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베티, 나의 베로니카 2

주술회전 / HL 네임리스 드림 / 창작 샘플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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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죠 사토루, 게토 스구루

*최강샌드 네임리스 드림

*타계정 업로드 작품이며 샘플용으로 해당 계정에 아카이빙합니다.


오지랖만큼 인생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학습 능력이라고는 개나 준 멍청이였다. 누굴 도와서 감사를 받겠다는 거창한 인생의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닌데 부당하거나 누군가 도와야 하는 상황에 닥치면 일단 몸이 움직이는 비효율적인 신체 구조를 가진 탓이 분명했다.

기껏 소매치기를 잡아놓고 한패로 몰리거나 다친 사람을 도와놓고 가해자로 몰린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 오지랖은 내게 있어 내 뜻대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자 해악이었다. 본능이니 학습 능력이 통할 리도 없지.

“아악!!”

그러니 또 이렇게 머리채나 휘어 잡히는 거다.

나의 베티,

나의 베로니카

오랜만에 동기들과 약속이 있어 나선 술자리였다. 술이 약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주말이니 달리자던 동기의 애원을 숙취 핑계로 벗어나 밤거리를 걸었다.

숨에서 터져나오는 알코올 냄새를 만끽하는 내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술자리는 끝났어요?]

스구루다.

얼떨결에 돌봐준 일을 계기로 스스럼없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정신 차렸을 때는 번호까지 교환한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 폰 기종을 구경하겠다며 가져가 놓고 슬그머니 번호를 저장해둔 스구루의 앙큼한 계략이었지만.

[3차 가자는 거 물리고 집에 가는 중]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데리러 갈까요?]

와, 답장 엄청 빨라.

난 졸음에 약간 곱아 든 손가락으로 [괜찮아]라고 답했다. 학생이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안되지. 난 어른이니까 상관 없지만.

버스보다는 택시가 좋겠지 싶어 택시 승강장으로 향하던 걸음이 순간 우뚝 멎었다. 내 시야 끝에 시커먼 무리가 걸렸다. 잔뜩 움츠린 왜소한 남자애의 어깨에 팔을 두른 너댓 명의 장정을 보니 필시 돈이라도 뜯으려는 무리가 틀림없었다. 애석하게도 난 내 체격으로 그들에게 안된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이럴 때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 새끼들이….”

그때 곁을 성큼성큼 지나가는 남자의 목소리에 한 번, 그가 입은 교복에 한 번 정신을 빼앗겼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그의 옷자락을 쥔 채 부들부들 버티고 있었다.

“하, 학생. 잠깐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가 입은 교복은 스구루의 교복과 같은 것이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이대로 질질 끌려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가 멈춰줘 감사할 따름이었다.

“학생이 위험하게 어딜 끼려고!”

“뭐?”

험악한 음성에 살짝 쫄았다. 요즘 애들 너무 무서워.

그렇지만 그가 교복을 입고 있는 이상, 교직에 몸담은 내가 물러설 수도 없었다. 최대한 나의 무해함을 설명하고 그를 등 뒤로 보냈지만, 내 인생에 오지랖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는지 나는 또 잠시 잊고 있었다.

“아악!!”

 머리채를 휘어 잡히긴 했지만, 일단 스구루와 같은 학교 학생을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손짓함과 동시에 내 머리채를 휘어 잡은 남자의 주먹이 내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 찰나, 내 시야를 가로지르는 흰 주먹이 뒤에 선 남자의 턱을 가격했다. 웃고 있는 푸른 눈의 아이와 흰 주먹, 붉은 피, 검은 교복이 시야에서 어지럽게 춤췄다.

“네가 뒤져, 씨발아.”

히끅.

왜소한 남자는 도망친 지 오래고 난 어느새 순식간에 쓰러진 깡패 무리의 위에 걸터앉아 날 내려다보는 이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떡하냐. 개불편하네.

“있지.”

엄마야, 말 걸잖아.

“예, 예?”

분명 스구루와 같은 교복인데 이상하게 그 앞에서는 존댓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깡패들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는 걸 목격해서 그런지 편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 틀린다고 나를 저렇게 패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는 반말 찍찍하더니 웬 존댓말이야?”

“아하하…. 그럼 말 놓을까?”

“….”

“요?”

“이런 거 끼어들지 말라고 엄마가 안 가르쳐줬어?”

“…으음.”

이 자식 패드립까지 친다.

욱해서 잠깐 숨을 고른 내가 애써 웃어 보였다.

