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커미션 샘플 2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 23년 11월에 마감된 작업물

* 웹툰 TAL 신무영과의 드림컾 장편 커미션(미션:커미션신청자를 설득하라)

* 최종 공백포함 64,000여자 / 커미션 신청자와의 합의를 통해 n개월 간 진행하였으므로 자잘한 윤문횟수는 세지 않았습니다. 초고 완성 후 2차 수정을 거친 최종고.

* 연속되지 않는 일부분만을 올립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 그러니까 예린은 그 신무영이 정말로 저를 자택에 살게 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끽해야 그가 가지고 있을 열 개가 넘는 별장 중 하나에 가택연금을 할 줄 알았지. 트립 이전의, 작품 밖의 세계에서 주워섬긴 설정들만 생각해보더라도 충분히 그랬다. 예린은 제 폭탄 발언 이후에 무영이 미쳤느냐는 뉘앙스로 몇 마디를 뱉을 것을 예상했고(고해하건대, 정면에서 타박 듣고 싶은 사심도 있었다) 그 후에 다른 협상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웬걸. 신무영은 빼입은 정장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하나린에게 눈짓했다. 어쩐지 그게 ‘얠 좀 치워놔’라는 신호 같았다.

예상은 맞았던 모양이다. 낯선 이 앞에서 단아하고 콧대 높게 행동하던 하나린은(비록 예린이 일방적으로 그를 잘 알고 있어서 소용은 없지만, 멋진 여성은 언제라도 멋지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턱짓으로 저를 부리기가 무섭게 그 고고하고 서늘하기까지 하던 분위기를 던지고서 들입다 무영의 멱살을 쥐더니 짤짤 흔들었다.

“예의는 어디에 팔아먹었어, 응?”

“그, 미안…. 놔줘. 나 다음 스케줄 가야 해. 마루 녀석 요즘 잔소리가 늘어서….”

“어휴, 알았다 알았어. 어차피 우리 집단 벌어먹여 살리는 게 너 인걸. 이 누님이 너른 마음으로 받아줘야지.”

그냥 맥아리 없이 멱살을 잡혀주고 흔들리는 184cm를 하나린은 꽤 금방 풀어주었다. 등짝까지 한 번 퍽 소리가 나게 때리니 약간 휘청한다. 그 모양새를 예린은 꽤 감동한 채로 쳐다봤다. 하긴, 여기 와서 확인한 연도가 2015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휴재 기간의 빈 시간이고, 1부의 끝에서 3년이 흘러있는 지금, 신무영은 제 울타리에 들인 이들에게 전처럼 박하진 못할 테지.

무영은 예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 또 다른 별장에서 걸어 나갔고(어쩌면 쉐도우가 돌아오기 이전일지도 몰랐다), 예린은 그 점에 대해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신무영이 신무영답게 행동한 거 아닌가. 오히려 그는 난데없이 하나린이 제 턱을 끌어당겨 시선을 맞추는 바람에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흐음―.”

여러 의미에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놀라기도 놀랐거니와, 청자색의 붓꽃 같은 눈동자가 저를 꿰어버리는 듯도 하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 어쩐지 그 말도 스쳐 지나갔다. 하나린, 할미탈, 과거와 미래의 씨실과 날실을 대어 읽는 자. 과거는 베틀에서 잘려 나간 천이었다고 아까 전에 공언했으니, 지금 그는 저의 미래를 더듬어 읽어보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읽게 두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읽어줬으면 한다. 제가 던진 파문이 정말로 신무영이 이제 됐다며 눈물을 흘린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를, 정말로 제가 그 미래를 바꿀 힘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좋으니까 그걸 알고 싶었다.

두근거리던 심장도 가라앉고 이제는 오히려 판결을 앞둔 사람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예린은 제 앞에 떨어질 신탁을 기다린다.

“정말 재밌는 아이네. 너, 예린이라고 했지.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예?”

긴장했던 것과 달리 제게 주어진 말은 지나치게 평이하고 어떤 정보 값도 없어서 오히려 막막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어떤 가이드 라인도 없이 일단 해보라고? 공략집도 뭣도 없는데, 겁도 없이 머리부터 박아보자고? 저는 여기서까지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실패해서도 안 될 일이었고! 그것까지 안 것인가, 하나린은 가볍게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얘, 네가 정녕 우리를 알고 또 나를 안다면 이 나를 믿어야지. 내가 그리 쉬이 점을 쳐주는 사람이길 하니,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 하나를 위해서 귀한 조언까지 내려주는 사람이길 하니.”

“…….”

예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그렇다. 아주 오래도록 살아온 그는 운명의 자락을 함부로 들추어 올리지 않는다. 하나린은 얌전해진 햇병아리를 가볍게 도닥이고선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를 안다고 하였지. 그렇다면 우리를 휩쓸고 간 상처도 전후를 알 것이다.”

