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영그는 결실에 탄복을 자아내는 이 있더라

자각

BGM



은엽은 자신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악몽에 사로잡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두 번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시야를 온통 채운 하얀색을 인식하면서는 자신이 결국 사후세계에 들어왔나 하는 착각에 잠깐 빠지기도 하였다. 다행히도 오래 이어질 착각은 아니었다. 머잖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저마다 부산하게 떠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은엽은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이 들지 않아서 그들의 대화를 그저 멍하니 듣기만 했다. ‘혼수상태에서 이렇게 빨리 깨어나실 줄은 몰랐다’거나, '다른 이상은 없는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거나, '이건 기적'이라거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소란은 영 끝날 줄을 몰랐지만, 은엽은 딱히 싫진 않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무채색 일색이던 공간에 알록달록한 색채를 띤 물체가 존재감을 유독 뽐내고 있었다. 은엽은 어디선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 깊이 호흡해 보았다.

꽃향기가 생명의 물기를 싣고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은엽은 모처럼 얻은 회복기를 여유롭게 보낼 수 없었다. 자신의 의식이 세상과 단절된 동안 벌어진 일들을 타자의 입으로 전해듣고 정보값들을 소화하는 데만도 애를 먹고 있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악의 조직 간부에게 납치되어 있는 사이 국제경찰 조직 내에서도 대규모 변화가 일었고, 상부가 물갈이되었으며, 조직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수사 인력도 대거 보충되었다고. 은엽의 병실을 제일 먼저 찾아온 후배가 씨근대며 이르기를, 아스펜 요원은 '잠입 임무 중에 붙잡힌 요원을 구출해낼 자원이 없다'면서 버리는 패가 될 처지였지만 이러한 대혼돈의 입김을 받은 덕분에 구출 작전을 급하게나마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배님, 나중에 레인저 시오레와 레인저 리안에게 감사 인사하기 꼭 잊지 마세요. 특히 레인저 리안께요!" 후배가 구출 작전의 후일담을 한바탕 쏟아붓고는 이렇게 신신당부했었다. 레인저 리안, 은엽은 이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 까닭모를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동결되었던 사고회로가 겨우 재생했다가 과부화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여긴 은엽은 결국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차근차근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겸사 해서... 구출 작전 이후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황을 공유받았으면 하는데요."

머잖아 들어올 후임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려나, 행복한 고민에 잠겨있던 후배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앉은 자세 그대로 펄쩍 뛰었다.

"아니, 꼼짝않고 쉬셔야 할 분이요?!"

후배는 난색을 표했지만 은엽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자기 책임이 걸려 있는 사건이니 자신이 앓아누웠다고 완전히 손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악의 조직의 행동 대장격인 위험인물을 언제까지고 버젓이 활동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됐다. 결국 후배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태도로 은엽에게 자료를 넘기고는 다음의 말을 남기고 본부로 복귀했다.

"레인저 리안이 어제 문병을 오셨어요. 그러니까... 선배님이 깨어나시기 두 시간쯤 전에요. 그분이 선배님 걱정을 많이 하셔서, 선배님이 깨어나시자마자 제가 멋대로 그분께 연락을 보내드리긴 했는데... 음, 오늘은 오지 않으실 건가봐요. 알려줘서 고맙다는 답장만 오고 별 말이 없네요..."

은엽은 '극비' 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서류를 펼쳐놓은 채로 창가에 놓인 꽃병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병에 꽂힌 꽃다발은 이제 시들시들했지만 향기는 여전했다.

'레인저 리안이...'

불현듯, 은엽의 시선이 탁상 위의 몬스터볼들과 라이브캐스터에 가 닿았다.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은엽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개인 소지품을 챙겨들었다. 서류를 서랍 속에 넣어서 잠금처리하고, 가벼운 외투를 걸치는 일련의 동작이 뻐근하게 이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꿋꿋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후회와 미련은 여지껏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도대체 뭘 하고 지냈길래 사람 얼굴이 그리 홀쭉해졌어?

경악을 가득 실은 음성이 스피커를 뚫었다. 통화음이 1초만에 연결된 후의 일이었다. 옥상 정원을 거닐던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지만, 은엽은 자신의 동생을 달래는 데 급급하기만 했다.

"괜찮아, 어차피 다 끝났어. 빠져나올 때 소동이 좀 있었어서... 금세 나을 테니 걱정 말아, 하운아."

사건이 벌어진 동안 하운에게 용케 소식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을까. 은엽은 자신의 동생이 이 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편이 백 번 낫다고 여겼다. 겁에 질려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모습에 퍽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생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게 된 반가움은 그보다 더 컸다.

-누군 걱정을 태산처럼 하는데 실실 웃고 있네. 저 얄미운 것.

"미안해, 하운아. 앞으로는 연락 자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응?"

자신의 오빠가 입고 있는 환자복을 알아본 하운이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삼시세끼 메뉴 사진 보내주면서 약올릴 거야. 오빠도 메뉴 사진 찍어서 보내줘.

하운은 심술과 걱정과 투정을 한데 뒤섞은 요구를 하고는 곧이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상은 어땠는지, 포켓몬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병원에는 오래 있어야 하는지, 달리 아픈 곳은 없는지 등등. 여느 때보다도 길다란 통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은엽은 어쩐지 마음 한켠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자신은 단 하나 남은 가족의 가슴에 또다시 대못을 박고 세상을 뜰 뻔했었다. 살아서 소중한 사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새삼스레 감사했다. 살아날 수 있어서 이 얼마나 다행인지.

-오빠 표정 이상해. 피곤한가? 끊을까?

동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정신을 퍼뜩 깨웠다. 은엽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통화 더 할 수 있어."

-음... 아냐. 내일 또 하면 되니까 이만 끊자. 오빠는 피곤한대도 괜찮은 척하는 사람이니까 이럴 때 푹 쉬어야지.

