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궤도
고죠유지
*주술고전 4학년 고죠 사토루x 과거로 가게 된 학생 이타도리 유지 AU
*설정 조작 많음 주의
너의 궤도
고죠 사토루는 이타도리 유지라는 궤도에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명확한 논제는 어느 곳이라도 통하는 당연한 법칙이었고, 이 한적한 도쿄 도립 주술고등학교에 또한 적용되는 통상적인 규칙이었다. 특급주물인 스쿠나의 손가락을 삼켜내 어줍짢게 주술사가 되어버린 이타도리 유지 역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스쿠나의 손가락 20개, 그것을 모두 삼키면 죽어라, 며 자신의 끝이 결정된 이타도리에게도 말이다. 골치 아픈 특급주물이 얼른 사라졌으면 하는 이 에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손가락들이 천천히 나타났으면 하는 이 에게도 이타도리의 사형일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요컨대 이타도리가 집어삼킨 손가락은 방금까지의 것을 포함해 18개라는 소리였다.
이제는 표정 변화 없이 목울대를 꿀렁이며 삼켜내는 이타도리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18개를 삼키는 동안 맛없고 기분 나쁜 손가락을 단숨에 삼키는 요령도 꽤 생겼을뿐더러, 삼키고 난 후의 상황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삼킨 개수가 많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일은 잦아졌지만 자신의 옆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폭주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이 세계의 최강도 말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내려 쬐는 따스한 햇살은 꽤 기분 좋았으며 자신의 뺨을 간질여대는 산뜻한 바람의 감각이 제법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신발 너머로 느껴지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의 촉감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지, 그래서 18개째를 삼킨 기분은?”
“나쁘지 않아요. 스쿠나가 좀 더 시끄럽게 굴긴 하지만요.”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해 보이는 이타도리는 자신이 말한 대로 별다른 신체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저 장신의 사내는 고죠 사토루, 유일하게 저주의 왕 스쿠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인물. 최강이라 불리고 있는 저 사내는 빈말로라도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다. 규격 외 특급 주술사인 그의 손길을 기다리던 수많은 지명 의뢰들은 전격 취소되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 이타도리가 막 15개째의 손가락을 삼켰을 때였다.
―나 꽤나 참고 있었는데 말이지. 슬슬 시시한 지명 의뢰는 봐주지 않을래? 조금 양보해서 위치가 가깝다면 고려해줄 만한 의뢰는 있을지도.
―무슨 소리인가! 고죠 사토루, 네가 어느 위치인지는 알고 있는거냐?
―하?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내가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어? 내가 없을 때, 스쿠나가 날뛰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은 모양이지.
게임 오버. 아무리 특급 저주라도 스쿠나와 격이 다르다. 만약에라도 이타도리가 스쿠나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어쩔 셈이냐고 고죠 사토루는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 쪽에서 스쿠나 라는 패를 든 순간부터 상층부는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고죠는 ’그럼~‘하고 평소처럼 한없이 가벼운 태도로 손을 들어 올리며 퇴장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정리되고 나서는 쭉 이런 상태다. 다시 말해, 이타도리 옆에서 일 분 일 초도 떨어지지 않고 껌딱지 마냥 딱 달라붙어 있는 이 상황 말이다. 상층부에게 일방적으로 뒤집어엎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타도리는 당황스러웠다. 겨우 나 하나를 위해 많은 의뢰들을 포기해야 했을까? 그 의뢰들은 단순한 의뢰들이 아니다. 자칫하면 인명피해가 있을 수도 있기에 고죠 선생님에게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저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선생님, 이라고 말하고 싶어 입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눈치 챈 고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투명한 겨울 호수처럼 말갛게 푸른 눈으로 우물쭈물 하고 있던 이타도리와 눈을 마주쳤다.
―유지는 나한테 실컷 보호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모든 게 괜찮을테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그의 말대로 이타도리가 걱정할 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저주에 의해 인명피해가 생기는 사건이나 처치되지 못한 주령에 의해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식들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죠 자신이 말한 대로 의뢰지가 가까운 곳이라면 도와주러 갔을 수도 있었으며 혹은 일련의 사건들이 이타도리의 귀에 들리지 않게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고죠가 의도 한 방향대로 이타도리는 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모습이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신의 제자는 큰 의심 없이 넘어 갔던 것이다. 덕분에 고죠의 곁에서 이타도리가 손가락을 삼키는 상황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고죠의 노력은 허사가 되지 않았다. 그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제자는 이 정도로 살뜰히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 이타도리의 모습은 퍽이나 즐거워 보여 고죠는 자신의 손을 그의 머리에 툭 올렸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유지?”
“괜히 옛날 생각이 났거든요.”
“그래? 기분이 좋다니 잘됐네. 유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거든.”
부탁이요? 이타도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올리자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는 미형의 얼굴이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아름답게 조각된 형태는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안대 아래로 날카롭게 미끄러지며 서 있는 콧대와 단정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붉은 입술.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은 평소에도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의 백발을 흐트렸고, 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어지러이 반짝여 은실 타래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군데군데 빛망울이 맺힌 모습은 꽤 혼자 보기에 아쉬운 절경이었다. 볼 때마다 깨닫게 된다. 자신의 선생님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나 꽤 재미있는 술식을 만들었었거든. 시험해보고 싶은데 지원자가 필요해.”
평소에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가 모토인 선생님이 새로운 술식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말에 이타도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대면 죄다 성공시켜버리는 사람이기에 후배 양성을 위해 일부러 자신의 능력 개발을 제쳐두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꺾고 시험해보고 싶은 술식 이라니. 그 누구라도 궁금할 법한 내용이기에 이타도리는 번쩍 손을 들며 ‘여기요! 여기 그 지원자 있습니다’ 라고 소리쳤다. 강단 있게 말하는 이타도리의 목소리에 역시, 유지는 그럴 줄 알았어. 라고 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응한다.
“좋아, 지원자인 이타도리 유지 군에게 시험해보도록 하지!”
어디선가 들어봤던 진지하고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타도리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대는 고죠의 손이 예사롭지 않다. 그의 손과 맞닿은 이타도리의 어깨는 투명해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설명을 해달라고 입을 열어보지만, 자신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당황하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이타도리의 모습을 보고는 후, 하고 숨을 내쉬던 고죠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곤 자신의 안대를 끌어 내렸다.
고죠의 목소리는 정확한 음절로 들려오지 않고 왱알왱알 알 수 없는 백색소음과 같은 상태로 귓가를 가득 채운다. 소음들은 이내 이타도리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헤집어 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방해했다. 자신의 몸의 감각은 점차 흐릿해지며 이상하게 붕 떠오르는 감각은 현실감은 사라지게 만든다. 믿기지 않는 감각들이 자신의 몸을 지배할 때,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군, 고죠 사토루! 라는 소리가 이그러져 귓가에 스치다가 다시 전신을 타고 돌아 머리에서 울려 퍼진다. 그만 소리 좀 질러. 나 머리 아프니까...