조심스럽게 끄덕인 정수리를 보면서 그는 마저 말을 자아냈다. 꽤 예스러운 말투다. 먼 데를 보는 시선은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처럼 고목古木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고해이기도 할 것이다. 예린의, 인간의 삶은 짧고 그리하여 한 자락의 말이 여기 머무는 시간은 찰나일 것이기에 꺼낼 수 있는 어느 문장.

“우리는 너무 오래 산다, 아해야. 지독하게 오래 살아버리지. 그러니 굳이 마음 다칠 짓을 하지 않게 된다. 외로운 자들이 모여버리면 때때로 과하게 응집될 수도 있는 법이고. 그러니 내가 헤아린 미래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어 뵀다면, 너를 여기 이렇게 살려두었겠니.”

하나린은 이제 더는 뭐든 읽지 않겠다는 손짓과 태도를 보이며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로 연락했다. 예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여기에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흠결은 아니라는 보증수표 하나만 들고서 우뚝 섰다. 하나린의 연락을 받고 온 호가 정면 벽에서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다시 한번 길게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 쭉.

 (중략)

한편 신무영은 이 거수자가 한 달 안에 꼬리를 드러내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할미탈이 예린의 과거를 읽어내지 못했지만 그게 그것의 결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수상쩍지. 진의 경우도 그의 점괘가 제대로 닿지 않았던 케이스 아닌가. 그때는 그냥 흔한 사기꾼 따위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진실을 안 지금에서 무영은 흐리게 미소 지었다. 지금의 제가 할미탈의 실력을 신뢰하는 데에는 다 연유가 있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린 역시 그날 예린에 대해 읽어내지 못했음에도 저에게 납득하라거나 따위의 다른 충고를 던지지는 않았을 거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 태도가 종종 고까워서 그렇지, 그는 충분히 오래 살아 타인에게 무심한 구석이 있는 최연장자다. 네게 더 이상 맹목은 남아있지 않으니 싹튼 의심은 알아서 확인해서 처리하라는 뜻은 전달되고도 남았다.

이야기가 샜지만, 어쨌거나 하나린의 그물망을 벗어난 존재라는 점 때문에 무영은 예린에게 반드시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각을 못 하고 있더라도 필히 어떤 폭탄을 품고 있을 거라고. 그는 최예린이 인간이 틀림없다는 확언조차 의심한다. 그 전제도 흔들릴지 또 누가 아나.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전되며 불온한 일이 생기고 있는 마당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굳이 호와 이그나지오에게 그걸 감시하고 필요하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지 않았나.

하루와 그게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집 구조 일부도 틀어두었다. 투영이란 참 편한 능력이라는 걸 학창 시절 이후에 또 절감할 줄은 몰랐다. 주로 집에 남은 호가 하긴 했지만, 자택 근무가 있거나 하면 제가 교대했다. 하루는 집안에 새로 들어온 그걸 자꾸 보고 싶어 했지만, 안전이 걸린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 원하는 물건을 더 쥐여주고 가능한 시간을 더 쪼개 함께 보내는 걸로 타협을 보았다.

어차피 한 달이면 될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렇기에 8백만을 바로 선불로 때려 박지 않았나. 겨우 8백에 안전 문제를 확실히 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다. 사장이네 회장이네 해도 기본적으로 거래와 교역과 사업은 리스크와 투자를 어떻게 저울질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점에서 무영은 꽤 괜찮은 도박꾼이었다. 지금의 회사도 어릴 적부터 뒤에서 손을 대 지금까지 키워내지 않았던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신무영은 자신의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이 석 달째다. 만으로 삼 개월이었고 곧 네 번째 입금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처음으로 사업가로서의 자신감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 녀석은 계약서를 처음 내밀었을 때 SNS 금지조약에 진저리를 냈어도(제 딴엔 표정 관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저였으니) 그 약속을 꾸준히 잘 지켰다. 심지어 인터넷 사용 범위에 관한 질문이 마루를 통해서 넘어왔기도 했고, 공개된 곳에 자신에 대해서 남기는 외는 전부 허용된다고 했음에도 접속기록 일람을 부러 보내기도 했다.

호와 이그나지오의 말로는 마당에서 산책하는 것도 건강 문제 때문이지 어디 바깥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접촉을 시도하는 기색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무영은 제 쌍둥이의 말을 당연히 믿는다. 그런 시도를 했었다면 그 녀석은 결단코 숨이 붙어있지 못할 테니까. 호는 물론이요 이그나지오가 제 안위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갈 존재를 살려놓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그리고 그 둘을 제외하면 그 녀석과 가장 많이 면을 맞댄 건 마루다. 요청과 질문, 그 외 계약 이행에 관한 모든 걸 위임받았으니 말이다. 제가 믿지도 않는 녀석을 직접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굳이 마루를 보냈던 것에는 청각으로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얘는 마음이 물러서 그렇지 길바닥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남은 깡과 뻔뻔함이 있는 녀석이다. 예린에 대한 스파이 질을 맡겼을 때도 그냥 한숨만 푹 쉬고선 알겠다고 했더랬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최소한 제가 듣기에는요. 그리고서 들은 답이 저거다. 뭐, 직후에 넌 네 능력을 좀 더 믿어야 한다고 타박하긴 했는데.