“독립한 지 오래라. 어려서는 엄마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쫄지 않겠다는 의지로 말을 놨는데, 내 마음 같은 건 앳저녁에 들켰는지 히죽대면서 웃는다. 생긴 건 곱상하니 예쁘게 생겨서 히죽히죽 웃는 얼굴은 재수 없기 그지없었다. 아래서 끄윽끄윽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깡패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쥐어 팬 그가 “으쌰.”하고 내 앞에 훌쩍 내려섰다.

그를 바라 보려던 내 고개가 다시 익은 벼처럼 숙여졌다.

‘존나 크잖아, 얘…! 뭐야?’

체감상 스구루보다 크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학생 덕분에 신문 1면에 나는 건 피했네.”

“당신처럼 힘도 없으면서 함부로 끼어들고 그러는 게 더 성가셔. 앞으로 끼어들지 말고 냉큼 꺼져.”

저 나름대로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은데 말하는 본새가 저 누워있는 깡패들하고 다를 게 없다.

차라리 아까 스구루한테 나와달라고 할 걸 울상이던 내가 문득 그의 손등을 발견했다.

“…다쳤어?”

“내가 다칠 리가 있나.”

“까졌는데.”

내가 슬그머니 가리키자 푸른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는 한숨을 푹 밀어내고 머리를 벅벅 털더니 “괜찮아.” 하고 주머니 속으로 손을 감췄다.

나도 허투루 보건교사를 하는 말랑한 인간은 아니었다. 스구루에게 줬던 파우치처럼 나도 기본적으로 들고 다니는 간이 구급 키트정도는 있었다.

“고전 학생이지?”

“어떻게 알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괜히 스구루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얼버무리자 푸른 눈이 무감하게 날 내려다봤다. 스구루한테는 그래도 반말이 바로 나왔는데 이 사람 앞에서는 어째 쉽지가 않다. 딱 봐도 눈이 돌아있다, 애가.

“의심 안 해도 되니까 손 줘볼래? 나 아까 말한 것처럼 교사거든. 보건교사.”

그 말에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가늘게 나를 바라보던 그가 못 미더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도 허여멀건하고 길쭉길쭉해서 손도 가느다랄 줄 알았는데 막상 잡은 손은 생각보다 투박하고 커다랬다. 아주 살짝 까졌는데 어쨌든 날 도와줬으니 이대로 모른 척 보내기도 찝찝하고 스구루와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하니 마음이 더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잡동사니로 엉망인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내 소독약과 연고, 밴드를 차례로 꺼내 그의 손에 두드리고 바르고 둘러주자 생각보다 얌전했다.

“지금 가진 게 이거밖에 없네. 남자애들은 이런 거 안 좋아하나?”

하필 밴드가 고양이 무늬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보급품을 사용하니까 상관없지만, 내 개인적인 취향은 귀여운 것들이었다. 당연하다. 귀여운 건 최고니까. 이걸 무슨 문짝보다도 큰 남자애 손에 둘러줄 줄은 몰랐는데 막상 두르고 나니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머쓱해져 묻자, 나와 밴드를 번갈아 빤히 바라보던 그 애는 불퉁하게 “상관 없어.”하고 손을 거뒀다.

“나 걱정 해주는 건 고마운데 학생도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마.”

이제 그만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손목을 낚아채는 힘이 너무 세서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너무 놀라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휙 뒤도는데 별안간 그 애는 제 시커먼 교복 어드메를 가리키며 “피 묻었어.”하고 볼멘소리를 냈다.

“뭐?”

“피 묻었다고. 안 보여?”

까매서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아, 여기다.”

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아무튼 이거 세탁비 어쩔 거야?”

“…응?”

“당신 도와주다 묻은 거잖아. 세탁비 안 물어줘?”

이게 웬 목숨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격인지.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잽싼 그 애는 벌써 내 휴대폰을 낚아챈 뒤였다.

“보아하니 먹튀할 건가 본데, 당신 번호 저장했으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마. 내가 세탁 하고 연락할 테니까 그때 변상해.”

“아니, 저기!”

“아, 그리고 내 이름 저기 아니고 학생 아니고 고죠 사토루. 그럼 잘 가~”

다시 휴대폰을 내 가방에 쏙 넣어 준 그가 언제 내 손목을 잡았냐는 듯 웃는 얼굴로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배웅했다.

순식간에 그에게 휘둘려 멍한 정신으로 택시에 오른 난 짧게 두 번 울리는 휴대폰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택시는 탔어요?]

[피 엄청 튀었어. 이거 한 두 푼으로 안되겠는데?]

게토 스구루와 고죠 사토루.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

“귀엽지 않아?”

“손이 아니라 머리 다친 거 아니야?”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제 손에 붙은 고양이 무늬 밴드를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내는 사토루의 모습에 쇼코도 이제 질리고 말았다.