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고 싶었어, 오빠." 하고 짧은 문장을 건넨 후 곧바로 통화를 끊었다. 은엽은 까맣게 물든 화면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방금의 그 말은 다름아닌 자신이 먼저 꺼냈어야 하는 말이었다. 가슴속에 자리잡은 응어리가 느물하게 흐르면서 무게감을 더욱 키우는 듯한 기분에, 은엽은 손아귀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라이브캐스터를 서둘러 감추듯 주머니 깊은 곳에 쑤셔넣었다. 이내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손에는 몬스터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은엽은 무거운 표정으로 후배에게서 돌려받았던 볼들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미루면 안 돼."

그는 자기자신을 다그치듯이 중얼거리고는 개폐버튼을 차례로 조작했다. 기계음과 비슷한 소리가 터지듯 울린 뒤 이어롭과 플라이곤이 볼 밖으로 나왔다.

"높새, 보라."

낯선 장소의 풍경에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두 포켓몬은 자신들을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왔다. 은엽은 크게 흡뜨인 두 쌍의 눈동자를 보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화를 내든, 길길이 날뛰든, 은엽은 그들의 분노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명령'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포켓몬들이 제게 준 애정을 배반한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두 포켓몬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놀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던 것 같다.

"... ... ...윽."

은엽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포옹 속에서 힘겨운 숨을 뱉었다. 플라이곤 높새의 품은 숨막히도록 드넓었고, 이어롭 보라의 품은 가슴이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했다. 그들은 무어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은엽의 어깨와 가슴에 대고 머리를 마구 부벼댔다. 은엽은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높새와 보라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내가 그토록 상처를 줬는데도 이들은 내게 여전히 숨막힐 것 같은 애정을 주는구나. 그리고는 서럽게 우는 포켓몬들을 쓰다듬어 달래며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을게요."

울음소리가 어쩐지 한층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은엽은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흘끔 모여드는 것을 느끼며 포켓몬들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울게 두었다간 둘다 탈진이 오겠는걸.' 곤혹스러움이 그렇게 고개를 슬쩍 들어올릴 때였다.

"둘다 당신을 엄청 보고 싶었대. 그럴 땐 당신도 똑같이 말해주면 되는 거야."

퍽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러나 마치 어제 들었던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은엽은 그늘 밑에서 청아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잠시 잃었다.

"... ...리안 씨."

은엽이 그 이름을 힘겹게 발음하자, 상대방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네."

뜻밖의 도움을 받아 플라이곤과 이어롭을 겨우 달래는 데 성공한 후, 구내 카페스페이스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리안이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은엽은 시선 둘 곳을 잃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리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곁눈질하고는 에나코코아를 한모금 마셨다. 은엽은 그 뜸이 의미하는 바를 한 박자 늦게 깨닫고 열심히 기억 저장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진 뒤로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워낙 수많은 사건사고가 지나갔기에 옛 일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테이블에 몸을 기댄 자세로 잠자코 그 얼굴을 감상하던 리안은 느릿느릿 정답을 알려준다.

"내가 현대로 건너와서 병원에 입원한 기간동안 말야. 옥상으로 나갔던 나를 당신이 찾아왔잖아. 그 다음에는 몸을 녹이러 카페스페이스로 함께 내려갔고... 기억해?"

눈을 꿈벅꿈벅 뜨던 은엽은 뒤늦게나마 '아아.'하는 소리를 냈다. 리안은 작게 킥킥 웃고는 잔을 쥐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은엽은 그 손을 조건반사적으로 잡고 나서 다시금 눈을 어리둥절하게 떴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였을텐데, 이 손을 잡는 행위 자체가 퍽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 이런 악수를 나눈 적이 있던가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의아하게 들릴 질문을 무심코 뱉은 은엽은 순간 '아차'해서 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리안은 그저 무던한 낯빛으로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다.

"이번이 처음이야. 저번에 헤어졌을 때는 내가 악수의 뜻을 몰라서 못했고."

"그런가요......"

은엽은 제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가두듯 주먹을 쥐어보고는 리안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니스 요원에게 리안 씨의 활약상을 전해들었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로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당신이 깨어났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은엽은 이를 금방 이해하지 못해 반응이 잠시 멎었다. 당신이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과 다름이 없는데 당신이 제게 고마워한다고요? 돌아가는 응답이 없자, 리안도 마찬가지로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내가 이상한 말을 했어?"

"아, 아닙니다. 음, 귀걸이... 역시 어울리시네요."

은엽은 완전히 엉뚱한 말을 내놓고는 병원에 꼬렛 구멍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몰라서 제 몫의 차를 마시는 척 그의 안색을 살피니... 그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리안 씨?"

리안을 화나게 만들었나 싶어서 존재하지도 않을 해법을 궁리하던 은엽은 불현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저, 고마워."

"아뇨... 네..."

은엽의 의미불명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란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넘어간 건 맞을까, 그런데 왜 저런 반응을... 하지만 어울리는 건 맞는 말이다. 원래부터 리안 씨가 지니고 있던 귀걸이니까...' 은엽은 제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로즈레이드 티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사색 아닌 사색에 잠겨 있었다. 카페스페이스의 백색소음이 더불어 넋을 빼가는 듯한 기분에 젖을 무렵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리안이 냉큼 입을 열어 은엽의 정신을 일깨웠다.

"퇴원 날짜는 잡혔어?”

리안은 대화주제를 제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은엽은 내심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며 빠른 답을 내주었다.

"내일은 하루종일 건강검진을 할 예정이고… 모레가 퇴원일입니다.”

리안은 열이 약하게 남은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꽤… 빠르네? 여기서 좀 더 회복해야 하지 않아?”

걱정기 다분한 질문이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은엽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되찾고 대답했다.