정신이 깜빡거리며 점멸하고 있을 때 자신의 귓가에선 평소와 다른 담담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놓아 버렸다.
“사형수인 유지를 도망치게 하는 게 아니야. 고죠 사토루의 개인적인 실험 인거지.”
눈을 뜨니 그곳은 우습게도 다시, 주술고전이었다.
단,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깨끗하게 관리 되었고 세월감이 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쿵, 하고 진흙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이타도리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고통에 찬 신음 소리만 내며 자신의 엉덩이를 슬슬 문질러댔다. 아야, 이게 무슨 일이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분명 똑같은 주술고전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익은 모습이 아니었고 자신의 곁에 있었던 고죠 선생님도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물어보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무슨 술식을 시험해보신다고 하신거지?
“우와, 뭐야 이건? 감자 같이 생겼네.”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그걸 본인에게 탓해선 안 돼, 사토루.”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꽤 익숙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자, 이 세계에서 최강의 주술사와 자신이 아는 한 최악의 주저사의 목소리가 동시에 귀에서 웅웅거렸다. 땅에 시선을 내리꽂고 있던 이타도리가 고개를 팟 하고 쳐드니 거기엔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보다 좀 더 젊은 모습의 두 명이 보였다.
“고,고,고죠 선생님?!”
“하?”
스구루, 얘 지금 나 맥이는거냐? 글쎄. 그런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타도리의 발언에 정작 그 발언을 내뱉은 본인을 무시해버리곤 서로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둘의 친근한 모습에 이타도리는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을 정리를 해야만 했다. 그래, 그 둘이 과거에 친구였다는 사실은 알음알음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알기엔 이젠 둘은 그런 친근한 사이는커녕, 사이 좋게 말을 건넬 사이던가?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 둘의 모습은 기억하던 모습과 달리 젊고 평소 하고 다니던 스타일과 달랐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안대 대신 대충 걸치고 있는 선글라스. 이 모습들은 마치... 자신이 우연히 봤던 고죠 선생님과 게토 스구루의 졸업 사진의 모습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니?”
볼썽사납게 넘어진 이타도리 앞에 내민 손의 주인공은 의외로 최악의 주저사인 게토였다. 아직까지 상황판단이 되지 않은 이타도리는 대답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게토의 손을 보고만 있자 게토는 민망한지 손을 거두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토루, 네 이름을 불렀던 거 보니 네가 부축해주는 쪽이 좋은가봐.
“땅에 파묻힌 감자처럼 굴지 말고 일단 일어나지 그래?”
“감자가 아니라 이타도리 유지거든요! 고죠 선..선..”
“선?”
“선. 크흠, 큼...........배.”
저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 이란 소리가 툭 나오는걸 어쩌겠나. 간신히 자신의 성대를 가다듬어 선, 배, 라고 뚝 끊어서 말한 건 제법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들은 이타도리의 말을 듣자 서로를 멀뚱히 마주 보고 나서 다시 이타도리를 쳐다보고(정확히는 이타도리의 주술고전 교복을 쳐다보고.) 수긍을 한 것 마냥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엎어져 있는 이타도리를 무시한 채 또다시 자기네들끼리 잡담을 이어간다. 하, 선배라. 벌써 그런 시기라고? 응, 어쩐지 주력이 느껴졌지.
...하지만, 이 주력의 느낌은. 하고 게토는 머리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혼자 중얼거리다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내 그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여전히 이상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이타도리에게 제안했다.
“1학년 담임은 모르니까 우리 담임에게 가볼래?”
야가 학장, 아니 선생님이었다.
야가의 젊은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리 멍청하다고 놀림받는 이타도리 유지일지라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맞춰보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고.
고죠 선생님이 제게 시험한 그 새로운 술식에 의해서 말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겠냐마는 ‘그’라면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수긍해버렸다. 하지만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과거로 뚝 떨어진 이 상황을 타개하는 건 혼자선 역부족이었으며 자신을 날려버린 고죠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그럼 웃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지, 그것이 이타도리의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그런 결론이 나자, 이타도리는 자신의 장점대로 행동을 재빠르게 옮겼다. 말을 걸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의심의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야가 학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스쿠나의 손가락을 먹어 치워 미래에 처형당할 ‘스쿠나의 그릇’이고, 자신은 과거로 오게 된 거 같다고. 자신이 하는 말을 딱히 믿는 눈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것도 아니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꽤나 긴 이야기가 마무리 되자 조용히 듣고 있던 야가는 첫 마디를 뱉었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군. ‘스쿠나의 그릇’ 이라. 물론 이론적으로는 불가능 한 것도 아니지만...”
사실 이타도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쫓겨나지 않을까, 새삼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스쿠나의 그릇’ 이라는 것도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생긴 이야기지, 그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을 이야기였고 애초에 ‘영문도 모른 채 과거에 떨어졌습니다.’를 누가 믿어주겠냐는 거지. 이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에서 할수 있는 일이라고 그나마 자유로운 자신의 눈동자를 굴려 눈치만 보는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을 지키고 있던 야가는 결단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고죠 사토루.”
“네―에.”
“이타도리 유지라고 했나? 이 녀석이랑 기숙사 같이 쓰도록 해.”
갑작스러운 폭탄 선언에 방 안에 있던 야가를 제외한 전원이 놀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에 의해 자신의 개인 공간을 빼앗기게 된 고죠 사토루가 순순히 오케이 할 리가 없다. 껄렁하게 앉아있던 고죠는 장신의 몸을 벌떡 일으켜 이타도리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쳤다. 저 감자랑 제가 왜 같은 방을 써야하는데요? 상당히 짜증난 목소리로 화풀이를 잔뜩 하고 있자 게토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야가는 한숨을 내쉬며 저음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너도 방금 이 녀석 얘기를 들어서 알겠지? 저 말이 사실이라면 스쿠나를 제지할 수 있는 건 누구지? 그리고 어차피 네 녀석, 기숙사 방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주제에.
“그, 그건...”
제법 핵심에 찔린 모양인지 아까부터 고함치던 목소리의 크기가 작아진다. 이 모습에 야가는 몰아 붙일 생각인지 말을 이어갔다. 그럼 네 녀석의 말은 저 어린 녀석에게 노숙이라도 하라는 의미냐? 이 말은 고죠에게 완전히 쐐기를 박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완벽하게 논파 당한 고죠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입을 삐죽 내미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기숙사를 안내해주라는 야가의 말에 이타도리를 잠시 노려보던 고죠 는 짜증나, 라는 말만 뱉곤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이타도리의 거처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졌다.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는 고죠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사람과 많이 다른 모습이라 색달랐지만 이타도리의 반가웠던 마음은 이내 아쉬운 마음으로 잦아들었다.