“애초에 네가 손은 왜 다쳤는데?”

“글쎄에.”

제 뒤에 바싹 붙어있던 그녀에게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 싶어 뒤로 감추던 순간에 저를 감싸던 주력을 감췄다. 아마 그때 스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 덕에 얻은 게 많으니 사토루로서는 아쉬울 게 없는 거래였다.

쇼코는 딱 봐도 음흉한 생각으로 가득 찬 쓰레기 1을 바라보며 강하게 혀를 찼다.

“쓰레기들이 이제 쌍으로 징그럽기까지 하네.”

쓰레기 2는 요즘 휴대폰만 붙들고 살았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거나 저 혼자 아련해지는 눈빛에 쇼코는 기분 나쁘다며 질색했지만, 애석하게도 스구루의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 기분 나쁜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나미.”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 주세요.”

자판기에서 커피나 뽑아 마실 요량으로 찾아왔다가 불똥이 튄 나나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선을 긋자,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하이바라가 해맑게 웃었다.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 아니에요?”

“진짜 최악이다. 저 쓰레기들한테 걸린 여자가 불쌍해.”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가만히 듣자 하니까 너무 한 거 아니야? 스구루라면 몰라도 난 완전 나이스 가이 사토루잖아.”

“저 새끼는 개소리가 점점 신박해져.”

쇼코는 농담처럼 혀를 끌끌 차면서 하이바라와 나나미 몫의 동전을 자판기에 밀어 넣어줬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투자라는 그녀의 너스레에 귀여운 후배들은 감사를 전하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정확히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는 딱 질색인 눈치 빠른 나나미가 더 놀고 싶어하는 하이바라를 끌고 사라진 거지만.

“그래서? 진짜 여자때문이야?”

“뭐, 정확히 말하자면 세탁비.”

“세탁비?”

“이거 봐. 피 잔뜩 튀었잖아.”

아니, 안 보이거든?

그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킨 쇼코가 사토루의 시커먼 교복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여자 구해주다가 피가 이만큼 튀었다니까? 딱 봐도 돈도 없어 보이던데 세탁비 명목으로 밥이나 몇 번 먹을까 하고.”

해맑게 웃으며 제 음흉한 계획을 나불대는 사토루의 음성에 쇼코가 “여자 인생 망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일갈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 털었다.

“망칠 생각 없는데.”

“엉?”

“애초에 내가 그 정도로 빠져들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손으로 맛집 정보를 검색하는 제 친구의 모습에 쇼코가 입술을 달싹이다 굳게 다물었다.

‘그래. 그러다 뒤지게 후회하는 거거든. 재수 없으니까 안 알려 줄 거지만.’

못지 않게 악랄한 속내로 낄낄 웃는 쇼코의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스구루의 음성이 넘어왔다. 뭐가 못마땅한지 잔뜩 뺨이 부푼 소리였다.

“응?”

“말린 장미하고 물 머금은 장미의 차이가 도대체 뭐야?”

“…넌 또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하고 있어?”

“립스틱 사려는데 차이를 모르겠네. 그냥 둘 다 예쁠 것 같거든.”

스구루의 개소리에 쇼코가 “우웁.”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그만 해줄래? 토할 것 같아, 얘들아.”

“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싱긋 웃는 스구루의 모습에 불안을 감지한 쇼코가 “들어준 것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하자, 그는 방금 결제를 마친 액정을 들어 보였다.

“둘 다 샀어.”

응,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해, 쓰레기들아.

난 모르겠다.

*

내게 있어 주말이란, 집안에 틀어박혀 침대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의미도 목적도 없이 뒹굴 거리다가 다시 그대로 잠드는 날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약속이 있으면 나가야 한다. 사회적인 동물이고 평생 혼자 틀어박혀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보통 약속의 상대라 함은 연인이나 친구에 국한된다. 전남친과 헤어진 지 세 달정도 지났으니 날 불러낼 사람은 친구가 유일했다.

“가운 벗은 거 처음 봐요.”

적어도 학생, 그것도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 스구루일 확률은 내 안에 없었단 소리다.

“나도 너 교복 벗은 거 처음 봐.”

스구루는 교복을 벗으니 정말 진심으로 학생 같지가 않았다.

느슨하게 반묶음한 머리 아래로 편한 티셔츠와 슬랙스, 로퍼 같은 아이템을 걸치고 있으니 주변의 어른보다도 어른스러운 모양새였다. 걸친 코트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그간 느꼈던 덩치가 결코 품이 큰 교복때문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에 두르고 온 머플러는 명품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값비싼 브랜드가 확실했다. 부잣집 애였던 걸까?

