벌써 세 달째 남의 학교 보건실에 출근 도장을 찍고 계신 게토 스구루였다. 한 번 도움을 줬을 뿐인데 어쩐지 날 따르게 됐다. 길고양이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비추면서 그의 이름 같은 걸 알게 됐다. 창문으로 들락거리는 게 영 못마땅해 한소리 했더니 이젠 칭찬해달라 유세다. 아니, 당연한 일을 해놓고 칭찬까지 바라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잘했어. 훌륭해.”

그치만 저 녀석은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만히 바라만 보는 걸로도 위협적이라 난 고분고분 그 말을 따르고 있다.

“오늘은 다친 데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스구루는 올 때마다 항상 상처 두 세 개를 달고 다녀서 그가 방문할 때마다 몸을 살피는 게 일이 됐다. 도대체 학생이 남들 다 수업받을 시간에 이렇게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매번 상처까지 생기니 불량학생인가 싶은 고민도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냥 특수한 학교 방침상 그렇다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교사 된 도리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으음. 오늘은 옆구리.”

“봐봐.”

겉옷을 벗어 옆에 둔 채 왼손을 오른쪽 옆구리로 뻗어 가슴 아래까지 올린 스구루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지만, 여기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야말로 스구루가 원하는 바라고 생각해 최대한 태연한 척 그 옆에 앉았다. 막상 옆구리에 퍼렇다 못해 까맣게 번진 멍 상태를 보자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이게 다 뭐야! 너 진짜 이상한 일 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무슨 애가 이렇게 멍이 심하게 들어? 이거 아동학대로 신고… 아니, 일단 치료 먼저….”

두툼한 옆구리를 따라 시원시원하게 드러난 근육을 덮은 멍은 보는 것만으로 내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조심조심 그 주변에 연고를 펴 바르는데, 별안간 스구루의 엄지가 내 미간에 닿았다.

“…뭐야?”

“인상 쓰지 마요. 예쁜데.”

지금 이게 인상을 안 쓰게 생겼냐고 따져 물으려다 그만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난처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런다. 하지만 내게는 스구루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상대하며 익힌 처세술이 있었다.

“선생님은 원래 예쁘단 소리 자주 들어.”

무릇 아이들이란 오히려 반대로 뻔뻔스럽게 나가면 십중팔구 질색하며 떨어져 나가거나 오히려 깔깔 웃으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놀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내 승리를 다짐하며 코웃음 치는데, 내 미간을 문지르던 스구루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음, 질색팔색 하는 부류로군.

이 녀석도 결국 애였다고 웃어넘기는데 날 내려다보는 스구루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누가 자주 하는데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차갑다. 정색까지 하다니.

이 녀석아.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상처받아.

“…우리 엄마아빠.”

“부모님 눈에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제야 웃어 주는데 정말 서럽다. 다신 스구루 앞에서 이런 농담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그의 옷자락을 내려주었다. 오늘은 잠깐 들렀을 뿐이라며 다시 가봐야 한다는 말에 난 이번에 스구루가 온다면 꼭 줘야겠다고 생각해둔 파우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 가져가.”

조금 귀여운 다람쥐 자수 제아무리. 스구루 같은 남학생이 들기엔 너무 깜찍했다. 하지만 집에 남는 파우치가 저거밖에 없었는걸.

“뭐예요?”

“연고랑 밴드야. 적어도 그 정도는 가지고 다녀. 자주 다치잖아.”

“…아.”

“네가 뭘 하고 다니느라 그렇게 다치는지 모르겠는데 애들이면 애들답게 얌전히 좀 놀아라. 너희 학교는 도대체가 연락을 해도 괜찮다고만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어쩌다보니 또 잔소리가 길어졌다. 애들 가르치는 입장이란 게 그런 거다.

한참 떠들다가 아차 싶어 제아무리 떠넘기듯 안기자, 스구루는 그 귀엽기 그지없는 파우치를 가만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귀여운 거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고맙습니다.”

“안에 사탕도 들었어. 츄잉캔디도 있을 텐데 그건 내가 추천하는 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스구루가 겉옷 안 주머니에 파우치를 넣었다. 다행히 싫어하진 않는 눈치라 한결 마음이 놓였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녀석이 아니니 이런 식으로나마 챙겨 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응?”