“제가 의식을 회복한 이상은 딱히 추가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할 사항도 없고, 무엇보다도 병원에 오래 붙잡혀 있기가 싫었거든요.”

"...하긴, 그렇겠다."

동일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이해가 빠른 편이었다. 리안은 멍하니 컵을 기울여 에나코코아를 길게 들이켰다. 무언가 고민에라도 잠긴 것일까, 은엽은 그의 골똘한 표정을 조용히 관찰하면서 말을 이었다.

“퇴원하더라도 휴가를 받아버려서... 집에서 얌전히 쉬고 있어야겠죠. 만들어 둔 일정도 딱히 없거든요.”

그 순간 리안의 눈에 빛이 확 들었다. 이번엔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 자신의 언행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던 은엽은 별안간 들려오는 열띤 목소리에 입을 헤벌렸다.

“그럼... 당신 퇴원한 다음 날에 나랑 당일치기 여행 가자.”

“예? 여행이요? 저랑요? 여행을?”

은엽은 찻잔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안은 한쪽 귀에 착용한 귀걸이가 흔들거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별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거든. 옛날에는 그냥 고개만 들면 밤하늘에 별이 한가득했는데 말이야, 요즘에는 하도 공기 질이 나쁘고 오밤중까지도 밝은 빛이 남아있다 보니까 원래부터 있었던 별마저도 없어진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런데 때마침 당신도 휴가, 나도 휴가, 당신도 일정이 딱히 없고, 나도 일정이 딱히 없네. 그러니까 오랜만에 마음속 여유 챙길 겸 해서 같이 별 보러 가자.”

리안은 흥얼거리듯 말하고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은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리안이 말해주는 이유를 듣고 나니 미묘한 설득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엽은 자신이 저 눈빛을 절대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소같았으면 다른 동료와 같이 가는 건 어떻겠느냐며 거절했을 텐데, 왜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승낙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속 여유'라는 단어에 동했던 것일까. 은엽은 침착함을 가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별이 잘 보이는 장소를 물색해 놓아야겠네요.”

미끄러지듯 올라가는 저 입꼬리는 승리의 미소인 걸까?

“보온용품이랑 야외용품은 내가 챙길게. 만날 시간 정해서 문자 보내줘.”

냅킨에 잉크로 휘갈겨진 리안의 전화번호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은엽은 자신의 연락처를 교묘하게 뜯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슴푸레한 미소를 지었다.

은엽이 냅킨을 품속으로 넣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던 리안은 뭔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은엽."

"예?"

그에게 이름이 불리우는 것마저 마치 최근에 자주 들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 은엽은 까닭모를 기시감에 빠져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안의 지그시 내리감긴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보고 싶었어."

반짝 뜨인 연청의 눈동자가 은엽의 목소리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그 날은 별을 관측하기에 썩 이상적인 날씨였다.

봄철의 온화한 기온에, 미풍이 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달도 뜨지 않아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느긋하게 별을 감상할 수 있을 만한 날이었다. 4번 도로의 레인저 기지 앞에서 조우한 리안을 차에 태우고 장장 두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 도착한 곳은 인기척이 없어 한적한 언덕 지형이었다. 리안은 잠에서 겨우 깨어나 비몽사몽 창밖을 바라보다가 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왔어…?”

“보배마을 옆의 12번 도로입니다. 태엽산도 생각해 봤는데 거긴 아직 추워서요.”

‘그렇구나….’ 리안은 어눌하게 웅얼거리고 작게 하품했다. 하기야 움직이는 차 안에서 두시간을 내리자도 잔 것 같지 않겠다 싶어, 은엽은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창문을 약간 내려주며 말했다.

“아직 오후 네 시네요. 별을 제대로 보려면 여덟 시 정도는 되어야겠는데, 여유롭게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습니다.”

도로가 막힐 것을 감안해서 일찍 출발했는데, 교통이 원활했던 덕분에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하게 되어 시간이 넉넉하게 비었다. 눈을 비벼가며 잠기운을 몰아내던 리안은 마지막으로 레파르다스처럼 기지개를 키고 은엽을 바라보았다.

"피곤하진 않아?”

은엽은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눈을 깜박거리다, 반 박자 늦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전 멀쩡해요. 간밤에 잠도 넉넉하게 잤고요."

혼자서 장거리 운전을 한 것 때문에 피곤하지 않느냐는 의미로 알아들었는데, 리안의 의도와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묘한 눈길로 은엽을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좋아. 빨리 나가서 자리 펼치자. 나 피크닉 처음이야."

은엽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리안은 재빨리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은엽은 잠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차량의 시동을 완전히 껐다. 성큼 다가온 고요 속에서 잔디밭을 재게 밟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물오른 풀밭 특유의 싱그러운 향이 곧바로 코끝을 스쳤다. 은엽은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꼈다. 자연의 생기를 마지막으로 만끽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했다.

"트렁크 열어 줘."

차 뒷편에서 작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은엽은 부랴부랴 명령을 따르고 리안이 피크닉 자리를 펼치는 작업을 도왔다. 그의 말마따나 피크닉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돗자리를 펼치기에 알맞은 평탄한 지형을 찾아내거나 피크닉용 테이블을 조립해서 척척 설치하는 모습이 썩 능숙하게 보였다. 전자라면 모를까, 후자는 리안이 수백년 전의 과거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리안은 그런 은엽의 의문을 읽어냈는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레인저로 활동하다 보면 이런 건 저절로 배우게 돼."

"...적응을 훌륭히 해내셨군요."

어쩔 수 없이 대견한 마음이 떠올라서 그리 중얼거리자, 리안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꽤 열심히 살아왔거든. 언젠가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자랑하고 싶었어."

리안의 입장에서는 칭찬해달라는 의미였겠지만, 은엽에게는 '이런 자랑을 평생 못할 뻔했다.'는 의미로도 인식되는 말이었다. 은엽은 자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몸의 방향을 틀며 말했다.