이곳엔 내가 알던 사람이 없는 걸까? 아니, 아니지. 분명 저기 앞장 서서 미소 짓고 있는 게토 스구루도, 이에이리 쇼코도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은 맞다. 하지만 고죠는 달랐다. 자신은 고죠 사토루를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앞에 있는 그는 28살의 모습이 아니고 좀 더 어렸으며 더 거칠고 미성숙할 뿐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죠 선생님과 같은 인물이었다. 이타도리는 고개를 들어 장신의 남자의 등을 살폈다. 눈에 익은 넓은 등도 비슷했고 새삼 큰 키도 자신이 알던 그였다. 조금은 껄렁한 걸음걸이도 자신이 알던 버릇이었다. 여전히 선글라스 너머로 섬세하게 팔랑이던 속눈썹도, 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반짝이는 백발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집을 부려주었던 그 상냥한 선생님이었다.
야가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이 결정이 내려진 날 부터 일부러인지 혹은 항상 그래왔던 건지 몰라도 고죠의 얼굴의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의 고죠는 그 당시에도 최강이었는지 학생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막대한 양의 지명 의뢰를 받았다. 하지만 언뜻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많은 양의 의뢰 조차 고죠 사토루에게 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담,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역시 나랑 같이 있기 싫었던걸까, 고죠 선생님은. 아니 이젠 선배라고 해야겠지.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괜시리 들떴던 감정을 가라앉히기 좋은 소식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타도리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곤 차근차근 자신이 해야할 법한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입장이 입장인 만큼 이타도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주어진 규칙은 혹시 제어가 되지 않는 스쿠나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사실 주술고전 측에서 제한을 두지 않았더라도 이타도리는 나갈 생각은 없었다. 스쿠나가 걱정되는 것도 있었으며 주술고전 밖을 나가더라도 본인이 알고 있던 풍경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같이 나갈 친근한 동료들도 없었다. 괜스레 나가봤자 이것저것 추억만 떠올라 쓸쓸함만 더해질 것이었고, 그나마 자신의 기억에서 가장 흡사한 주술고전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나갈 수 없다는 제약이 걸리자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의 가짓수는 훨씬 적었다.
간신히 떠올린 것들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연마장에서 자신의 주력 연마하기. 하지만 이것도 자신을 봐줄 선생님이 없으니 꽤 막막한 일이었다.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더라도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고, 주력의 세세한 컨트롤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끈기 있게 훈련을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을 땐 예전에 갇힌 주술 고전 지하실에서 영화를 실컷 보았다. 그 방에 있던 비디오는 이미 과거에, 아니 미래라고 해야할지.. 일전에 봤던 것들이라 조금은 지루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불을 끈 채로 보고 있다 보면 세상과 격리된 기분이라 잡념을 없앨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 영화, 운동, 영화 지루하기 짝이 없게 시간은 흘러갔다. 하지만 불만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성가실 정도로 밥 먹어야 할 시간이 자주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타도리는 한 자리수의 체지방률의 몸을 가진 만큼 먹는 양도 많았고, 또 먹는 것을 즐기기도 했기에 밥 먹는 시간이 성가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식사 시간엔 항상 후시구로와 쿠기사키와 같이 밥을 먹으러 나가거나 자신이 한 요리한 음식을 왁자지껄하게 먹곤 했다. 하지만 이곳의 사정은 달랐다. 여기 와서는 줄곧 자신 혼자서 밥을 먹어야만 했다. 물론 다른 이들이 같이 밥을 먹자고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내키지 않았다. 생존하기 위해 식사를 하는 행위는 제법 지루했고, 요리를 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자 이타도리는 대부분의 식사를 레토르트 음식으로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볼까.
뭐, 먹을 사람은 나 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장 보는 정도의 외출은 허락받았던 터라 요리 재료도 제법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재료를 손질하는 손길은 통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하는 칼질은 훈련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스토브에서 끓고 있는 냄비에선 보글거리며 제법 맛있는 냄새는 싸늘했던 기숙사 내부의 공기를 데워주었다. 구수해 보이는 미소시루와 제법 단정한 차려져 있는 반찬들, 가정식이야말로 이타도리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요리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달칵,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익숙했지만 생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타도리는 몰래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래며 서둘러 매고 있던 앞치마를 풀었다. 분명 지금의 고죠 사토루라면 남정네가 무슨 앞치마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치마에만 신경 쓴 나머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국자를 신경 쓰지 못하고 고죠를 맞이했다.
“아, 다녀왔어요?”
“...뭐야 그, 신혼부부 같은 바보 인사는.”
“마음대로 주방을 써버렸는데...미안해요. 고죠 선배만 괜찮다면 양이 많아서 그런데 저녁 같이 드실래요?"
식사 권유를 내 밀었음에도 찾아온 정적.
이타도리는 자신의 괜한 소리를 내뱉었나 싶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나 혼자 고죠 선생님(지금은 선배의 위치인)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렴, ‘지금의 고죠 사토루’에겐 이타도리 유지는 뜬금 없이 고죠의 후배이자 제자였다고 자청하는 이상한 인물일테니까.
“갑자기 왠 저녁.”
“요리에 꽤 자신 있어서 무언갈 좀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이타도리는 자신의 팔뚝에 소매를 걷어부치고는 제법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죠는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괜히 자신의 뻗친 머리카락을 긁적이더니 이내 교복 자켓을 벗어 침대에 올려두었다.
“씻고 와서 먹어도 돼?”
“아, 응. 밥이 조금 걸리니까요.”
고죠 사토루에게 거절 당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보기조차 싫어서 피했던 고죠선배가 자신을 향해 긍정의 대답을 하는 것은 퍽 기뻤다. 이상하지, 예전엔 고죠 선생님한테 거절 당하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은 당연히도 거절 받을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렇게 생각해보니 고죠 선생님은 언제나 자신에게 너그러웠다. 지금까지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니 지금은 미래에 있을 고죠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져 보고 싶었다.
“...달아.”
고죠가 첫 술을 뜨자 마자 내 뱉은 말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예상외로 자신감을 깎아 먹는 말을 듣자 이타도리는 허둥지둥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달아요? 그럼 간을 맞춰야겠네요. 잠시만요, 어. 그러니까.
“정신 사나우니까 앉아! 나 단 거 좋아하니까... 맛있다는 의미였어.”
그의 말에 부산스레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순식간에 밝아진 분위기로 눈이 휘어지게 웃는 이타도리의 모습에 고죠는 괜히 성질이 난 것 처럼 숟가락으로 죄 없는 밥알들을 푹푹 찔러대다가 자신이 먹던 밥그릇에 조용히 고개를 처박았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니가 밑에서 잔다고 한거다.”
