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립 주술고전 하급주령퇴치소동의 사건일지

고죠 사토루의 낭만적사랑고백 절대사수작전에 대한 기록

백업2 by 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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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후배AU 

-주령의 설정에 대해 적당히 조작

1.

 

 

때는 바야흐로 2월 13일.

사랑으로 넘칠 예정인 대망의 밸런타인데이의 이브.

 

밸런타인데이란 어떤 날인가? 우연히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쳐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거나 혹은 빈 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그의 곁에 앉는다. 그 앞에 서면 횡설수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두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확인할 핑계를 댈 수 있는 날이다. 물론, 서로가 이어지는 것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고  대게는 일방적인 짝사랑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 사랑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법칙은 평범과는 거리가 먼 도쿄 근교에 설립된 고등학교에도 적용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의 응어리를 처치하는 주술사라 하더라도 사랑을 모를 리가 있나. 오히려 저주에 노출된 주술사들이야말로 현존하는 감정 중 가장 긍정적인 ‘사랑’에 더욱 간절했다.

게다가 올해의 주술고전은 평소보다 기념일에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는 이가 늘었다. 그리고 열성적인 인물 중 한 명은 지나가는 주술사를 붙잡고 ‘여기 최강은 누구예요?’라고 뜬금없이 물어도 지체 없이 나올 이름의 주인공이었다.

“유지가 보고 싶어!”

“응, 방금 것까지 카운트해서 26번.”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이 드는 곳에 옹기종기 세 명의 머리가 모여있었다. 흑백의 머리카락 외곽에는 따사로운 빛의 물결이 맺혀 있었다. 근심 없는 젊은 청춘에게서 나오는 공기가 가볍다. 아직은 싸늘한 겨울인데도 포근한 봄바람이 스며든 분위기였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참고로 귀엽다는 몇 번이었지?”

“아마 18번 말했을 거야. 1분 뒤에 또 말하겠지만.”

머리를 단정하게 동그랗게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한 가닥 내린 사내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바를 정(正)’ 자를 가리켰다. 단정하게 적힌 정(正)은 줄을 맞춰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질문을 던진 단발머리의 소녀는 얼굴을 쭉 내밀어 노트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는 적네. 분명 놀릴 의도가 다분한 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내뱉고 있는 백발의 남자는 분명히 그였다.

현존하는 주술계의 중심이 누구냐고 하면 수많은 어른 주술사를 제치고 당당히 이름을 올릴 ‘고죠 사토루’.

단순히 명맥 높은 3대 가문의 고죠가의 도련님이어서가 아니다. 몇백 년 만에 나온 육안과 무하한 세트를 가진 인재면서 상위 술식인 ‘자(紫)’를 부릴 수 있는 사내. 안주하지 않고 무궁무진한 술식개발로 잠재력이 높은 미래가 두려운 인재. 탄생과 동시에 세상의 균형을 바꾸어버린 거대한 존재. 그 외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수식하는 말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모두에게 받들어져 살아온 유명인 고죠는 언제나 제 잘난 맛에 살았다.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임에도 190cm에 가까운 큰 키, 그리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칼. 그뿐이랴. 축복받은 눈이라 불리는 육안은 맑게 갠 하늘과 같은 푸른색이었고 그 주변을 감싸는 속눈썹은 눈(雪)이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과도 같다.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만, 혹시라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유혹한다면 5분 내에 넘어갈 외모의 소유자.

정리하자면, 고죠 사토루는 외모 준수, 피지컬 우수, 업무능력 완벽. 신이 직접 정성스레 빚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피조물인 사내.  하지만 항상 평온을 유지할 그가 놀랍게도 심란한 상태였다. 이유는 바로 3살 어린 후배인 이타도리 유지 때문이었다.

 

173cm의 평범한 키. 좋게 봐주면 귀여운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동그란 감자를 닮은 평범한 얼굴. 그나마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이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역시도 주술계에서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고죠처럼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최악의 주물을 감시하는 시선이지만 말이다. 그는 겁도 없이 특급 주물인 스쿠나의 손가락을 삼켜 인간도, 저주도 아닌 그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한 시한폭탄 같은 재앙, 타인을 그것이 세간에서 이타도리 유지를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땅찮은 이유로 고죠는 이타도리를 눈길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못된 소리도 많이 했다. 괜히 그가 지나가면 웩, 거리며 기분 나쁜 소릴 내기도 하고 먼저 인사해오는 이타도리를 ‘뭐야, 어디서 특급 주물 느껴지지 않냐?’라는 얄궂은 말을 하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성격 좋은 스쿠나의 그릇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씩씩하게 부딪혀왔다. 선배, 저 맛있는 사탕 있어요. 드실래요? 라든지. 고죠 선배는 오늘도 멋있네요! 라든지. 가끔은 애교 있게 제 팔짱을 껴 온다든지. 아무리 성격이 나쁘고 완벽에 가깝다 칭송받는 고죠 사토루 역시 사람이다. 웃음을 만면에 띄운 채로 부딪혀오는데 어떻게 눈길 한번 안 줄 수 있겠나. 우습게도 *‘천역모(天驛矛)’ 같은 특급 주구 없이도 이타도리는 고죠를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의 역류가 거기서 멈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억지로 막아둔 감정의 흐름은 한 번 터진 둑처럼 막을 틈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 당연하게도 고죠 사토루는 이타도리 유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죠는 부정했다. 사랑 같은 건 비논리적인 픽션에 불과해. 모든 미디어 매체에서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어댄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온  온 진심을 바칠 수 있어? 생존에는 불필요한 두뇌의 화학적 작용으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좌지우지될 뿐이잖아. 한동안 잘난 입으로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던가. 분홍 머리의 후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숨 쉬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심장에 저릿한 고통을 겪었다. 실수라도 툭, 하고그의 손이 스치듯 닿을 때면 얼굴이 화끈거려 눈가까지 뜨거워졌다. 옆에 나란히 서 있기라도 하는 날에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새어 나올까 입을 꾹 닫은 적도 있었다. 입으로 떠들어대던 말과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신체의 반응이었다. 일련의 어이없고 우스운 증상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랑니.  이해할 수 없는 생리 반응을 그렇게 명명했다. 살아가는 데 하등 쓸모없고 불필요한 감정이면서 억지로 뽑아내려 들면 쑤시고 아팠다. 그렇다고 모른 척 지나치기에 가슴 한쪽에 콱 박혀 있어 썩어 문드러지기 십상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도통 없어질 것 같지 않아 골치가 아팠다. 도대체 저더러 어찌하란 말이야?

이 마음을 발치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뽑아버렸을 것이다.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한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의 단점을 ―약하고 바보에 고릴라 같고 ... 그런데 내가 지켜주면 되잖아.― 손가락을 꼽아 열거해보기도 하고 일부러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피해다니기도 했다 ―금단 증상으로 3시간만에 그만뒀다―. 쉬는 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보려 밖을 나돌아다니는 어울리지 않는 짓까지 했다 ―전부 그녀석보다 못생겼다!― . 그 외에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지만, 전부 실패. 

결국, 도달하는 결과에 떠오르는 것은 웃고 있는 그 얼굴이었다.  

이쯤 되니 항복 선언과 동시에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자라난 감정은 안고 가야 할 내 것이라는 것을. 

느지막이 받아들이고 나니 내내 흐릿했던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불합리한 감정의 나열을 후배에게 여지없이 표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애정공세는 당사자가 느끼기엔 예전의 괴롭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죠가 이타도리를 좋아한다는 변명 아래에 그를 괴롭히는 날들은 이어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오늘은 고죠를 두고 이타도리는 제 친구들과 함께 주술고전을 많지만 전혀 이틀이나 비웠다. (정확히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었지만)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학생이라도 주술사는 주술사. 주령 처치 임무의 위치가 지방이었으므로 1학년들은 다 같이 손잡고 타지역으로 내려간 것이다.

“너무 늦어지잖아. 짜증 나. 학생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냐고. 망할 썩을 놈의 귤들.”

“내려간 김에 같이 관광이라도 다녀오는 거겠지.”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잔뜩 구긴 채로 억지로 책상 아래에 밀어 넣은 채 고개를 책상에 처박은 고죠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익숙한 게토가 달랬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 보였다.

“하아? 임무 중에 땡땡이를 쳐? 임무가 끝났으면 재깍재깍 돌아와야 할 거 아냐.”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사토루…”

“못 참아. 못 참아. 못―참―아―! 젠장! 유지가 보고 싶어―.”

거의 울음소리에 가깝게 소리 지르던 고죠는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하게 조작하니 갤러리가 열렸다. 갤러리는 다소 심심하게 분류되어 있으나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분홍색으로 가득 차 있는 앨범, 제목은 ‘♡’. 갤러리 안에는 이타도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사진 속의 이타도리는 한결같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진은 얼굴보다 뒤통수가 더 많이 찍혀 있었다. 어떤 사진들은 급했는지 흔들린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지 고죠는 검지와 중지로 확대해가면서 천천히 음미했다. 책상에 한쪽 뺨을 납작 붙인 채로 천천히 자신의 이타도리 콜렉션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니 친우들도 헛웃음이 나왔다. 미쳤구나, 네가.

