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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reath of life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3

rhindon by 댜

 

김이 자욱하게 서린 욕실 안으로 가냘픈 인영(人影)이 들어섰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흰 가운을 걸친 여자였는데, 가운 자락은 여자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소리 없이 흔들리고 벌어지며 깎은 상아 같은 종아리와 날씬한 발목을 드러냈다. 그 아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욕실 바닥에 낮게 깔린 물기가 걸음걸음마다 작게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넓은 욕실을 가로질러 욕조 앞에 선 여자는 몸을 숙였다. 욕조 테두리를 짚고 다른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욕조를 차지한 선객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이 선객은 남자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명치께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찰랑이는 수면 위로 탄탄한 가슴과 어깨가 드러났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친 두 팔에도 뚜렷한 근육이 잡힌 채였는데, 오른손에서는 막 불을 붙인 듯한 담배 한 개비가 달랑거렸다. 특이하게도 남자의 피부에는 가느다란 은빛 흉터가 가득했다. 유일하게 흉이 없는 얼굴은 제법 수려했으나 묘하게 의뭉스러운 분위기가 풍겼고 풀어헤친 은발은 물을 먹어 거의 잿빛에 가깝게 어두워진 채였다.

여자의 손이 뺨에 닿았을 때 그는 눈을 떴다. 날카로운 눈매 속 눈동자는 붉었고 독특하게도 동공이 십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었다.

암굴왕 에드몽 당테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J.”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거두더니 가운의 허리끈을 당겼다. 가운이 스르륵 허물어지며 우윳빛 살결을 드러냈다. 바닥에 가운을 남겨두고서 J는 흐르듯 우아한 몸짓으로 욕조 속에 몸을 들였다. 물이 한 번 출렁이며 넘쳤다.

욕조가 좁지는 않았으나, 체격이 큰 암굴왕이 홀로 차지하고 있기에도 꽤 빠듯했던 터였다. 그가 무릎을 세우며 내어준 빈자리에 앉은 J는 두 발을 그의 넓적다리 위에 올리며 욕조 발치에 몸을 기댔다. 얕은 숨이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J를 마주 본 암굴왕은 손에 든 담배를 두어 번 까딱이고는 재차 말했다.

“부인.”

이번에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암굴왕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욕실의 김에 담배 연기가 섞여들었다.

욕조 옆 트레이에는 따지 않은 위스키병과 둥근 얼음이 든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J는 병도, 잔도 집지 않았다. 트레이 밑단의 담뱃갑을 흘깃 보았으나 역시 그뿐이었다. 움직인 것은 암굴왕이었다. 욕조 물에 다시 한번 파도가 쳤고, 몸을 일으킨 암굴왕은 담배를 J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J는 지극히 사소한 변화를 대하듯 담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입으로 가져갔다. 깊이 숨을 들이쉬는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녀처럼 무구했다.

그사이 새 담배를 꺼낸 암굴왕은 J를 향해 허리를 기울이고는 눈짓으로 허락을 구했다. J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진 다음에야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그 끝을 J의 담배와 맞댔다. 양쪽의 호흡이 겹치더니 이내 새 담배의 끝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들이는 어떠셨나?”

다시 등을 뒤로 젖힌 암굴왕이 물었다. 길게 연기를 내보내며 침묵하던 J는 숨이 다 흘러나간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욕실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았지. 그럼 종일 틀어박혀 있는 것은 어땠어요?”

나긋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겨우 대답을 얻어낸 암굴왕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는 J의 대답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나쁘지 않았다.”

욕실에 가득 찬 수증기 속으로 J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목 옆의 십자가 모양 문신이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 J가 다 웃기를 기다리며 암굴왕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폐부 깊은 곳까지 연기를 들였다.

“지루하진 않았고?”

J의 발끝이 암굴왕의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가, 차츰 위로 올라갔다. 근육이 갈라진 선을 따라 나아가던 발끝은 골반이 튀어나온 부위에 잠시 걸린 다음 자연스럽게 옆구리를 타고 올랐다. 무릎이 쭉 펴지며 하얀 발가락이 물 위로 드러났다. 슬며시 웃은 암굴왕은 J의 무릎을 빈손으로 덮었다.

“부인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 지루하겠나.”

물은 아직 꽤 뜨거웠다. J의 무릎은 한동안 수면 위로 솟아 있었고, 욕실 안 더운 공기에도 불구하고 희었다. 반면 물에 잠겨 있던 주변 살결에는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연한 장밋빛이 감돌았다. 암굴왕은 그런 대비가 마음에 드는지, 엄지로 그 경계를 가만히 문질렀다. 물속의 온기가 경계선을 지워 버릴 때까지.

조용했다.

상대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종류의 평화였다. 이따금 긴 숨이 내쉬어지고, 물이 작게 찰랑거렸다. 손가락이 욕조 테두리를 두드렸다. 물속에서 맞닿은 피부가 서로 눌리고 미끄러졌다. 담뱃불이 깜빡인다. J는 암굴왕의 허리에 발바닥을 꾹 눌러 붙였다.

그러더니 도로 다리를 접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가 싶더니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였다. 담배를 든 손은 한 번 흔들리는 법도 없이 물 위에 둔 채 남은 손으로 암굴왕의 어깨를 짚고는 체중을 넘긴 것이었다. 암굴왕이 자연스레 J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 역시 담배 때문에 양손이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한 손으로도 J를 지탱하기에는 충분했다.

하나 J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암굴왕을 숫제 기다란 방석 취급하며 움직인 J는 암굴왕과 아예 몸을 겹치며 엎드렸다. 젖은 머리카락과 어깨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도드라진 등뼈를 타고 미끄러지더니 욕조로 참방 떨어져 내렸다. J는 한쪽 팔을 암굴왕의 목에 감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암굴왕의 손도 저절로 J를 끌어안듯 받치게 되었다.

“J.”

나지막한 목소리가 J의 귓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숨결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릴 듯 가까웠다.

“무엇을 원하지?”

J는 타박하듯 장난기 어린 투로 대꾸했다.

“으응, 가만히 있어.”

그리고 J는 암굴왕의 목을 가볍게 깨물었다. 상처가 나기는커녕 아프지도 않았을 힘이었다. 하지만 암굴왕의 전신에 미미한 떨림이 퍼져나갔다. J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의 진동 역시 맞닿은 몸을 통해, 욕조에 가득 찬 물을 통해 암굴왕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반쯤 허리를 든 J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더니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암굴왕의 시선은 J의 입술에 홀린 듯 이끌렸다. J는 사정을 눈치챈 듯 웃었지만 말을 하지도, 입을 열지도, 심지어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암굴왕의 입에 가만히 입술을 포갰다.

한 사람은 숨을 내쉬고, 다른 한 사람은 들이쉬었다.

마치 시간이 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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