“상관없어요, 저 평소에도 밑에서도 잤었으니까.”
처음으로 둘이서 자는 밤이었다. 불이 꺼진 방안은 어둠이 내려앉아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이내 눈이 익숙해지자 어렴풋하게 형태가 보였다. 이타도리는 침대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미래의 나는 어때?”
먼저 말을 걸어준 것도 지금 고죠의 성격을 감안하면 놀랄 사항이었지만, 그 내용도 꽤 의외의 것이었다. 역시 최강이라 해도 자신의 미래는 궁금하긴 하구나ㅡ,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타도리는 괜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음~, 배려심도 있고 언제나 웃고 있어요. 나한텐 고마운 사람이고.”
“그리고 최강이야?”
“응, 최강.”
자신의 대답에 안심이 된 걸까, 침대 너머로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몇 마디 안 되는 대화에 가슴이 간질간질 했던 걸까, 아니면 그의 얼굴이 새까만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용기가 괜스레 났던 걸까. 이타도리는 이번에 자신이 먼저 침대 위에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고죠 선배를 만나서 꽤 기뻤어요.”
넌지시 던진 말에 아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답이라도 하는 것 마냥,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스락거리던 소리는 이타도리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들려왔으므로 아마 바닥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왜? 라고 묻는 것과 같아서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에 괘의치 않고 이타도리는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여기서 내가 아는 사람은 고죠 선배 밖에 없어요. 아, 물론 내가 알던 시기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이잖아요?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안심되니깐요."
“그러냐.”
“여기 꽤 심심하거든요. 나가는 건 안 되니까요. 그 덕분에 요리를 한 거지만. 아, 영화도 제법 많이 봤어요, 영화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 접어가며 말하는 이타도리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도 고죠 선생님 덕에 잔뜩 보게 된 취미네요.“
길지 않은 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난 후 일어난 변화는 제법 컸다. 다음 날부터 고죠는 지금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가 시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늦어봐야, 꼭 저녁을 먹기 전에 기숙사에 들어왔다. 고죠의 바뀐 귀가 시간에 이타도리는 식사 시간에 혼자 남아 맛없는 레토르트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요리를 준비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고죠는 의뢰를 마치고 나서 근처 유명 디저트를 사 오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가끔 자신이 먹을 한 두 개 분량이나 사던 녀석은 이젠 가장 큰 크기의 디저트를 사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고죠에게 물으면 알 거 없잖아, 라는 답변으로 초지일관했다. 칼로리만 채워주면 된다며 적당히 고르던 디저트 종류들을 이제 제법 꼼꼼하게 맛까지 따져가며 사가는 고죠의 달라진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자세히 물을 용기는 없었다. 그 이유를 아는 건, 고죠의 기숙사에 먹일 입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친한 친구들뿐이었다.
평탄하고 지루한 일상들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 고죠 사토루는 평소답지 않게 시간에 쫓겨 고전하고 있었다. 정확히 고전한다기 보다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주령이었다. 그가 주령을 처리하기 위해 쫓아가 잡으려고 하면 도망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도망치고. 차라리 당당하게 겁도 없이 자신에게 달려오면 좋을텐데 이건 뭐 미꾸라지도 아니고 자신을 약올리기에 바빴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터질 녀석이었는데 계속 도망을 쳐 처리하는 데에 시간을 지체하게 되는 것이었다. 고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 같으면 기숙사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의뢰를 처리하는 데에 시간 제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쓸데 없이 마음이 조급해오기 시작했다. 괜스레 마음이 촉박해지자 세밀한 주력조작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도망치는 주령을 향해 주력을 맞추는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제 마음대로 조정이 되지 않는 주력에 잔뜩 골이난 고죠는 젠장ㅡ, 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이빨 사이로 짓이기듯 주령을 향해 소리쳤다.
”어차피 뒤질 거 귀찮게 굴지마. 나 바쁘다고! 너 따위 하급 주령 따위랑 놀고 있을 시간이 아니야!”
“사토루, 이 뒤에 약속 없지 않았나?”
“시끄러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다.”
아아, 요새 서둘러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이유도 그거야? 자신의 친구를 놀려줄 셈인지 웃음기가 섞인 게토의 목소리에 못 들은 척 하는 고죠는 핸드폰 화면을 강박적으로 들여다봤다. 지금 시간이 몇시지? 그러고 보니, 디저트도 사가야 할 시간을 확보해야는데. 유명한 디저트는 모찌였었나? 이미 늦어 버렸는데 디저트 사가는 건 생략할까.. 혼자 중얼 거리며 고민을 하던 고죠는 이내 차분해졌는지 잔뜩 구겨진 미간을 폈다. 반 쯤 뜨고 있던 눈의 초점을 자신의 앞에 얼쩡 거리던 주령을 향해 맞추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장난질은 그만하지.”
어찌 되었든 고죠 사토루는 최강이다. 아무리 2급 짜리 주령 따위가 날고 기어도 결국 고죠의 손에 손쉽게 처리된다는 이야기였다. 평소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거다. 고죠는 다시 한 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변명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이타도리에게 꺼낼 변명거리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이타도리가 오기 전엔 항상 불이 꺼져있었던 게 당연한 자신의 방이 어두운 것이 몹시 어색하다. 그것 뿐 아니라, 평소의 이 시간대의 자신의 방에서 풍겨오는 입맛을 자극시키던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냄새는커녕, 불 마저 꺼진 채 한기가 도는 방에선 평소처럼 맞아주던 따뜻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 딱 그 짝이었다.
어이, 조금 늦었다고 삐진 거냐고? 네가 내 애인이라도 돼? 하면서 괜히 혼자 꿍얼 꿍얼 불만스럽게 말을 뱉던 고죠는 낌새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이, 장난치지마, 멍청한 감자. 들을 사람도 없지만 고죠는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어쩌면 이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튀어나온 방어기제였다. 별로 넓지도 않은 방임에도 이리저리 다녀본다. 화장실에 있나? 아니면 침대 밑에 처박혀 있기라도 한거야? 제 입가 근처에서 간질이던 분홍색 머리카락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제법 기쁜듯이 웃는 헤실헤실한 얼굴은 어디를 살펴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하, 서프라이즈에요 선배! 라고 실 없는 농담을 하면서 나올 거 같았는데.
“어이. 대답 해.”
지금 나오면 이 재미 없는 장난 용서해 줄 테니까 어서 나와.
“이타도리 유지! 당장 대답 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일상에 스며든 이타도리 유지는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고죠 사토루는 두려운 게 없다.
이것은 당연한 논제였다.