"축하의 뜻으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죠. 야외라서 복잡한 요리는 못하지만 맛은 보장해드릴 수 있어요."

"응! 그럼 기대할래."

리안은 기분 좋은 음성으로 종알대며 캠핑 의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걸어갔다. 은엽은 사뿐사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속이 붕 떠오르면서 메슥거리는 듯한 느낌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두 명의 인간과 열 한마리 포켓몬이 참여한 피크닉의 분위기는 복작복작 그자체였다. 오랜만에 밝은 야외로 나와서 기분이 다함께 좋아진 포켓몬들은 은엽이 끓여준 나무열매 포토푀를 실컷 포식하고 나서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뒤엉켜 한참을 놀았다. 주인끼리는 서먹하고 데면데면 굴어도 포켓몬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테이블 주변의 풀밭 여기저기에 누워 곯아떨어졌고, 한풀 지친 주인들이 돗자리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었다. 일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리안 쪽에서 쌓아올린 궁금증이 많았던지 주제가 의식의 흐름처럼 이리저리 튀었지만, 은엽은 괘념치 않고 자신이 답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그러고보니 나 졸업식 때 익명으로 꽃다발을 받았었거든. 그거 당신이 보냈던 거지? 그거 보낼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밖에 없어서."

"아... 음. 그리 말씀하시니 부정할 수 없게 됐네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응, 그 이유라도 듣고 싶어. 졸업식 날짜까지 기막히게 맞췄더라고."

"그... 다른 졸업생들은 저마다 꽃다발을 받았을 텐데, 당신은 이렇다 할 연고자가 없으니 저라도 보내드려야겠다 싶어서..."

은엽이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라면, 자신은 리안에게 거짓말을 한다거나 대충 둘러대며 얼버무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었다. 은엽의 이러한 솔직함이 리안에게는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흠... 그렇긴 하네. 확실히, 당신의 꽃다발이 없었다면 난 그대로 빈손으로 졸업식에 나가야 했을테니까. 그러면... 그, 카드의 A는 당신 코드네임 이니셜이겠지?"

"네, 맞습니다. 당신이 제게서 무언가를 더 받지 않겠다고 못을 박고 가셔서... 그렇게라도 해야 리안 씨가 모르실 것 같았거든요."

"그런 건 또 잘 기억하네. 그럼 코드네임은 왜 그렇게 지었어?"

"제 본명을 발음대로 풀이하면 '은색 이파리'가 됩니다. 백양목의 잎 뒷면이 살짝 은색을 띠지요. 그래서 백양목을 뜻하는 하나지방의 단어로 제 코드네임을 채택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그럼, 나한테는 왜 처음부터 당신 본명을 알려준 거야? 듣자하니 국제경찰 요원의 본명은 초면에 막 그렇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던데."

은엽은 미혹의 숲에서 과거인을 조우한 이래 최초로 겪었던 망설임을 회고했다. 자신이 그에게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없음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다.

"코드네임은 가명이고, 가명은 제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지요. 하지만 전... 리안 씨께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려면 제 자신부터 속임을 쓰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해가 뉘엿하게 기울어져 선선해진 공기가 어깨 위로 차츰 내려왔다. 땅거미가 만든 그늘이 리안의 표정을 가렸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움직이는가 싶었다. 무릎 위에 엎드린 쌔비냥의 등을 가느다랗게 쓰다듬는 손길은... 언뜻 불안정하게 흔들렸던가.

"그렇게 말해줘서... 기쁘네. 정말이야."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과는 반대로 기쁨의 감정이 섞여 있지도 않았다. 은엽은 표정 없는 얼굴을 조용히 마주보았다. 문득, 이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리안은 이쪽의 마음이 어떤지 곧잘 꿰뚫는 통찰력을 가졌는데 정작 은엽은 그의 의중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다. 단련된 눈썰미로도 어떻게 승부수를 내밀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요.' 소리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기만 할 뿐이었다. 은엽은 평소와는 느낌이 다른 답답함을 느끼고 영문모르는 한숨을 삼켰다.

"다른 걸 물어볼래. 당신은 스트레스를 어떤 식으로 풀어?"

질문과 답변 코너는 예고없이 이어졌고, 은엽은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답변자 역할을 착실하게 해냈다.

"직장 동료들과 사내밴드를 꾸렸지요.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모여서 곡을 만들거나 연주를 하고, 가끔 작은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니스 요원의 아이디어였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꽤 도움이 되더군요."

"...그럼 그 동안 그런 활동도 제대로 못했겠네."

"네. 그래서인지 실력이 좀 굳었지만... 이제부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동료들이 한참을 벼르고 있었어서 조만간 복귀무대에도 오르게 될 것 같더군요."

"그건 멋지다. 나도 보고 싶어."

이번에는 진심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만큼의 열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엽은 그만 쿡, 하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이는 어떤 것은 숨기는 데 성공할지언정 모든 것을 숨기지 못하는 솔직함을 가졌다. 이를 증명하듯 리안이 볼멘소리 섞인 주장을 한다.

"우, 웃지 마. 나는 그냥 현대의 악단이 어떤 악기를 써서 어떤 식으로 연주하는지 보고 싶을 뿐이라고."

"하하, 네. 근시일 내에 공연 날짜가 잡히면 리안 씨께 입장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동료 분을 데려오셔도 좋고요. 관객 수가 많을수록 그 날의 연주가 잘 풀린다네요."

마지막은 후배의 입장문이었지만, 리안은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쌔비냥을 쓰다듬는 손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리안은 자신을 관찰하는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머리카락을 기르는 이유도 공연 때문이야? 그 왜, 있잖아, 뇌문시티 근처에서 가끔 길거리 공연하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 기른 사람들이 많더라고."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이유는 아니고요."