딸깍딸깍. 의미 없이 펜을 달각거리고 있자니 갑자기 시야에 뭔가 쓱 들어온다. 이전에 예린과 작성했던 계약서 원본과 그 사본이다. 눈만 슬쩍 굴려서 보니 옆에 제1비서인 마루가 능청을 부리고 있다.

“뭐야.”

“곧 달라고 하실 것 같아서요.”

“…너 많이 컸다, 정말?”

“어련하겠어요. 형님이 스파르타식으로 굴리셨는데.”

얘가 갈수록 내 머리 꼭대기 위를 앉으려고 하네. 쥐어박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무영은 그냥 손이나 휘적였다. 실제로 지금 비서진 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일 잘하는 녀석이 얘다. 후견인이던 김에 아예 호적에까지 들였는데 그걸로 한때 밖에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걸 마루는 실력으로 잠재웠고. 얘가 일하는 걸 보니까 불평불만이 쑥 들어갔었지. 지금은 삼류 일간지에서나 물고 늘어질 뿐이고 그마저도 그리 멀쩡하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 정리했다.

일부 사원들은 마루더러 그 신 회장님께 대놓고 직언을 날리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고 추키기도 했는데, 본인은 정작 울상이었다. 그거 그냥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욕 아니느냐며. 이상한 데에서 소심하고 엉뚱한 데에선 겁이 없는 녀석. 무영은 제가 그 점을 높이 사고 있다는 걸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거나 마루가 틀리진 않았다. 실제로도 대략 삼 분 후면 이 서류를 달라고 했을 테니. 그는 몽블랑 149를 꺼내며 말했다.

“그래,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 보다.”

“헐. 어디 아파요?”

“…굳이 매를 번다, 너?”

“악! 악! 쉐도우로 이러는 거 반칙!”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되돌아온 말에 무영은 쉐도우에게 턱짓했고, 제 순한 용마는 마루를 집어 들어다가 허공에서 탈탈 털어냈다. 나름의 응징을 하는 사이 무영은 계약서의 일부 문구를 고쳐 쓴다. SNS 금지 조항 위로 몽블랑 미드나잇블루의 검푸르게 짙은 가로줄이 그이고, 그 위로 기존의 비밀 유지 조약을 지키는 선상에서 자유로운 인터넷 활동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쓰였다. 사본에도 같은 작업을 반복한 후에는 각각에 제 도장을 찍었다. 그는 이제 바닥에 엎어져 있는 마루를 발로 툭툭 차며 물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내 다음 스케줄.”

“―삼십 분 후에 △△건설하고 수원 쪽 주거단지 착공 관련 회의 있습니다.”

“그럼 나 십오 분만 자리 비운다. 사람 오면 적당히 돌려보내.”

“엥, 예린 씨한테 직접 주시려고요?”

“계약수정이잖아. 계약 당사자끼리 처리해야지 그럼 뭐 어쩌게.”

“―형님 성질머리 진짜 더러운데 이상한 데에서 상식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취소, 취소! 얼른 다녀오세요!”

알고 있는 일정이나마 다시 확인 후에 마루를 한 번 더 을러대고서 무영은 공간을 건넜다.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으니 이후 착공 미팅에는 호의 도움 없이도 갈 수 있을 듯했다.

건너간 곳은 자택 마당이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는 예린이 호를 끼고서 산책하는 걸 알아서다. 나무 그늘에서 제가 튀어나오자 호가 빵끗 웃으며 오도도 달려온다. 저와 똑 닮은 얼굴이 저러는 꼴도 오래 보다 보니 이젠 감흥이 없다.

“랑아!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고.”

“볼 일이 생겨서.”

그보다 뒤늦게 허우적대며, 조금은 의아한 얼굴을 한 예린이 잰걸음으로 왔다. 무영은 제 쌍둥이에게 눈짓했고, 호는 눈치 빠르게 A4 크기의 클립보드를 구현해다 넘겨줬다. 섀이드는 그의 발치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린이 충분히 가까워지고서야 무영은 그에게 계약서 원본과 사본을 넘기며 운을 뗐다.

“계약서를 좀 수정할까 한다. 하는 꼴을 보니 정말 구린 구석도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지. 사본도 가져가고.”

“SNS 해도 돼요? 진짜로? 와!”

“어. 랑아, 그래도 돼? 나 거기까진 확인 못 할 텐데.”

