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익애계 스쿠나 2.5] 와 수면

식사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발아래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를 보니 붉은 액체가 발목 높이까지 고여 있었다. 피라고 하기에는 아무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고 냄새도 없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있는 풍경에 언제 어디서 이런 풍경을 보았을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하면서 서 있었더니 옆에서 특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케힛. 꽤나 침착한 모습이구나.”

 

장신의 나나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신장과 그 신장에 어울리게 커다란 근육질의 몸을 한 남자. 얼굴 반은 나무껍질 같은 것으로 변해있으며 양쪽 눈 아래에 눈이 하나씩 더 있었다. 팔, 어깨와 몸에는 검은 선으로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그 문양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 보니 몸에 한 쌍의 팔이 더 있는 것과 배에 입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료멘 스쿠나?”

 

스쿠나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까의 목소리와 이 모습을 보면 눈 앞의 남자가 누군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나미는 지금의 풍경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마히토의 영역에 갇혔던 때 이타도리가 영역 안으로 들어왔고 그때 스쿠나의 영역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나나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스쿠나는 두 쌍의 팔을 팔짱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 생득영역이다.”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온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이젠 잘 차례라고.”

“여기서 자는 겁니까?”

 

바보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쿠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에 스쿠나는 소리내 웃으며 다가오더니 나나미의 등에 손을 올리더니 가볍게 눌러 그를 어디론가로 이끌었다. 어느새 발목까지 고여 있던 액체가 사라지고 바닥에는 자연석이 깔려 길을 만들고 있었다. 구두 굽이 돌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할까. 네 영혼은 내 영역 안에 있고 네 몸은 지금 강제적으로 잠든 상태다. 유체이탈이라고 할까.”

“왜 그런 일을.”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지 못했겠지? 네가 수면실이나 휴게실에 들어갔다가도 금방 다시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나미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스쿠나가 말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변명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잠들 수 없었고 쉬는 것 자체가 실수를 넘어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쉬거나 자려고 앉고 누웠다가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이끄는 대로 걷는 모습에 스쿠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네 몸은 강제적으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내가 널 영역에서 내보내 주기 전까지는 계속 자겠지. 적당한 시간이 지나거나 유지가 깨워야 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내보내 주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거라.”

 

적당한 시간. 저주의 왕이 생각하는 사흘 밤을 샌 인간이 충분히 잤다고 판단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게다가 방금 이타도리 군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나? 이타도리 군이 말해준다니-?

 

“-잠깐. 이타도리 군과 소통이 가능합니까?”

“그래. 꼬마가 보고 들은 건 전부 인지하고 있다.”

 

나나미는 자신의 얼굴에 피가 몰려 체온이 오르는 걸 느끼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그럼, 제가 먹는 모습도, 전부.”

“물론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스쿠나의 입가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나나미는 부끄러움을 넘어서 수치심이 치밀어 올라 걸음도 멈추고 입을 뻐끔거렸다. 하필 그런 모습을 보여버렸다니-?

 

“신경 쓰지 마라. 나로서는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꽤나 즐거웠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무언가 말하려 스쿠나를 향해 고개를 든 나나미는 말을 잊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스쿠나의 어깨 너머로 마치 성과 같은 전통 가옥이 보였다.

 

“이건...”

“네가 쉴 곳이다. 신발을 신은 채로도 상관없으니 들어오거라.”

 

혹사당해 지친 사고는 현재 상황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땐 뼈가 쌓여 있었는데. 스쿠나를 따라가며 집 안을 둘러보던 나나미는 왜 이 집이 큰지를 문득 깨달았다. 스쿠나의 체격에 맞추어 만들어진 집이었다.

 

“자, 여기가 좋겠구나.”

 

적당히 넓은 방에 커다란 이불이 깔려 있었다. 나나미는 영역에 대한 인식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상황에 더해 어느 정도까지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아 문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슬쩍 등을 떠밀며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간 스쿠나는 나나미를 마주 보고 서서 넥타이의 매듭에 손을 올렸다.

 

“아.”

“얌전히 있거라. 내가 벗겨 줄 테니.”