은엽은 손끝에 걸리는 성긴 수염을 문지르며 뜸을 들였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라서, 이를 들은 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는데, 뭘 새삼 고민하나.' 은엽은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결국은 충실한 대답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제 동생이 어릴 때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고... 음, 그렇게 기르다보니... 제 스스로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겠군요."

이번 건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은엽은 리안의 손길이 우뚝 멎은 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를 차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부끄러움의 한 종류. 은엽은 사뭇 해탈한 마음가짐으로 리안의 반응을 예상해 보았다. 징그럽다거나, 재수없다거나, 어떤 반응이든 받아들일 요량이었다.

"...맞아, 어울려."

"...예?"

"어울리는 스타일 보고 안 어울린다고 말할 순 없잖아. 그리고 나 머리 손질 잘 하는데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당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묶어줄 수 있어."

"예...?"

그들은 서로를 말없이 오랫동안 마주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못 들은 걸로 해줘."

"예... ..."

봄철 한가운데라서 그런가, 해가 거의 모두 가라앉았는데도 주변 온도가 여전히 뜨겁게 느껴지기만 했다.


잠들어 있는 포켓몬들을 몬스터볼에 들여넣어 주고 취사도구들을 정리하는 과정을 모두 끝마치고 나니, 하늘의 가장자리를 가느다랗게 채우고 있던 땅거미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별들이 하나 둘씩 또렷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랜턴의 불빛마저 꺼진 언덕은 이제 완연히 어둠에 잠겼다. 단순히 의자에 앉아서 별을 보려는 은엽을 냅다 돗자리 위로 잡아끌어 눕힌 리안은 남의 속도 모르고 그저 편안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렀다. 누운 자세가 별을 관측하는 데 확실히 편하기는 했다. 은엽은 다소곳한 자세를 더욱 굳건히 만든 채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리안 씨가 원래 막무가내인 성격이긴 했지.' 그가 자신을 깜짝 놀래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고 스스로 납득해내는 데 성공한 은엽은 그제서야 뒷목에 힘을 빼고 옆사람을 따라 밤하늘을 편히 바라볼 수 있었다.

빛공해로부터 자유로운 언덕의 하늘에서 바야흐로 별무리들이 나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별의 강이 되어 하늘을 길게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아도 하늘에 무수히 박혀 있는 흰 점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었으니, 이를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별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표현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자신이 근래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또한 이토록 찬연하고 다채로운 빛에 경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은엽은 마음의 여유를 챙기자던 리안의 처방이 꼭 들어맞았음을 깨닫고는 나지막이 감탄했다.

고개를 살짝 틀어 제 옆에 누워있는 리안을 보니, 그는 밤하늘에 완전히 넋을 잃은 상태였다. 언뜻 보면 숨을 쉬는 것마저 까맣게 잊은 듯해 슬며시 이름을 불러볼까 했지만, 이는 결국 감상을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 터이기에 은엽은 목소리를 도로 삼켜버리고는 시선을 다시 위로 향했다. ‘오길 잘했군요.’ 라는 은엽의 중얼거림에 리안의 나직한 긍정만이 있었을 뿐이다.

북쪽 하늘을 수놓고 있던 깜지곰자리가 반시계방향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옮겼을 동안 조용히 별을 감상하고 있던 리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뭐 하나만 물어도 될까?”

“…예, 말씀하세요.”

은엽은 아까 전에 있었던 질답의 연장선인가 여기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을 먼저 꺼내고도 머뭇거리던 리안은 이윽고 자신의 오른편에 놓인 손, 즉 은엽의 왼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잠깐 손좀 잡을게."

느닷없이 손이 잡히게 된 은엽은 입을 열 타이밍마저 놓치고 그에게 순순히 손을 내어주었다. 리안은 그 손을 손바닥이 보이도록 뒤집고는 그 안에 새겨진 흉터들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였다.

“당신, 그 조직에서 무슨 일을 했었어? 난 다른 건 다 몰라도 돼. 하지만 이 손, 너무 신경 쓰여서... 왜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거야?”

은엽은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제게는 지나치게 쓰라린 기억이기도 했고, 또 그가 궁금증을 가진다 한들 쉽게 설명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포켓몬 레인저인 리안이 이를 듣고 어떤 판단을 가지게 될 지 몰라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지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두려웠다. 그렇다고 둘러대자면 금방 들통날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어설픈 딜레마가 어디 또 있을까.

은엽이 뜸 들이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리안은 그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손바닥을 강하게 꼬집었다. 앗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걱정 마. 난 당신이 그 패거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당신은 늘 인간이었잖아. 괴물이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안 그래?”

그 단호한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게 물들어 있기도 하였다. 리안은 그 온기를 상기시켜주듯 자신이 붙잡고 있는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는, 답을 재촉하듯이 은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한 청빛이 올곧게 날아와 꽂히는 화살촉처럼 느껴져, 결국 은엽은 체념의 감정을 안은 채로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조직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밀매 루트를 짜는 역할을 맡았었지만, 초기에는 조직 내 사육 시설에 감금된 포켓몬들의 상태를 케어하고 그들의 식사를 배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본디 지내왔던 환경과 강제로 분리된 까닭에 무척 사납기 이를데 없었고, 대부분의 힘든 일들은 신입들에게 주어졌거든요. 평범하게 채용된 직원들에게는 그 포켓몬들이 원래 살고 있던 환경에서 낙오되어 보호소로 온 것이라고 안내되었지만요….”

