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커미션 샘플 1 : 판도라의 상자

* 23년 4월 경 작업물. 회지로 출력했습니다. 신청자의 요청에 의거, 캐릭터 명은 가립니다.

* 최종 공백포함 18,768자 / 1차 수정을 거친 최종고

* 전체는 아니고, 일부분만 올립니다.


(전략)

출근 후 사무실에 앉은 지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누군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진달래꽃 같은 눈동자를 가진 비서 베로니아였다. 그의 어깨 너머로 따라 들어온 사람은 B다. A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 힘찬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제 예측대로 P사의 동향이 감지되기 무섭게 브륄레르가 B를 A의 호위로 돌린 거다. 회사 대표의 직속 호위를 바꾸는 것이기에 내부망이 해킹당할 일을 염두하고서 비서를 보냈으리라.

지구가 멸망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그 괴물 브륄레르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무표정의 비서는 형식적으로 손에 들린 서류를 읊어주었고, A는 감정과 욕구가 희박해 오히려 남의 메신저가 되곤 하는 눈길에서 또 다른 메시지를 읽어낸다. 부러 떨구어준 콩고물이라는 암시는 그럼에도 굴욕보다는 거래에 가깝다. 비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작자의 지독하게 효율적인 사고방식은 결과만 낼 수 있다면 그사이에 약삭빠르게 취하는 이득쯤은 당연히 눈을 감아준다.

낭랑한 목소리를 흘려듣고 조금, 베로니아가 말을 마무리했다.

“그럼, B 씨는 P사 건이 정리될 때까지 A 씨의 호위 잘 부탁드립니다.”

“예.”

“부디 살펴 가시길, 베로니아 씨.”

고개를 까닥인 것만으로 A의 인사를 답례한 베로니아가 따박이는 단화 소리를 남기고 멀어지고서야, 내도록 그의 뒤에서 칼같이 시립 해있던 B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무척이나 희귀한 장면이기에 A는 눈을 가늘게 접어 뜨며 웃으면서도 샅샅하게 B를 훑는다. 이 건물에 들어서면 ‘브륄레르 대표의 개’인 그가 ‘A의 B’로 흘러오는, 공사의 혼동은 특별히 감미롭다. 어쩌면 그 자식에게서 마운트를 뺏었다고 신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A는 순순히 인정했다.

암암리에 불리우기를, ‘미친개 B’. 저자가 정녕 강화 인간이 아니냐는 경악을 불러일으켰던 소문의 주인공이다. 지금도 이쪽 바닥에 종사하는 사람 아무나를 붙잡고 작년 브륄레르 대표 총격 테러 아느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그걸 끝까지 다치지도 않고 막아낸 경호팀의 괴물 말이지?”라는 요지의 대답이 돌아올 거다.

다시 떠올리려면 속이 쓰리긴 했다. 그야 그 당시엔 제 것의 목숨이 빌어먹을 대표놈의 방패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잔뜩 짜증이 나 있었고, 그에 비롯한 초조와 스트레스가 도를 넘다 보니 강제로 유급휴가까지 받았더랬다. 심지어는 이게 직업이고 일이니 우는 소리 말라고 형에게 쓴소리까지 들었다! 몇 년을 통틀어 그렇게 끔찍한 이 주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기분이 풀린 것은 현장의 CCTV를 제가 파기하라고(애초에 남을 시켰어도 다시 뺏어올 생각이었다) 허가가 떨어졌을 때였다. B가 다치지도 않았고 상당히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고는 들었으니, 이왕 파기할 거라면 해상도를 높여 소장하려고 작업을 돌렸다.

그렇게 선명해진 화면을 처음 틀었을 때 느꼈던 경악과 감탄이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대체 어떻게 저 거리의 저격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막아내며 증원된 병사마저 다 때려눕히냐는 말이다.

아니,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B는, 제 형은, 제가 떠민 지옥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다시금 이 땅 위로 기어 올라왔을 테다. 제가 B를 죽이는 데에 실패했으므로, 세상 현존하는 그 무엇도 B를 죽이기는 어려울 거다. 버린 이름의 과거에서조차 저는 결단코 무르지 않았고 철두철미했으므로 ‘데스티노’는 이를 확신한다.

“A, 듣고 있어?”

“어어?”