 

그제야 눈치챘다. 현실에서 나나미는 시부야 역에서 우라우메가 찾아 입힌 하늘색 터틀넥에 회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평소 제일 자주 입던 파란 셔츠와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다.

 

“왜 제 옷차림이 바뀌었습니까?”

 

나나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얌전히 턱을 들었다. 넥타이의 매듭이 당겨져 뒷목에 잠깐 무게가 실렸다가 조임이 풀려 느슨해지면서 가벼워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은 네가 평소 인식하는 스스로의 모습이고 본인이 제일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모습이다.”

 

커다란 손이 재킷을 잡고 어깨에서 끌어 내렸다. 나나미는 양팔을 살짝 몸쪽으로 모아 재킷을 벗기기 쉽게 자세를 잡았다.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천이 한 겹 벗겨진 것인데 마치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할 땐 으레 받는 느낌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느끼는 그 감각에 생각이 미칠 정도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나미는 짧은 날숨을 내쉴 뿐이었지만 스쿠나의 반응은 달랐다. 눈을 감은 나나미가 보지 못하는 사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던 스쿠나는 재킷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재킷을 벗겼던 두 손으로 나나미의 등을 쓸어내리며 허리께로 내려갔다.

 

“앗.”

 

예상치 못한 접촉에 나나미는 반사적으로 스쿠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스쿠나의 두 팔에 완전히 끌어안긴 상태였다.

 

“기다려라. 이상한 걸 하려는 게 아냐. 이... 벨트를 풀려고 했을 뿐이다.”

 

홀스터라는 명칭을 몰랐는지 한 박자 늦게 벨트라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아주 미세하게 당혹감이 느껴졌다. 나나미는 잠시 망설이다 스쿠나의 몸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두 쌍의 손이 움직이면서 홀스터와 바지 벨트를 풀어내고 벗겨 바닥에 떨어뜨렸고 이번엔 온몸이 밧줄로 묶여 조여지고 있다가 풀려난 것 같은 해방감에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네 녀석도 요령 부릴 줄을 모르는구나.”

 

무슨 말일까. 셔츠의 단추가 풀어지면서 따뜻한 실내의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따뜻하다니 조금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셔츠가 벗겨지니 물기를 머금고 피부에 들러붙어 있던 막이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이 바지 허리춤을 건드렸다. 후크가 풀리는 소리가 나고 바지가 끌어내려졌다. 다리를 들어 발을 빼려고 했지만 나나미가 움직이기 전에 스쿠나가 세 개의 팔로 가볍게 나나미의 몸을 들어 올리더니 바지를 벗겼다. 나나미가 눈을 떴을 때 스쿠나는 방 한쪽의 함에서 유카타를 꺼내고 있었다. 스쿠나를 위한 것이라면 나나미의 신장에 맞지 않아야 할 텐데 그가 꺼낸 것은 어딜 봐도 나나미의 신장과 체격에 딱 맞는 크기였다. 흰 천에 노란 은행잎 몇 개가 수놓아진 유카타는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얇고 부드러워 보였다. 스쿠나는 팔 네 개를 전부 써서 유카타를 펼쳐 보였고 나나미는 얌전히 뒤로 돌아서 스쿠나가 유카타를 입힐 수 있도록 팔을 움직였다. 서늘한 느낌의 부드러운 천이 피부에 스치는 느낌이 기분 좋다고 느꼈고 나나미는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냐?”

“몸에 익숙한 정장과 홀스터를 벗을 땐 짐을 벗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당신이 주는 유카타를 입으면서 상쾌함을 느낀다니 조금 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방금까지 네 녀석이 걸치고 있던 건 피로나 책임감, 죄책감 같은 것들이 형상화되어 들러붙어 있던 거니까.”

“네?”

“그런 것들이 떨어져 나갔으니 개운한 게 당연하지. 그래서 아까 네 녀석은 요령 부릴 줄 모른다고 한 거다.”

“무슨 말을... 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나나미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정의 의미보다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봐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스쿠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자꾸 눈을 굴리면서 딱히 볼 거리도 없는 방 여기저기를 응시하는 나나미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그 누더기 놈을 빼앗겼을 때.”