은엽은 고개를 들어 별들 사이로 보이는 검은 바탕을 가만히 응시했다. 전말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선행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 결과가 악으로 넘어간다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일을 거듭할수록 제 손이 검게 물들어간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떤 포켓몬은 인간에 의해 가족을 잃었으며, 또 어떤 포켓몬은 자신이 따르던 주인과 강제로 분리되었다. 어떤 포켓몬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끊이지 않는 고통에 신음해야 했다. 야생을 누리던 포켓몬들은 어느 순간 자유를 빼앗기고 철창에 갇히게 되었고, 관계에 의지하며 살던 포켓몬들은 어느 순간 유대를 빼앗기고 차디찬 고독 밑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자신들의 삶을 철저하게 짓밟은 주체와 그 아래 있는 부속체들을 증오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정체를 가장한 은엽 또한 이 일원으로 간주되어 그들에게 원망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은엽은 제 손에 흉터를 새긴 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손날 부분에 있는 자상은 날개를 잃은 스라크가 낸 것, 중지와 약지의 중간마디에 있는 이빨자국은 어미 잃은 아기 캥카가 만든 것, 엄지 아랫부분에 남은 화상자국은 트레이너와 떨어진 뚜꾸리가 남긴 것, 그 외 다수. 리안은 그가 짚어준 흉터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그의 손바닥에 가장 크게 남아있는 자국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제 정체가 탄로나던 날에, 간부의 습격을 받고 입게 된 상처입니다. 따라큐의 손톱이었죠.”

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나 싶었다. 그는 은엽의 왼손바닥을 제 오른손으로 덮어버리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많이 힘들었겠다.”

은엽은 감히 그의 손을 치워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한 웃음소리를 냈다.

“실은,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이들을 제 손으로 모두 해방해준 뒤 뛰쳐나오고 싶은 욕구가 든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거든요. 국제경찰에 들어온 이후 잠입 임무를 몇 번인가 해 왔었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도 없었습니다. 포켓몬들이 조작된 밀매 행선지로 이송되는 도중에 일부 빼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더욱 말이죠.”

‘되도록이면 전부를 구하고 싶었는데도요.’ 은엽은 들릴 듯 말 듯 뇌까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방금의 말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 속마음이었는데, 역시 이 사람 앞에서는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어 있다. 단순히 그가 외부인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꺼내 놓은 말문이 생각보다 쉽게 쏟아져 나오니 마음속이 심란하고도 후련해지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것이 본인 나름의 변화인 걸까, 은엽이 막간의 고민에 빠졌을 무렵 곁에서 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알아, 전부를 구하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 말야. 하지만 적어도 당신 덕분에 우리가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어. 우리가 놓쳐버린 생명들은, 이후에 절대 놓치지 않는 것으로 위로하고 기억해주면 돼. 그게 내가 배운 레인저의 정신이야.”

리안은 천천히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들을 끼워 넣고는 손을 붙들었다.

“고생 많았어, 은엽.”

왼손 전체가 뻣뻣하게 굳어오는 감각을 느끼고 있던 은엽은 그 속삭임을 듣고 숨을 확 멈추었다.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미하게 굳어있던 손가락들이 저절로 구부러진다.

그렇게 약간의 간극을 두고 리안은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언가가 더 남았다고 짐작한 은엽이 잠자코 기다리자, 리안은 숨을 길게 내쉬며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어. 당신을... 습격했다는 그 간부, 어떤 사람이야?"

은엽이 순간 흠칫하자, 그는 재빨리 질문의 이유를 덧붙인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미안해, 하지만... 누군지 알아야 나중에 내가 그자를 만나서 앙갚음을 해줄 수 있으니까."

"...저는, 당신이 그 간부와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은엽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아직껏 맞잡힌 그대로였지만, 은엽은 깍지를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두려운 가정이 언어로써 실체를 갖추기 직전이었다.

"그자는 걸어다니는 악귀 그 자체예요. 자신의 포켓몬으로 하여금 인간을 직접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적을 사냥감 대하듯 상대하면서 한계에 부딪히게끔 만듭니다. 자신의 약점을 철저히 감추고 상대방의 틈을 탐색하는 데 도가 튼 인물이죠. 그러니..."

리안이 덩달아 몸을 일으키자 은엽은 정신없이 이어지는 말문을 황급히 닫았다. 어둠 속에서도 냉렬히 타는 눈빛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수히 이름 붙은 감정들 중에서 내가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게 뭐냐면, 그건 바로 악의야."

리안의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같이 덤덤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적개가 은근하게 아른거리고 있어, 은엽은 할말을 잃은 채 어둡게 깔린 눈빛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어떤 인간들은 악의를 숨길 생각을 하기는커녕 자랑이라도 하듯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나는 그런 인간들을 곧잘 알아볼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자들이 벌이는 과오를 가로막고 벌하는 일에 내 힘을 기꺼이 사용하기로 맹세했어. 당신이 국제경찰 요원으로서 사명감을 가지듯, 나 또한 그렇단 말이야."

은엽은 반론이라도 제기할 것처럼 목울대를 울렁거렸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리안이 정립한 각오를 알고 난 다음의 기세가 꺾였지만, 그렇더라도 이에 반(反)하고픈 생각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마음속은 덧없이 혼란해지고 복잡해지기만 하는데, 은엽은 과연 상대방이 이런 속내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부디 그가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 찰나에 연약한 한숨이 흐른 것 같았다.

"... ...방금 욱했던 건 미안해."

"...괜찮습니다."

리안의 눈빛은 예의 무던함을 되찾고 하늘을 응시했다. 어느 새 풀려난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해, 언덕 밑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온기가 차게 식어갔다. 자리 위에 잠시나마 착지한 침묵은 은엽이 체온을 수습하기도 전에 금방 달아나 버렸다.

"...그 야느와르몽."

"예?"

은엽은 왼손을 어정쩡하게 펼쳐놓고 리안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기울어진 시선이 되돌아온다.

"니스 요원이 전달 안 해줬어? 당신을 구출했을 때 어떤 야느와르몽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아아... 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의식을 되찾은지 얼마 안 된 시점에 후배가 워낙 장황하게 설명해 줬는지라 일부를 잊은 모양이었다. 은엽은 기억의 편린들을 급하게 끼워맞추는 일을 멈추고 리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응. 그 야느와르몽, 주인이 따로 있는지, 야생의 포켓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지하실의 밀폐된 공간에서 꺼내기 직전에 우리한테 내건 약속이 있었거든."