“뭔가 하려면 벌써 했겠지. 지금 저거 꼴을 봐라. 저건 그냥 SNS 중독자잖냐. 그리고 우리 헬스장, 거기도 그냥 열어줘.”

SNS 금제가 풀렸다고 신이 나서 펄펄 뛰는 예린을 두고서 호가 눈초리를 가느스름하게 떴다가, 곧 묘한 표정을 하고서 무영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엔 이그나지오였다. 무영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그의 다른 쌍둥이를 마주한다.

“제대로 잘 생각한 게 맞지, 신무영?”

“어. 너랑 호랑 마루. 세 명에게서 검증받았잖아.”

“우릴 너무 믿는 거 아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믿어야지. 너흴 안 믿으면 누굴 믿어, 그럼.”

그 말에 이그나지오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비웃음인지 어쩔 수 없다는 건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다.

“하여간 신무영이 너, 진짜 물러. 여하튼 꼬투리 보인다 싶으면 바로 쓱싹할 거야. 네가 정 붙여도 소용없어.”

“원래 너희한테 전부 맡겼잖아, 처음부터. 그럼 마저 부탁할게.”

이그나지오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물러났다. 되돌아온 호가 애매하게 웃다가 맡겨달라는 듯이 랑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계약서를 들고 펄쩍펄쩍 웃고 뛰는 예린에게 몸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 저런 식으로 즐거워하는군. 심심한 감상과 함께 무영은 회사로 다시금 공간을 도약한다. 원본 계약서는 퇴근 후에 회수하면 될 거였다.

회장실에선 마루가 이미 회의에 갈 준비를 마쳐 두었다. 정리된 자료를 집어 든 무영은 머릿속 기어를 다시금 바꾼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 어디에도 허점을 잡힐 수는 없었고, 실패는 아주 많은 이들의 죽음을 뜻할 것이다. 어깨가 무겁다. 새삼스럽게도. 숨이 갑갑해져서 그는 잠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마루가 제 쪽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별말은 없었다.

(중략)

방 안은 간접조명 하나만 켜진 채 어둑어둑하다. 그 조명조차 실낱같이 희미해, 따스한 주홍은 어둠에 제 몸을 거의 다 내어주었다. 창을 가려둔 암막 커튼조차 강박적으로 벽면에 달라붙게 해, 밖에서 들어오는 빛줄기는 한 조각도 들어오지 못한다. 사물의 윤곽만 음영 속에 간신히 떠오른 그곳에서 무영은 가만히 앉아 한구석을 응시한다. 

신경 쓸 게 많아서인지 기어코 왼팔이 파업했다. 그 덕에 새하에게 닥터 스톱을 먹고서 일정을 줄줄이 취소당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부 계열사 일들 뿐이고 제가 반드시 참여해야 할 굵직한 대외 건은 없었다. 구두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은 마루를 대리인으로 보냈고, 메일이나 전화로 변경된 일정에 대한 연락 또한 마쳤다. 상대가 이해해줬다곤 하지만, 약속을 깼다는 그 감각이 관자놀이를 여전히 꾹꾹 누른다. 장사는 결국 신뢰 문제인데 말이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데, 그게 쉽나.’

심인성으로 고장 나는 팔이니만큼 선비탈 녀석도 자기가 해주는 조치는 어디까지나 증상 완화나 회복을 돕는 정도에 그치는 거라며 어렵긴 해도 가능한 선에서 맘을 편히 먹으라고는 했지만, 그게 맘처럼 되는 거였으면 제가 지금 이 꼬라지일 리가 없다. 현대의학으로도 어떻게 수습이 안 됐던 게 그나마 선비탈 놈이 있어서 어찌저찌 손을 쓸 수 있어 망정이지. 예전 같았으면 시간이 해결해주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더랬다. 정신적인 문제란 늘 골치가 아프다.

그러다 문득, 그는 반년도 전의 어떤 장면을 불쑥 떠올렸다.

“저한테 상담 받아주세요.”

해주겠다도 아니고 부탁이라던 그 말. 차차웅의 방식으로도, 인간의 방식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특이점의 존재를 스스로 해명하라 했더니 돌아온 엉뚱한 말이 있었다. 당신이 무거운 짐을 짊어져 사소한 것에 행복해하고 안식을 찾는 법을 잃어버렸을 때, 당신이 내게 그러하였듯 이번엔 자신이 그렇게 해주고 싶다고. 무영은 그 순간 이 모든 대화가 바보 같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 모든 강수를 두어 한 달 안에 승부를 보겠다고 맘을 먹었더랬다. 그 후로는 쭉 잊은 기억일 텐데, 왜 갑자기 그 얼토당토않은 말이 떠올랐을까.