“사랑에 빠진 도련님은 뭐든지 하는구나. 기분 나쁘네.”

“몰래 찍는 건 좋은 건 아닌 건 동감해.”

“누군 그러고 싶었냐.”

불퉁한 고죠의 말에 납득했다는 것처럼 이에이리가 응수했다.

 

“그렇지. 매번 얼굴만 보면 짜증 냈던 주제에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건 역시 철면피인 너에게도 어렵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앞으로는 솔직하게 구는 건 어때?”

“흥.”

“그나저나 요새는 더 조바심 난 것처럼 보이는데.”

핵심을 찌르는 말에 고죠는 핸드폰 화면을 보는 것을 그만두고 눈동자만 바짝 들어 올려 게토를 쳐다본다. 역시 귀신같이 제 감정변화를 알아챈다. 그렇다, 안 그래도 요즘 고민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성급하게 내뱉자니 분명 저를 놀릴 게 뻔해 우물쭈물하고 있자 게토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 고양이 손이라고 빌리고 싶은 마음이긴 했지만... 망설이던 고죠는 자기 합리화를 끝내고 수그렸던 허리를 바르게 폈다. 사뭇 진지해진 표정과 낮은 톤의 목소리는 그의 고민이 꽤 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깨달았거든. 유지가 나만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걸.”

“아, 확실히.”

“스구루도 쇼코쪽도 이름으로 불리고 있잖아? 난 아직 성으로 불리고 있다고.”

“그렇지만 그건 욕심 아니야? 네가 한창 괴롭힐 때 우리랑은 사이가 좋았는걸.”

“게다가 사토루는 성으로 불려도 이타도리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걸. 어차피 멋대로 굴고 있잖아. 상관있어?”

위로해줄 것이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아픈 곳까지 자비 없이 찔러오는 말에 고죠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죠는 선글라스 옆 테를 들어 고쳐 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일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좋아,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그럼?

“내일 근사한 곳에서 고백하고 승낙받을 거니까. 예약도 이미 해 뒀어. 그리고 키스할 거야, 유지랑.”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이에이리와 게토는 놀란 눈으로 고죠를 쳐다보다 동시에 서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말문이 막힌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 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똑딱똑딱. 시계 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뭐야, 하고 고죠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서 수락을 받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선 거야?”

“일단 자빠뜨리면 걔가 별수 있겠어? 오히려 상대가 나라는 거에 고마워해야지.”

“우와 싫어… 도련님이라는 거, 정말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게토는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질문을 했으나 더욱 납득 가기 어려운 대답이 날아왔다. 입안에서 막대 사탕을 굴리던 이에이리는 먹던 사탕을 꺼내고 진저리 쳤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없는 그녀도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미리 약속은 한 거야? 그래도 내일은 특별한 날이니까 선약이 있을 수도 있잖아.”

“응? 안 했지.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나의 유지는 인기 없으니까.”

너 같은 안하무인도 반하게 한 인물인데 인기가 없겠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게토는 침을 삼킴과 동시에 하고 싶은 말도 삼켰다. 고죠가 난동을 피워 뒷처리를 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고죠의 상태라면 무슨 말이라도 들어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쇼코는 막대 사탕을 시계추처럼 까딱거리며 게토 대신 문제점을 지적해주었다.

“헤에, 하지만 의외로 노리는 애들 제법 있을걸?”

“있어도 상관없는데. 내가 치워 버릴 거니까.”

“왔다―. 재수 없는 도련님 3연타.”

“그러니까 그놈의 도련님 타령 좀 관두라고!”

“네― 어련하시겠어요? 고죠가의 사토루 도련님―.”

이타도리 앞에서 1억 2천엔 모두 현금이야, 같은 대사를 해보는 건 어때? 라고 히죽거리며 실없는 농담을 꺼낸 이에이리를 고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생각한 바가 있는지 핸드폰이 들어 있던 반대 방향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꺼내든 케이스의 형태는 누가 봐도 정체가 명확했다.

“설마 반지를 주면서 고백을 하겠단 건 아니겠지?”

“뭐가 문제인데? 그게 가장 클래식하잖아!”

”글쎄, 그보다도 구식이지.“

게토는 끼고 싶지 않은 둘의 만담을 조용히 방관하던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야가 선생님이었다. 무슨 일이지? 평소에 수업 혹은 업무가 아니면 전화보단 메시지를 남기는 편이었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수업도 없고 임무 역시 없어서 이런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하며 늘어져 있었던 것인데. 게토는 아직도 투닥거리는 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동작을 보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지금 옆에 사토루랑 쇼코 같이 있나?]

[네, 같이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셋이 같이 수련장으로 오도록 해.]

 

게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둘에게 말했다. 우리 보고 오라는데?  

 

 

2.

 

 

밖은 아직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수련장 내부로 오면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어둠을 정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있는 등불에 의지해 셋은 야가 선생님에게 향했다. 보통, 비번인 날은 푹 쉬라고 배려한 탓에 연락하지 않는 야가 선생님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직접 와서 이야기하자는 말만 남겼기 때문에 궁금했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는데. 제 연애 사업을 위해 조언을 얻으려 했던 고죠가 투덜거리자 게토가 주의를 주었다. 곧, 선생님 앞이야.

”왔구나. 급하게 맡아줄 임무가 있다.“

임무요?

자신들은 오늘 휴식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셋의 고개는 동시에 오른쪽으로 기울여졌다.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는 제스쳐에 야가는 민망한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물론 너희가 비번인 걸 알고 있지만 이번엔 특수 상황이라서 말이지. 출장을 갈 필요는 없어. 해결할 건 주술고전 내부에 있는 주령이다.“

”여기에 주령이라니... 텐겐님 보호막이 뚫리기라도 한 겁니까? 큰일이잖아요.“

”따로 파악하기로는 외부에서 들어온 게 아니다. 고전 내부에서 발생했지. 그래, 다시 말하자면 내부인이 만들어낸 저주다.“

오늘따라 이래저래 충격적인 발언을 자주 듣는다. 저주를 처치해야 할 주술사가 스스로 저주를 만들어내다니! 그것도 주술사의 성지, 이 주술고전에서!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하고는 야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이기보다 황당하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학생이더라도 이들은 특급, 혹은 1급 주술사이기에 기본적으로 주령에 대한 이론은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령은 비술사의 부정적인 감정이 몸으로 새어 나오기 때문에 만들어진 존재이다. 주력을 다루지 못하는 신체는 감정을 붙잡지 못해 감정이 밑동이 깨진 그릇처럼 줄줄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술사의 경우는 달랐다. 주술사들은 감정을 다룰 줄 알았고, 그 감정을 주력으로 바꾸어 활용했다. 비술사와 달리 새어 나오는 감정도 극단적으로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령은 통상적으로 주술사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아무리 멀쩡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넘겨버리면 흘러넘친다. 다시 말해, 주술사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양보다 더 커진다면 문제다. 이런 이유로 어린 주술사들은 감정 컨트롤을 위해 영화감상 같은 종류의 훈련을 했다. 이와 관련된 수업을 하는 것 또한, 학교의 교육 커리큘럼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현 상황은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다. 제법 큰 문제가 될 법한 일이니, 야가는 일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실력으로 가장 믿을 만한 셋을 호출한 것이었다.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정보를 듣고 게토와 이에이리는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고죠는… 글쎄, 파악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제 시선이 안 보인다고 생각한 건지 주머니 속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얼씨구, 헤실헤실 웃는 꼴을 보니 그 ‘나의 유지’라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주령은 3급으로 확인되고 있어. 쫓는 사이에 급수가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한계는 2급까지다.”

”다른 정보는 밝혀진 건 없어요? 술식이라던가.”

고죠가 집중하고 있지 않은 것을 눈치챈 야가가 표정을 찌푸렸다. 혼내는 것이 좋을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게토가 제법 진지하게 제 말을 받아주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설명을 이어갔다.

”문제는 그거야. 이 녀석이 왜 생겨났는지, 어떤 외형인지조차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당한 사람은요? 그 주령을 확인하지 못했나요?”

의욕적인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고 예의상 여쭤보는 이에이리가 갸웃했다.

”그 녀석에게 내가 당했는데, 전혀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네―?“

"큰일은 아니야. 아끼던 주해 인형을 잃어버렸거든. 갓뎀, 그건 정말 완벽했다고! 접시를 얹어서 언뜻 보면 갓파 같이 생겼지만 입은 삼자 입이라 굉장히 귀여웠는데! 게다가 뒤에 달린 앙증맞은 날개가... "

차분하던 야가는 갑자기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기염을 토하고 있는 야가의 옆자리와 뒷자리에는 한가득 쌓아 올린 기괴한 모양의 인형들이 눈에 띈다.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인형을 만들고 있었는지 널브러진 헝겊 조각도 보인다. 인형이 잔뜩 쌓여 마치 산처럼 보이는 더미를 보고 있으니 게토는 아연했다. 옆을 돌아보니 이에이리도 자신과 똑같은 감상인 모양이었다.