고죠 사토루는 지금껏 인생을 겪어 올 때 감히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있었다 한들 그의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기만 하면 거친 태풍에 쓸려나가는 나무처럼 힘없이 스러져갔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말은 지나가던 아이도 웃을 법한 농담에 가까웠다. 전지전능함, 어쩌면 신이라고 별칭이 붙을 만한 그에게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지각한 것은 놀라울 일이었다.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세 살 어린 후배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최강의 사내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투 중에 살짝이라도 긁힌 상처로 아파본 적 없던 자신이 지금은 심장에 잔뜩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려왔고 호흡조차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길 한복판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그는 떨리는 입술로 애타게 이름을 불러댔다. 유지, 이타도리 유지,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그동안 스쿠나의 떨거지라거나, 주물을 삼킨 주제에 사람인 척한다고 깔보거나,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감자라고 놀리지 않을 테니까. 빠르게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에게 했던 심한 장난들을 곱씹어 대던 고죠는 몸을 움찔했다. 내가 좀 너무하긴 했던가. 혹시... 삐져서 가출한 건가? 그렇다면 돌아와, 사과해 줄 테니까.
기숙사에 돌아왔을 때 이미 저녁이 지나 있었던 터라, 옅게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은 이제는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거뭇거뭇하게 내려온 하늘 아래로 기온은 급격히 낮아졌지만 내리 쉴 틈 없이 뛰어다녔던 고죠의 뚝뚝 떨어지는 땀은 구레나룻을 흥건하게 적셨고 아침에 나설 때 말끔하게 다렸던 교복 재킷은 이미 땀에 배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타도리 유지!“
얼마나 외쳐댔을까, 평소에 듣기 좋다고 평가받던 목소리는 이젠 잔뜩 쉰 목소리가 되어 아무도 없는 공간을 메아리쳤다. 하아, 하아, 어디 있는 거야. 그의 폐에서는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산소를 가쁘게 요구하고 있었고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계속 뛰어다닌 탓에 고생했던 다리가 욱신거린다. 뻐적지근하게 조여오는 허벅지의 감각은 거슬린다. 이마에서 계속 배어 나오는 땀은 그의 눈썹에 고였고 입안에서는 단내가 났다.
밭은 숨만 가쁘게 내뱉던 고죠는 아려오는 발바닥으로 천천히 속도를 줄여 터덜터덜 걸어가던 찰나였다. 훈련장에서 어두컴컴한 샛길로 나오는 방향에서 줄곧 찾았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어렴풋이 제 눈 안에 들어왔다. 이미 고죠의 다리는 한계에 다다라 수많은 바늘로 찔러대는 것 마냥 고통스러웠지만, 통증을 인지하기도 전에 먼저 나간 것은 자신의 발걸음이었다.
”닿지 않아.“
땀에 잔뜩 절어 눈꺼풀에 눌어붙은 속눈썹 아래에 푸른 동공이 확장된 채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 앞에 누워있는 인영을 바라본다. 고죠는 분명 눈앞의 그를 자신의 등에 들쳐 업으려고 했다. 하지만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무하한 술식이 풀려있는데도. 힘없이 흔들거리는 이타도리의 어깨는 투명해져 아래의 흙먼지들이 비쳐 보였다. 그의 어깨에 닿지 못한 채 통과된 자신의 손목은 잔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거친 숨을 내쉬며 급하게 방안을 뛰쳐 들어온 고죠는 입고 있던 얇은 셔츠가 잔뜩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두려움에 잔뜩 질린 그의 표정과 상반되게 곤히 잠들어 있는 이타도리는 교복 재킷을 덮은 채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거칠게 들어온 것과 달리 혹시 유리가 깨질세라 구는 것처럼 조심스레 이타도리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평소 유유자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뿐, 땀에 흠뻑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고는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어 책상 위에 벗어던졌다. 벗은 선글라스 너머에 보이는 그의 눈빛은 초점이 풀린 채 이에이리에게 윽박지르듯이 물었다.
”반전술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깨어나질 않잖아!“
갑작스럽게 짜증 가득한 호통을 들은 이에이리는 기분이 제법 나쁠 법도 한데 응하지 않고 자신이 하던 대로 무던한 눈길로 이타도리를 꼼꼼히 살펴본다. 평소에는 기분 나쁜 웃음이나 흘려대며 여유를 맘껏 부리던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 조바심 내는 모습은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기에 꽤 놀라 화낼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었지만. 고죠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를 꼼꼼히 살펴봤지만 이에이리가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일단은 외상이 없어서 반전술식은 소용없어.“
차분하게 대답을 내놓은 그녀의 말처럼 누워있는 이타도리는 잠을 자는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지금은 자신이 업어 데려올 수 있었지만 발견한 순간에는 투명하게 비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역시 그가 ’스쿠나의 그릇‘이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긴 건가 해도 애초에 스쿠나의 그릇이라는 개념조차도 모호한 상태이다. 단지 이타도리가 그렇게 말했기에 수긍했을 뿐이지, 다들 그 정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쿠나의 그릇‘이라는 말에 주령에 가까운 존재이지 않을까, 라는 논리적인 사고에 따라 게토에게 물어봤지만 그 역시도 눈을 지그시 감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죠는 처음 겪어보는 자신의 무력감에 입안은 메말라갔다. 애가 닳아가는 고죠는 제 마음도 모르고 곤히 누워있는 녀석이 원망스러워 볼이 아프게 늘려주면서 실컷 욕을 내뱉고 싶었다. 바보 녀석, 여기에 나 말곤 아는 사람도 없다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그랬어. 어? 정작 본인이 듣지도 못할 책망을 괜스레 혼자 중얼거리다 이내 기다란 다리를 접어 쭈그려 앉고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필요도 없는 팔은 무릎에 걸친 상태였다. 처음 보는 친우의 절망스러워하는 모습에 게토와 이에이리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그냥 학생이었다.