그야,

‘그 녀석이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으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해준 적도 없는데, 대체 무엇을 믿고 생판 모를 타인에게 그토록 헌신적일 수가 있는가. 그야 최예린 그 녀석은 뭔지 모를 경로로 저희를, 저를 분명 안다고 했고, 주변인들의 증언에서 확인한 언행을 보더라도 실제로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겨우 그딴 앎 하나로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온 정성을 쏟을 수가 있나. 그는 잠시 눈을 감는다. 아니, 사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존재함은 겪어서 안다. 양부모님. 어머니와 아버지. 그 두 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제가 지금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는 거 아닌가.

저는 유구하게 그런 사람들에게 물렀다. 그러다 한 번 크게 덴 게 오래지 않았는데, 내가 또 이러고 있단 말이지. 스스로 조소를 던지면서도 필사적으로 허물어진 울타리를 무시하고 있노라면 언젠가 소라 누나가 했던 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영아, 누굴 믿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니? 너는 그냥 사람을 고르는 데에 까다로울 뿐이야. 그때는 마땅히 돌려줄 말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지만(안 아프게 한 대 얻어맞았다. 너, 동의한 거 안다면서), 사실은 안다. 믿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단순히 말해 버려지는 게 두려운 거겠지.

결국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다.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줄곧 무시해서 그렇지. 그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취약점에 관한 선택을 앞두면 늘상 쇳덩이를 삼킨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도 아니면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기 직전의 오싹함 따위에도 견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긴 지금도 야매 의사에게 몸 맡긴 건 똑같은데, 뭐. …아니지, 걘 학위도 있고 오히려 적법하긴 한가?”

푸슬푸슬하게, 웃음이라기엔 애매한 것과 섞여서 튀어나온 혼잣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타인에게 믿음을 가지는 일은 언제라도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직감에 더는 확신하지 못하게 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제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증명하듯이, 뛰어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든 결과를 보려거든 덤벼들어야 한다.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심이 무뎌지기 전에 해치워야 했다. 문에 몇 개고 걸려있는 자물쇠를 풀고서 눈을 감은 채 문을 열었다. 이전처럼 눈이 초점을 잃고 날뛰지는 않지만 컨디션이 무너지면 어쨌든 시각이 과민해진다. 어차피 여긴 제 집이고 구조 따위야 외우고 있으니 눈 감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2층 가장자리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면 안쪽에서 뭔가 분주하게 소리가 났다. 샤프가 놓이고 책갈피가 책장에 꽂히고 덮이는 소리. 곧 예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누구세요?”

“나다.”

“헉. 그, 무영, 님? 갑자기 무슨…?”

“그 애매한 호칭은 뭐야, 대체. 게다가 내가 집주인인데 들리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뭐, 됐어. 어쨌든 할 말이 있어서 왔다. 거기서 그냥 들으려면 듣고, 문 열 거면 커튼 먼저 다 쳐 놓고.”

“어, 네네, 잠깐요!”

화급하게 발소리가 나고 커튼이 레일을 따라 차르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거운 물건이 창틀에 놓이는 소리도 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예린은 눈치 빠르게 그 요청의 저의가 빛을 가리는 데에 있음을, 그러니까 자신의 시력 문제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 사이 쉐도우가 복도의 불을 껐다. 어쩌면 섀이드일 수도 있는데, 그 점은 확신하기 어렵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서도 눈꺼풀 위로 과한 빛이 쏟아지지 않음을 감지한 후에야 무영은 서서히 눈을 떴다.

복도도 예린의 방도 어둑어둑했지만 제 눈에는 여전히 밝은 편이다. 광량이 생각보다 많은 탓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러기 무섭게 예린이 앞에서 허둥대고, 무영은 그걸 손짓으로 제지하고선 앞뒤 다 자르고 바로 본론을 던졌다.

“너, 예전에 말했지. 나더러 내담자가 되어달라고.”

“네에….”

“시간 내는 건 대체로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내가 그런 위치이고. 그래도 주에 두 번이 최대다. 구체적인 일정은 마루하고 상의해.”

지난 육 개월 좀 넘는 동안 계약서 수정 외로는 단 한 번도 먼저 찾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왔으니, 예린의 처음 표정은 오로지 의아함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건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 후의 변화란. 제 말이 이어짐에 따라 의아함은 혼란(무영은 여기서 예린이 그 제안을 잊혔다고 체념했던 건 아닌지 의심한다)으로, 혼란에서 놀라움과 기쁨으로 점점 하얗게 밝아져만 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러니까 저 뜬금없는 말을 던졌던 그 날처럼. 오롯하게 저의 안녕과 안위를 바라며 행복해하는 표정이다. 내가 너에게 대체 뭐라고 너는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정말 고마워요, 무영 님!”

아주 맑은 날의 저녁노을처럼 맑은 주홍색이 그 어떤 광원 없이도 저 홀로 오롯하게 빛이 난다. 오로지 저를 향한 애정 하나만으로. 무영은 그게 조금 눈부셔서 시선을 피했다.