미닫이 문을 부서질 듯 꽉 쥔 스구루가 기다란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고 제 머리를 한껏 헝클었다.

“다친 곳 없더라도 여기 올 수 있을까요?”

그 말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친 데 없이 오면 더 환영이지, 무슨 소리야.”

*

“스구루 또 연락 안 받네.”

사토루의 음성에 짜증이 한가득 묻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항상 붙어 다니던 스구루가 요즘 비밀을 만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이상한 다람쥐 그 외에 같은 걸 쥐고 혼자 좋아하다가 한숨을 쉬다가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설마하니 여자 문제인가 싶었지만, 그 게토 스구루가 여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리 없다며 잡념을 떨쳐냈다.

오늘은 손도 많이 가고 찝찝했던 건수를 해치운 날이었다. 사토루는 생각보다 섬세한 남자였고 이런 날은 곧장 고전으로 돌아가기보다 도시에서 한바탕 놀고 시간을 보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스구루도 이 시간이면 일이 끝났을 것 같아 연락했더니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리는 걸 듣고는 그만 빈정이 상해버렸다.

“혼자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몰려드는 여자들도 있으니 심심할 틈 따윈 없었다. 재밌게 놀다 갈 심산으로 대충 가장 예쁜 여자나 골라볼까 싶었던 그의 귀로 양아치 무리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골목?’

제 주변의 여자들에게 대충 손짓으로 꺼지라 말하니 그녀들은 붉으락푸르락 해져서는 금세 금붕어처럼 흩어졌다.

골목에 가까이 다가선 고죠의 눈앞에서 양아치 무리에게 금품을 갈취당하는 심약한 남성이 울상인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어째 이지치를 닮아 기분이 상했다. 이지치를 괴롭혀도 되는 건 저뿐이니 그와 닮은 남자를 괴롭혀도 되는 것 또한 제 몫이었다. 그런 걸 고작 양아치 무리 따위가 흉내 내고 있으니 가뜩이나 뒤틀려있던 심산이 제대로 꼬여버렸다.

“이 새끼들이….”

정정한다. 고죠 사토루는 그냥 화풀이가 하고 싶었다.

입으로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얼굴은 잔뜩 신이 났다.

골목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려던 그의 뒤에서 그리 강하지 않은 힘이 옷자락을 쥔 채 필사적으로 사토루를 잡아끌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흘끗 뒤돌아보자, 웬 작은 푸들 같은 여자가 제 옷을 쥔 채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하, 학생. 잠깐만.”

제가 움직이면 그대로 질질 끌려올 것 같은데 필사적인 게 웃겨서 그대로 뒀다. 그녀는 드디어 멈춰준 사토루의 행동에 함박웃음을 짓더니 곧 심각해져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학생이 위험하게 어딜 끼려고!”

“뭐?”

“이상한 사람 아니고 이 근처 학교 선생님이니까, 학생은 내 뒤에 있어.”

그녀의 뒤에 있어도 이미 머리 세 개는 차이가 나서 제 얼굴만 팔릴 뿐이었다. 사토루는 부러 그 부분에 대해 시비 걸지 않고 그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심심하던 그에게 양아치 무리보다 재밌는 광경이었다.

“이럴 때는 경찰에 신고하는 게 최고야.”

무슨 비장의 수가 있나 했더니, 씩 웃으며 하는 말이 저런 거다.

그녀가 경찰에 신고 문자를 넣는 사이 순식간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그녀가 잔뜩 겁먹은 주제에 사토루를 향해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하, 학생은 도망쳐! 여긴 내가 신고할 테니까-”

“이 미친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남자의 손이 여자의 뺨을 향해 날아들기 직전, 흰 주먹이 눈 깜짝할 새에 남자의 턱에 명중했다. 뻐억, 뼈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힌 남자의 손에서 벗어난 여자를 제 뒤로 돌린 사토루가 푸른 안광을 희번덕이며 웃어 보였다.

“네가 뒤져, 씨발아.”

뒤에서 여자의 작은 딸꾹질 소리가 작은 진동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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