은엽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야느와르몽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들은 기억이 있어도 그 내막까지는 분명 듣지 못했었다.

"그런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네요... 리안 씨는 들으셨나요?"

"응. 그 포켓몬은 일대를 떠도는 영혼들을 명계에 바래다주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고 있었대. 그런데 최근에 길잃은 영혼들의 수가 심각하게 늘어나서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와 마주친 거지."

은엽은 제게 낯선 단어를 홀로 곱씹어 보았다. 영혼이라는 개념을 막연하게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가까운 이의 입에서 발음되어 나온 어휘는 사고의 범위를 급작스레 확장시키려 했다. 은엽은 이에 대해 따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기로 마음을 먹고 리안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럼... 그 약속이란 건?"

"그리 복잡하진 않아. 우리가 원하는 영혼에게 길을 인도해줄 테니, 우리더러는 작금의 사태를 만들어낸 자를 찾아서 벌해달라고."

'일이 그렇게 흘러갔나보구나.' 은엽은 자기도 모르게 제 가슴을 짚은 손을 밑으로 내리고는 작게 한숨쉬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책임지라는 논지로군요..."

"바로 그거야. 그런 약속을 했으니 마땅히 지켜줘야지."

리안은 얼핏 무심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간부를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까지 들려준 듯해, 은엽은 체념어린 숨을 내쉬고는 무상히 중얼거렸다.

"그 야느와르몽... 정말로 영혼을 명계로 바래다주는 일을 하고 있다면, 왜 제 영혼은 거기에 그대로 두고 있었을까요. 정말로 역할에 충실했다면 저까지도 데려갔을 텐데."

"... ... ..."

"... ... ..."

"방금 그거 재밌었는데. 다시 한번 더 말해 봐."

리안이 눈빛에 살기까지 담아서 또박또박 짓씹듯이 말했고,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진 은엽은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리안은 한참 쏘아보던 눈빛을 거두고는 담요를 휙 끌어쥐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그는 코를 가볍게 훌쩍이고 은엽을 향해 손을 휘적였다.

"... ...됐어. 당신이 되살아난 기념으로 별점이나 봐 줄게. 누워서 손 다시 줘봐."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낙담할 지경에 이르렀던 은엽은 이 갑작스러운 제안과 요구에 눈을 깜박였다.

“별점... 이요?”

은엽은 어떤 토를 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리안의 지시대로 누워서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곁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고, 리안은 일전처럼 은엽의 왼손을 감아쥐며 조용히 설명했다.

“어떤 떠돌이 여행자한테서 배운 건데, 기분전환이나 심심풀이 용도로는 꽤 쓸만해. 밤에 할 일이 없으면 하늘을 보면서 운세를 짚어보곤 했거든. 단순히 재미로 하는 거고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너무 믿으면 안 돼.”

왼손을 감싸 쥔 리안의 손가락들이 바삐 움직여, 이에 놀란 은엽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무덤덤한 목소리가 선수를 쳤다.

“내 손 더 꽉 잡고 검지 세워봐. 응, 그렇게. 잠깐 그러고 있어. 이래야 내가 편해지니까.”

손의 크기차 때문에 약간 어그러져 보이긴 했어도, 리안은 그렇게 만든 손깍지 모양을 유지한 채로 은엽의 곁에 가까이 붙어 누웠다. 은엽은 둘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움찔했지만, 리안은 이를 못본 체하고 팔을 번쩍 들어 올려서 밤하늘의 별들을 가리켰다.

이맘때쯤 가장 강한 빛을 내는 별들이 있어. 그중에서 이렇게, 링곰자리의 꼬리에서 시작해 삼각형 모양으로 이어지는 것들 보이지? 원래 가장 위쪽에 있는 게 으뜸으로 밝은 편인데 오늘은 전부 깨끗하게 잘 보이네. 모양이 많이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그럼 운세가 좋다는 뜻이야. 형태를 이룬 것들은 혼자 빛을 내지 않고 모두가 거들어주고 있어. 이건 진행하는 일이 협력을 통해 더욱 순조롭게 될 거란 의미. 하지만 짧은 시간에 다 함께 몸을 불사르는 만큼 각자가 지는 부담도 클 거야. 그러니 확실한 보답을 해줘야만 이후로도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있어. 이어지는 별들이 전부 또렷하니 이미 성공은 보장됐구나. 미리 축하해.

팔이 위로 들려진 채로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감각은 퍽 낯설었어도 정작 은엽은 이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리안이 똑똑하게 짚어내는 별의 위치를 눈으로 좇아가며 그가 풀이해주는 해석을 귀담아듣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세가 좋다’고, 리안은 해석을 끝내고 한번 더 강조하듯 말하면서 조그맣게 웃었다. 쏟아지는 별빛을 받은 그 미소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조금 전 보였던 분노는 온데간데 없었다. 은엽은 어떤 것에 주의를 두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는 점, 아니면 자신의 운세가 좋다는 점, 어느 쪽이 더 중요하지? 서로 맞잡은 손은 영 떨어트릴 수 없었다.

도란도란 이어지던 목소리도 어느덧 끝을 맺고, 손목시계의 숫자는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 새에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은엽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다가 조심스레 묻는다.

“점점 추워지는데, 이제 돌아갈까요?”

은엽의 시도가 무색하게 어둠 속에서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움직임이 보였다.

“아니, 더 볼래.”

이 상황을 과거 언젠가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리안은 제가 만족할 때까지 버티고 있겠다는 의지를 꿋꿋하게 풍기고 있었으며, 때문에 은엽은 그를 설득해서 마음을 돌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예감했다.