”무슨 일이야?“
시끄럽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인물은 소식을 듣고 온 야가였다. 다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정적만이 내려앉은 공간에 흐름이 변했다. 상황을 해결할만한 사람이 들어오자 어두웠던 두 명의 표정이 밝아졌다. 야가의 목소리에 숨만 씨근덕대던 고죠는 굽힌 몸을 벌떡 일으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 녀석 전혀 깨어나질 않아요. 발견했을 때 제 손에 닿지도 않았고요.“
”과연...“
야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타도리의 앞에 서서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리자 얌전히 복부에 걸쳐져 있던 그의 팔이 중력에 의해 툭 떨어졌다. 여기저기 건드리기만 할 뿐 설명도 하지 않고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야가의 모습을 고죠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진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팔짱을 끼고 있는 고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나른한 고양이처럼 굴던 사내였다. 절박함 따위, 초조함이라곤 없었던 고죠 사토루였다. 차분히 이타도리를 살피던 야가는 후, 하고 한숨을 내뱉더니 마침내 고죠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나도 정확한 건 잘 모른다, 텐겐님 보좌를 위해 조금 들어 본 것으로 예상을 할 뿐이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는 절대적인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지는데 그중에 하나는 시간의 항상성이다. 시간은 이치에 맞지 않는 잘못된 불순물을 걸러내려고 하는 거야. 그 법칙이 이타도리 유지는 이 시간에서는 존재해선 안 될 존재라는 걸 알아챘어. 너는 이곳에 와서 스쿠나를 보았나?“
”아뇨.“
그러고 보니 저주의 왕 스쿠나라고 불리는 것을 그와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스쿠나는 원래대로라면 이 공간에 존재가 성립할 수 없기에 나타날 수 없는 거다.“
”유지는 우리 앞에 있었잖아요.“
”’우리가 그를 지켜보고 있어서 존재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관측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오늘 고전에 아무도 남아있는 이가 없어서 혼자 있었다고 들었다. 그 누구도 이타도리의 존재를 확인해줄 수 없었어. 하지만 이 얘기도 편법일 뿐이지. 원칙적으로 녀석은 사라져야 할 존재야.“
”그럼 이 녀석을 그냥 사라지도록 내버려 둔다고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이 녀석 나보고 보살피라며!“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맞아. 애초에 미래의 네가 보낸 것도 그런 의도였겠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스쿠나를 깨우지 않고 처리한다. 미래에선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 관리를 하면 된다,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아주 논리적이고 깔끔한 방법이야. 사토루, 미래에 제법 똑똑해졌어.“
내 앞에 서 있는 사내는 전혀 알 수 없는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원래 있으면 안 될 시간에 왔기에 물질계를 아우르는 법칙에 의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고, 그건 미래의 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다? 진심으로 이 녀석을 없앨 생각으로 미래에서 보내왔던 건가, 빌어먹을 나 자신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의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무슨 생각이야, 제기랄. 고죠는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영민한 그는 사실 완벽하게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야가 선생님의 말씀 대로 이타도리 유지를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더 편리하고 형편이 맞았다. 시랍 조차도 파괴하지 못해 모두가 빌빌대며 봉인한 주물을 한꺼번에 18개로, 피해 없이 없앨 수 있다니 최고잖아? 분명 자신도 그 설명을 들으면 뭘 고민하냐고 빈정대며 가볍게 넘어갈 문제였다.
문제는 그 사라질 인물이 이타도리 유지였다. 저 녀석이 잘못한 게 뭔데? 그냥 영화를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했을 뿐인 바보 녀석이라고. 분명 손가락을 억지로 자신의 뱃속에 구겨넣은 것도 저 칠칠치 못한 상냥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뿌드득 갈렸다.
고죠는 잔뜩 핏발 선 눈으로 야가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며 멱살을 잡는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예의 같은 것을 차려야겠다는 의식은 머리에서 완전히 날아가 버릴 정도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 ’진짜‘ 방법 없는 거 맞아요?“
”사토루! 선생님께 예의를 지켜!“
야가는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않고 덤덤히 팔짱만 낀 상태였다.
”물론 너라면 방법이 있지, 고죠 사토루.“
내가 말한 건 평범한 주술사, 혹은 인간의 경우였으니까.
낯익은 천장이다. 길지 않은 시간에 벌써 고죠 선배 방의 천장에 익숙해져 버렸구나. 물기가 없어 뻑뻑한 눈이 제대로 시야가 잡히지 않아 힘을 주고 여러 번 끔뻑거리다가 자신의 옆에 느껴지는 인영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멋있게 쓰고 있던 선글라스는 엉망진창 널브러져 있었고 배어 나온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목선은 가느다란 주제에 몸집은 제법 커서 억지로 어깨를 안쪽으로 말고 머리만 침대에 눕힌 불편한 자세는 평소처럼 당당하지 않아서 조금은 귀엽다. 머리를 처박고 있는 침대는 제법 낮았던 터라 키가 190cm 넘는 사내에겐 목에 부담이 갈 높이라 보고 있으면 담이라도 걸릴 거 같다. 평소에 자랑할만한 긴 다리는 형편없이 구겨져 수납되어 있었다. 항상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거칠 것 없이 다니던 선배였는데 말이지, 물론 선생님 때도.
이타도리는 불편한 자세지만 곤하게 누워있는 고죠를 눈동자를 굴려 잠시 살펴보다 투명한 얼음으로 얇게 저민듯한 하얀 머리카락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떼 준다. 머리카락 아래로 단정히 자리하고 있는 적당히 도톰한 눈썹에서부터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떨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면 자신과 줄곧 마주쳐왔던 푸른 눈 위에 얹힌 가지런한 속눈썹은 밀려 들어오는 바다와 엉켜 들어오던 포말과 닮아있어 바다의 비린내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다. 적막이 내려앉은 이곳에서 오직 자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나 옅은 머리카락이 자신의 손길에 의해 사라락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모래사장을 어지럽히며 잔잔하게 쓸어 들어오는 파도 소리와 같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색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언제나 열띤 눈빛을 지녔던 이곳의 그는 여름과도 같았어. 내가 알던 고죠 선생님은 나이에 비해 꽤 소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간의 풋내나는 고죠 선배를 지켜보고 있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고죠 선생님은 언제나 제 앞에선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닥가닥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놓고선 가벼운 손짓으로 쓸자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오는 감촉을 즐긴다. 언제였지, 지하실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던가. 선생님이 일을 다녀오고 피곤하다고 내 품속에 쏙 들어왔을 때였나. 자신에게 지쳤다며 어리광부리는 선생님은 자신의 배에 머리를 부벼댔고 자신은 그의 머리카락을 제법 정성스럽게 손으로 빗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일이 어쩐지 굉장히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항상 누워있다 일어나고 나면 자기주장 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뻗치는 머리인 주제에 막상 만지고 있으면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하다가 목 근처에 짧게 깎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목 부근의 까슬한 촉각은 천천히 더듬어가듯 내려가는 이타도리의 손가락의 마디를 예민하게 긁어내린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쪽은 선생님이면, 까칠한 쪽은 선배 같아,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입술 사이로 비죽 새어 나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제법 흥분을 했었는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목 부근을 손으로 지분거렸다. 하얀 목에 붉게 올라온 것은 꽤 선연했던 터라, 꼭 꽃이 피어있는 것만 같아, 하고 이타도리는 190cm 쯤 돼 보이는 사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한다.
역시 자고 있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좋지 않겠지 싶어 슬쩍 손을 거두려는 찰나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푸른 눈과 맞닥뜨렸다. 괜히 어른 몰래 나쁜 짓을 한 아이처럼 얼굴이 붉어지며 후다닥 손을 치우려는 찰나에 이타도리 손 위에 겹쳐지는 손길이 서늘하다. 강하게 짓눌러 내리는 손길은 꼭 자신을 계속 쓰다듬으라는 것 마냥,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제스쳐를 취하는 사내의 모습이 왠지 애교 부리는 대형견 같다고 생각했다.