(중략)

연말 연초란 오만 가지의 가족 행사로 넘치기 마련이다. 가족과 연말을 보내요, 연초도 함께 합시다. 그런 메시지가 모든 곳에 넘쳐흐른다. 이래서 12월과 1월이 힘든 거야. 예린은 SNS까지도 관련 이야기로 도배된 것을 보고 앱을 껐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인터넷으로 도피하면 뭐 하나. 당장 이 집이 최고로 가족 지향적인 것을.

‘아니, 보통 신정이랑 구정 중에선 구정만 챙기지 않나? 신정은 그냥 쉬는 날이고?’

근데 이 미친놈은 기어이 둘 다 챙기더라. 그게 으레 당연한 일 아니냐는 듯한 태도까지 화룡점정이다. 아직 뵙지도 못했지만 신 씨 부부가 이런 사람이었을 거라 그렇겠지. 것도 아니면 유기됐던 경험 때문에 무의식적인 반동으로 그렇던가. 둘 다일지도 모르지만.

집은 웬일로 텅 비어있다. 크리스마스 홈 파티 이래로 제가 집 안에만 얌전히 있으면 더는 감시가 붙지 않았다. 네가 가봐야 어딜 가겠냐는 것도 있고, 이럭저럭 이 무리의 일원이긴 하다고 증명된 모양이다. 이제 그는 개개인의 방이 아니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쓸 수 있기까지 하다. 냉장고는 당연하고, 주류 저장고까지 전부.

원래 □□의 생에서도 알코올에 쉬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여기서도 양상은 엇비슷했다. 그나마도 상담사가 되어서 거의-알코올-중독 같은 타이틀을 달 수는 없으니 뇌에 힘을 꽉 주긴 했지만. 오늘은 괜찮을 거다. 그제였나, 설핏 주워들은 대화에 따르면 하루는 새하 있는 데에 훌쩍 놀러 가서 거기서 이틀 밤인가 있다가 온댔고, 무영은 출장이 있댔다. 당연히 마루도 동행. 거기에 만일의 사태가 있으면 어쩌느냐고 호와 이그나지오(둘 다 각자가 주도권을 가진 상태에서 똑같이 말했다)가 따라갔다. 그러니까 최소한 오늘 밤은 혼자다, 이 말이다.

‘그러면 주저 없이 마셔야지.’

여긴 정말 오만 술이 다 있었다. 이게 선물 들어온 것인지 취향 따라 사둔 건지 짐작도 안 간다. 가격대도 천차만별이라, 적당한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싼 것부터 차마 이거 얼마냐고 묻기 어려운 것까지 다양했고 그것부터가 신무영 본인에게 물건의 가격은 썩 중요하지 않고 걔를 쓸 수 있냐 마냐가 문제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어쨌거나 아무도 없이 그저 욱신거리던 마음을 억지로 동여매지 않고서 풀어둔 상태에서 마시니, 취기가 좀 빠르게 올라오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데. 혹 필름이 끊기더라도 내일 일어나서 혼자만의 주정뱅이 파티를 정리하면 될 일이다. 시야가 물렁거리고 소리가 웅웅댄다. 현실과 감각 사이에 아주 살짝 거리가 뜬다. 잠시 간의 도피다. 바로 이 마음의 틈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취했다는 걸 알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린은 도어 락이 삑삑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게 오지랖이라는 건 안다. 무영은 현관 앞에 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손발 멀쩡한 성인이, 심지어 온갖 안전 대책을 세워둔 자택에서 일이 있으면 뭐가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여기 왔다. 인정하자. 그 녀석이 신경 쓰이는 게 맞는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런 표정을 봤으면.’

크리스마스 파티 때의 일이었다. 유독 벽에 바싹 붙어 저는 오로지 방관자라는 양 미지근하게 식은 태도로 잔을 홀짝이던, 지나치게 엷은 얼굴을 본 것은. 걔는 주변부에 있는 타입이 아니야, 둘 중 하나로 고르라면. 무영은 타인을 관찰하는 눈썰미에는 자신 있는 편이었다. 사업을 일궈온 시간이 길기도 했고, 특히나 호구 잡히기 딱 좋은 부모님을 둔 덕이 제일 컸다. 누구를 판별하는 눈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이었던 셈이니. 게다가 믿을만한지 아닌지의 판단을 떠나서 한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은 관리자의 기본 소양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가 이 정도 규모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면접 어느 단계쯤에는 반드시 제 입김이 닿게 해두지 않았나.

약 구 개월간, 태반이 감시하는 기간이었음에도, 무영이 파악한 최예린은 어쨌든 일을 벌이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거에 비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없는 편이고. 무의식중에 무대 중심으로 나아가고선 화들짝 놀라는 부류란 뜻이다. 또한 사람 자체를 꽤 좋아한다. 내적 친밀감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저 녀석은 저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어도 기꺼이 친해지기를 선택했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거실에서의 위치 선정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거다.