그 좋은 머리로 똑똑히 새겨 기억해둔 CCTV 영상 관람을 끝마칠 즈음에야 A는 제 눈앞에 선, 심기가 불편한 경호원을 눈치챘다. 제 어벙한 대답에 샐쭉하니 뜬 눈이 한숨과 걱정의 색을 담는다. 제게 배신의 칼을 맞고 쓰러졌던 기억이 선연할진대, 형은 여전히 저를 그날의 데스티노처럼 어여삐 여겨준다. 게다가 이런 헐렁한 모습은 오로지 당신 앞에서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하다. A는 기꺼이 당신의 순한 양의 표정을 입고 몸가짐을 고쳤다. 동생의 집중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B는 아까의 말을 복창하려고 입을 열었고,

“다시 설명할―, 젠장!”

“윽!”

이제는 꽤 많이 길어 질끈 묶어둔 흑발이 허공을 뜨고, 루비를 고아 굳힌 듯한 눈동자가 지근거리에 다가와 A를 덮쳐 눌렀다. 동시에 유리창이 산산이 조각나 카펫 위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가공할만한 위기 감지 능력이다. 저격 첫발이 들어오는 것보다 B의 반응이 소수점 한 자리는 빠르다는 사실을 A는 실감한다. 그 영상과 똑같다. 정수리 위에서 욕설을 씹어대는 형의 목소리가 난다. A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B의 강함은 익히 충분하고, 그러니 두려울 리가 없지 않은가.

저를 몸으로 가린 채 슬금슬금 엄폐물 삼은 책상 뒤로 움직이면서 B는 경호팀 멤버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넣는다. 형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듯, 이제는 저도 일할 시간이다. A는 B의 목소리를 통해 경호팀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P사의 잔해를 어떻게 마저 다져줄까를 구상했다. 제가 이 회사, 브륄레르에게 어필한 가치가 그것이다. 머리를 굴려 무언가를 파멸에 이끄는 것.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실패한 것은 오로지 ‘B’ 뿐이다. 그조차도 ‘A’로서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므로, 지금껏 이 이름 아래 제가 묻어버리고자 한 것 중 땅 위를 다시 기어다니는 것은 없다. 빛은 모든 그림자를 몰아내는 법이니.

 

(중략)

처음 세 시간은 A의 예측대로 수월하게 진행됐다. 여기는 길이 복잡한 시가지이고, 따돌릴 엄폐물이나 지형이 차고 넘치며, 정 아니면 행인을 미끼로 삼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탄창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총알을 아끼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도심을 지나 트인 곳으로 나오니 새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저희를 목표로 삼아 걸어오는 구울의 수는 다른 사람을 쫓는 놈보다 월등히 많았던 거다. 시내에서야 인간이면 우선 붙잡고 보는 줄로 알았지, 그냥 저희를 쫓다가 인간을 만나면 그걸 먼저 사냥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앞길을 가로질러 온 구울 세 마리를 B가 상대하는 사이, A는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조립해 가설을 세운다. 따로 방책이 나올까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그저 계속 머리를 굴리고 그에 맞추어 도박까지도 감행해온 것이 그의 삶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리되었을 뿐이다.

지금껏 그를 살아남게 해준 두뇌는 곧 아침에 들었던 속보와 상식을 뛰어넘은 이 사태에 저희를 노리는 듯한 상황을 모두 엮어내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은 답을 도출해냈다.

“설마 저주야? 그것도 나한테?”

“그게 정답 아닐까.”

그 사이 구울의 다리를 완전하게 망가뜨리고 돌아온 B가 처음보다 확연하게 지친 표정을 하고서 곁에 섰다. 특수제작된 방호복은 이제 꽤 너덜너덜하다. 자신이 낸 답이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진 저와 달리, B는 이 괴이한 사태에도 침착해 보였다. 어쩌면 B의 옛 시절 중 이런 사교 집단과 연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윗선을 설득해서 오늘 하루만 더 호위를 맡게 해달라고 했을지도. 그렇다면 B는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결론은 도출했지만, 그에 수반해야 할 해답이 없는 빈손으로 A는 제 형을 쳐다본다. B는 곧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저를 향했음을 알아차리고, 피로에 젖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죽은 자를 일으킨다는 미친놈들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야. 수상쩍은 소문을 달고 다니던 놈들도 있었고. 다 거짓인가 했더니, 아무래도 그중에 진짜는 있던 모양이지.”

그렇다면 사태를 해결할 열쇠는 아무도 모른다는 건가. A는 속으로 길게 탄식하고서 한참 전에 지나가는 길에 마주쳤던 편의점에서 털어온 생수 한 병을 B에게 건넸다. 목울대를 꿀꺽꿀꺽 넘어가는 모양새를 보면 아무래도 목이 꽤 탔던 모양이다.