 ”이 더미에서 한 개가 사라졌는데 알아챘어요?“

”물론이지! 난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편이라고. 그리고 그 인형은 말이지. 내가 꿈꾸던 가장 완벽한 밸런스의 걸작이었거든!“

지금이라도 그 인형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설명하려는 야가의 목소리를 높아졌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자신들이 보지도 못한 인형에 대한 찬양을 들을 기세였다. 눈치가 빠른 이에이리는 재빠르게 대화에 치고 들어왔다.

”언제 사라진 지는 기억하고 계세요?“

”그게 가장 곤란한 점이야. 다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어. 분명 소중한 것이라면 기억하는 게 보통일 텐데. 술식의 하나라고 생각된다만.”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하고 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이런 상태가 내일까지 지속 된다면 내일 학교를 봉쇄할 생각이다. 나가기라도 하면 혼란을 빚을 테니 말이다.”

야가의 갑작스러운 봉쇄 선언에 딴청 부리고 있던 고죠가 벌떡 일어섰다. 야가는 이 건방 떨던 자식이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의 친우들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고죠는 제 콧등에서 주륵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고쳐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벗었다. 흥분했다는 의미였다. 평소에는 사람 약 올리는 표정만 짓던 녀석이 이번엔 잔뜩 약이 오른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봉쇄해요?!“

”당연하지. 내일 같은 기념일은 평소보다 3배는 활발하다는 건 상식일 텐데. 하급 주령이라도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해. 애초에 잡으면 될 거 아니냐, 사토루.“

그럼 문제없지? 하고 말하는 야가의 표정은 평온했다. 사실 하급주령은 주술사가 득실거리는 주술고전에는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단지 작은 사건이라도 발생할 경우 한창 자라나고 있는 새싹 주술사들에 대한 상층부의 태도였다. 지금도 달갑지 않은 태도인데, 만약에라도 눈엣가시 같은 소동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미지수였다. 주령이 발생한 만큼 보고서는 올려야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사건의 크기를 줄이고 싶었다. 그렇기에 가장 적은 인원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고, 그중에 하나는 고죠 사토루였다. 분명 그가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이다, 라는 안이한 생각이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나가지 못한다’에 도발에도 보기 좋게 걸렸기에 저 승부욕 넘치는 성격에 학생 주령을 지워줄 것이다, 그렇게 야가는 계산했다.

그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턱을 괴고 다른 생각만 하던 고죠는 아직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네모난 케이스를 꼭 쥐고 있었다.

”젠장, 그딴 허접, 잡아주면 되잖아!“

고죠는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제 마음대로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문이 있었다면 쾅 하고 제 기분으로 발산할 셈이었는데 드넓은 수련장엔 아쉽게도 그의 화풀이를 받아줄 문짝은 없었다. 게토는 무례한 고죠의 행동에 그의 뒷모습과 야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선생님, 그게 사정이 있어서...

”신경 쓰지 마. 저 녀석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냐.“

야가는 그럼 부탁한다며 손을 흔들어 제자들을 내보냈다. 게토와 이에이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고죠를 뒤쫓았다. 키가 평균보다 훨씬 큰 고죠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멀리서도 눈에 띄게 잘 보였다.

”내일이 무슨 날인데! 어떻게 청춘을 빼앗을 수 있냐고!“

”사토루, 선생님 말씀대로 주령을 잡으면 되잖아?“

정보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차차 알아보자. 이런 맨땅에 헤딩, 예전에도 해본 적 있었잖아, 그렇지? 마치 성난 아이를 달래듯 게토는 고죠를 회유했다. 야가 선생님의 생각은 대충 알아챘다. 주령을 잡게 되는 것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곤란한 건 주술고전의 쪽일지도 몰랐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분명 내부의 주술고전 사람에 의해 주령이 발생했고 이것은 보기에 따라 큰 사안이었다. 주령을 없애야 할 인물이 오히려 주령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겉으론 감정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죠도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진 않을 테니까. 자신이 납득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그 고죠 사토루였으니까.

”좋아, 최대한 빠르게 해치운다.“

”잘 생각했어, 사토루.“

”그리고... 쇼코!“

”응?“

나? 갑자기 언급된 이에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고죠는 입이 삐죽 나온 채로 소중하게 들고 있던 케이스를 내밀었다. 

아까는 놀리느라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제법 고급스러운 태가 났다. 부드러운 남청색의 벨벳에는 별 조각을 박아 넣은 듯 미세한 입자의 은가루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은하수를 흩뿌린 모습 가운데에 금박으로 박힌 화려한 필기체로 럭셔리로 유명한 쥬얼리 상표가 적혀 있었다. 

케이스 자체의 무게는 질량 자체로는 가볍지만, 손에 들고 있기에 심히 부담스러운 가격의 것이라 무거웠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고심했을 마음도 그 정도의 무게겠지. 그런 값비싸고 소중한 것을 왜 자신에게 내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네 쪽에게 맡길게. 너는 적당히 할거잖아. 잃어버리지 않게 보관해줘.“

본인과 자기 친구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이해를 끝낸 고죠의 명석한 판단이었다. 그 말을 꺼낸 고죠도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고죠는 괜히 하급 주령을 잡다가 반지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밸런타인데이의 성대한 고백을 위해 주령 따위를 잡으러 다니다가 반지를 잃어버려 고백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척 봐도 이 반지는 시중품이 아니다. 분명 징그럽게 곱게 자란 도련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세밀한 오더를 넣었을 것이 뻔했다. 유지의 손은 생각보다 작으니까 이런 디자인이 좋을 거 같아, 역시 원석 색깔은 이쪽, 아니 저쪽이 더 좋겠어. 라고 까탈스럽게 굴어대는 고죠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친구의 섬세함을 눈치챈 이에이리는 미소 지으며 순순히 반지 케이스를 받았다. 너 마음에 안 들 때 팔아도 되는 거야? 하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면서.

쇼코가 받아서 든 케이스는 생각한 것보다 더 깨끗했다. 그가 제법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끔한 케이스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주인이 어떻게 다루고 있었는지 전해주고 있었다. 

 

 

3.

 

 

고죠, 게토 그리고 이에이리는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아직 3급이라는 정보뿐이었기에 큰 틀부터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죠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서 주령을 잡고 싶은지 몸을 들썩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침에 낙서하며 썼던 노트를 들고 와 새 페이지를 펼친 게토는 무언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 MISSION 1. 주령의 능력? ]

 

 

”일단 명확한 능력부터 알아야 할 거 같아. 그래야 대응책을 마련하니까.”

”선생님 말씀만 들어보면 소중한 걸 훔쳐 가는 주령이라거나. 곧, 발렌타인이기도 하고 타당성은 있어 보이지?”

이에이리는 제 인중에 볼펜을 올려놓고 입을 삐죽거렸다. 펜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을 쓰다 보니 제법 귀엽게 생긴 얼굴이 꽤 웃긴 표정이 되었다. 게토는 그걸 보고 푸핫, 하고 웃었다가 살벌한 분위기를 뿜는 고죠를 보고는 웃음을 거뒀다.

”그렇게 조바심 내지 마, 사토루.“

”맞아, 마음에 여유를 가져. 그 표정을 지으면 주령이 잡히기도 전에 도망치겠어.“

”시―끄―러―워―. 나는 지금 이런 시시한 하급주령 따위가 아니라 유지랑 만나고 있어야 한다고?!"

”어차피 출장 갔으니까 상관없잖아.“

섬세한 남고생의 마음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이에이리는 턱을 괴며 정론을 말했다. 아무래도 반박할 말은 없는지 고죠는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안 그런 척해도 고백 때문에 잔뜩 심란한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으니 잔뜩 골이 난 모양이었다. 일할 때는 웬만한 성인들보다도 나으면서 이런 면을 보면 순 애라니까, 사토루는. 뭐,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를 미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걸지도 모르지만.

”일단 피해자들 얘기를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주변에 물어볼까. 아, 나나미! 혹시 시간 괜찮아?“

”약속이 있어서요. 용건만 말씀해주세요.“

타이밍 좋게 나타난 금발의 덴마크 혼혈인 나나미는 운이 좋지 않게도 작당 모의하는 셋의 눈에 띄었다. 차갑지만 정중한 말투, 타의 모범이 될 법한 나나미 켄토는 잰걸음으로 서둘러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다 멈췄다. 이 자리에서 서서 말할지, 혹은 다가가야 할지 고민하는 몸짓이 보이자 괜찮아, 괜찮아, 거기서 이야기해도 좋으니까. 라며 게토는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다른 건 아니고 요즘 잃어버린 거 있어?“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주변에서는 잃어버렸다고 한 사람은 없었어?“

”... 아. 젠, 아니 마키가 뭘 잃어버렸다고 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은 아닌데, 하고 게토가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고죠는 장신의 몸을 지탱하는 긴 다리를 벌리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는 이 지루한 대화는 언제 끝나나, 하고 감시하다가 게토의 말이 끝나자 오른손의 검지를 내리꽂듯 바닥을 가리켰다. 고죠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걔 데려와. 당장!

짜증이 잔뜩 묻은 한마디로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우리한테는 성질부려도 좋지만, 괜히 불쌍한 후배한테까지 불똥 튀기지 말라니까. 눈웃음을 짓던 게토는 표정을 굳히고 뭐라고 혼낼 요량으로 고죠를 흘끗 노려봤다. 이에이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개의치 않고 노트에다가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예상외로 싸늘한 분위기가 생각보다 짧게 무마되었다. 나나미는 고죠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무례한 언동에도 한숨을 가볍게 쉬는 것으로 넘겨주었다.