...알겠습니다. 담요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기를 수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 덕분인지 밤하늘에 보이는 별의 수도 삽시간에 늘어난 듯했는데, 리안은 아까처럼 그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은엽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리안의 체온이나 잘 보존해주자는 심정이 되어서 자신의 몸 위에 덮은 담요를 넓게 펼쳤다.

“있지, 바깥으로 나와서 행복해?”

의문문이 갑작스레 던져졌다. 은엽은 그에 놀랄 틈도 없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너는 행복한가?’에 대한 대답이었고, 은엽은 이에 대한 답을 쉬이 찾아낼 수 없었다.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홀가분하긴 하네요.”

리안은 다섯 번의 호흡을 하고 나서 웅얼웅얼 말했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왼손을 꾹 쥐고 있었던 손아귀의 힘이 천천히 풀려갔다. 은엽은 내뱉으려던 호흡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지만, 리안은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중얼거린다.

“내가 여기서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라서, 너만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리안은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리안 씨......?”

은엽은 조건반사적으로 리안의 열과 호흡 상태를 재보고는 안도의 숨을 잘게 내쉬었다. 하기야 밤 늦게까지 느긋하게 누워있었으니 잠이 올 만도 했다. 은엽은 그를 조심스레 안아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안이 마지막으로 흘렸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에게 '너'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이 어째서 익숙하게 들렸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아무래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리안을 레인저 기지에 바래다준 뒤부터 긴장이 탁 풀리는가 싶더니, 물풍경시티의 자택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온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조수석에서 꾸준히 들려오던 새근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허전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백미러의 한쪽 측면에 살며시 비쳐 보이곤 하던 얼굴도 더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까지 떠올린 후에는 정신 차리라며 그 생각들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이 때문에 편두통까지 찾아오는 것 같았지만, 은엽은 자기가 피곤하기 때문이겠거니 여기며 어물쩍 넘겨버렸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점 악화되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소파나 침대에 뛰어들어 빨랫감마냥 널브러지고 싶었지만 적어도 사람 꼴은 지키고 하루를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은엽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에 스민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낼 기력조차 소진된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퍼질러 앉은 자세로 다음날의 일정을 곰곰이 구상했다. 집안 대청소부터 해야 하고, 장도 다시 봐야 하고, 창가의 눅눅해진 벽지도 새로 도배해야 하고, ...기타등등. 몸도 이미 축축 처지는데 앞으로 쌓일 피로의 양이 가늠되질 않았다.

은엽은 몬스터볼 바깥으로 나온 루카리오의 묵직한 애교를 잠자코 받아주며 과도한 피로감에 대한 이유를 고민했다. 이는 단순히 리안과 함께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임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2년 가까이 잠입 생활을 보냈다지만 체력이 그 정도까지 심각하게 떨어질 리는 없었다. '아니, 그 고생을 했는데 오히려 늘어야 정상인 게 아닐까?'......따위의 허튼 생각까지 떠오를 정도면 어지간히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참 이상했다. 엊그제 받았던 건강검진의 결과도 모두 양호했었는데 말이다. 손으로 쿠션을 더듬어 찾아서 얼굴을 묻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제게 담요를 덮어준다. 눈을 들어보면 소소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 서 있었다. 꼭두각시 인형이 줄에 당겨지듯 스르르 일어나 앉은 은엽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려 보였고, 루카리오는 그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냉큼 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어?”

루카리오는 붉은 눈동자로 트레이너를 한동안 올려다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엽은 그의 앞발을 오른손으로 감싸쥐며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그럼 그분도 알고 계실까.”

이번에는 잘 모르겠다는 의미의 도리질이 이어졌다. 이것이 ‘모르겠다’가 아니라 ‘아니’라는 의미의 고갯짓이었으면 차라리 안도할 수 있었을 텐데, 은엽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심리적으로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감정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에 묻어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했을 텐데, 이제는 그것도 힘들었다.

그에게서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들었던 날 이래로 잠이 들 때마다면 어느 한 부분은 그 사람이 반드시 등장하곤 하였는데, 현실에서 들은 목소리가 그대로 꿈속에서 재생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보았던 미소까지 재현되기도 했다. 문제라면, 현실이고 꿈이고 그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면 한쪽 구석이 붕 뜨다 못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제발 제 머릿속에서 나가달라 애원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는데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작은 속삭임을 들었을 땐 어떤 감정이 들었더라. 레인저 기지 앞에서 그와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귓가에 어른거렸다.

‘당신이 만족해야 내가 만족해. 그러니까 내가 물어볼래. 여행은 만족스러웠어?’

이렇게 물어오면 당연히 만족스럽다고밖에 못할 것이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고. 하지만, 자기자신이 행복한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당신은 행복한가요?’라고 되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그러질 못했는지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가 별을 바라보며 흘렸던 순수한 감탄과, 별에서 운세를 뽑아주며 지어주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선하다. 심지어는 제 손 안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던 손가락들의 감촉까지 뇌리에 남아버리니, 은엽은 이런 것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맨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루카리오는 고통스럽게 앓고 있는 주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어깨를 토닥여준다. 한참을 넋놓고 앉아 있던 은엽은 탁자 위에 놓인 라이브캐스터에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와 상담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려나.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당장 제동이 걸렸다. 누구에게 말을 할지부터가 문제였다. 일단 직장 사람들은 즉시 제껴버렸다. 선배님들께는... ... 도무지 이런 화제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또, 알로라에서 지내고 있는 친우에게는 놀림을 잔뜩 듣게 될 것이 뻔했다. 한동안 갈팡질팡하다 제 인간관계가 의외로 얄팍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헛웃음도 한차례 짓고, 끝끝내는 이 주제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을 겨우 추려낼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결국 동생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지금쯤이면 신오지방은 한낮 시간대이니 동생이라면 금방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은엽은 통화음이 하운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것을 구세주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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