”뭐야, 깼으면 말을 해야지. 몰래 만지기나 하고.“
”선생님, 아니 선배야말로요.“
”너 보살피느라 완전 지쳤어. 난 보살펴주는 사람 쪽이 취향인데.“
”에엑, 저도 엉덩이가 크고 키가 큰 사람 쪽이 좋은데요?“
”키 큰 건 충족했고, 나 엉덩이 대신 다른 쪽이 커.“
고죠는 얇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말아 올려 키득댔다. 이타도리의 손을 잡아 내리고 있는 반대 쪽 손의 검지를 들어 올리고는 이타도리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눈가에는 장난기를 가득 채운 채 반 접어 웃고 있는 것이 꼭 야살스러웠다.
”하? 싫어요. 난 어른스럽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 좋아.“
”까부네.“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갔다. 별로 재밌는 농담도 아닌데 괜히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조금 냉기가 도는 방안은 서로 손을 마주 겹쳐 체온을 나눠서였을까, 그리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타도리는 능숙하게 반복적으로 머리를 어루만지자 고죠는 반쯤 뜨여있던 눈을 나른하게 살포시 감고는 그 감각을 즐기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를 이타도리 손을 향해 부볐다. 이러니까 영락없이 주인에게 애교부리는 강아지 같잖아?
”그리고 너 자꾸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선생님 소리를 듣냐. 아직 파릇한 19살인데 엄-청 늙은 기분이라고.“
”근데 가끔 툭 나오는걸 어뜨윽해요.“
이타도리의 말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고죠의 눈이 가늘어지며 커다란 손으로 말랑한 그의 볼을 쭉 늘렸다. 덕분에 발음이 잔뜩 뭉개진 이타도리는 울상을 지은 채 변명이라도 하는 것마냥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저한테 고죠 사토루란 사람은 선생님이라고요!“
하, 됐다, 말을 말자 말아. 어느 부분에서 빈정을 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삐죽이는 고죠는 뚱한 표정이었다. 정말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어릴 적의 고죠 사토루 라는 사람은 알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사춘기 소년 마냥 토라지곤 했다.
”됐어 잠이나 자자. 올라갈래, 목 아파.“
”뭐야, 남자랑 같이 자는 취미 없다면서요?“
”하, 그렇다고 내가 밑에 가서 자라는 거야? 이 내가?“
”그럼 제가...“
”난 환자를 추운 곳에 눕히는 성격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대체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투덜거리는 고죠의 목소리에 이타도리는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분명 서툰 사람이라 솔직하지 못한 편일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자 침대로 올라오던 고죠는 의뭉스럽게 이타도리를 쳐다본다. 웃긴 뭘 웃어, 아니요 그냥요. 따뜻해서요.
서로의 등을 마주 대고 온기를 나누며 누워있으니 조용한 침묵만이 그 둘을 감쌌다. 보통 사람의 평균 체온보다도 조금 높은 이타도리에게서 열감이 따스하게 고죠에게 전해져왔다. 자세가 불편한지 부스럭대던 이타도리는 이내 자리를 잡았는지 고죠의 목 근처를 간질이던 머리카락은 더 살랑이지 않았다. 얄팍한 천을 가운데에 두고 이타도리의 날개뼈 죽지가 도드라져 선연하게 느껴진다. 귓가에는 곤히 잠들어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고죠의 귓가를 간질였다.
긴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이 순간이 그대로 멈춰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해.
―고죠, 네가 선택해라.
야가와 했던 대화는 생생하게 떠올라 고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타도리에게서 돌렸던 등을 다시 돌려 떨리는 손으로 그를 껴안았다. 제법 단단하게 단련된 몸이면서 자신의 품에 알맞게 들어오는 이타도리는 이미 잠에 빠졌는지 규칙적으로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전해오는 고동 소리는 점차 수면 저 아래로 가라앉게 만든다.
고죠는 뜨겁게 달아올라 파들거리는 눈동자로 애써 어둠의 윤곽을 더듬어 오목하게 들어간 이타도리의 목 근처에 자신의 이마를 파묻었다. 제법 달큰한 체향이 제 코에서 맴돈다. 옆에 있어도 닿을 수 없는 곳 멀리 있는 것 같아, 이타도리 유지.
쾌청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반짝이는 햇빛만이 길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산뜻하다. 아침이 되자 고죠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외출 준비를 얼추 마친 이타도리의 팔목을 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꽤 건장한 이타도리였지만 별다른 반항은커녕,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따라갔다. 그 둘에게 대화는 없었지만 약속한 것처럼 같이 맞추어 걸어갔다.
이제는 눈에 익은 거리. 축축한 진흙 사이에 살짝 패여 있던 그곳은 이타도리가 처음으로 넘어져 고죠들과 만난 곳이었다. 고죠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이타도리에게 잔소리처럼 소리쳤다. 하지만 불퉁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서늘한 손길은 다정하게 이타도리의 손과 마주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은 땀이 축축하게 밴 채였다.
”그거 알아? 너 엄청 귀찮고 건방져. 나 제법 많이 참았다고.“
이타도리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산소가 코점막을 타고 흘러가 뇌에 직접 맞닿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이내 강한 바람이 불어 자신의 몸을 부유시키려는 것처럼 감쌌다. 머릿속은 엉망진창 어지럽게 되어 정리되지 않았고 가슴 속은 울렁거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 불쾌한 기분, 느낀 적 있어.
”그러니까 널 다시 되돌려 놓을 거야.“
곧 구토라도 할 것처럼 강제로 욱, 욱, 거리는 이타도리의 손을 힘있게 붙잡았다. 평소 체온이 낮은 그의 손에서 지금은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가상의 분자를 쪼개서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술식을.
―고도의 계산이 필요해. 네가 시도하는 건 올바른 시간의 방향으로 향하는 거라 좀 더 쉽겠지만. 그래도 계산과 동시에 섬세한 주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이건 아무리 너라도 뇌의 반은 다 타 버릴 정보량이야.
”싫어서 보내는 사람치고는 표정, 슬퍼 보이잖아요.“
반향을 일으키려는 것처럼 처음에는 산들거리던 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두 발로 버티기 힘들 정도로 사납게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을 덮치자 고죠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무릎을 구부렸다.
―뇌가 다 타버려도 상관없어요, 언젠 내가 그딴 거 생각하면서 다녔나.
고죠의 머릿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이내 어지러워졌다. 욕지기가 치밀어. 다시 머릿속에서 커다란 폭풍이 치는 것처럼 두개골이 울려댔다. 이타도리를 맞잡던 손을 놓치는 바람에 다시 그를 향해 뻗는 떨리는 두 손이 꼴사납다.