 

누더기. 마히토를 말하는 거겠지. 나나미는 스쿠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너는 만족스럽게 싸우지 못했지.”

 

나나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스쿠나의 손이 나나미의 뺨을 매만지더니 엄지로 턱관절 쪽을 눌러 억지로 힘을 빼게 했다.

 

“주구도 없었고, 주력도 체력도 이미 바닥나 있었다.”

 

부상은 스쿠나의 반전술식으로 나은 상태였지만 주력이나 체력, 흘린 피는 술식으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싸우기는커녕 제대로 도망도 가지 못하는 인간들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필사적이었지. 그만큼 다른 인간들을 지키지 못하고 누더기를 빼앗긴 죄책감과 책임감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일하고 있었던 건 알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할 셈이냐?”

 

나나미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스쿠나는 잠시 짜증 섞인 표정을 짓더니 금방 표정을 풀고 나나미의 뺨을 쓸었다.

 

“그 짐을 네가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 그때 만족스럽게 싸우지 못한 건 나도, 우라우메도,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이니. 다른 일도 사탕 녀석이나 다른 주술사들과 분담해라. 애송이가 내 힘을 다룰 수 있다고 꾸며냈으니 그만큼 그 힘을 활용해도 좋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뺨에 올려져 있던 스쿠나의 손이 위로 올라오더니 나나미의 선글라스를 벗겼다.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전에 뺨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놀랐다.

 

“어...”

 

안와에 밀착하는 형태의 선글라스 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깜빡이고, 손으로 문질러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스쿠나가 나나미의 손을 붙잡더니 부드러운 천으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찍어 닦아주었다.

 

“이 시대 녀석들은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부르던 것 같은데. 넌 영혼 단계에서부터 가림막을 치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셈이냐.”

 

그 말에 나나미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표정이 풀어졌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울리지... 않네요.”

 

스쿠나는 짧게 코웃음을 치는 걸로 답을 대신했지만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팔 하나로 이불을 가리켰다.

 

“쓸데없는 말이 끝났으면 누워라. 이곳에서 잠들면 평소에 자던 것과 똑같이 영혼도 휴식을 취하게 되는 거니까.”

“...네. 감사합니다.”

 

나나미는 유카타가 흐트러지지 않게 신경 쓰며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과 적당한 중량감에 과로와 감정의 흔들림으로 지친 몸-영혼-이 한층 더 나른해졌다. 심지어 스쿠나가 옆에 모나게 누워 마치 아이를 재우는 이불 위로 배를 토닥이기 시작했고 나나미는 그 모습에 놀라거나 새삼스러워 하기 전에 잠들고 말았다.

 

 

 

나나미가 잠든 후에도 스쿠나는 손을 멈추지 않고 잠든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방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스러운 기척이었다. 그 모순에 실소하며 스쿠나가 한손을 들어 흔드니 복도로 이어진 방의 미닫이문이 열렸고 곧 이타도리가 슬쩍 얼굴을 내밀어 방 안을 살폈다.

 

“나나밍 자?”

“그래. 푹 잠들었다. 혹시 모르니 조용히 들어와라.”

 

이타도리는 그 말대로 까치발로 들어와 비어있는 나나미의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제대로 씻겼느냐?”

“응. 내 방에서 대야에 물 떠와서 머리 감기고, 뜨거운 수건으로 몸도 다 닦고, 실내복으로 갈아입힌 다음에 내 방 침대에 눕혔어. 속옷까지 갈아입히는 건 싫어할 테니까.”

“잘했다. 그럼 넌 지금 어떤 상태냐?”

“난 수면실용 여분 베개랑 담요 가져와서 바닥에 누웠어.”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따로 방법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스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새로 요와 이불을 꺼내 나나미가 누운 자리 양옆에 하나씩 깔았다.

 

“너도 슬슬 자라. 알람이 울리면 깨워 줄 테니까.”

 

나나미에게 뭔가 먹여야겠다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그 정도는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이타도리는 고맙다고 해맑게 웃으면서 얼른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고 스쿠나는 두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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