체온에 녹아 일그러진 초콜릿 한 알까지 야무지게 우물거린 B는 조금 전으로 끝난 빈 탄창을 갈았다. 홀더에 손을 넣었을 때, 짧게 혀를 찬 것으로 보아 그것이 마지막 탄창일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고, B의 소모는 예상보다 빠르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A의 이러한 감은 언제가 되었듯, 잘 들어맞는 편이다. B가 그러하듯이.

 

회사에서 출발한 지 어언 7시간을 넘었고, 이제 그들의 집까지 앞으로 한고비 남았다. 해가 떨어지고 있어 그늘에 잠긴 데가 훨씬 많지만, 아침에 차를 타고 나설 때 늘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니 틀림에 없다. 겨우 3초쯤 볼까 말까 한 점은 미루더라도. 잠시간 왜 우리가 자가용을 이동 수단에 고려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던져둘 선택지다. 사실은 지나친 선택지를 복기할 만한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눈에 익은 풍경에 낙관한 것도 찰나, 역시 그런 밝은 단어는 저희 형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인지, 대뜸 들이닥친 녹록하지 못한 현실에 A가 눈을 굴리며 머릿수를 세어보고선 낙담한 목소리로 숨을 뱉었다.

“여기서 스물세 마리가 튀어나온다고. 이게 무슨….”

“A, 내 등 뒤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뭐? 형, 설마?”

“강행 돌파할 때야, 안 그래? 내 감은 그렇다고 하는데.”

서서히 조여오는 포위망을 앞에 두고서, B가 히죽 웃었다. 등골이 오싹한 미소였다. 반사적으로 이것저것 가능성을 재어보던 A는 곧 확률 놀음을 그만두고 B의 등에 바싹 붙었다. 작게 소리내어 웃었는지, 등을 통해서 진동이 느껴졌다. 한때, 이 등에 배신의 칼을 꽂았던 인간이 이제는 신뢰와 애정을 담아 설 수 있다는 건 역시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동시에 그 사실이 A가 확률 놀음을 던지고 올인 배팅에 나선 근거이기도 했다. B는 오로지 그 몸뚱어리 하나로 온갖 수라장을 살아남고 여기에 선, 이른바 역전의 용사다. 생과 사를 가르는 현장에서 몇 번이고 담금질해, 예리하게 갈고 닦은 생존 본능은 결코 허세가 아닐 테지. 다만, 이 선택에 B 본인의 안위가 고려되지 않은 게 아닐까, 오직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그러니 부득불 물어봐야 했다. A는 꽤 비장하게 입을 열었고,

“형, 설마 나만 살리려는 건―,”

“그런 거 아니야. 뭐에 걸면 지금은 믿을래.”

“…냉장고에 있는 푸딩?”

“이거 값싼 믿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그럼, 셋 세고 뛴다.”

B에게 바로 말을 잘렸다. 오히려 되물음을 당한 A는 약간 얼이 빠져서, 지금 집에 들어가서 단 것을 먹고 싶다는 일차원적인 욕구를 뱉었다. 이건 아예 생각지 못한 답이었는지 B가 부슬부슬 웃더니 이내 단단하게 벼려진 목소리로 카운트를 센다. A 역시 그 구령에 이끌려 온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셋, 둘, 하나.

발과 다리에 의식을 집중하며 땅을 박찬다. 앞서 뛰어나간 검은 등은 이미 울룩불룩하게 굳은, 소총이었던 것을 휘두르며 길을 튼다. 문드러진 손과 허옇게 뻣뻣한 얼굴을 치워가며, 집은 점점 가까워졌다.

C 가의 자택은 웬만한 벙커보다 낫다는 말은 비유법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요새를 겸할 수 있기 때문에, 저희가 발 뻗고 누일 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구울의 침입은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다. 자택을 둘러싼 담벼락 주변에는 이미 까맣게 탄 구울의 시체(이미 시체인데 또 죽었다고 표현하기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A는 생각한다)가 꽤 있던 거다. 어쨌든 저것들이 죽기도 한다는 걸 알았고, 어쩌면 모 영화처럼 태우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사이, 대문은 앞으로 이십오 미터쯤을 남겨두었다. A는 잠시 새어나간 생각들을 갈무리하고서 품에서 리모컨을 꺼내고 시계로 초를 세어본다. 초 당 달려가는 거리를 가늠하고, 기존에 재었던 계량을 꺼내면 시뮬레이트의 준비가 끝난다. 대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통과할 너비로 열리는 데에 약 2초. 구울의 수가 많아 조금씩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으니, 그 속도를 감안하면 1.5m에 문을 열고서 수동개폐로 전환,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으면 된다. 앞으로 10초 이내에 벌어질 일이니 B에게도 미리 언질을 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A가 입을 열었고, 말이 나오기보다는 비명이 앞섰다.