”알았어요, 발견하면 이쪽으로 가라고 전해드릴게요.“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 혹시 뭐하러 가고 있었어?“

”조금 전에 하이바라가 지나가서요. 전해줄 게 있어서 따라가고 있었어요. 덕분에 방금 놓친 거 같지만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자기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는 나나미는 묵례를 한 후 사라졌다. 바쁘다고 한 것 치곤 성실하게 인사까지 한 점이 주술고전에 몇 안 되는 성실한 사람인 나나미다웠다. 이에이리는 낙서를 끝낸 모양인지 펜 뚜껑을 ‘뽁’소리를 내며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이미 나나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내가 듣기로는 하이바라, 오늘 여동생 보러 내려간다고 들었는데.“

”그래? 하지만 나나미가 사람을 잘못 볼 성격은 아니잖아. 잘못 들은 거 아냐?“

”그런가. 계획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마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이에이리의 말을 끝으로 고죠는 구겨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냥 닥치는 대로 잡지? 그딴 하급 주령, 뭐가 무서워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데?“

”선생님도 발견 못 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찾아? 그리고 지금 대증요법을 쓰자는 게 아니잖아. 확실히 없애려면 ‘원인 요법’을 써야 한다고. 그건 기본이잖아.“

주령을 잡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대증요법과 원인 요법. 대증요법은 말 그대로 주령이 보이면 다 때려잡는 가장 효과적이고 단순 무식한 방법이다. 보이는 주령을 죄다 족치면 눈에 띄게 빠르게 잡을 수 있고 원인을 분석하지 않아도 돼서 전투력이 높다면 오히려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단점은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령이 계속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보통 채택하는 것은 원인 요법. 주령이 생겨난 이유를 파악해서 그 근원을 없애 확실히 뿌리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번거롭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한 시라도 다급한 고죠는 느긋하게 원인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오늘은 주령이 없는 것처럼 꾸며내고 내일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물론, 정론을 주장하는 제 친구가 듣는다면 분명 제게 화를 낼 의견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죠의 입장은 억울했다. 내일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벼르고 있었던가. 평소에는 위에서 해달란 대로 다 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이 고죠 사토루가! 그렇다면 1년에 한 번쯤인, 아니 자신의 인생에서 또 올지 모르는 고백 타임을 양보해줄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이 망할 놈의 약해빠진 주령은 왜 하필 타이밍 나쁘게 나타나서는 자신을 고생시켜? 고죠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다. 

유지의 살랑이는 분홍색 머리카락,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눈꼬리, 자신이 모질게 굴어도 언제나 선배~하고 다정스레 부르는 목소리. 그렇다, 지금의 고죠는 금단 현상에 시달렸다. 정말 웃기지도 않지, 스스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틀이었다. 이틀을 보지 못했다고 마음이 식기는커녕 점점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한순간만이라도 내 기분을 느껴본다면  느긋하게라는 말 따위 하지 않을 텐데. 제 마음도 모르는 친구는 이미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인들의 질린 표정을 보게 되는 것은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자의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달갑지 않지만 말이다.

”선배들. 저 불렀다면서요? 무슨 일인데요?“

”마키! 잘 와줬어. 다름이 아니라 너 잃어버린 거 있다며. 뭔지 알 수 있어?“

묘한 신경전이 흐르던 가운데 타이밍 좋게 마키가 나타났다. 이에이리는 예이―하고 마키와 하이터치를 하며 인사했다. 마키는 훈련이라도 하고 온 모양인지 운동복을 입은 채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별 건 아니에요. 저 어렸을 때, 동생이랑 나눠 가진 팔찌 있었거든요. 그게 없어졌어요.“

”팔찌? 너 액세서리 같은 거 하던 타입이던가? 훈련할 때 거슬린다면서?“

”그렇죠, 아무래도. 음...? 내가 언제부터 끼었었더라?“

무언가가 이상한지 이야기하던 도중 마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네?“

”네, 아쉽긴 해도 훈련이나 임무 나가면서 잃어버렸겠거니 했어요.“

”그렇구나. 바쁜데 일부러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근데 고죠 선배 상태는 왜 저래요? 아니야, 마키. 수고했어. 게토는 다시금 후배에게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죠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이제 슬슬 표정 좀 풀지, 사토루? 살살 때린 터라 아프진 않았지만 고죠는 제 이마를 문지르고는 벌린 다리 위에 제 팔을 걸쳐 턱을 괴었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이에이리는 소파에 제 얼굴을 걸친 채 아, 하고 자리를 뜨려는 마키에게 툭 말을 건넸다.

”동생한테 연락하지, 그래? 내일은 특별한 날이잖아.“

자기 일 말고는 큰 관심이 없던 이에이리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마키의 눈은 약간 커졌다.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건 역시 무리에요. 그나저나 쇼코 선배답지 않은 오지랖이네요.“

”응? 난 언제나 상냥한 선배 역할인데. 만나서 잃어버린 팔찌라도 새로 맞추면 좋잖아?“

그러니까 이건, 상냥한 선배로부터의 조언, 하고 쇼코는 장난스럽게 히죽 웃어 보였다.

”글쎄요, 고려는 해볼게요. 그런 건 한쪽에서만 밀어붙인다고 통하는 건 아니니까.“

마키는 제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에이리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밸런타인데이는 꼭 연인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은 아니니까. 전하고 싶었던 말을 꼭꼭 숨겨둔 것을 풀어낼 좋은 변명을 만들어주는 날이다. 그것이 고마움이든, 추억이든, 우정이든. 그러니까 이 정도의 소원은 괜찮잖아.

대화를 마친 후, 노트를 보니 착실히 이에이리가 서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는지 마키와의 대화가 적혀 있었다. 글자 외에도 추리한 것처럼 물음표와 동그라미가 잔뜩 산재해있었다.

”단순히 훔쳤다고 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있네.”

”아무래도 주령이 발생한 이유부터 알아야 할 거 같아.“

 

 

[ MISSION 2. 주령의 원인?? ]

 

 

아까와 달리 소제목에는 물음표가 하나 더 달렸다. 단순한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복잡해질 것 같다. 이에이리는 펜을 닫지 않고 물음표의 점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의미 있는 물건이 없어지고 있잖아?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초점을 다르게 가보는 건 어때? 평소에 잠잠하던 학교가 갑자기 감정이 요동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거야 ...“

게토와 이에이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직도 불만 가득한 고죠를 쳐다봤다. 자신에게 시선이 주목되자 뭐? 하고 불량스럽게 대답한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우리 옆에 있는 표본에 따르면 역시 ‘밸런타인데이’ 때문이겠지?“

”그렇지. 이 시점에서 한꺼번에 감당되지 않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건 그 이유뿐이니까.“

”아앙?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너도 주령이 만들어지는 데에 한몫했을 거라는 얘기지.“

강렬한 감정일수록 주령은 생성되기 쉬웠다. 아무리 긍정적인 감정이라 표상되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감정이라는 것은 이어 붙인 뫼비우스 띠와도 같지 않은가. 극단의 감정은 결국 떨어뜨릴 수 없는 관계였다.

흔히들 그런 상황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굉장히 귀여운 동물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생물을 깨물어주고 싶다는 가학적인 생각―큐트 어그레션(cute aggression)―이 들 때. 극한의 애정은 극도의 집착을 만들어낸다. 플러스 감정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이너스 감정으로 순식간에 변환할 수 있는 에너지이다. 게다가 고죠의 경우 부정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만큼 주력을 담는 그릇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질과 크기 차이가 남달랐다. 그리고 확인된 바로는 강렬한 감정은 주령의 좋은 사료이기도 했다.

안타까운 소식은 강력한 주술사인 고죠는 이타도리에 대해 틈만 나면 키스하고 싶어, 고백하고 싶어, 좋아해, 귀여워. 계속해서 입에 달고 있었고 그것은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올수록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게 뭐가 나빠.“

“뭐라 하는 게 아니라, 타이밍이 그랬을 뿐이란 거잖아. 가설이지.”

“흥.”

물론 고죠의 말대로 좋아하는 감정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일반인들 사이라면 축하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주술사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주령을 퇴치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주령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시트콤 같은 상황인가!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가장 잘 알았기에 그를 꾸짖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평소에도 주령이 넘치는 포인트가 있잖아.“

”보통은 자연재해가 생긴 날이나 시즌별로는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나 장마철이 보통이지. 하지만... “

보통 주령이 자주 발생하는 날에는 밸런타인데이가 포함되지 않았다. 천천히 상식을 되짚어가자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과연 ‘밸런타인데이’ 때문에 발생한 게 맞을까? 라는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이유가 아니라면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탐문을 통해 알아본 결과 ‘자신이 아끼고 있던 것을 도둑맞는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좋아하는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피어난 주령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그래야 앞뒤가 맞았다. 누군가의 소중한 것이 되고 싶거나, 혹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지금으로서 가장 그럴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밸런타인 데이’ 때문이 아니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다들 똑같이 추론한 모양인지 한동안 조용했다. 추리의 진전이 없었다. 이런 갑갑한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용했던 고죠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나가본다.“

”어딜?“

”여기서 죽치고 앉아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직접 그 망할 주령을 찾아보겠다고.“

평소에는 머리 좋고 약삭빠르게 움직이던 친구가 어쩌다 저런 단순 무식한 말을 내뱉게 되었나. 그의 고집을 아는 친구들은 반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동의를 얻기도 전에 고죠는 이미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고죠가 사라진 뒤에 게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바보가 되어버렸는지. 누가 그 고죠 사토루로 알겠어?“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는 말, 흔하잖아?“

그러니까 저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을 이어가며 이에이리는 기지개를 쭉 켰다. 단순 무식한 발언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들은 탐정이 아니였다. 방구석에서 머리를 맞대 셜록 홈스를 흉내 낸다 하더라도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술사는 주술사답게. 게토는 펜을 들어 끝자락에 정갈하게 소제목을 썼다.