“뭔가 헛짓거리를 하진 않았겠지, 설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익숙하게 도어 락을 열고 집에 들어섰는데, 부엌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알코올 냄새도 좀 난다. 어깨 힘이 쭉 빠졌다. 그냥 술판을 벌였군. 그래, 저 녀석은 도덕심이 높은 편이라 하루가 집에 있을 땐 알코올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지. 긴장을 푼 채로, 무영은 그냥 예린의 얼굴만 보고 남은 술은 잘 밀봉해서 넣어두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아아! 신무영이다! 생각하면 소환됐어!”

“하아…. 아주 꽐라가 됐군, 네 녀석.”

발음이 반은 뭉개진, 주정뱅이의 목소리에 무영은 괜히 들어왔다고 후회했다. 그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건만 예린은 그냥 실실 웃으며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뭔가 노래 곡조에 맞춘 것도 같은데 무슨 곡인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타박을 받고서도 오히려 손뼉이나 치며 까르륵 웃는 게 아닌가.

“하하하! 진짜 같다~. 움직이는 등신대? 퀄리티 쩐다.”

“뭐라는 거야. 내가 진짜지, 가짜겠냐, 그럼?”

“어어? 진짜? 그치만 지금은 없는 게 맞잖아. 소환된 등신대 아냐?”

“…진짜라니까.”

반사적으로 말을 받아쳤다가 무영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예린의 가드가 내려가 있지 않나? 취중진담이라는 걸 썩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이라면 쟤의 머릿속 밑바닥을 한 자락쯤은 확인해볼 기회 아닌가? 비록 이제 이 녀석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고는 해도 최예린이란 존재는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제게 그 자신의 중심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이유를 모르지만 제가 예린의 닻별 같은 존재였다는 것, 무엇을 통해서인지 몰라도 저희를 안다는 것, 그리고 꽤 실력 있는 상담가라는 것 정도다. 제게로 그저 무작정 퍼부어지는 애정과 다정의 연유가, 그 근원이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한때 그가 부모님에게도 물었던 질문이기도 해서 새삼스러운 궁금증은 아니다.

마른침을 삼키고서 무영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낸다.

“하나만 묻자.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돼. …예전에 네가 어려웠던 시기에 내 존재로 버텼다고 했지? 무슨 뜻이냐, 그거.”

제 질문을 들은 예린은 곧장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동경과 애정 그 사이 어딘가의 표정을 하고서 흥얼흥얼 대답했다. 아마 그는 지금 제 기억 어딘가를 뒤지고 있는 걸는지도 몰랐다.

“으음―, 진짠가, 그럴 수 있나, 그래도? …정말 본인한테 말할 수 있을 거라곤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지만, 이건 언제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말이죠, 당신을 동경해요. 닮고 싶었어요. 내가, 음, 여하튼 많이 힘들었을 때, 당신을 보고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그 일념 하나로 버티고 살았어요. 그래서예요.”

내용이 예상외로 무겁다. 건드리면 안 될 금선을 밟았나 흠칫하면서도 무영은 이미 듣기 시작한 김이라며 속으로 각오를 굳히고 이야기를 이으라고 눈짓했다. 그대로 말이 이어지고, 예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박사박 지워져 나간다.

“가지지 못할 것을 바라는 절망. 결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체념하지도 못하고, 이러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그때 당신을 알게 됐어요. 말했듯이, 나는 당신들의 역사를 알아요. 그러니 당신이 어중이떠중이가 겪었다면 당장 맘이 꺾여서 냅다 죽음을 택할 일을 겪고서도, 그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라도 악착같이 긁어모아서 살아나가려는 길을 택했다는 걸 안다는 뜻이에요.”

거기서 예린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쉰다.

“그래서, 그런 삶도 있다고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라도 살아보자고, 삶에 덤벼봤고요. 당신이 아녔으면 나는 진작 죽었겠죠.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행복해져요. 그거면 돼…. 더 바라는 건 사치에요.”

내 모든 행동은 목숨을 빚진 자의 것이라며 바닥에 납죽 엎드린 저자세의 끝에, 분명 술김에 붙은 어느 말을 듣고서 쭉 아연한 채로 서 있던 무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라는 게 뭐 어때서. 웬만한 건 다 구해줄 수 있어. 알잖아, 나?”

알코올이 듣지 않은 또랑또랑한 상태라면 이 물음이 유도신문임을 바로 눈치챘을 테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예린이 그걸 분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텅 빈 유리잔 같던 표정에 말그랗게 차오른 것은 놀랍게도 의아함이었다.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다. 무영은 순간 배 속에 시리도록 찬 게 들어앉는 걸 느낀다.

“더 바랄 게 뭐가 있어요.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고 해준 그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도록 기적인데.”