오늘 만남은 조금 갑작스러웠다. 요 며칠 바빴다며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스구루가 “주말에 잠깐 만날 수 있나요?”하고 물어와 홀린 듯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날더러 양심 없다며 질타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으리라 확신하다. 하지만 그 사람도 게토 스구루라는 저 요망하기 그지없는 남자애의 피지컬과 얼굴, 목소리, 말투 그 외 기타 등등을 겪고 난다면 나처럼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을 터였다.

“근데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밖에서 아팠다면 애가 병원에 갔겠지.

하지만 내가 머쓱하지 않게 배려라도 할 셈인지 스구루는 놀리는 기색도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저하고 밤에 만나긴 어렵잖아요. 주말 낮 정도면 받아 줄 것 같아서.”

“그, 그렇지. 아무래도 선생님이 학생하고 밤에 밖에서 만나는 건 좀 보기에 그렇잖아.”

“아플 때만 보는 사이도 이제 슬슬 지겹구요.”

그러면서 슬그머니 입술 핥는 거 다 봤다.

종종 이런 학생들이 있다. 아무래도 난 이 아이들과 나이차가 많이 안 나는 실정이다 보니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해 들이대는 청춘들이 분명 있었다.

“저기, 스구루.”

스구루는 아무리 봐도 그 또래 애들 같지는 않았지만, 괜히 애 앞길 망치고 나도 사회적 매장을 당하느니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자르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며 펄쩍 뛰어 준다면 민망하긴 해도 제일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널 다른 학교 학생으로 보고 네가 착한 애니까 밖에서도 보고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네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난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아, 걱정 마세요.”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고 생각했는데 스구루는 생각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 털었다.

“다른 생각은 확실히 성인 되고 할 테니까.”

“그래, 그래. ……………응?”

“오늘은 같이 밥 먹고 싶어서 불렀거든요. 사탕이랑 파우치 보답으로.”

“아니, 그건 내가 살 건데. 잠깐만, 너 방금….”

뭐라고 내가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정신 없어!

“잠깐만, 나 전화 좀.”

“편하게 받아요.”

내 옆 담벼락에 등을 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스구루는 정말 느긋하게 날 기다려줬다. 지나가는 여자들 시선이 무섭게 꽂히는 걸 보면서 난 슬그머니 액정을 바라봤다. …고죠 사토루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얘는 아직 좀 무섭다. 공갈협박이 특기 같다.

“나 지금 밖인데….”

[뭐야? 누구 만나는데?]

따져 묻는 음성에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왜 내가 추궁 당하는 거지?

“오늘 약속이 있어서. 근데 왜?”

[…아, 세탁비말인데.]

올 게 왔구나.

대충 입금해주고 끝낼 요량으로 “얼마야?” 물으니 [안 받을 거야.]하는 황당한 답이 들려왔다.

“응?”

[대신 나랑 밥 먹어. 지금.]

“나 약속 있다니까!”

[내가 우선이어야지.]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문득 혜안이 떠올랐다. “잠깐 기다려.”하고 힘줘 말하자 사토루는 생각보다 순순하게 [알았어.]하고 수긍해줬다.

난 전화기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누른 채 스구루의 옷자락을 두 어 번 당겨 그의 시선을 끌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왜요?”

“으음, 스구루. 내가 너무 미안한데 저번에 너희 학교 학생한테 신세 진 일이 있거든. 갑자기 오늘 밥을 대접할 일이 생겼는데 괜찮을까?”

“…우리 학교?”

순간 험악하게 바뀐 눈빛은 기분 탓일까?

“그, 그래서 너랑 선약이니까 나는.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 기왕 이렇게 된 거 셋이 같이 만나서 먹으면 어떨까? 둘이 인사도 해.”

내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스구루가 다시 차분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좋다면 나도 좋아요. 아쉽긴 한데 다음에 또 둘만 있을 기회도 주겠지.”

“으응.”

다음에 꼭 자리를 만들라는 무언의 협박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여보세요.”하자 [왜 이렇게 늦어? 뭔데?]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니, 나도 일행한테 양해는 구해야지. 아무튼 내가 신세진 건 맞으니까 이리 와. 셋이 밥 먹어도 될 것 같아.”

[누가 셋이 먹쟤? 둘이 먹자고.]

“나도 선약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래? 싫음 말던가.”

[…됐어. 주소 보내.]

놀랍게도 사토루는 내가 주소를 보낸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건가 두려운 마음에 주변을 살피는데, 나보다는 오히려 사토루와 스구루 두 사람이 더 놀란 눈치였다.

“스구루….”

“…사토루?”

사색이 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소개할 수고를 던 나만 기분이 좋아져 두 사람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둘이 아는 사이야? 잘 됐네!”

내 무덤을 판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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