 

 

[MISSION 3. 주령 소거]

 

 

”그럼 우리도 나가볼까.“

게토의 말에 이에이리는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는 터라 뻐근해진 다리를 풀어주었다. 이제야, 주령을 잡는 기분이 드네. 그렇지? 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급수 높은 주술사일지라도 그들은 아직은 청춘인 고등학생이었다.

”그럼 우리 나눠서 찾아볼까?“

“그편이 빠르겠지.”

서로 가볍게 손 인사를 나누고 다른 방향으로 갈라섰다.

 

게토는 눈에 익숙해진 주술고전을 찬찬히 훑었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아 흙바닥은 단단하게 얼어있었다. 그 위에 세워진 불탑처럼 쌓아 올린 목조건축은 고풍스러웠으나 쌀쌀한 날씨와 어우러져 고등학교 특유의 풋풋한 분위기보다는 스산해 보였다. 주변에 잎사귀 없이 줄지어진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석탑은 그 감상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학교라는 생각하지 않고 보았다면 주령을 처치해야 할 스폿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선 틀린 말도 아녔다. 인파의 북적거림이 없는 적막한 학교는 평소에도 한적해 보였지만 오늘은 유독 더 쓸쓸해 보였다. 밸런타인데이 때문에 어느 정도 떠들썩한 분위기를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다른 학생이라도 마주치면 탐문이라도 할 요량이었으나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하고 게토는 후회했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노트를 꺼내 근처 벤치에 앉았다. 단순히 물건을 훔친다는 능력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수 십번 주령을 처치해온 육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얄팍한 노란색 종이를 천천히 위로 넘기며 차근차근 노트에 적혀있는 글자를 손으로 되짚었다. 제 입술로 읊조리듯 적힌 글을 천천히 읽던 게토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의 이에이리와의 대화를 더듬어보았다.

작년의 밸런타인데이도 이랬던가?

별다를 게 없었다. 물론 올해가 작년보다 조금 더 떠들썩하긴 했었다. 예전 같았으면 초콜릿에 대한 흥미도 없었던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 해에는 유독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늘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령이 발생할 정도의 열렬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직 2월이라 뺨에 닿아오는 공기가 차가웠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입에서 뿜어나온 입김이 하얗게 변해간다. 차가운 기류에 하얗고 몽글한 것이 뭉쳐지다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게토는 백발의 친구를 떠올렸다. 역시 가장 열정적인 건 그 녀석이겠지, 게토는 평소답지 않은 그를 떠올리며 픽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본인답지 않게 바보같이 구는 것은 꽤 신선한 구경이라 주변인으로서 퍽 재밌었다. 그래, 그 1학년 앞에 서면 초등학생처럼 제법 귀여운 짓을 하더라. 그러고 보니 작년의 주술고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긴 하지. 4학년 졸업생들은 사라지고 1학년들이 올해 새로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던 고민의 흐름이 그 생각에 당도하자, 게토는 웃고 있던 입매가 천천히 굳어졌다. 게토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내리감았다. 단정한 눈썹은 약간의 균열을 일으켰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가설에 게토는 심히 쌉싸름한 담배를 물고 싶어졌다. 설마...

”게토, 큰일 났어! 나 사고 친 거 같아.“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게토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저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언제나 느긋하게 걸음을 걷던 이에이리가 이례적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정리되었던 치마는 볼품없이 바람에 의해 휘날리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잘 없는 하얀 얼굴에서 진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게토 근처에 도착했지만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고르기 바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게토 앞에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그녀가 대답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게토는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영문 모른 채로 액정을 들여다보던 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망했다. 

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휴대폰 액정에는 고죠로부터 온 문자가 띄어져 있었고 내용은 이러했다.

 
 

 

[반지 어디있어? 잃어버린거야? 지금 유지가 내 반지 들고 나타났다고!!] 

4.

고죠는 당황스러웠다. 첫 번째, 믿을만한 친구에게 맡긴 반지가 예상치 못한 곳에 튀어나온 것. 그리고 두 번째. 아침부터 계속 되뇌었던 이름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는 것. 이틀 전부터 되뇐 탓에 멋대로 만들어낸 자신의 망상이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눈을 여러 번 떴다 감아도 온종일 자신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귀여운 짝사랑 상대의 모습이었다.

”뭐야, 너 노, 농땡이 안 피우고 바로 온 거야?“

마음의 준비가 되지도 않은 채로 상대를 마주쳐서인지 볼썽사납게 고죠는 말을 더듬었다. 멋있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음정의 끝이 약간 떨린 것을 보니 삑사리가 났다. 

고죠는 얼른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뛰어다니느라 젖어 있던 등에 이번엔 식은땀이 흘렀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러다가 또 입으로 사고 치는 거 아닌가, 본인이어도 제 입을 믿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의 앞에만 서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게 된다. 이런 건 초등학교를 마칠 때 졸업했어야 하는데 고죠는 그러질 못했다. 

천재라고 불리는 사내는 사랑은 처음이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죠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에 있어선 초등학생 1학년의 학습상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모든 것에 능숙한 고죠는 첫사랑에게 유독 서툴렀다.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소중하게 준비한 반지 케이스를 든 채 올려다보는 호박색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쟤는 뭘 저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거야. 내, 내,내가 잘생겼나. 그렇긴 하지. 그럼 나, 나,나한테 새삼 반했어?! 폭주를 제지할 사람이 없으니 사고방식도 고무공처럼 이상하게 튀어 나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잡념에 고죠는 고개를 가볍게 휘저었다. 방심하면 안 된다. 매번 유지 주변에는 방해꾼들이 있었다. 번번이 그에게 말이라도 걸면 입으로 사이렌을 울려대며 쫓아오는 2명이 꼭 나타났다. 본인들이 그의 보안업체라고 착각이라도 한 모양인지, 주변에 접근이라도 하면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노려봤다.

”뭐야, 그 재수 없는 1학년들은? 너 먼저 올라왔어?“

이타도리는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해꾼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고죠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도 말간 표정을 짓고 있는 이타도리와 눈을 차마 마주칠 자신은 없어 콧망울 근처에서 시선을 고정했다. 고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마 남고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겠지만, 말랑한 복숭아 같아서 베어 문다면 달콤하고 폭신할 것 같은 입술이 있었다. 저 입술 안에 숨어있는 혀는 또 얼마나 말캉할까,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고죠는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정말 그가 들고 있는 것이 자신이 준비한 반지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이에이리는 매사 느긋해 보이더라도 제 할 일을 하는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맡긴 터였는데 이런 상황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고죠는 이타도리가 들고 있는 케이스를 뺏듯이 가져갔다. 달칵, 하고 열리는 케이스 안에는 만년설을 녹여내 담금질한 것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백금의 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자기  색깔과 똑 닮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터키색의 그랜디디어라이트가 청아하게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녹청색의 보석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반지 안쪽에는 자신이 고심하여 새겨넣은 문구도 그대로였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 반지임이 틀림없었다. 단 1% 가능성의 희망이라도 걸었던 고죠는 절망스러웠다.

”안에 있는 반지 봤지? 아냐, 됐다. 대답하지 마. 당연히 봤을 테니까.“

고죠는 선글라스를 벗고 손을 들어 을 가렸다. 흔들리는 동공은 갈피를 잃었고 꼴사나운 모습을 앞의 웃고 있는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일까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은 이미 들켰다. 기대에 부풀었던 가슴이 서서히 꺼져간다. 입 안쪽이 시큰거렸다. 

이타도리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제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 반지가 뭐냐고, 되물어보지 않는 것은 그의 평소 배려 넘치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당황스러워하는 고죠 앞에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고죠는 눈을 의심했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에게 손에 반지를 끼워달라는 것 아닌가... 고백을 수락한다는 의미 같잖아. 착각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고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찬찬히 훑었다. 

눈꼬리가 새침하게 올라간 눈매면서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잡은 듯 가슴이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져 왔다.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이야? 사랑에 있어서는 무지렁이인 고죠는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니까 전혀 알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잔뜩 긴장한 기세의 고죠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이타도리는 사르르 웃어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웃어 보이는 건 명백한 반칙이잖아, 이타도리 유지.