지금까지의 녀석들과는 다르게, 어떤 다섯이 대문 앞을 가로막아 섰다. 본 기억이 있는 옷이었다. 날이 더워 부패가 많이 진행된 탓에 얼굴 윤곽으로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특수복과 거기에 붙어있던 명패 따위는 확실히 기억 속에 있었다. 습격이 있던 첫날, B와 함께 묻었던 그 오인조다.

명백하게 이쪽을 향한 고개와 손에 들린, B도 애용하곤 하는 나이프 그리고 무기를 쥐고 공격대기에 들어간 모습은 여느 놈들과는 다르다. 저것은 훈련받은 몸뚱어리로 만든 구울이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묻었던 팔십여 구가 곧 모조리 일어나 이쪽을 향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나중 문제다. 지금은 당장 눈앞의 다섯 놈이 급했다.

평소의 B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지금 그는 충분히 지쳤다. 오히려 지금까지 저를 지켜내며 강행군을 해온 것이 더 놀라운 일인데, 골인 직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오만가지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폭력적으로 머릿속을 휘돌았고, 그 각각의 결론이 거품 터져 나오듯이 솟구치기도 전에 다섯 마리의 구울이 움직였다.

저절로 시야가 따라붙고, 칼끝의 반짝임이 길게 늘어지는 착각이 든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이. 세 개의 나이프가 소총의 움직임을 틀어막으며 쇳소리를 낸다. 네 번째의 칼날을, 소총을 포기한 B가 아슬아슬하게 꺼내든 나이프로 막아선다. 날붙이끼리 맞닿는 소리. 소총은 이제 잔디밭에 떨어져 무딘 소리를 내고, 마지막 다섯 번째 칼날이 허공을 쌔액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좀먹는다. 자신의 비명이 멀었다. 물속에서 듣듯 모든 소리가 흐릿한데도, 쇠붙이에 옷감과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만 유독 선명했다. 곧 시간은 본래의 흐름을 되찾고, 시야도 명확한 초점을 잡았다.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채로, A는 숨을 껄떡인다. 약 일곱 시간 동안, 구울에게 감염되어 살아있는 시체로 변모하던 인간은 꽤 보았다. 그중 하나가 B가 된다면, 이것이 정녕 최후라면 자신은 그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다. ‘B’의 모든 것은 A의 것이다. 죽음조차 그러하다. 뇌수까지 쟁쟁히 끓여내는 것은 집착이며 광기. A는 찔린 팔을 가린 채 연신 괜찮다고 외쳐대는 형을 무시하고 B의 왼편으로 돌아 나왔다.

그리고 목도한다. 예상한 충격이 아닌, 오늘 하루를 통틀어서 가장 기이한 것을.

“이, 이게 무슨….”

“그러니까 괜찮다고 한 건데.”

B의 동강이 난 왼팔이 허공에 떠 있다. 피 대신 스며 나온 것은 짙은 어둠이다. 해가 떨어지며 차오른 밤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차라리 블랙홀의 중심이나 인간의 몸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해구 안쪽의 검정은 너울너울 갈래를 그리며 밖을 유영하고 있다. 흐늘거리는 인상과 달리, 그것은 돌연 유려하게 뻗어 나와 제 어깨 위를 지나쳐 무언가를 찔렀다. 멱따는 소리. 뒤를 돌아보니 지근거리에 아까의 구울이 꿰뚫려 매달렸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 다섯 구울은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B의 어둠에 걸려있다.

저의 인지는 그 형태를 촉수라고 명명한다. 암만 그래도 촉수처럼 뻗어 나온 팔다리라는 건…. 쓰레기통에 처넣었을 소문의 한 자락이 기억 속에서 불려 나오고, 곧이어 반박된다. 잠시나마 촉수로 인식했으나, 이것은 인간이 명명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저 그것은 그 자신으로 거기에 존재한다.

너르게 퍼져나온 그것은 주변을 좀먹으며 구울 따위는 우습게 부스러뜨린다. 오히려 자신을 과시하는 듯도 하다. 여러 갈래로 흐느적거리면서 게걸스럽게 수십의 구울을 집어삼키는 괴이한 어둠의 중심에 선, 요요하게 붉은 눈. B는 이제 더 이상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이나 피와 흙과 오물로 더러워진 옷가지만 아니었으면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숨만 헐떡이는 A에게 그 기이한 무언가가 웃는다.

“마지막에 실수했네. 일단 집에 들어가지 않을래?”

여전히 B의 모습이며 B의 목소리를 내는 그것의 물음에, A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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