“내가 거둔 건 너 말고도 마루나 하루도 있잖아. 걔들도 나한테 요구할 거 있으면 다 해. 너라고 안 될 게 뭐냐. 이제와서 식객 한둘 늘어난다고 해도 타격도 없고, 내가 그 정도로 능력 없는 것도 아닌데.”

공백에서 느껴지는 어떤 감각을 무영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부정했다. 얄팍한 논지이나 그 지향만큼은 확고하게. 네가 나를 안다면, 내가 울타리에 들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예린은 미소라기엔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하다기엔 과하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그렇지만 이 모든 건 그냥 내 일방적인 보은이니까, 너는 그냥 받기나 해요.”

나는 무대 밖의 사람이야. 그런 나도 어떻게 챙겨보려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그런데 안 그래도 되니까. 너는 그냥, 행복해져. 그거면 충분해.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네 행복이니까.

성냥불이 잉걸불로 사그라들듯이, 만월이던 달이 날을 거듭하며 줄어들듯이 예린의 목소리는 마디마디마다 느릿하게 흩어졌고 마지막 문장을 뱉은 직후 식탁 위에 엎어져 그대로 잠들었다.

무영은 그저 아연한 채로 새근새근 평화롭게 잠든 예린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지독하게 고요하고 포근하기 그지없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찢긴 장막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목격한 지금은 그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골일 뿐이다.

사람을 뭉근하게 담가서 녹여버릴 기세였던, 끊임없는 장맛비로 쏟아지던 무애한 애정의 뒷면은 그저 너르고 평탄하게 이어진 체념의 들판이었다. 그건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공간이다. 채워진 적이 없는 순백이 아닌, 한때 무언가를 담아보려다가 포기하고만, 밑바닥이 얼룩진 회벽. 이 애의 다정과 헌신의 이면에 자리한 흰 벽을 마주한 무영은 한동안 거기서 망연히 서 있다가 곧 멈추었던 머리를 굴렸다.

체념은 본래 담담한 온도를 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체념 전에는 반드시 기대와 실망과 분노와 좌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체념은 피어나지 않으므로. 하얗게 재가 덮인 체념은 분명 그 이전에 다른 모양을 한, 이제는 없는 무언가의 존재를 명증하기 마련이지 않나. 타오를 게 없었는데도 재가 남을 리가 없다.

예린은 흰 재가 될 때까지 열심히 달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때는 그랬던 자신을 부정한다. 지금은 남은 것이 없으므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친함에 대해서는 늘 회의적이다. 모순으로 충돌하는 두 성질은 여기서 만났다. 이제야 이해되는 어떤 명제에 무영은 깊게 숨을 뱉었다가, 곧 입술을 감쳐물었다.

원래부터 받기만 하는 것은 썩 성미에 맞지도 않고(어느 쪽이냐면 저는 주는 게 맘이 편하다), 예린에게는 원래부터 제가 받은 만큼의 적합한 뭔가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존에 염두에 뒀던 목록은 전부 파기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동시에 오기가 들었다.

하얗게 다 탄 숯에도 불은 다시 붙는다. 아예 가루가 된 재? 분진폭발이라는 걸 아는가. 가루는 오히려 불이 더 잘 붙는다. 텅 비고 다 망가진 폐허도 가꾸면 다시 그럭저럭 한 사람의 삶이 된다는 걸, 저 자신이 증명하고 있지 않나. 그 부분은 예린도 동의한 바가 있는 셈이고. 그렇다면―,

지난 몇 년 거의 모든 일에 무던한 온도를 하고 있던 도홍빛 눈동자에 쨍쨍한 열의가 담겼다. 아마 그의 쌍둥이가 지금의 그를 봤다면 즐거워했을 눈빛이다. 그래, 원래도 저는 당하면 갚아야 하는, 꽤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진 놈이다.

“네가 그랬지. 일방적인 보은이라고. 근데 그거 아나? 그런 방식, 나도 꽤 선호하거든.”

그런 선전포고를 들었으니, 나도 똑같이 하지, 뭐.

제가 어떻게 체념의 밤을 벗어날 수 있었는가. 무슨 연유로 기어코 이런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는가. 답은 하나다. 무영은 한쪽 입가만 비죽 올려 웃었다.

“내 삶을 보고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지. 그럼 아예 너를 여기로 끌고 오면 되겠네, 안 그래?”

멀리서 본 것만으로 그만큼이었다면, 아예 이 무대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리면 될 일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다행스럽게도 저는 그 방식에 관해서는 한때는 대상자였으니만큼 정말 잘 알고 있었고, 제 양부모님이 제게 그랬듯이 그 모든 과정을 이어갈 인내심도 갖추고 있었다. 의지와 시간과 애정. 그게 뚫을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예린이 알았다면 정말 펄쩍 뛸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략, 이하 2만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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