 

고죠 사토루의 가장 완벽하고 낭만적인 밸런타인데이의 고백은 이미 무너졌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면, 본새 나진 않지만,자신의 사랑을 마무리할 수 있는 타이밍이다. 먼저 시작한  건 너야, 유지. 고죠는 타는 듯한 목구멍에 침을 한 번 삼켰다. 누가 봐도 처음 고백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하얀 손은 내민 손을 받든다. 

상대의 생각만으로 가득 채워 몇 달 동안 고르고 고른 결실이 맺어진다. 오직 한 명만을 위해 만들어진 주물(鑄物)이 드디어 주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고죠가 가장 바라왔던 그림이 현실로 덧대어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은색의 것은 알맞게 이타도리의 손가락에 딱 맞춰 끼워지며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황홀한 광경은 고죠의 넋을 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고죠는 떨리는 입술로 허락의 말을 청했다.


 

”이건 앞으로 너에게 키스해도 좋다는 의미의 끄덕임이지?”

 

 

이에이리와 게토는 서둘러 고죠를 찾기 위해 주술고전을 누볐다. 다행히도 고죠는 큰 키와 백발로 찾아내기에 안성맞춤인 외모였다. 자신들이 담소를 나눌 때 자주 찾던 자판기가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자판기 뒤편에 서 있는 고죠의 머리가 쑥 올라와 있었다. 머리를 약간씩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어 보였다. 상대는 고죠보다 작은 상대였기에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거지? 게토와 이에이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곧이어 대화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고죠의 쩔쩔매는 태도는 분명 딱 한 명의 특권이었으니까. 어떤 사고 경위인지 알 수 없었지만,반지는 주인의 손에 들어갔으니 진실을 털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그래, 차라리 고백을 해버리는 편이 좋겠네. 사랑 때문에 생긴 주령이라면 고백을 하는 거야말로 ‘원인 요법’ 아냐?“

”이론대로라면 그렇긴 하지. 우리 같은 건 필요 없었어. 정말 스스로 해결해버렸네.”

게토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신랄하게 내뱉었다. 평소 같으면 짓궂게 놀렸을 이에이리는 양심이 걸린 모양인지 담백하게 동의했다. 밸런타인데이의 기적은 조금 이르지만 그들의 친구에게 찾아왔다. 멀찍이 고죠를 바라보던 둘은 맥이 빠진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돼서 서둘러 달려왔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잘 풀려가는 것을 확인하니 안도 반, 회의감 반이었다.

”우리도 슬슬 도련님의 보모 노릇을 졸업하자고.“

자립심 높은 녀석이 기대오니까 의지가 되어 주고 싶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난척하며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절대 신인 것처럼 굴어놓고 왜 이타도리 앞에만 서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굴어대는지.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자립할 때가 되었지? 두 명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 찰나에 등 뒤에서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등 뒤가 오싹해질 만큼 살벌한 분위기에 천천히 몸을 돌리자, 거기에는 지금은 없어야 할 인물이 있었다.

”고죠 선배, 지금 누구랑 뭘 하고 계신 거예요?“

짜증이 잔뜩 난 저음의 목소리. 후시구로 메구미였다.

게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러니까 ‘이타도리 유지의 보호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일을 벌이지 그랬어, 라고 원망해도 때가 늦었다. 게토는 무력으로라도 말릴 생각으로 현장으로 다가가던 중이었다. 다급하게 사건이 발생할 예정인 곳으로 뛰어가던 중, 게토의 눈에 보인 것은 후시구로 말고도 다른 한 명 더 있었다.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인물이 후시구로 뒤에 서 있었다.

”어라? 고죠 선배네. 안녕하... 이상하다. 후시구로! 고죠 선배가 두 명이 있어!“

”이타도리, 너는 또 무슨 소리야? 츠미키, 대체 여기에 왜 와 있는거야? 연락도 하지 않고. 일단 거기서 물러서.”

”뭐야, 유지가 왜 두 명...“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옥견을 부르려고 손동작을 취하던 후시구로도, 고죠에게 꾸벅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이려 했던 이타도리도. 그중 가장 압권인 것은 입을 떡 하니 벌린 채 얼어있는 고죠 사토루였지만 말이다. 각자 다른 인물의 이름을 부르며 당황하고 있는 꼴은 흔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았다. 얼추 상황을 파악한 게토만 얼빠진 세 명에게 뛰어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의 뒤편에서 이에이리의 고함이 들렸다.

”반지는 나한테 있었어! 잃어버린거 아니야! 저건 가짜야!”

이에이리는 전력을 다해 케이스를 게토를 향해 던졌다. 날아오는 케이스를 받아낸 게토는 천천히 살폈다. 분명 고죠 사토루가 보여주었던 그 반지였다. 그는 다급하게 고죠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자판기 주변에 보이는 주력의 잔예가 눈에 들어왔다. 하하, 젠장. 하급 주령한테 보기 좋게 놀아났군!

”사토루! 네 앞에 있는 거, 이타도리가 아니라 주령이야! 빨리 잡아!“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고죠는 친구의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주령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자 태도를 돌변했다. 귀엽게 입을 쭉 내밀고 있던 이타도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앞에 보이는 것은 반투명한 말랑해 보이는 젤리 같은 것이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점액의 흔적을 잔뜩 남긴 채 꾸물거리며 기어가고 있는 모습은 분명 주령이었다. 나는 지금 주령 따위한테 고백을, 아니 그것뿐 아니라 키스 할 뻔 한 거지? 그것도 유지 앞에서?

고죠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새하얀 얼굴은 열이 몰려 순식간에 혈관이 비칠 정도로 붉어졌고, 꾹 다물던 입술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내 이빨이 빠득, 하고 깨질 것 같이 갈았다. 주술계의 최강인 고죠 사토루를 물 먹인 값은 톡톡히 해야 할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외침은 윙윙거리며 퍼져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설렘이 수치스러움으로 바뀌자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에너지가 가슴 저편 내부에서 끓어 올랐다. 지금이라면 분명 상위 술식도 가능할 정도의 부정적인 에너지였다.

”망했어, 쟤 지금 귀 빨개졌다.“

엄청나게 열 받았잖아, 저 자식. 이라는 게토의 미래를 예견한 말을 끝으로 주변의 일대는 엄청난 파괴력이 발생했다. 소행성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주변 일대는 초토화되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깨끗한 자판기는 물론이고 고풍스러운 미를 뽐내던 주변 목조건물들은 저항할 틈 없이 부서져 벽은커녕 기둥까지 흔적도 없이 파손되었다.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것은 남아 있지 않고 부스러기만 남아 공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고죠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흙바닥은 엄청나게 패여 있는 흔적은 못 해도 1m의 깊이는 되어 보였다. 

고죠의 무자비한 술식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서 흙먼지 때문에 한동안 모두의 기침 소리만 이어졌다. 엄청난 소리에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상황을 모르고 현장만 본 감상은 특급 주령과 전투라도 벌인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이리는 어마어마한 현장의 상태와 얼빠진 표정의 주변인들을 살펴보다 조용히 박수를 짝, 짝 쳤고 게토는 손을 들어 올려 제 이마를 짚었다. 힘의 격차를 역력하게 보여주는 파괴적인 현장에 울려 퍼진 것은 오롯이 게토의 슬픈 목소리뿐이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끝내라고 했잖아... " 

 

5.

 

 

수련장 내부는 수용하고 있는 인원에 비해 조용했다.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이에이리, 옆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제 뺨을 긁는 게토. 그 옆에는 잔뜩 골이 난 듯 입을 삐죽이고 있는 고죠는 팔짱을 끼고는 있지만 얌전히 무릎은 꿇은 채였다. 이제야 지방에서 돌아온 1학년들은 다소 지친 표정이었으나 아까의 소동으로 더 피곤한 기색이었다. 쿠기사키와 후시구로는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이타도리만 품 안에 있는 쇼핑백을 제 옆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야가는 어떻고 말문을 떼야 할지 곤란한 표정이었다. 본론부터 꺼내야 할까, 혹은 격려부터 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꽤 긴 정적이 흐르고 야가는 겨우 말을 꺼냈다.

”면목 없구나. 내가 처음부터 주령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했었다면 혼선이 생길 일도 없었고.“

야가는 대뜸 제 머리를 팍 숙였다. 평소답지 않은 약한 모습에 게토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나라고 말렸다. 사정을 모르는 일학년들만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야가는 ‘자신이 인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착각하여 ‘도둑질’ 맞았다고 처음에 그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안내했다. 보기 좋게 주령의 능력에 온전히 당한 꼴이었다. 이것은 주술고전을 담당하는 교사이자, 1급 주술사인 자신에게도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야가는 반성을 끝내고는 빠르게 푹 수그린 고개를 바짝 들며 말했다. 

”그건 그거고. 제법 화려하게 해주었구나, 사토루.“ 

야가는 머리가 아픈지 제 찌풀어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야가의 두통의 원인은 아무래도 옆에 있는 종이 뭉치인 것으로 보였다. 잔뜩 쌓여있는 종이에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힌 숫자와 건물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고죠가 멋지게 부서뜨린 건물의 수리 견적서로 보였다. 스케일이 크다 보니 조용히 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야가는 쌓인 종이 뭉치에서 가장 위에 올라 와있는 종이를 낚아채 눈으로 훑고 얌전히 앉아 있는 학생들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주령을 퇴치했으니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일단은 먼저 확인해보는 쪽이 좋겠지 싶어서.“

얄팍한 종이에는 약 10시간의 소동의 원인을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간추려져 있었다. 이 사건의 중심이었던 이에이리, 게토, 고죠는 물론이고 돌아오자마자 아수라장에 휩쓸린 일학년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팔락, 하고 종이는 게토의 손에 들어갔고 이타도리를 제외한 5명은 옹기종기 모여 활자를 훑었다. 이타도리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상황이 정리가 된 후에 볼 요량이었다.