”지금은 솔직했었네요, 선배. 우는 얼굴도 하고. 하지만...“
알고 있어, 이것은 나의 이기심이다. 차라리 야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너는 이곳에서 고통 없이 소멸하는 편이 이 세상은 물론이고 너에게도 이로울지도 몰라. 어떤 일들이 널 괴롭히고 망가지게 할지도 모른다. 너를 절망시키고, 어쩌면 파탄에 이르게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이 과거를 넘어 미래에서 마주칠 너를, 또다시 너를 마주하기 위해 너를 돌려보낸다. 그것이 나의 이기심. 나는,
‘그저 다시 너를 만나고 싶어, 이타도리 유지.’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은 이타도리의 바랜듯한 복숭앗빛 머리카락에 부서지듯이 쏟아져 내린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머리칼을 어지럽히고 부유하던 흙먼지는 시야를 부옇게 만들었다. 흔들리며 반짝이던 머리칼 아래에 이타도리가 웃었던가. 웃었던 거 같다. 언제나처럼 눈을 한껏 접고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외친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분명, 울지 마세요, 선배는 웃어요. 웃을 때가 제일 멋있었어요.
웃어야지, 응 웃어야지. 네가 좋다는데 내가 웃어야지, 이타도리 유지.
억지로 끌어올린 제 입가에서 솟구쳐 후드득 떨어지는 붉은 액체가 뜨겁다. 잇새 사이로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액체가 울컥 터져 나왔다. 고죠의 코에서 피가 우수수 쏟아져 그의 발아래에 피 웅덩이가 깊게 고여있었다. 말끔하게 다렸던 셔츠는 피에 절어 눅진해졌고, 잔뜩 피를 쏟은 탓인지 술식의 탓인지 머리는 불에 탄 듯 뜨거워져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억해! 내가 널 보낸 거야! 미래의 고죠 사토루가 아니라, 지금 이 고죠 사토루가!“
모든 것을 미래에 남겨둘게. 조금만 기다려, 널 따라갈 테니까.
나를 또다시 불러줘, 이타도리 유지.
기다릴게, 너의 선생님인 고죠 사토루가.
일렁이는 바람과 동시에 이타도리의 모습이 사라지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거대한 몸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귓가에서는 윙윙대는 소리와 사토루! 혹은 고죠! 라는 목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달려오는 투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가라앉는 의식 가운데에 점점 이타도리의 얼굴이 흐릿하게 사라져간다. 아까까지 자신의 눈에 담아두었던 햇빛 아래의 그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지고 관자놀이는 깨질 것 같이 쑤셔댔다. 그와 맞잡았던 손끝의 감각은 아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망할 선생... 나한테 거짓말을 했잖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에 피가 적셔 흘러 눈앞이 점점 붉어지며 흐릿해졌다. 흙바닥에 처박힌 머리에선 더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단순히 피를 많이 흘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던 게 아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얼굴은... 그리고, 이름은 점차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억지로 지워내는 것처럼 흔적을 남긴 채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어떤 선생이 자기 제자가 죽는 꼴을 구경하고 있겠어.“
동공이 열린 채 잔뜩 충혈된 눈언저리 위로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덮는다. 눈이 부시게 비추던 맑은 햇빛은 차단되고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대던 무색 소음도 사납게 휘몰아치던 바람도 잠잠해졌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던 두통은 점점 사라져갔고 몽롱해지는 기분에 부릅뜨던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서서히 힘이 빠져가는 손가락 사이로 술식이 잔뜩 적힌 종이는 툭 떨어졌다.
”선생님, 저희 어디까지 얘기했죠. 새로운 술식?“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분명 주머니에 어떤 종이가 있었는데 잃어 버렸나?“
”뭐에... 어? 선생님 코에 피가!“
아-, 주르륵 하고 인중을 따라 흐르는 코피가 뚝뚝 흘렀다. 별로 아픈 기미도 없었기에 고죠는 자신의 손등으로 코 부근을 대충 쓸어 닦자 선혈이 묻어나왔다. 그의 모습에 걱정되는지 제 어린 제자가 눈썹을 잔뜩 내리고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올려다봤다. 보이지 않는 습격이라도 당한 것이 아닌데 왜 그럴까나, 가볍게 키득거리던 고죠는 몸을 돌려 이타도리를 내려다봤다. 그는 곧게 선 등을 깊게 숙여 이타도리와 눈높이를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눈가를 슬어 내렸었다. 이타도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턱 끝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울 정도로 선생님의 코피가 슬펐어?“
”그,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 눈물이 난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바람 때문에 먼지가 들어갔나?“
이타도리의 말에 고죠는 우스꽝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자신의 안대를 내렸다. 하지만 기분 좋은 바람은 자주 오지 않잖아, 내 눈도 환기를 시켜줘야겠어.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희디 흰 머리카락을 어지럽히며 사라지고 흔들리는 속눈썹 아래엔 시리도록 푸른 눈, 서늘한 겨울의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타도리는 앞장서고 있는 넓고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어. 본인도 영문을 알 수 없이 스며드는 기분에 들썩이는 등을 쳐다보았다. 넓다란 등의 주인은 손에 깍지를 껴 한껏 기지개를 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다가 문득 이타도리에게 물었다.
”옛날 생각이라고 하니까 말이야, 유지. 우리 처음 만날 때 생각나?“
”생각나요. 선생님, 그때 엄-청 부담스럽게 제 얼굴 쳐다봤으니까.“
”그랬던가? 하지만 유지를 어디서 본 거 같았단 말이지?“
”엑, 구려. 선생님 그거 헌팅 할 때 절대 쓰면 안 되는 말 1등인 거 알죠?“
아하하, 하고 가볍게 웃어넘긴 고죠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이타도리를 돌아봤다. 지금 이곳에 자신의 제자, 이타도리 유지가 서 있었다. 그 현실이 어쩐지 기쁨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알고 있다. 현실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은 채 계속 흐르고 이타도리는 마지막 손가락 까지 삼키는 미래가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맡겨진 미래는 이타도리 유지를 지키는 것이겠지 . 자신을 바라보는 고죠의 시선에 이타도리는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혹시 바쁘지 않으면 어디 들렀다 가지 않을래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빙긋 웃어 보이는 고죠는 마저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 나 바다가 보고 싶어요. 물거품이 잔뜩 낀 곳으로.“
축축한 흙바닥도, 기분 좋은 햇볕도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도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고죠는 그럼 가볼까? 하며 푹신하고 따뜻한 분홍색 머리에 서늘한 손길을 얹었다. 자신의 밑에서 바르작거리는 이타도리를 보며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댓글 1
멋부리는 물범
너무 졸습니다..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