 


 

[ ( 3 )급 주령 발생퇴치 보고서 ]

급수: 3급

발생 장소: 도쿄도립 주술전문 고등학교

능력: 당사자가 가장 바라는 것으로 외형적 변환

원인: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성애적 감정으로 발생

관련 인물: 고죠 사토루, 이타도리 유지(성애적 감정 대상)

처치 시간: 9시간 38분

처치 인물: 고죠 사토루

청구액: 별도 첨부 *

 


 

주령을 퇴치하고 나면 늘 보게 되는 익숙한 양식이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을 읽은 경악에 찰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은 러브레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점은 이 내용이 고스란히 상층부에 올라가서 검토받을 것이고 선례로써 서고 한쪽에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부분이 평범한 러브레터보다 더욱더 최악이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하급 주령의 보고서였다. 보통의 하급주령의 사례라면 찾아보지 않겠지만, 주술고전에서 발생했다는 특이점과 주술계의 유명인 고죠 사토루가 만들어낸 데에 있어서 화제성은 충분했다. 급 낮은 주술사라도 확인할 수 있는 구미 당기는 내용의 보고서다. 이래서야 주술계 전반에 방방곡곡 퍼지는 고백 대자보 혹은 고백 전단지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 고죠의 친구들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일학년들 쪽은 어안이 벙벙한 채 당사자들을 번갈아서 쳐다볼 뿐이었다. 고죠는 얄팍한 종이를 읽자마자 게토의 손에서 낚아채 마구잡이로 구겨댔다. 고죠의 손안에서 볼품없이 구겨진 종이는 냅다 패대기 당한 후 고죠의 발길질을 당했다. 고죠는 당장이라도 이 종이를 없애고 싶어 한 행위였지만 소용없었다. 주령보고서는 반드시 올라가야 했으니, 분명히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있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고죠는 귀가 새빨개진 채로 분을 토하고 있었다. 고죠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왠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이타도리는 흠칫하며 고양이눈이 된 채 옆을 흘끗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추적해보니 주령은 온전히 사토루의 주력으로 만들어졌어. 그래서 교내 감정 컨트롤 교양 30시간 추가되었다, 사토루.“

”윽.“

”불만은 없겠지. 지금 학교 수습하는 것도 벅차거든.“

이타도리는 간접적이었다 할지라도 두 사람이 만들어낸 합작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령, 두 사람의 아이네, 라는 재미없는 농담이 머리에서 생각났지만,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지 묘한 정적이 이는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야가는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이고, 라고 묵직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보고서 내러 간다. 둘은 할 말이 많아질 테니 남고.”

추가로 뱉은 말은 둘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비켜주라는 선생의 배려였다. 비록 부탁한 대로 조용히 일을 처리해주진 않았지만, 분명 곤란한 일을 처리해준 건 고죠 사토루였다. 이것은 야가 선생의 나름대로 배려한 감사함의 포상이었다. 

후시구로와 쿠기사키는 모르는 체하고 버틸 생각이었다. 먹기 좋게 차려진 이타도리를 고스란히 재수 없고 짜증 나는 선배에게 진상할 생각이 없었다. 쿠기사키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덩치가 큰 게토가 무사히 막아냈다. 이런 일학년들의 마음을 진작에 알아차렸던 터라 이에이리는 쿠기사키를, 게토는 후시구로의 입을 막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소란스럽게 반항하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며 사라지자 소음이 사라진 채 고요해진 수련장에 둘만 남았다.

이타도리는 고죠가 있는 쪽으로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았다. 불편한 자리를 당장이라도 뜨고 싶은지 이타도리의 자세는 엉거주춤했다.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고죠는 수그리던 얼굴을 이타도리 쪽으로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

”야, 너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네... 네?“

”아까 보고서 못 봤어? 망할 주령이 자기가 좋아하는 거로 바뀐다고 하잖아.”

이타도리는 한쪽 손을 살며시 들며 못, 못 봤는데요... 라고 반박할 터였다. 하지만 고죠의 표정은 무시무시했고 그의 소심한 반항은 목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반면에 고죠는 모른 척하는 이타도리가 얄미워 꾹 참아내려던 성질머리를 결국 참지 못했다. 분명 고죠 선배가 둘, 이라는 말을 해놓고 모른 척하시겠다? 나는 그 부끄러운 모양새를 다 들켰는데 너만 발 빼겠다 이거지. 살짝 거리가 있었던 고죠는 벌떡 일어나 큰 보폭으로 걸어가 얌전히 무릎 꿇은 이타도리 앞에 섰다. 이타도리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자 고죠는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벽을 밀어붙이며 제 팔 안에 가두었다.

”너, 나 좋아하냐?“

”네? 아, 아뇨?...아니, 네에... 맞습니다.“

애써 눈길을 피해 다른 곳을 보던 이타도리는 항복했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이타도리 팔에 부딪혀 옆에 있던 쇼핑백이 툭 하고 쓰러져 내용물이 우수수 나왔다. 이타도리가 다녀온 지방의 특산품으로 가득 찬 것 아래에 귀엽게 생긴 초콜릿이 쏟아져나왔다. 아무래도 이 깜찍한 후배는 초콜릿을 특산품으로 아래에 쌓아두는 위장 전술을 택한 모양이었다. 이타도리는 초콜릿이 튀어나온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서둘러 숨기려고 손을 휘적거리자 그것을 지켜보지 않겠다는 듯 큰 손이 턱 하고 이타도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죄송해요, 고죠 선배. 선배는 인기 많으니까 초콜릿만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사귀어 달라고 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감히 이런 마음을 품게 돼서 미안하다고, 이타도리는 거듭 사과했다.

그가 지방에서 늦어진 것도 고죠가 없는 곳에서 자기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하기 위해서였다. 고죠 선배의 이름만 부르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고 얼굴이 뜨거워져, 따위의 귀여운 종류의 상담 말이다. 물론 이 마음을 성사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들키지 않고 이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있을까에 대한 괘씸한 내용이었지만.

”너 바보야? 내가 누구한테 고백 했는지는 알아?“

이타도리는 눈을 말똥하게 떴다. 물론 그로서는 모르겠지. 이타도리가 보고 싶은 것은 ‘고죠 선배’였으니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약을 바짝 오르게 하곤  도망가려는 유지가 얄미웠다. 고죠의 오른손이 이타도리의 양 뺨을 잡아 눌렀다. 이타도리의 얼굴만 한 커다란 손이 양쪽 볼을 꾸욱 눌러대니 반동적으로 이타도리의 입술이 붕어 입처럼 오동통해졌다. 삐죽, 하고 나온 입술의 모양은 꽤 웃겼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엔 어쩌면 탐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누구 마음대로 끝내라고 했어? 그걸 허락해주는 건 이 몸이야.“

”그, 그건 치사하잖아요. 선배...“고죠는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겉치레도 잠시였다. 고죠는 이타도리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기댔다. 어린아이 같은 따뜻한 체온이 상상에서나 맛봤던 그 체온이다. 

멋진 척, 잘난 척,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 밑의 심장이 진정시킬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이런 꼴사나운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런 얕은 생각에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를 이제는 너에게 쏟아버려도 괜찮을까. 마음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이 마음을 네게 속삭여도 괜찮을까. 고죠는  눈가 주변이 심장이 박동하듯이 요동쳤다.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으로 이타도리를 바라봤다. 놀란 것처럼 커다랗게 뜬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눈에서는 촉촉한 꿀이 흐르는 노란색 눈이 저를 마주 보고 있다. 좀 더 닿고 싶어, 이 마음을 좀 더 전해주고 싶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고죠의 떨리는 속눈썹은 상대의 솜털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속눈썹은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며 파스스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맞닿은 서로의 숨결이 얽혀 들어간다. 자신들이 내뱉는 날숨과 들숨을 교환하며 들이마시고 있었다. 타인이 내뿜는 숨이 이렇게 달콤한지 몰랐다. 둘빼고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 어떤 소음조차 들리지 않고 두 명분의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자, 자,자, 잠깐만요, 얼굴, 얼굴!“

”응?“

”그, 그렇게 가까우면  다시 반할 거 같아서….”

고죠는 둔탁한 것에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이타도리는 자신이 뱉은 말처럼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를 굴려 고죠를 마주 보았다. 태양을 향해 하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고죠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이 아이는 나를 쫓아 주었구나, 아마도 자신이 사랑을 눈치채기 훨씬 이전부터. 연한 황금빛의 홍채에서 씨앗처럼 까맣게 발하고 있는 검정색 동공은 올곧게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죠는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자기 손을 그의 손과 겹쳐 강하게 끌어 잡았다. 그의 손에 의해 단단히 묶인 이타도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턱을 당긴 채 빤히 고죠의 눈과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다. 높은 하늘을 품고 있는 푸른 눈, 그리고 그 안에 오롯이 담긴 자기 모습을 마주친다. 이제는 고죠의 눈엔 오직 유지만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아우를 수 있는 그의 눈엔 오직 한 명만 담겨있었다.  독점을 하고 있는 것이 황송한 기분이 드네….  눈을 얼마나 마주치고 있었을까, 고죠는 고압적으로 이타도리를 불렀다. 야, 라고 하니 깜짝 놀라 떨리는 호박색의 눈이 저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네?

”눈 감아.“

”왜, 왜요?“

앗,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나…. 우쭐해지고 말았어, 하고 기가 죽은 목소리로 응했다.

”지금부터 키스할 거니까.“

다급한 고죠의 입술이 거칠게 이타도리의 말랑한 입술을 덮쳤다.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한 것처럼 흉포하게 이타도리의 입술을 빨아낸 고죠는 제 혀로 마구잡이로 침범했다. 숨을 쉴 틈 조차 주지 않고 혀뿌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흡, 하고 고죠의 페이스를 따라가고 싶지만 서툴러 숨을 내뱉고 마시는 것에만 급급했다. 고죠는 생각했다. 키스라는 거 생각보다 달달한 것이 아니구나, 완전 엉망진창이고, 라며. 나도 처음, 상대도 처음인지라 어설프게 긁어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혀를 움틀 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왠지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 감상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잇새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입가를 간지럽힌다. 잠시 한 박자를 쉬듯 입술을 살짝 떼고 번들거리는 입술을 바라본다. 참을 수 없어, 깍지 낀 채 마주 잡은 손이 더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엉망진창인 키스인데도 닿으면 닿을수록 뱃속이 꾸욱 하고 저릿해졌다. 치열을 훑어내고 오목하게 들어간 치아 사이를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가 살살 원을 그려가며 돌려가며 비벼댔다. 끈적거리는 타액은 서로의 점막을 유린했다. 축축하고 습한 내부와 코에서 뿜어내는 따뜻한 숨결이 닿아 인중에 송골, 하고 땀이 맺혔다.

이타도리는 숨쉬기가 어려운지 밭은 숨만 겨우 내뱉다가 제 팔을 고죠의 목에 매달리듯 휘감았다. 고죠는 드디어 손에 넣었구나, 하는 만족감이  들었다. 목울대 안에서 긁어내리는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액을 길게 늘어뜨리며 입술을 떼 내었다. 붉어진 얼굴과 눈물이 고여 촉촉해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이타도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약간 벌려진 입술을 혀로 쓸어 올렸다. 몇 번이나 키스도, 뽀뽀도 아닌 핥아대는 행위에 이타도리는 제 중심이 뜨거워짐을 느끼고 그만둬요, 하고 고개를 뒤로 뺐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고죠에게는 오히려 신호탄에 더 가까웠다. 고죠는 물어뜯을 것처럼 이타도리의 목 부근에 고개를 처박고는 쪽쪽, 입을 맞추곤 고개를 들었다. 진득한 눈빛이었다.

”유지, 그 표정 관둬줄래, 참기 힘드니까.“

”무슨, 무슨 표정이요?“

”계속해서 키스해달라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제, 제가 언제요 하고 제 입술을 손등으로 가리는 유지에 고죠는 시원스레 웃었다. 

 

마침표로 끝맺을 줄 알았던 사랑은 쉼표로서 두 사람의 마음이 이어져간다. 고죠는 이타도리 옆에 쓰러져 있는 생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맛을 음미하며 그대로 다시 한번 이타도리의 입술에 겹쳤다. 한숨 돌리고 있던 이타도리는 부끄러운지 제 가슴팍을 약한 힘으로 꾹 누르는 통에 고죠는 그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 끌어안았다. 이제 와서 어딜 도망칠 생각이야? 처음에는 가볍게 말랑한 입술을 톡, 톡 맞추기만 하다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고죠의 혀가 성급하게 이타도리의 치아를 두드린다. 한 번의 키스로도 그의 버릇을 알아챈 이타도리는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안을 개방했다. 

농도가 깊은 갈색의 생초콜릿이 진득하게 눌어붙은 두 사람의 혀를 길게 이어갔다. 까끌거리는 두 개의 혀 사이로 뭉근하게 초콜릿이 녹아 내려간다. 초콜릿인지 타액인지 모를 끈적이는 체액은 찌걱거리는 농밀한 소리 아래에 서로의 혀 아래로 섞여 들어간다. 일련의 행동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굉장히 서툴렀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능숙하게 상대의 기분 좋은 곳을 혀로 공략할 줄은 몰라, 하지만 이렇게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서로의 생각을 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따뜻한데 모를 리 없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고죠와 이타도리는 초콜릿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질척이며 닿고 나서야 입술을 떼 냈다. 고죠는 이타도리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로 닦아내고 보란 듯이 제 혀로 핥았다. 방금까지도 키스했으면서 낯부끄러워진 이타도리의 얼굴은 제 머리카락 색과 같아질 정도로 피가 몰렸다.

”모처럼이니까 아깝잖아.“

”선배, 진짜 성격 나쁘다고요...“

“그래서 싫어?”

“... 맛은 어떤데요?”

그 질문에 고죠는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입꼬리를 말아 씨익 웃어 보였다.

“완전 달아.”

그러니까 내게 다시 한번 맛보여줘. 고죠는 다시 한번 이타도리에게 달려들었다. 이 사람 언제까지 키스만 할 셈이야? 완전히 고삐 풀린 강아지 같아. 라고 생각하는 이타도리지만 그 역시도 행복했기에 얌전히 입술을 내주었다.

 

사랑은 불가피한 뇌의 기전에 의해 발생하는 생리적인 현상이 아니였다.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했던 것도 취소, 필요 없는 감정이라는 것도 취소다. 뻔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한 이 세상을 너 없이 살아간다면 무척이나 재미 없을 거 같아. 따스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알 수 있게 된 것은 너와 맞잡은 손 덕분이겠지.

시시때때로 욱신거렸던 자신의 첫사랑니는 썩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온갖 수를 쓰더라도 사라지지 않았던 감정은 이타도리의 고갯짓 하나로 손쉽게 툭 빠져버렸다. 빈자리는 다시 자라날 영구치의 몫이었다. 너에 대한 사랑이 새롭게 돋아난다. 영원히 변치 않을 그에 대한 사랑이.


 

20xx. 02.14 는 고죠 사토루의 고백 날이 아니다.

고죠 사토루와 이타도리 유지의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 날이다.

 

 

Be my Valentine...

  

 

 

 

 

 

Bonus)

 

"그런데 말이야, 고죠.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안 된다고 해도 물을 거잖아, 너는. 뭔데.”

자신의 연애사업에 어느 정도의 지분이 있던 이에이리의 질문에 고죠는 퉁명스레 질문을 응했다. 어찌 되었든 친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 순순히 인정한 고죠는 말해보라는 식으로 턱을 까딱였다.

“응~별 건 아니지만, 너 키스도 못 하면서 왜 그렇게 이타도리랑 키스하는 거에 집착한 거야?”

“듣고 웃지나 마.”

“응 약속.”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죠는 당황한 듯 제 선글라스를 약간 내렸다.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제 눈을 마주쳐 오는 고죠의 눈에 이에이리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또 둘만의 이상한 대화인가, 하고 집중하지 않고 있던 게토도 이유가 꽤 궁금했는지 보던 책을 엎어 두고 이야기가 나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통 동화책에서 말이야. 서로의 마음을 키스로 확인하고 나서는.. 항상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잖아?”

이에이리와 게토의 동시에 눈이 가늘어졌다. 헤에, 설마. 여기서.

“그러니까 나도 유지랑... 오래 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으니까.”

주문이랑 비슷한 거야, 그거. 하고 말을 덧붙인 고죠의 얼굴에서 멋쩍음이 묻어났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재수 없는 자기 친구의 입에서 메르헨적인 발상이 나오자 잠시 정적이었다가 폭발할 것 같은 반응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이런 천연 도련님 속성으로 공략한다는 거야?”

“야! 내가 도련님이라 하지 말랬지.”

“하지만 사토루, 이건 나도 좀... 동의하는걸.”

믿고 있던 게토마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안 놀린다며! 말이 다르잖아!”

고죠는 부끄러웠는지 당장이라도 손을 튕겨 여기를 부술 생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협박에는 도가 튼 둘은 놀림을 멈출 생각하지 않고 계속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건수를 놓칠 리 없는 친구들이었다.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람. 고죠는 30초 전 자신의 판단 에러를 원망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그래, 도련님 말고 왕자님이라고 불러주자, 우리.”

고죠는 진심으로 소리를 치며 때리기 위해 몸을 던졌다. 이에이리는 꺄아, 무서워하며 도망치려는 찰나에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교실 밖에서 들려왔다.

“고죠 선배 어디 있어요?”

“어, 어어어, 나, 여기 있어 유지!”

“다녀오세요~ 오래오래 이타도리와 행복해질 고죠 사토루씨!”

“너희들이 말 안 해도 잔뜩 행복해질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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